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부처님의 질문(1)
부처님의 질문
부처님이 그이 제자인 비구들을 위해 하셨던 설법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무상→고→무아의 계열로 이루어진 정형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설법들은 남전 상응부경전 제3권(인간분석에 대한 경전군),*(인간분석에 대한 경전군:khanda vagga. 五蘊에 관한 경전의 집록) 제4권 (인간감관에 관한 경전군)*(인간감관에 관한 경전군:saḷāyatana vagga. 六處에 관한 경전의 집록)의 앞머리에 각각 ‘근본 50경’으로 집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오온과 육처에 대해서 역시 같은 정형으로 말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러한 경전들을 보는 사람들은 은연중 부처님이 이런 사상적 체계를 설명하는 데 얼마나 진지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가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또 이런 사상적 체계를 자신의 설법방법의 정형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다시 뒤집어서 비구들에게 질문하는 방법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컨대 부처님은 그런 것들을 다만 비구들에게 설법했던 것만은 아니고 또한 그들이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는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질문으로 시험하고 확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이미 인용한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49)輸屢那<1>. 한역 잡아함경(1ㆍ31)輸屢那)에서 부처님은 소나라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소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육체)은 항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스승이시여, 무상한 것이옵니다.”
“무상이라면 그것은 고인가 낙인가.”
“스승이시여, 괴로움(苦)이옵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보고 이것은 나의 소유다, 이것은 나이다, 또는 나의 본체이다 라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이시여.”
그리고 똑같은 질의응답을 다시 수(감각)ㆍ상(표상)ㆍ행(의지)ㆍ식(의식)에 대해서 반복한 뒤 결론은 언제나처럼 다음과 같은 말로 맺고 있다.
소나야, 그렇게 해서 나의 가르침을 들었던 성스러운 제자들은 색을 염리하고 수와 상과 행과 식을 염리한다. 그리하여 탐욕을 떠나고 탐욕을 떠남으로서 해탈한다. 해탈함으로써 해탈했다는 자각이 생기고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의 행은 이미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했다. 이제 더 이상 미혹의 삶을 반복하는 일은 없으리라’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소나라는 인물은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상당히 그 이름이 알려졌던 비구였던 것 같다. 한 경*(남전 증지부경전(6ㆍ55)輸屢那. 한역잡아함경(9ㆍ30) 二十 億耳)에 의하면 그는 처음에 남보다 유달리 엄격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진척이 없자 환속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때 부처님이 소나에게 가르쳤던 ‘거문고줄’의 비유는 너무나 유명하다. 부처님은 비유 중에 ‘가운데를 취하라’고 교시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중도(中道)’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었다.
어쨋거나 부처님의 이같은 질문에 막힘이 없이 응답할 수 있는 제자들은 결코 소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소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기록하고 있는 경전은 이밖에도 10여종이 넘는다. 이러한 경전 속에 나오는 비구들은 모두 소나처럼 부처님의 질문에 막힘없이 응답하고 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러한 부처님의 질문에는 다만 앞에서 말한 무상→고→무아라는 정형으로 이루어진 설법을 잘 기억하고 있으면 대답을 쉽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그들은 그 설법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햇다.
육처에 대한 질문
부처님의 질문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35ㆍ62)了悟. 한역은 없음)에 의하면 그것 역시 기원정사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부처님은 먼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나는 너희들을 위해 일체의 집착을 척결하는 방법을 설하려고 한다. 잘 듣도록 하라.”
그리고나서 이런 질문을 했다.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눈(眼)은 상주(常住)이겠는가, 아니면 무상(無常)이겠는가.”
“스승이시여, 그것은 무상이옵니다.”
“그것은 무상이라면 괴로움(苦)이겠는가, 즐거움(樂)이겠는가.”
“그것은 괴로움이다.”
"무상이고 괴로움이고 변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보고 그것은 내것이다, 그것은 나이다. 그것은 나의 본체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육처에 대해 질문하면서 제자들을 시험하고 있다. 육처에 대한 질문은 오온에 대한 것처럼 간단하게는 안 된다. 먼저 육근(六根) 즉 눈ㆍ귀ㆍ코ㆍ혀ㆍ몸뜻이라는 여섯 가지 감관이 있다. 또 그 대상으로서 육경(六境) 즉 색깔ㆍ소리ㆍ향기ㆍ맛ㆍ감촉ㆍ관념 등의 대상이 있다. 그리고 그 육근과 육경이 서로 상관되어 여섯 개의 인식이 성립된다. 따라서 부처님은 여기에서 그러한 육근과 육경의 하나하나에 대해 질문을 계속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가운데 어느 것이든지 술술 대답을 한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대답을 듣고 매우 만족해 한다.
부처님의 용용문제
그러나 부처님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좀더 어려운, 말하자면 응용문제로 제자들을 시험하기도 했다. 이 경우, 제자들은 앞의 경에서 처럼 쉽게 대답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도 한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155) 我, 한역은 없음)은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비구들이여, 도대체 무엇이 있음으로 해서, 무엇을 취함으로써, 또 무엇에 집착함으로써 아견(我見)이 생기는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우리의 법(法)의 근본이십니다. 원하옵건대 그것을 설해 주십시오.”
이 질문은 부처님이 즐겨 사용했던 설법의 정형을 기억하고 있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비구들은 다른 때와 달리 거침없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구들은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법의 근본이십니다. 원하옵건대 그것을 설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간청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때 언제나 사용하는 상투적인 말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제자들을 위해 설명을 해 나갔다.
“잘 들으라. 그것은 색이 있음으로, 색을 취함으로써, 또 색에 집착함으로써 아견이 생기는 것이다. 또 수ㆍ상ㆍ행ㆍ식이 있음을 그것을 취하고 집착함으로써 아견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다시 제자들에게 물었다.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은 상주(常住)이겠는가 무상이겠는가.”
“스승이시여, 그것은 무상이옵니다.”
“무상이라면 괴로움이겠는가, 즐거움이겠는가.”
“괴로움입니다.”
“무상이고 괴로움이고 변화하는 것을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아견이 생기겠는가.”
“스승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묻는 방법은 앞에서의 그것과 같은 문답식이다. 비구들은 이런 형식의 질문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거침없이 대답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술술 대답하고 있는 동안 어느덧 아견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여기서도 역시 앞에서와 같은 결론으로서 이 설법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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