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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죽음] 재벌 앞에 ‘자기검열’ 빠져드는 지식인

slowdream 2008. 1. 13. 19:56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재벌 앞에 ‘자기검열’ 빠져드는 지식인


- 경제권력 우위의 정경유착 구조 -



이른바 X파일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2005년 8월, 아니나 다를까 노무현 대통령께서 한 말씀하셨다. “97년 대선 후보들을 대선자금 문제로 다시 수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통령은 그 이유를 이렇게 부연하였다. “직접적 피해자가 있지 않은 정경유착 등 포괄적 문제는 구조적 요인을 밝혀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 … 10가지만 딱 조사해서 1000가지의 구조를 다 이해할 수 있으면 그 수준에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건 검찰에 대한 대통령의 불법적(!) 수사지휘다. 그 수혜자는? 김대중? 이회창 후보? 대통령의 발언에는 두 대선 후보만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뜻이 결국 삼성을 수사하지 말라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생각해보자. 정경유착의 문제가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넘어갈 과거의 일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재벌공화국의 구조를 다 이해했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경제학의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정경유착은 규제자(정치권력)와 피규제자(경제권력) 사이의 불법적 경제거래를 의미한다. 즉 규제는 경쟁제한과 불투명성을 초래하고 여기에는 필히 독점적 지대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규제자와 피규제자가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곧 정경유착이라는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정경유착을 타파하는 개혁정책의 첫번째 원칙은 규제 완화다.


이러한 전통적 해석은 규제자가 피규제자에 대해 교섭력의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핵심 기득권 세력의 문제, 특히 정경유착의 문제에서는 본말이 전도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 과거에는 정치권력의 직접적 규제, 예컨대 금융·세제상의 특혜나 신규사업 인허가권이 독점적 지대를 창출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거대재벌은 특혜와는 무관하게 스스로의 힘에 의해 시장질서와 사회질서를 왜곡함으로써 독점적 지대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규제를 하지 않는 것(자유방임)에 대한 대가로 독점적 지대의 일부가 제공된다.


다시 생각해보자. 한국사회의 이 일그러진 모습은 과잉규제(비합리적 규제의 존재) 탓인가 아니면 과소규제(합리적 규제의 부재) 탓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의 정경유착은 과잉규제의 산물이지만, 오늘날의 재벌공화국은 과소규제의 산물이다. 건전한 경제사회질서를 창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합리적 규제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 주소이다.


1997년 대선에서의 X파일 사건은 한국사회가 드디어 경제권력 우위의 정경유착 구조로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이다. 2005년 노대통령의 불법적 수사지휘는 삼성공화국의 완성을 선포한 것이다. 2007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금산분리 원칙 재검토 발언은 영원한 제국에의 충성 서약이다.


- 재벌공화국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


오늘날 정경유착의 두 당사자인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한 목소리로 규제 완화를 외치고 있다. 연일 신문지면을 도배질하던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슬로건은 어느덧 그 어떤 정치인도 정부관료도 도전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원리가 되었다. 심지어 횡령·배임과 분식회계를 저지른 재벌총수에 대해서도 그들의 경제발전 기여를 인정하여 검찰이 불구속 수사하고,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그리고 대통령이 특별사면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군부독재 시절처럼 총칼을 앞세운 것도 아닌데, 정치인·정부관료·법조인·언론인·학계 등이 모두 재벌 앞에 무릎 꿇은 이유는 무엇인가? 폭력에 의한 강제보다도 더 효과적인 지배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재벌에 좋은 것이 한국에 좋은 것이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이다. 오늘날 상당수 지식인은 이 이데올로기적 지배 장치의 생산기술자로 전락하였다.


2005년 삼성공화국 논란 때도 그랬고, 최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사건에서도 확인되지만, 재벌은 한국경제의 명과 암을 동시에 안고 있는 야누스적 존재이다. 재벌기업의 생산력은 유지·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자산이지만, 동시에 재벌총수의 전근대적 소유·지배 구조는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 중의 하나이다.


기업과 기업인을 구분하여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재벌총수로부터 야기되는 문제를 개선함으로써 재벌기업의 새로운 발전을 이루자는 주장은 반(反)‘기업’ 정서로 간단히 매도되고 있다. 2005년 삼성은 삼성공화국 비판론자들을 “우리 사회의 1%의 반대세력”으로 지칭한 바 있다. 50:50의 문제(이것도 백번 양보한 거다)를 99:1의 문제로 정리하는 자신감의 배경은 삼성전자의 수익력과 삼성생명의 자금력이지만, 그 지배 논리는 삼성공화국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총수일가의 소유지분은 5%도 안되지만 그들을 여전히 ‘오너’로 전제하고, 오너가 직접 경영권을 행사하는 한국의 재벌체제의 우월성이 통계적으로 입증된다. 가정과 결론 모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주장이지만, 이런 류의 보고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왔던 ‘중국 위협론’ 발언도 ‘그 분’이 새삼 말씀하시면 한국경제의 미래를 경고하는 탁월한 선견지명이 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보고서들이 쏟아진다.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화 작업이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기업연구소에 의해 거의 자동생산체제에 들어갔으며, 이것이 검증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일반 국민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대량유통체제까지 갖추었다는 것이다. 진보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의 국책연구소조차도 국가적 의제설정에서 이렇게 무기력했던 적은 없다. 노무현 정부 이후 논란이 되었던 ‘1만 달러의 덫’, ‘외국자본에 의한 경영권 위협론’,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은 모두 기업연구소, 특히 삼성경제연구소의 작품이다. 기업연구소가 제기한 요구사안이 어느 순간에 정부입법 또는 의원입법의 형식으로 국회에 상정되는 것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재벌공화국은 자신의 지식기술자들이 만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 한국사회를 안정적으로 지배할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노대통령은 취임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의 유통기관(이른바 보수언론)과는 계속 대립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인(재벌)과는 타협했다. 그들의 지식기술자를 관료로 임명했고, 그들의 보고서를 정책결정의 준거로 삼았다. 그래서 실패했다.


- 알아서 침묵하는 지식인 -


올해는 민주화 20년, 외환위기 10년이 되는 해이며, 다음 5년을 책임질 대통령을 뽑는 해이다. 과거 평가와 미래 전망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경제 문제이다. 그러나 경제정책, 특히 재벌정책에 대한 진보적 목소리는 정말 듣기 어렵게 되었다. 과거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민주화를 외치던 지식인의 목소리보다도 더 잦아들었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이 재벌공화국, 삼성공화국의 구조적 문제를 몰라서 그런 걸까?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대학, 연구소, 언론기관, 심지어 법조계 등 이른바 지식인들의 삶의 조건 자체가 재벌에 포섭되었기 때문에, 재벌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검열을 거쳐 침묵하는 것이 지식인의 체질이 되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진보성향 경제학회인 한국사회경제학회의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40대 중반인 필자가 거의 막내급에 속하는 것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진보 경제학자의 재생산 메커니즘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최근 한미 FTA에 반대하는 (그나마도 미미한) 학계측 움직임이 주로 정치학자·사회학자에 의해 주도되고, 경제학자는 대부분 찬성하거나 침묵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진부한 말이 됐지만, 지식인의 사명 중 하나는 ‘비판’이다. 그 비판의 대상에는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경제권력도 포함되며, 경제권력에 대한 비판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의 재생산 메커니즘 자체가 경제권력에 포섭되어 있는 상황에서 경제권력에 대한 비판을 개개 지식인의 윤리적 의무감에 맡겨서는 희망이 없다. 그것은 지식인의 자기검열을 강화할 뿐이다.


모든 지식인이 진보적일 수도 없고, 모든 지식인이 현실참여적일 필요도 없지만, 지식인이 ‘자기검열의 공포’를 벗어나 그 연구성과를 지식사회 및 일반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은 확보되어야 한다. 최소한 대학이 재벌의 지배를 벗어나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김상조|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연대 소장〉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