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신심명(信心銘)·증도가(證道歌)

[증도가 해설] ② 과학자, 철학자, 도인

slowdream 2010. 8. 23. 08:58

[증도가 해설] ② 과학자, 철학자, 도인
도인은 스스로 진리가 되어 진리를 증언하고
과학자는 객관적 확증-철학잔 실존적 이해
기사등록일 [2010년 08월 17일 09:30 화요일]
 

지난 회에 증오와 해오의 수준 차이를 성철 스님의 강조점에 발맞추어 구분하였다. 해오는 부처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소화로 말하는 수준이고, 증오는 부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그 순간이 바로 부처의 말이 되는 차원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참고삼아 비유하자면, 노자와 공자 그리고 소크라테스, 예수는 진리를 말하였지,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이점은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다 한 결 같이 진리에 대하여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도 진리를 증언한 차원이라고 읽어야 하겠다.

 

본인도 잘 모르면서 제법 유식한척 뇌까리는 사이비 학자의 알음알이는 여기서 말하는 해오의 수준이 아니다. 해오는 알고자 하는 진리(부처)에 대하여 투철한 문제의식에 도달한 사람의 수준이다. 여기서 쓰여진 ‘문제’(problem)는 20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가톨릭 철학자인 마르셀의 철학용어다. 이 용어를 그는 ‘신비’(mystery)라는 의미와 대비해서 썼다. 이 신비라는 용어를 한국 불교가 오해하고 있는 면모도 있다. 그래서 이 용어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이 알아서 대중화되면 가치가 떨어질까 봐 정체를 감추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설로 자기 말을 호도하면서, 스스로를 은닉시키려는 것을 나쁜 의미의 신비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풀이하는 것 같다. 또 신비라는 말인 영어의 ‘미스터리’라는 용어가 평가 절하되어서 철학적으로 쓰기를 기피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마르셀 철학에서 ‘신비’라는 용어의 의미는 ‘문제’라는 개념과 함께 대조적으로 음미되어야 한다. 문제의 위상은 늘 그 문제를 생각하는 주관인 내 앞에 놓여 있고, 나는 그 문제의 바깥에 놓여 있는 모색자이다. 문제가 나의 간절한 질의와 모색에 답을 제공해 주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실존적 해오(解悟)다. 철학은 자신의 정신적 자양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문제에 대한 실존적 답을 발견하지 않으면, 다 알음알이로 주어진 정답일 뿐이다. 해오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결과와 같다. 문제를 탐구하려는 나의 실존적 의문이 충족되려는 찰나, 나의 실존의식은 퇴색하고 문제에서 솟은 해답이 나를 포함한 이 우주의 모든 존재의 사실로서 나타난다. 이 사실의 출현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객관적 확증이 아니라,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확증은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증언은 사실의 존재와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도(道)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존재와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도가 되는 것이 마르셀의 철학이 말하는 ‘신비’이겠다. 신비는 도를 깨치는 차원에서 존중되어야지, 가볍게 여겨져야 할 뜻이 아니다. 도의 존재와 도의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구분이 없는 경지의 그 신비가 바로 성철스님이 말한 증오(證悟)의 의미겠다. 과학자는 진리를 객관적으로 확증하고, 철학자는 진리를 실존적으로 이해하고(解悟), 도인(道人)은 진리가 되어 진리를 증언한다(證悟). 과학자는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비객관적 요소를 버려야 하고, 철학자는 실존적 진리를 체득하기 위하여 비실존적 요인들을 제거해야 한다.

 

따라서 학문으로서의 과학과 철학에는 반드시 취사선택이 있기 마련이다. 확증하는 마음과 탐구하는 마음은 버리고 갈구하는 긴장감이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도를 터득한 도인의 눈에 모든 것이 여여한게 사실이어서, 특별히 버리고 선택하는 경계가 없다. 도인이 사실이라 부르는 것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도를 증오한 사실은 가장 단순한 그 사실을 사실대로 볼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형효 교수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법보신문 1060호 [2010년 08월 17일 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