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한암(漢嚴) 선사
(1) 회의 (懷疑)를 품고
어느 시골 서당(書堂)에서 나이 겨우 9살인 소년 하나가 『사략(史略)』을 읽고 있었다.‘태고에 천황씨(天皇氏)가 있었다·’ 첫 대목을 읽던 소년은 선생을 향하여 물었다.
"태고에 천황씨가 있었다 하였는데 그러면 천황씨 이전엔 누가 있었습니까?"
당돌한 물음에 선생은 당황했다·
“그렇지! 천황씨 이전에는 반고씨(盤古氏)라는 임금이 있었지"
소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선생은 그 이상 소년의 회의를 풀어 주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소년인 바로 한국 선교사(韓國禪敎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선사(禪師) 방한암(方漢岩)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우주와 인간의 근원에 대하여 이렇게 회의하였으며 어떤 것이든 해답을 얻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다
그는 1876년에 강원도 화천(華川) 땅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전란(戰亂)을 피해 고향 맹산(孟山 : 平安南道)을 떠나 낯선 화천 땅에서 피난하는 동안에 얻은 아들이다. 500년 왕업의 여명(餘命)이 얼마 남지 않은 이조(李朝) 말엽 나라의 안팎이 어수선한 틈에서 숨가쁜 나날을 겪은 이조의 역사와 함께 그의 생애도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한암(漢岩)은 호(號)요 이름은 중원(重遠)이고 온양(溫陽)이 본관(本貫)이다. 그는 천성이 영특하고 총기가 빼어나 한 번 의심이 나면 풀릴 때까지 캐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9살때『사략(史略)』을 읽다가 떠올랐던 ‘반고씨 이전에 누가 있었을까?’하는 회의는 그 후 10여 년 동안이나 유학(儒學)의 경(經) . 사(史) . 자(子) . 집(集)을 널리 공부하고 있었을 때에도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깊은 사색을 되풀이 하여 파고 들어가더라도 그 회의가 해명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학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할 길이 막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의문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2) 세속(世俗)을 등진 청년(靑年)
한암은 나이 22세 때 우연히 명산인 금강산 구경을 가게 된 일이 있었다. 이 나라에 산은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금강산은 기암절벽(奇巖絶壁)이 많기로 유명하다. 더구나 그 기암과 절벽의 하나하나가 꼭 부처님이 아니면 보살의 얼굴을 닮았다고 하니 더욱 신기하다. 그래서‘보살의 자비상(慈悲像)’을 닮은 거대한 암벽(岩壁) 앞에 서 있으면 그 엄숙한 모습에 위압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대자연의 창조상(創造像)을 우러러볼 때 사람은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경건함에 머리를 수그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젊은 한암도 아마 금강산의 위용(偉容)에 접하였을 때 강렬한 종교적 감흥을 느끼고 충격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위대한 자연의 품에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속세를 발아래 두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위용을 바라보며 문득 속세를 등지고 출가하여 입산수도(入山修道)할 것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당시 금강산의 명찰 장안사(長安寺)에 있던 행름노사(行凜老師)를 의지하여 그는 수도의 첫걸음을 디뎠다.
그는 출가할 때, 첫째로 자기 마음의 진성(眞性)을 찾아보자. 둘째로 부모의 은혜를 갚자. 셋째로 극락으로 가자는 세 가지를 그 자신에게 맹세하였다. 한암은 불교 교리의 깊은 뜻을 공부하기 위하여 신계사(神溪寺)의 보운강회 (普雲講會)에 나갔다. 어느 날 우연히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 을 읽어내려 가다가 다음의 대목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만일 마음밖에 부처(佛 :覺을 뜻함)가 있고 자성(自性)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소신연비(燒身聯臂)의 고행을 하고 팔만장경(八萬藏經)을 모조리 독송하더라도 이는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일과 같아 오히려 수고로움을 더할 뿐이다."
한암은 홀연히 마음과 몸이 송연하여 마치 대한(大限 : 죽음의 시각을 뜻함)이 박두하는 극한의식(極限意識)을 느꼈다. 그때, 장안사의 해은암이 하룻밤 사이에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그는 한없는 무상관(無常觀)을 뼈저리게 체득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것은 몽외청산 (夢外淸山)임을 깨달았다.
(3) 교리(敎理)보다는 선(禪)을
한암은 그 후에 동지인 함해선사와 동반하여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운수(雲水)의 길에 올랐다. 남쪽을 향하여 흘러가다가 경북 성주(星主) 청암사(靑巖寺) 수도암(修道庵)에서 경허화상(鏡虛和尙)을 만났다. 경허화상은 한국불교계의 중흥조(中興祖)라고 불리던 인물이었다. 그들은 경허화상을 만나자마자 높은 설법(說法)을 청하였더니 화상은『금강경(金剛經)』 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무릇 형상(形相)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형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如來)를 볼지라."
한암은 이 구절을 듣자 안광(眼光)이 홀연히 열리면서 한 눈에 우주 전체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 아님이 없었다. 9살 때 서당에서 처음 가진 회의-반고 이전에 주가 있었느냐-는 비로소 아침 안개 걷히듯이 풀렸다. 반고 이전의 면목(面目)이 환희 드러났을 때는 그의 나이 24세 입산하여 3년째 되는 가을이었다.
그런데 반고 이전의 면목이란, 유학에서는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이요, 도교학(道敎學)에서는 ‘천하모(天下母)’ 불교 교리에서는 ‘최청정법계(最淸淨法界)’ 선리(禪理)로서는 ‘최초일구자(最初-句子)’를 뜻한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경계(境界)를 시(詩) 한 수 읊어 이렇게 표현하였다.
다리 밑에 하늘이 있고 머리 위에 땅이 있네
본래 안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봄이여.
북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네.
한암은 또 어느 날 경허화상을 모시고 앉아서 차를 마신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화상은 문득 『선요(禪要)』 의 한 구절,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라는 문답 대목을 인용하면서 거기 모인 대중을 향하여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이 물음에 한암은,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互墻)이 앞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하니, 상식(常識)의 세계에서는 얼른 이해가 안가는 문답이다.
그러나 선리(禪理)의 세계에서는 이따금씩 상식의 언어 논리를 초월한 대화가 있는 것이다. 경허화상은 이튿날 법상(法床)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 고 말하였다. 역시 아는 사람만이 알아보는 선(禪)의 묘계(妙界)인 모양이다. 노화상은 한암을 알아본 것이다.
(4) 지음(知音)의 벗을 얻다
한 때 한암은 해인사 선원(禪院)에서 『전등록(傳燈錄)』 을 펴들고 읽은 일이 있었다.
‘약산선사(藥山禪師)가 석두선사(石頭禪師)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도 하는 것이 없다.’ 고 한 대목에 이르자, 그는 다시 심로(心路)가 끊어져서 미로(迷路)를 헤매게 되었다. 마치 통 밑이 빠져 버린 것 같은 허전한 경계를 맛보았다. 한편 경허화상은 그 해 겨울에 함경남도 삼수갑산(三水甲山) 등지를 긴 머리에 수염을 깎지도 않은 모습으로 방황하면서 한암에게서 자취를 감추었다. 경허화상이 해인사에서 한암을 이별할 때 은근히 그를 함께 데리고 가고 싶어하며 서문 한 편과 시 한 구를 지어서 한암에게 준 일이 있다. 그 서문과 시는 다음과 같다.
“나[경허]는 천성이 화광동진(和光同塵 : 부처 보살이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기 위하여 인간 세계에 섞여 사는 일)을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지냈더니 우연히 해인정사(海印精舍 : 海印寺)에서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순직하고 또 학문이 고명(高明)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 만난 사람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서로 이별하는 마당을 당하게 되니 조모(朝暮)의 연운(煙雲)과 산해(山海)의 원근(遠近)이 진실로 영송(迎送)하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날 사람은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 차 있지만, 진실로 내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고 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 한 수를 지어서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한다.”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변변치 않은 데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은 예사라서 어려운 게 아니지만
부생(浮生)이 흩어지면 또 볼 기회 있으랴.
한암은 이와 같은 경허화상의 이별시(離別詩)를 받아 읽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서 답했다.
서릿 국화 설중매(雪中梅)는 겨우 지나갔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가 없을까요.
만고에 변치 않고 늘 비치는 마음의 달
쓸데없는 세상에서 뒷날을 기약해 무엇하리.
한암은 시로써 이별을 아쉬워했을 뿐 경허화상을 좇지는 않았다. 그 후 경허화상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으니 그가 시에서 말한 것처럼 부세(浮世)에서는 영영 기약 없는 이별이 되고 말았다.
(5) 계오(契悟)의 경계(境界)
한암은 30세 되던 1905년 봄에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 내원선원(內院禪院)으로부터 조실(祖室)로 와 달라는 초청장을 받고 거기에 가서 젊은 선승(禪僧)들과 더불어 5,6년의 세월을 보냈다. 192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다시 평안도 맹산(孟山 : 한암의 고향) 우두암에 들어가서 홀로 앉아 보림(保任 : 깨달은 眞理를 다시 硏磨한다는 뜻)에 힘쓰고 있었다. 어느 날 부엌에 홀로 앉아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계오(契悟 : 보다 깊은 깨달음)의 경계(境界)하였다. 그 계오한 경계가 성주의 청암사 수도암에서 개오(開悟)한 때와 조금도 차이가 없으나 다만 한줄기 활로가 분명해졌을 뿐이었다. 때는 한암의 나이 35세 되던 겨울이었다. 그는 이 경지를 보고 난 후 또 우연히 시 두 수를 읊었다.
부엌에서 불붙이다 별안간 눈 밝으나
이걸 쫓아 옛길이 인연 따라 분명하네.
날 보고 서래의를 묻는 이가 있다면
바위 밑 우물 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마을 개 짖는 소리에 손님인가 의심하고
산새의 울음소리는 나를 조롱하는 듯.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하루아침에 세상 바람을 쓸어 버렸네.
한암은 이때부터 중생이 서로 의탁하여 사는 이 세상에 들지도 않고 거기서 나지도 않으면서 수시수처(隨時隨處)에서 종횡무진으로 선풍을 크게 떨쳤다. 이리하여 한국의 선교사(禪敎史)는 한암에 의하여 한층 빛나게 된 것이다.
한암은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에 있었고, 송만공(宋滿空)화상은 예산(禮山) 정혜사(定慧寺)에 있었다. 만공화상은 당시 선(禪)의 경지에 있어서 한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사로서 그 이름이 높았다. 만공에게도 한암 못지않게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여기 한암선사와만공선사의 사이에서 벌어진 법(法)문답 몇 토막을 소개하여 보겠다.
만공은 한암에게 법을 물었다.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설상가상(雪上加露)이 되었다. 지장암 도량(道場)내에 업경대(業鏡臺)가 있으니 스님의 업(業)이 얼마나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한암은 실로 기상천외(奇想天外)의 대답을 하였다. “이 질문을 하기 전에 마땅히 30방망이를 맞아야 옳다"
만공은 다부지게 되물었다.
“맞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고?"
한암은 여유를 두지 않고 대답하였다.
“지금 한창 잣 서리할 때가 좋으니 속히 올라오라"
만공은 쉬지 않고 다시 말했다.
“암두(岩頭)의 잣 서리할 때에 참예하지 못함은 원망스럽지만 덕산(德山)의 잣 서리할 시절은 원하지 않노라"
한암은 곧 응수하였다.
“암두와 덕산의 명함은 이미 알았거니와 그들의 성은 무엇인가?"
두 선사의 이 동문서답 같은 법문답은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
“도둑이 지나간 후 3천 리가 넘었거늘 문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성을 물어 무엇하랴"
이런 만공의 물음에 대하여 한암은 또 대답하였다.
“금선대 속에 있는 보화관(寶花冠)이 금옥(金玉)으로도 비하기 어렵다."
만공선사는 마지막에 네모진 백지 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서 한암에게 보냈다고 한다.
또 일정시대(日政時代)에 경성제대 교수로 있던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명승(名僧) 사또오가 한국 불교계를 전부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의 한암에게 와서 법문답을 한 일이 있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사또오는 말문을 열었다. 조용히 앉아 있던 한암은 이 물음에 대하여 거기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사또오도 만만치 않은 위인이다. 그는 물었다.
“스님은 일대장경 (一大藏經)과 모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아오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한암은 가만히 사또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참배나 갔다 오라."
한참 있다가 사또오는 또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부터 입산(入山)하여 지금까지 수도하여 왔으니,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한암은 잘라 대답하였다.
“모르겠노라."
사또오가 일어나 절을 하면서 활구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어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인사하였다. 이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암은 말했다.
“‘활구’라고 말하여 버렸으니 벌써 ‘사구(死句)’가 되고 말았군."
사또오는 3일 동안 유숙하고 한암이 살던 상원사를 떠났다.
뒷날 여러 사람이 모인 어느 강연석상에서 사또오 교수는, “한암스님은 일본 천지에서도 볼 수 없는 인물임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둘도 없는 존재다"라고 한암을 평한 일이 있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조선총독부의 일인 고관들과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인 저명인사들이 상원사로 한암을 찾아오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한암과 법담(法談)을 몇 마디 주고받고서는 반드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곁을 떠났다. 한암과 그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기발하고도 선묘한 선리 문답이 벌어졌다.
(6) 득의(得意)의 만년(晩年)
한암은 50세 되던 1925년 서울 근방의 봉은사(奉恩寺)의 조실(祖室) 스님으로 있었다. 그러나 곧 맹세하기를,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상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하면서, 또다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갔다. 그 후 27년 동안 그는 동구 밖에 나오지 않은 채, 76세의 나이로 일생을 거기서 마쳤다. 그때에 그의 법랍(法臘 : 중이 된 해부터 세는 나이)은 54세였다. 그는 오대산에 처음 들어올 때 소지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中臺) 뜰 앞에 꽂았다. 일영(一影)을 재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 나와서 하나의 훌륭한 정자나무가 되었다. 지금 오대산 중대 앞에 있는 정자나무가 바로 스님의 지팡이였다고 한다.
부석사(浮石寺)에는 의상법사(義湘法師)가 꽂았다는 지팡이가 있고, 순천 송광사(松廣寺)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꽂았다는 지팡이가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런데 신라 고승과 고려 국사의 지팡이와 지금 그 자리에 있다고 하는 나무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나무가 바로 옛날 고승들이 꽂았던 지팡이라고 한다.
역사가 오랜 절 마당에는 여러 가지 전설과 비화가 있다. 어찌 보면 마당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굴러다니는 돌 하나에도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가 숨어 있을런지 모른다. ‘오대산’하면 ‘방한암’ ‘방한암’하면 ‘오대산’이라고 할 만큼 오대산과 한암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오대산에 있는 사찰과 암자와 적멸보궁의 주변에는 한암의 면목을 전하여 주는 이야기가 많이 숨어 있다.
한암은 주변에 여러 가지 이야기만 남겼을 뿐 평소부터 저술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겨우 『일발록(一鉢錄)』 한 권을 저술하였는데, 상원사가 1947년 불에 탔을 때 그 한권의 원고마저 재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한암의 밑에서 득법(得法)한 제자도 몇 사람 있는데 그 가운데서 보문(普門)과 난암(暖庵)이 가장 지행(志行)이 뛰어나서 자못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더니, 보문은 아깝게도 일찍 돌아갔고, 난암은 일본에 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한암은 1951년에 가벼운 병이 생겼다. 병이 난 지 7일이 되는 아침에 죽 한 그릇과 차 한잔을 마시고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 2월 14일이지" 하고 말한 후 사시(巳時 : 午前 열시)에 이르러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선상(禪床) 위에 단정히 앉아서 태연한 자세를 갖추고 죽었다.
옛날부터 득도(得道)한 분들이 모두 생사에 자재(自在)함은 그 수도가 용무생사의 경계에 이른 까닭이다. 당(唐)나라의 등은봉(鄧隱峰)선사는 거꾸로 서서 돌아갔다고 하며 관계(灌溪)는 자기 몸을 태울 화장(火葬) 나무를 미리 준비하였다가 그 위에 앉아서 제자들에게 불 지르라고 한 마디 명령하고, 그 불이 다 붙기 전에 돌아갔다고 한다. 고려의 보조국사는 법상(法床)을 차려 놓고 제자들과 백문백답(百文百答)을 끝마친 다음, 법상에서 내려와 마루에 걸터앉은 채 그대로 조용히 열반하였다. 죽음이 범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공포와 괴로움이 되고 있으나 보조국사나 한암선사같이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서는 죽음이 아무런 거리낌도 되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만나더라도, 밤에 잠이 들듯이 아주 태연하게 죽을 수 있다.
이리하여 9살에 “반고씨 이전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궁극(窮極)’을 캐묻던 어린 소년은 76세 때에 바로 그 반고 이전의 궁극의 세계로 조용히 사라져 갔다. 아니, 어쩌면 한암선사는 그 궁극의 세계를 넘어서 더 멀리로 날아 갔을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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