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신심명(信心銘)·증도가(證道歌)

9. 불교는 욕망의 종교

slowdream 2010. 12. 18. 07:35
9. 불교는 욕망의 종교
 
부처는 자리이타적으로 이로움 향유
중생은 이기배타적으로 그것을 향유
 
출처 법보신문 2010.12.01 14:29 입력 발행호수 : 1074 호 / 발행일 : 2010년 12월 1일
 

다시 ‘증도가’의 글귀로 되돌아 간다. “무명의 참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같은 빈 몸이 바로 곧 법신이로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곧 천진불이라.” 무명의 중생이 곧 부처님의 성품이요, 허깨비 같은 부질없는 빈 몸이 곧 부처님의 법신이로다. 이 말은 앞 회에 우리가 누누히 강조한 애매모호성을 일컫는다. 흑백논리에 의거해서 보면, 지고지순한 부처님과 더럽고 누추한 중생은 결단코 동거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에 부처님과 중생이 한 곳에 동거하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보통 부처님하면 아주 머나면 거리에 위치한 성스러운 지존이고, 우리와 같은 일반 중생은 도저히 부처님과 한 곳에 살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사고방식이 기독교 신앙을 가로누비고 있는 생각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너무나 강조한다. 구제불능의 죄인이기에 예수님의 매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른바 하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 자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금이라도 들 수 없을 만큼 비천한 존재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불교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우리가 부처님의 종이 아니라, 우리는 부처님 자신이다. 이것은 엄청난 사고의 혁명이다. 불교가 인류사에서 최초로 인간 위에 아무 것도 없다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말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동식물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가 다 인간과 같은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와 서양 철학은 그동안에 인간과 하나님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자여서, 다른 존재자들은 이성이 결여되었다고 여겨 다 인간의 종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교는 이성중심으로 세상을 평가하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욕계라고 본다. 욕망의 세계라는 뜻이다.


그렇다. 불교는 기독교처럼 이성의 철학이 아니라, 욕망의 철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욕계 안에서 모든 생명체는 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런 욕망으로 살아간다. 여기에 동식물과 인간의 차이가 없다.


흔히 불교는 탈욕망의 종교인 양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모든 생명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을 부정하면, 그것은 생명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불교가 부정하는 탐욕은 다만 이기적 욕망을 지칭한 것이다. 모든 중생에게 공통적 욕망이 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의 유지에 이로운 것은 취하고, 해로운 것은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과 일반 무명의 중생에게도 마찬가지다. 부처님과 중생에게 공통적인 것은 욕망이고, 그 욕망의 활동으로서 이로움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부처와 중생은 욕망의 공통성에서 동거하고 있고, 그 욕망의 이로움을 공통적으로 향유하고있다.


그러나 이로움을 향유하는 방식에서 다르다. 부처는 자리이타적(自利利他的)으로 이로움을 향유하고, 중생은 이기배타적(利己排他的)으로 그것을 향유한다. 이것이 아주 결정적으로 부처와 중생의 사고방식의 차이다. 자리이타적 사고방식은 욕망을 원력으로 만들고, 이기배타적 사고방식은 욕망을 탐욕으로 전락시킨다. 흔히 원력과 탐욕을 서로 다른 것인 양 주장하나, 기실 그 두가지는 같은 욕망의 양면성이다. 이것도 욕망의 애매모호성의 일예라고 하겠다. 이 양면성은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원력은 욕망의 존재론적 측면이고, 탐욕은 욕망의 소유론적 측면이다.

대승불교는 대중불교의 다른 이름이겠다. 원시불교에서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어져 대중부가 대승불교를 낳게 된 것도 이를 입증한다 하겠다. 대중들이 생활 속에서 자리이타적인 보시나 지계, 그리고 정진의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부처되는 길을 걸어가는 성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