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옛스님 이야기

43. 용성(龍城)선사

slowdream 2008. 1. 18. 15:51
 

 43. 용성(龍城)선사

 -불교현대화를 선도(先導)한 암흑기의 큰 별-



(1) 시대적 배경


용성선사가 살다간 시대는 우리 민족사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5백년 동안의 숭유배불정책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아 왔으며 도성의 출입조차 금지된 8천민의 집단 가운데 하나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용성선사가 30대가 된 1895년에야 비로소 일본 일운종(日運宗) 승려 좌야전려(佐野前勵)의 상소에 의해서 3백년만에 해제되었다. 그리하여 승려의 서울포교가 가능해지긴 했으나 유생들의 천시와 모멸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으며, 불교신자들까지 자신이 신자임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대원군의 몰락과 더불어 서구의 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때 앞장을 선 것이 천주교, 기독교의 선교사들이었으며, 이들은 갑신정변 후 의료선교 등 갖가지 명목으로 이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서울에는 정동교회와 새문안교회 및 명동성당 신학교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세에 의한 서양종교의 전도와 포교에 민족자각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다. 이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양반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민족정신이 양풍에 빼앗겨 감에 비분을 느껴 1894년에는 동학혁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체포로 일시 주춤했으나 뒤에는 천도교로 개칭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제치하에서는 그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를 이용한 서구종교들은 일본에 충성심을 강요하면서 그 대가로 YMCA 같은 단체에서는 일본정부로부터 매년 기부금까지 받기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여 한글판 성경을 보급하였으며, 불교를 미신으로 몰아세워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산중에서 수행만 하던 용성선사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회의 변천에 발맞추어 외래종교의 적극적인 포교에 자극을 느꼈을뿐더러 불교를 비방하는 데 격분하지 않을 수 없어 1910년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교리적인 논박을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불교의 교리적 논박서로서는 최초의 저술일 것이다.


또한 교단 내부적으로는 일본불교의 상륙과 더불어 왜색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연종을 비롯한 일본불교 각 종단의 상륙은 일본식민지정책 중 한국불교를 왜색화 시킴으로서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도구로 삼고자 함에 있었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종단의 간부들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1911년 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함으로서 한국불교는 완전히 자치력을 상실하고 일제의 손아귀에 송두리째 넘어가 관제불교가 되고 말았다. 전국의 불교는 31본산제도로 묶여졌으며 1929년경에는 80% 이상의 사찰이 승려의 취처행위(娶妻行爲)의 금지조항을 삭제하기에 이르렀다. 교단내의 질서와 계율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으며 각 사찰마다 일본불교의 흉내를 내어 대처승들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 같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용성선사는 왜색화되고 천시받으며 외세(外勢)에 도전받는 불교의 새로운 이미지 부각과 조용한 혁신을 위해 불교를 대각교(大覺敎)라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때에 처한 그는 조용한 개혁과 혁신은 파괴와 전통을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것 중 지킬 것은 참답게 지키며 고칠 것은 과감히 고치는데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용성선사는 나라를 빼앗기고 교단이 위태로울  때 승려는 어떻게 나라를 되찾고 교단을 지킬 것인가를 보여준 화신보살이었다.


(2) 생애와 사상


선사의 생애를 크게 나누었을 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재속(在俗)기간이며, 둘째는 출가수행기이며, 셋째는 민중교화기로 구분된다. 이 중 선사의 법랍이 61세인데 이를 반으로 나누었을 때 전기는 수행기이며, 후기는 교화기에 속한다. 특히 후기의 교화기는 민족의 독립운동과 대중교화에 전력을 다 바치게 되며 이러한 결정체가 대각교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사는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수원(水原) 백씨(白氏)인 남현(南賢)과 어머니 밀양(密陽) 손씨(孫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상규(相奎)이고 법명은 진종(震鍾)이며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자비스러운 성품으로 자라났으며 이에 관한 일화가 많으나 생략키로 한다.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 합죽선(合竹扇)이란 시를 짓기도 하여 총명함이 일찍부터 알려졌다.


14세 때 꿈에 부처님을 뵌 것이 인연이 되어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우수주(于手呪)를 9개월 동안 념(念)하여 업장을 소멸하고 난 뒤 화두참구(話頭參究)에 들어갔다. 23세 때에 낙동강을 지나는 도중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금오산에는 천추의 달이 걸려 있고

낙동강에는 만리에 파도가 치는구나

저 고깃배는 어디로 가는고

예나 다름없이 갈대밭을 의지해 쉬는구나.


 선사는 나중에 대각교를 세울 때 이 오도송을 종지천명(宗旨闡明)의 구(句)로 삼았다. 전후 세차례에 걸쳐 오도한 선사는 그 뒤에도 보림과 정전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내전(內典)의 열람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이러한 선사의 산중생활은 47세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일찍이 선곡율사(禪谷律師)에게 비구계를 받기도 한다.


전국을 다니면서 안거와 운수(雲水)생활로 40세 때까지 선(禪)을 중심한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종맥을 확고하게 다지면서 제방의 납자들을 접인하게 된다. 그러다가 44세 때에는 중국의 북경에 가서 천하의 선지식들을 만났으나 여기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귀국하므로 세계의 정세와 시대의 변천을 간파하게 된다. 특히 뼈저리게 느낀 것이 기독교 세력의 범람이었다. 기독교에서 불교를 비방하고 조직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음에 많은 자극을 받은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47세 되던 해에는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기독교의 불교 비방에 대하여 강력하게 논박하고 있다. 선사에게 있어서는 47세가 중요한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수행과 산중선회(山中禪會)를 중심한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세계를 갈구해 왔으나 이때부터 선사의 삶은 사바세계에 뛰어든 보살의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천하게 된다.


특히 이 해는 한일합방이 체결된 1910년이므로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라를 빼앗겨 민족이 방황하고 있을 때 서울에 상경하게 되며 1911년에는 신도 집에서 법회를 보다가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하게 되니 이가 오늘날의 그 자리이다. 대각사는 장안의 선도량(禪道場)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이때 한용운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선사와 상의하였으며 급기야는 1919년 3.1독립운동을 성사하기에 이르른다. 선사 역시 33인 가운데 불교 대표로 참여함으로서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선사의 옥중생활은 참으로 시야를 크게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출옥 후에 대각교 운동의 방향을 뚜렷이 하는 시원점이 되었다.


선사는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각해일론(覺海日論)』등 많은 저술과 역경(譯經)을 하게 되며 불교의식을 완전히 한글화하며, 교단의 청정을 주장하게 된다. 선사의 정진과 교화사업은 계속되었으며, 61세 되던 해에는 왼쪽 이에서 우연히 치사리(齒舍利) 일과(一顆)가 나왔는데 이 사리는 지금도 해인사 용탑(龍塔)에 모셔져 있다. 1940년 2월 24일 새벽에 선사는 목욕재계한 뒤 제자들을 불러 두고 “그 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며, 법락이 61세였다.


선사의 중심사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대각(大覺)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가 부르짖던 대각이란 어디에서 기인하게 된 것일까?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선사는 전후 세 차례에 걸쳐 대각을 얻었으므로 어디에든지 걸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경지를 스스로 체득하게 된다. 이러한 흔들림 없는 경지를 바탕으로 새 불교운동을 전개한 것이 바로 대각교운동이다.


선사는 대각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석가모니불 법신불(法身佛)로 파악하였으므로 이를 구체화시킨 것이 비로자나불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은『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심(心) 이외의 것은 모두 부인하였으며, 불(佛)과 진심(眞心)과 아(我)를 일체로 보고 있다. 이 진심에 의하여 천지만법이 창조되며, 이는 나의 동근동체(同根同體)일 뿐만 아니라 일진심광명체(一眞心光明體)는 법신불의 이명(異名)이기도 하며, 이는 대자재(大自在)의 위신력과 무연대비의 발휘로서 처처에 자비시설(慈悲施設)을 성취하고 경원히 무애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며 역사 속에 석가모니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또한 선사는 대각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 즉, 근본심성을 자기 스스로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치고 하여 둘이 없이 원만하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구경각(究竟覺)을 다 깨친 것을 대각(大覺)이라 한다고 하고 있다.


선사는 대각사상의 논리적인 근거를 『기신론(起信論)』의 각사상(覺思想)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선사의 대각사상은 『기신론(起信論)』의 여래장(如來藏)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근거는 선사의 대표적인 저술인『각해일륜(覺海日輪()』에 잘 나타나고 있다. 선사는 대각의 근원을 여래장에 두고 있으며,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그 불성의 계발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남에게도 그 깨우침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이것이 바로 자각각타이며, 이의 완성이 대각이라고 볼 수 있다.


선사는 이와 같은 사상에 입각하여 대사회적 실천방법론을 전개하였다. 그 실천방법론의 이론적인 뒷받침을 여래장 연기(緣起)에 두고 있으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구현시킨 것이 바로 대각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의 오도 후 전개된 생애는 그것이 그 시대를 산 오도자의 자기실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가장 근원적인 대도를 스스로 체득함으로서 자타를 초월하였으며, 민중을 떠나 불법을 구하지 않았다. 또 불법(佛法)을 떠나 민족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대각교의 모체요 토대를 민중으로 보았으며, 인인개개(人人個個)의 고유 진성으로서 일체중생은 법성을 본성으로 하고 거기서 절대적 혹은 상대적으로 영각성(靈覺性)을 나툰다고 『임종결(臨終訣)』에서 말하고 있다.


그의 대각교운동은 새로운 신흥종교로까지 잘못 알려져 온 적도 있으나, 이는 기성종단이 일제(日帝)의 관제불교로 전략되자 일제와 관련 없는 순수한 한국 전통불교를 되찾자는 운동이요, 현대 민중에게 맞도록 혁신하자는 새 불교운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대각운동(大覺運動)의 전개


선사의 대각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저술과 역경, 선의 대중화, 항일운동, 교단의 정화운동, 사원경제의 자립화, 포교의 현대화 등 여섯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저술과 역경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3.1운동으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출옥한 후부터였다. 이 때 감옥에서 성경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얽히고 있음에 크게 자극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이 일반 서민들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한글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역과해금강경(詳譯科解金剛經)』의 서문에서 “한자장경(漢字藏經)이 적재여산(積在如山)이라도 귀어일개후물이재(歸於一個朽物而哉)인저”라고 술하고 있다. 즉, 보지 않고 쌓아만 두는 경전은 산더미같이 아무리 많더라도 한갓 종이이며 썩은 물건에 불과하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역경사업은 항일운동의 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글 화엄경』서문에서 “조선인에게는 조선글 조선말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의 시대상황이 우리말 우리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을 때임을 감안할 때 선사의 역경사업은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경사업에 대해 교단 내에서는 많은 비판도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번역본이 『화염경』을 비롯하여 30여 종이며, 저술도 『각해일륜(覺海日輪)』등 30여 종이나 된다.


둘째는 선의 대중화를 위하여 각 곳에 선학원을 위시한 선종포교당을 건립하게 된다. 또 선을 대중화하여 일반민중에게 스스로 자각케 함으로 대각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선사는 본인이 ‘선종인(禪宗人)’임을 확실히 했으며, 도시포교와 독립운동 등을 하면서도 참선에 대해서는 한시도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각사에 ‘부인선원’을 개설하기도 했고 망월사에 ‘활구참선만일결사회(活句參禪萬日結社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에 처음으로 서울시내에 ‘참선(參禪)’이란 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사가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대각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선정진의 힘이었다.


셋째는 항일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선사는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산중에서 도회로 뛰어든 뒤 1940년 입적 때까지의 30년간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되지 않음이 없었다. 특히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 대표로 서명하고 참여함으로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선사는 대각사를 설립하여 여기에 머물면서 한용운 등을 위시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때로는 대각사가 독립운동의 온상이기도 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경에 한용운으로부터 독립선언의 뜻을 듣고는 두말 하지 않고 도장을 한용운에게 맡기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하는 길이라면 어디에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승낙하였다. 한용운은 전국의 그 많은 승려들 중 백용성 이외는 이 일을 상의할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이 일에 가담한다는 것은 최후에 사형집행까지도 각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사에게 있어 3.1운동은 많은 새로운 경험을 쌓게 했으며 대각교 운동의 방향을 확실히 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이때에도 일본 연호를 사용치 않고 불기를 사용했다 해서 출판검열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책 속에 일본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스님도 또한 1918년 실시된 토지조사 사업에 의해 수탈된 우리의 땅과 경제적인 침략에 대해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만주에 가서 용정에 농장을 만들고 대각교당을 건립하였으며, 하동에 華果院(화과원)을 만들 선농(禪農)불교를 실천하였다. 한편으로는 교단이 왜색화 되어가자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찾기 위해 교단의 정화운동에 불을 붙였다. 2차에 걸친 ‘建白書(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일제의 불교정책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그것이다. 선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요시찰인물이 되었으며, 항상 일본경찰의 감시하에서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넷째는 교단의 정화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선사의 계맥은 선곡율사(禪谷律師)에게 수계하였다. 이는 조선조의 대은(大隱)스님의 계맥(戒脈)에 속하므로 한국전통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호리(毫釐)의 어김도 없이 계를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제자들에게 계율에 관해서는 철저했다. 이때의 시대적 상황은 총독부의 사찰령에 의하여 31본사는 대처한 자들이 늘어갔으며 한용운을 비롯한 대부분의 승려들은 취처해 줄 것을 총독부에 건의하기까지 하였다. 사찰에는 승려들의 처자권속들이 양육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라고들까지 하며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선사는 1926년 총독부에 2차에 걸친 ‘建白書(건백서)’를 127명의 비구승들의 연명으로 제출하게 된다.


이것이 해방 이후 일어난 대처·비구 정화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선사가 주장한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당국에서 대처식육을 금하지 못할 바에는 대처승에게 비구계를 취소 환속시켜 재가이중(在家二衆)의 위치에 있게 하든지, 둘째는 대처승들이 전국 사찰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지계병자(持戒炳子)들에게 일부의 몇 개 본사(本寺)만이라도 할양하든지 셋째는 유대승(有帶僧)과 무대승(無帶僧)을 확실히 구분하든지 할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만약 해방 이후 정화운동이 선사의 뜻대로 서로의 신분에 대한 구분만 확실히 짓고 같이 공존했다면 오늘날 한국불교는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되었을 것이다.


이 때의 정화운동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며, 그 때의 잘못된 점에 대하여 오늘날 종도들은 시인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대각사상의 전개과정에서 다섯째 사원경제의 자립화와 여섯째 포교의 현대화 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생략한다.


(4) 불교사적 위치


이처럼 용성선사의 업적이 현대 한국 불교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선사의 대각사상과 그 운동은 여래장 사상에 그 뿌리가 있으며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여래장 연기(緣起)를 근본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이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 민족의 아픔을 같이하면서 이 나라 독립을 위하여 온 몸을 다 바치면서 불법의 새로운 중흥을 염원하였다. 사원경제의 자립화를 위하여 선농(禪農)불교를 실천하였으며 포교의 현대화를 위하여 대각사 법당에서 노승이 스스로 오르간을 치면서 일요학교를 개설하였다. 특히 천수경, 시식 등의 의식을 한글로 표현하고 실천하였으니, 대단한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교단의 정화운동은 선사가 제시한 방법대로 신분과 역할을 구분하여 공존하는 차원의 정화가 되었다고 가정할 때 오늘날과 같이 한국불교가 겪어야 할 시련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해방 이후의 불교정화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


선사의 이러한 삶은 오도자(悟道者)는 어떻게 나라를 위하여 민중과 함께 생활하며 교단을 중흥시킬 것인가를 보여준 하나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사의 숭고한 뜻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필요성은 절실히 느끼면서도 아직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종단의 현실이다. 특히 일제의 압박과 회유정책으로 한국 전통불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던 때에 선사의 뜻으로 인해 뭉쳐진 127명의 건백서로 오늘날 다시 청정교단이 살아날 수 있었던 점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만약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용성선사와 같은 분이 청정교단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비구교단인 조계종이 존립할 수 있었을런지 심히 의심스럽다.


출처 http://cafe.daum.net/yumhwas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