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은 없다
-또 다른 지식인, 또 다른 반역-
성형외과 의사가 성형수술을 하기 위해 찾아온 환자의 얼굴에 칼을 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공부를 좀 했다고 하는 지식인조차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 것이다. 국가가 제공한 법의 보호 아래 환자가 돈을 내고, 의사가 수술을 하는 것은 개인의 당연한 권리이자 발전의 일면이라고 보는 것이다. 의료사고가 나면 국가가 시시비비를 가리고, 의사가 보상비를 지불하면 된다고 본다. 그러나 시민운동은 의료사고가 자주 발생하지 않는지, 발생할 경우 약자의 권리가 무시되지 않는지를 관찰하여 비판하고 처방을 할 뿐만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계약에 의해 인간의 몸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고 상품화시키는 것에 저항한다.
전통적으로 지식인, 즉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는 어떤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을 이용하여 국가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는 집단이다. 그가 공적 권력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는 쪽이든, 재야에서 권력을 비판하던 쪽이든, 권력이 매개되어 있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권력을 가지고 정책을 도모하는 자와 부정의한 권력을 비판하는 자가 지식인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었다. 자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경제발전을 도모하든, 시장 밖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든, 자본을 가운데 두고 상반된 시각을 가졌을 뿐이다. 권력이든 자본이든, 다스리는 자든 비판하는 자든, 모두 근대성의 핵심제도인 국가와 시장을 모태로 한 역사발전을 가정하고 있다.
근대성은 국가와 시장의 발전에 기초한 계몽주의요, 물질적 진보에 기초한 역사주의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성이 인간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을까. 도덕적인 국가가 광범위한 복지를 보장하고, 자본주의 발전이 부(富)를 확대한다고 인간이 행복할까. 그렇다면 수백 년 전에 비해 평균적으로 수천 배의 부를 지니고 민주화된 국가체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왜 절반이 정신적 장애를 겪고,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그리고 대부분 불행하다고 아우성인가. 날마다 되묻고 또 다짐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잠자는, 단순히 배를 채우고 시간을 보내는 존재가 아니다.
우주진화의 최종심이자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은 피상적인 육체적·물질적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인간존재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담론과 실천을 선도하고 있는 자가 바로 각종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일상생활로, 기술발전에 의한 삶의 편리에서 삶의 질로의 전환을 추구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질적 욕망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정체성은 근대성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영역의 지식인은 근대적 보편주의에 저항하는 특수인이고, 근대성의 또 다른 부류인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넘어서며, 독립성의 자의식을 가지고 현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시민사회는 너무나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이어서 규정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 대부분의 지식인이 포진하고 있는 대학이나 연구소도 시민사회에 위치한다. 그러나 시민사회 중에서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가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시민운동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식인은 기존의 지식인상에 비추어 아웃사이더에 속한다. 교수나 학자들도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되면 새로운 사유를 하게 된다. 물론, 시민운동에서도 권력과 자본은 운동의 중요한 주제이자 대상이다. 국가를 민주화시키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은 실제로 시민운동의 중요한 지형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시민운동의 하나일 뿐이고, 더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시민운동은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기업주의의 확산을 견제하며 세계화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소규모의 지역단위로 정치와 경제가 이루어지는 아나키즘을 논의한다. 다양한 소공동체에서 시민자치, 지역화폐, 대안무역, 공동육아 등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 자연의 이용을 통한 부의 축적과 소비의 증대가 아니라, 자연성을 의식하고 상생을 도모한다. 산을 개발하는 것에 반대하여 나무 위로 올라가 시위하거나 단식하는 자는 단순히 개발과 보존의 논쟁이 아니라, 자연물 하나하나를 생명으로 간주한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 나의 물질적 삶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그 곳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정열을 쏟는다. 대중에 밀착하여 함께 대화하고 행동하면서 그들의 언어로 이론을 만들고 정책을 구상한다. 환경에 대한 적응을 넘어 자기존재에 대한 적응을 좇아 영성과 신비를 추구한다. 직업과 여가와 직결된 놀이를 발명하고 실험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권력과 자본 아래 살지만 그것을 초극하여 생활세계의 의미 있는 삶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에게도 무수한 모순과 한계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권력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시민운동에서 리더십을 익히고 시민사회적 가치를 학습하여 정부로 진출하겠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운동을 그 자체로서 삶의 과정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수단화시키는 것은 스스로 삶을 형해화시키는 것이다. 한국적 특성으로서 근대성을 극복하기는커녕, 근대적 합리성조차 담지하지 못하고 반공주의·속도주의·연고주의·물질주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의 볼모가 된 사람도 무수히 많다. 시민운동을 마치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북한정권을 타도하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시민운동을 같은 연고를 가진 사람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어울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공공의식·평등의식·비판의식이 부족하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학습되지 않아 인간관계를 왜곡하고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시민운동을 사유화시키는 부작용도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뛰어난 자기반성능력을 가지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역동적으로 지휘한다. 정보사회와 참여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지식축적과 참여가 용이한 상태에서 지휘자의 권능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앞서 이끄는 자로서의 지식인은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물질에서 정신으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감각에서 의미로 전환시키는 선구자적 실천을 하고 있다.
현대인은 모두 자기기만의 모순에 빠져있다. 그래서 단순한 쾌락이나 사회적 요구에 의한 가식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기만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벗어던지고 윤리와 총체적 인격완성으로 이끄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를 지향하는 것이 시민운동 지식인의 본질이다. 그래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일정한 발전곡선을 그리는 역사, 계급을 포함한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본질의 원형 또는, 우주적 실재로의 영원회귀를 갈망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아득한 옛날부터 가슴 속에 품어왔던 진정한 삶의 본질로서 인간의 존재의의를 되찾는 근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 같지만 필연적인 것으로, 바로 우리가 주체가 되는, 서구 근대주의 이후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싹틀 후기문명의 정신적·철학적 토대이기도 하다.
<박상필 성공회대 NGO대학원 연구교수>
출처 경향신문
'***풍경소리 > 착한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식인의 죽음] Ⅱ-9 이상한 나라, 한국의 지식사회 (0) | 2008.01.13 |
---|---|
[지식인의 죽음]2-4. 문화권력, 어떻게 만들어지나 (0) | 2008.01.13 |
[지식인의 죽음] 재벌 앞에 ‘자기검열’ 빠져드는 지식인 (0) | 2008.01.13 |
[지식인의 죽음] Ⅱ-1. 지식인 현실참여, 그 복합적 의미 (0) | 2008.01.13 |
[지식인의 죽음] 1-4. 지식인, 위기를 말하다 (0) | 2008.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