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성서’에 ‘법구경’등 10여권 경전 수록
불교 평등·무아사상의 윤리적 탁월성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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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뮐러의 초상화. |
막스 뮐러(Friedrich Max Muler, 1823~1900)는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빌헬름 뮐러의 아들로 태어나 그의 학문적 생애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낸 산스크리트 언어학자이자 근대 종교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처음에는 시인이나 음악가가 되고자 했으나 1843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베를린에서 셸링 아래에서 일을 하며 인도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쇼펜하우어와도 만나 베다와 우파니샤드 등 인도의 고대 경전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산스크리트 문헌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1845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당대 산스크리트 불교학의 대가였던 유진 뷔르누프(Eugene Burnouf, 1801~1852)의 제자가 되었다. 뮐러를 처음 본 뷔르노프는 “나는 브라만이며 불교도이며 조로아스터교도”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고 한다. 뷔르누프는 뮐러에게 영국의 동인도회사에서 수집한 『리그베다』사본을 번역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이 번역 작업의 완성을 위하여 영국에 건너가 전4권의 교정 번역본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서구에 인도종교 문화를 소개하는 초석이 되었다.
梵語에 정통한 비교종교학자
영국에 귀화한 뮐러는 1850년부터 옥스퍼드대학의 교수가 되어 인도-유럽어족을 중심으로 한 언어학과 비교신화학을 통하여 종교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신화와 언어와 인간의 심성에 깃들어 있는 종교성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해석하는 작업이 그의 평생의 학문적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1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이 보여주듯 뮐러는 다방면의 학문에 관심이 있었고, 47세 때는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소설 작품도 출판하였다.
1870년 뮐러는 영국왕립연구소에서 행한 강연에서 신학이나 종교철학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인 종교학(Science of Religion)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하나의 종교만을 아는 이는 종교를 모른다(he who knows only one, knows none)”는 말은 그 후 종교학도들의 슬로건이 되었다. 뮐러는『종교학입문』(1973)에서 종교의 비교 연구는 종교 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지 않고 여러 종교를 비교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이해하고 나아가 종교의 궁극적 본질을 해명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뮐러는 종교는 태양과 같이 자연현상 뒤에서 이를 초월하여 있는 무한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무한에의 탐구를 뮐러는 “내 생각에 담을 수 없는 것을 생각에 담으려는 투쟁,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노력, 무한에 대한 열망, 신의 사랑에 대한 추구, 곧 영의 절박한 신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에게 종교 경험은 다른 이름과 형태를 지닌 무한한 것(the infinite)을 인식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뮐러는 베다시대의 종교를 통해 이러한 종교의 본질과 기원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베다의 종교는 자연현상의 배후에서 무한을 찾아내려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을 확인할 수 있는 모델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뮐러는 이른바 사제적 종교를 비종교적이라고 비판한다. 사제의 권력으로 발전한 종교는 종교의 제도화와 함께 자연종교에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참된 종교는 유한한 자연과의 접촉을 통하여 무한을 인식하는 것이며, 무한에의 인식이 인간의 도덕적 특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양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뮐러는 여러 종교의 신들은 주인 없는 가면이며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지 인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신화는 언어의 왜곡에 의해 창조된 언어질병으로서의 신들은 누미나(Numina, 신성) 자체가 아니라 노미나(Nomina, 명칭)일 뿐이라고 하였다.
뮐러는 아리안계, 셈계, 투라니안 어계 등 어족에 따라 종교를 분류하였다. 또한 고대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의 어원이 동일함을 알고 따라서 인도신화와 서구 아리안족의 신화의 연계성을 밝힘으로서 인도-유럽어족에 의해 형성된 신화와 종교문화의 유사성을 해명하였다. 이와같이 언어학의 창을 통해 종교를 바라보고자 했던 뮐러의 종교 읽기는 종교 간의 우열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나 종교의 내적 구조와 특성을 간과하는 과단순화의 오류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막스 뮐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1870년부터 시작한 동방성서 시리즈의 편찬 작업이었다. 당대의 동양학 분야의 대가들이 대거 참가하여 완성한 『동방성서』(SBE)의 출판은 19세기에 이룩한 동양종교학에 대한 금자탑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동방성서』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막스 뮐러의 주요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동방성서』50권 가운데 인도고대종교 관련 문헌이 20권이며 불교문헌은 10권이다. 그 외에 조로아스터교, 유교, 도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 경전 등이 약간씩 수록되어 있다. 뮐러는 인도의 종교 고전 가운데 『베다』와 『우파니샤드』 등을 번역하였으며, 다수의 불교 경전도 직접 번역하였다.
제도화된 권위적 종교 비판
뮐러는 1881년에 『동방성서』 제10권으로 출판된 『법구경(Dhammapada)』과 제49권에 수록된 『금강경』, 『대품반야심경』, 『소품 반야심경』, 『아미타경』, 『무량수경』 등 산스크리트 대승경전도 번역하였다. 제49권 가운데 『관무량수경』은 대정신수대장경의 편찬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번역한 것이다. 이 밖에도 『동방성서』에는 『법화경』(제21권), 『불소행찬』(제19권), 그리고 『율장』(제13, 17, 20권)과 『미린다왕문경』(제35, 36권)등이 수록되어 있다.
막스 뮐러의 대승경전 번역은 난죠 분유(南條文雄, 1849~1927) 등의 일본 유학생 협조로 이루어졌다. 난죠는 서구의 문헌학을 수용한 최초의 동양의 불교학자였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1880년부터 막스 뮐러로부터 서구의 산스크리트와 불교문헌학을 공부하였다. 뮐러는 난죠에게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산스크리트 불교문헌 사본의 입수를 부탁하였다. 난죠는 자신의 출신 종파인 정토진종 동본원사 계통의 여러 사찰에 의뢰하여 다수의 범본 불경을 구하였다. 이렇게 수집된 불전 가운데 뮐러는 1880년 아미타경을 먼저 교정 번역하였다. 이 때 밀교 계통의 『불정존승다라니』(The Ushnisha-vigaya-Dharani) 도 범본 교정본과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각 종교를 언어에 따라 분류
베다와 비교종교학에 대한 업적에 비하여 뮐러의 불교학 연구에 대한 기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뮐러는 빨리본 『법구경』을 비롯한 다수의 범본 불경을 직접 교정 편집하고 번역하였으며, 「열반의 의미」, 「붓다와 불교」,「불교의 순례자들」, 「불교 허무주의」, 「비밀불교」 등의 논문을 통하여 서구사회에 불교를 소개하는 데도 노력한 불교연구가였다.
뮐러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다음의 네 차원으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불교를 윤리체계로 보았다. 특히 불교의 자비사상에서 기독교와의 공통 연결요소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둘째, 불교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브라마니즘과의 관계에서 이해하였다. 셋째,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라는 점이다. 넷째, 불교의 열반은 절대 허무주의라는 해석이다. 뮐러는 불교를 브라마니즘에의 반작용과 그 연속선상에서 발생한 종교라고 보았다. 이러므로 불교를 독립된 종교라고 보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붓다를 당시 인도인을 억누르고 있던 윤리적 정신적 삶의 올가미를 풀어준 성인으로 평가했다. 붓다의 위대한 성취는 계급제도와 특권층에 억눌려 있던 인도인에게 참된 평등과 자유의 길을 가르친데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뮐러는 붓다가 가르친 자비의 윤리가 내포한 사회복지적 의미를 주목하고, 평등과 무아의 윤리적 탁월성을 찬양하였다.
1868년 타임(Time)지에 처음 발표된 「열반의 의미」에서 뮐러는 열반을 ‘신과의 합일과 교통’이 아닌 ‘궁극적 소멸(utter annihilation)’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뮐러는 불교의 열반관을 이해하는데 다소 혼란과 난해함을 느낀 듯하다. 영원한 존재자로서의 신과 영혼을 부정한 붓다의 가르침을 뮐러는 절대무의 가르침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뷔르누프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의 불교연구가들처럼 뮐러도 불교를 무신론이며 허무주의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종교로 이해한 듯하다. 뮐러의 이러한 불교관은 신과 같은 영원한 존재와의 재결합이나 그의 은총을 통해 구원의 성취를 염원하는 서구의 종교적 환경에서는 불가피했던 인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뮐러는 열반을 단순한 염세주의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열반을 탐진치가 소멸된 정적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윤리적 정신으로 이해하였다. 막스 뮐러는 기독교를 넘어선 지구상의 여러 진리에서 도출된 새로운 형태의 진정한 인간성의 종교의 도래를 희망하였다. 기독교를 상대화하며 종교학이야 말로 인간이 발전시킬 마지막 학문이라고 확신했던 뮐러의 태도는 그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들에게 뮐러는 모든 종교의 바탕에는 공통적인 성스러움이 있으며 이방인의 종교에 숨겨진 진리의 보고를 더 많이 발견할수록 참된 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래된 동전이나 비석에 수백 년이 지난 녹이 다 털어내면 그것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광채를 드러낼 수 있듯이 모든 종교 안에 숨겨진 비문을 읽을 수가 있다면 모든 종교의 동일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가 단순한 인도 문헌학자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모든 종교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노력은 후에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케 했던 것이다.
“모든 종교는 성스럽다”주장
막스 뮐러는 19세기 말 동서종교문화의 교류와 이해에 공헌한 선구자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다수의 불교 경전을 번역 출판하여 불교를 서구사회에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산스크리트 문헌학 방법론을 일본의 유학생들에게 전수하여 극동의 근대 불교학 태동에도 기여한 동양학자였다.
동국대 김용표 교수
김용표 교수는
미국 템플대 대학원 종교학 박사이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한국종교교육학회장, BK21세계화시대불교학교육연구단장, International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Editor를 역임하고 있다.
주요논저로 ‘불교와 종교철학’ ‘경전으로 본 세계종교’‘초월에서 보편으로-종교문화에서 종교교육을 논하다’‘한국종교와 인격교육’등이 있다.
출처 법보신문 982호 [2009년 01월 12일 1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