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明)으로 실제적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환화(幻化)인 공(空)한 몸이 곧 법신(法身)이로다.(탄허 번역) 법신을 깨닫고 나니,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곧 천진불(天眞佛)이라.(성철 번역)”
영가대사의 이 말에 의거해서 우리는 잠시 철학적 사유를 펼쳐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공자와 예수님의 가르침과 아주 다르다. 부처님은 자연적인 것을 인간 지혜의 근원적인 것으로 알려주고 있고, 공자와 예수님은 사회적인 것을 인간이 알아야 할 으뜸의 것으로 말한다. 즉 불교는 자연적 본능을 최고의 지혜로 생각하는데 비하여, 유교와 기독교는 사회적 지능을 최고의 진리로 간주하는 데에 있다.
유교와 기독교는 사회를 보호하고 지키는 그 가치로서의 사회적 선을 선양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데 비하여, 불교는 사회적 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 불교의 도인은 자연적 본능의 자발적 힘을 왜곡되지 않게 표출하는 자연의 화신을 뜻한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매우 놀랄 분들이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본능은 동물적인 것이고, 도덕부재의 충동을 말하는데, 불교가 그런 류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불교를 도덕적 타락상의 측면으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언짢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우리의 편견이다. 본능은 모든 자연적 삶의 진솔한 욕망의 표현이지, 결코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본능의 영역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고, 그냥 모든 생명이 선천적으로 살기 위하여 행하는 욕망의 운동일 뿐이다. 우리가 본능을 비도덕적 타락의 대명사로 여기는 것은 사회적으로 악한 인간을 동물보다 못하거나, 동물적 본능의 충동으로 채워진 이른바 짐승보다 못한 놈으로 여기는 학교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이 학교교육은 유교적 인성교육의 영향이고, 또 기독교적 사회교육의 힘이 가세된 것이다. 불교도 조선조 500여년간 유교적 권력의지의 영향으로 살아남기 위하여 유교의 훈육교육에 길들여져 본능을 매도하였다.
자연적 본능(동물적 본능)은 결코 충동적인 것의 대명사가 아니다. 성충동과 폭력충동은 인간만이 사회적으로 행사하는 반사회적 그림이지, 자연적 본능의 생명이 행사하는 반자연적 무질서가 아니다. 본능은 무질서와 동의어가 아니고, 가장 생명력이 넘치고 기계적인 반응의 질서에 속한다.
생명보전을 위한 동물의 교미는 주기적으로 발생하지, 사회적인 충동에 의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동물의 교미는 인간이 끝없이 사회적으로 벌이고 있는 성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성욕은 자연적인 본능의 명령이라기 보다, 오히려 사회적인 지능의 작품이다. 우리는 자연적 본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본능이라는 말을 너무 무식하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의 힘이 너무 미약하다. 동식물처럼 본능의 직관적 전문성에 의하여 잘 짜연진 완성된 테두리를 형성하고 있지 않고, 열려진 가변성의 존재양식을 띠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드라마가 출현한다. 동식물의 본능은 주어진 본능의 직관력으로 철저히 닫혀진 울 안에 갇혀 산다. 그래서 어떤 변화의 충동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런 본능의 취약으로 어떤 결정된 힘이 너무 없다. 동식물에 비하여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자유로운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 나간다. 인간은 지능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인간의 지능은 이성의 이름으로 자연을 정복하여 생활의 장애와 불편을 극복하고, 사회의 무질서와 투쟁함으로써 보다 안온한 사회생활을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희구하여 왔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적 본능을 멀리하고 사회적 지능인 이성의 힘을 더 신뢰하고 그동안 살아 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사회적 가치에서 거의 소외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8호 [2010년 10월 19일 1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