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신심명(信心銘)·증도가(證道歌)

[증도가 해설] 4.연기(緣起)즉 공성(空性)

slowdream 2010. 9. 23. 01:05

[증도가 해설] 4.연기(緣起)즉 공성(空性)
존재는 자성의 아집 전혀 없는 공성
자기고유성 소유 않는 공성의 실상
기사등록일 [2010년 09월 14일 14:34 화요일]
 

과학적 사실과 불교적 사실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기독교는 과학적 사실 앞에서 곤혹스러워 하기도 하고 또 상충적인 갈등을 피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는 생물학적 진화론을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기기도 한다. 그리고 물리학적 역학이론을 공부하여 불교의 실상을 더 풍요하게 이해하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의 출발이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로 시작하지 않는가? 이 세상의 우주적 사실을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라는 것은 무조건 믿으라는 신앙제일주의의 선언과 아주 다르다.

 

과학적 사실은 제삼자의 위상에 서서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한 사실의 확증을 말하는 것이지만, 불교적 사실은 존재론적 사실의 가능근거를 가리킨다. 존재론적 사실이라고 하면 대단히 어렵고 난해한 말처럼 들리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독자들은 이전에 반복적으로 말해온 존재와 존재자와의 의미상의 차이를 기억할 것이다. 존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별적 명사들을 말한다.

 

우리는 보통 이 개별적 명사들의 존재를 통하여 존재라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예컨대 구름, 별들, 하늘, 산과 새들, 사람들과 바람과 물을 통하여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라는 의미는 개별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명사적 개념들이 아니라, 위에 든 모든 명사들이 다 존재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것들이 다 존재한다고 언급해도,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명쾌히 말할 수 없다.

 

존재하다라는 뜻은 개별적 명사(존재자)들을 초탈하는 막연한 의미의 안개구름 정도로 다가온다. 모든 존재자들(명사들)은 다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적으로 존재는 하나의 명사적 개념이 아니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명사들의 상관적 관계를 가리키는 상관적 장(場)을 말하거나, 상관성을 엮는 어떤 안개구름 정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상관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과 같겠다. 구름, 산, 인간, 동식물, 해, 땅 등은 다 서로 어떤 연쇄적인 상관성을 형성하면서 존재한다. 이런 현상을 부처님은 연기법이라 일렀다.

 

모든 것은 상관적으로 존재한다. 존재는 이 우주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상호 상관적인 의존관계의 짜임새로 존재하는 방식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상호의존 관계의 짜임새를 잡으려 하면, 잡을 수 없고 실상 하나의 빈 허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개구름도 손으로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는 무(無)에 불과하다.

 

『신심명』의 승찬대사도 ‘유즉시무 무즉시유’(有卽是無 無有是有無=존재가 곧 무요, 무가 곧 존재다)라고 언급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고, 모든 삼라만상의 존재자들을 다 상관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빈 터전과 같으므로 무에 해당하고, 또 무는 모든 삼라만상을 다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서의 안개구름과 유사하므로 또한 존재라고 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는 무와 같은 의미의 힘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삼라만상이 존재하기 위하여 그 존재는 모든 것들의 상호작용과 반작용의 왕래운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는 자기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텅빈 공허의 빈 사이공간이기도 하다. 존재는 자기 것을 고집하고 그것을 수호하려는 자성의 아집이 전혀 없는 공성(空性)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존재는 상호연관성의 힘으로서의 연기법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또 존재는 자기 고유성을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는 공성의 실상이기도 하다. 용수보살이 그의 『중론』에서 연기가 곧 공성이라고 지적한 것은 존재론적으로 아주 탁월한 철학적 견해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4호 [2010년 09월 14일 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