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옳다
- 부처는 사고방식이 확 바뀌어 버린 중생
수행은 불심을 현행적으로 유지할 방편
지난 회에 우리가 읽었던 나무장승이 노래하고 돌여자가 춤을 춘다는 말은 무흔적의 존재방식인 부처의 입장에서 읊은 경지이다. 흔적의 존재방식인 삼라만상은 무흔적의 존재방식인 공의 나타난 표현이다.
공은 스스로 아무 것도 나타낼 것이 없는 허허로움 자체다. 일체 중생은 사회생활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의 감정을 느낀다. 중생이 사회생활에서 쾌락과 즐거움을 미친 듯이 찾지만, 그것은 고통과 괴로움을 일시적으로 잊기 위한 몸부림이다. 중생의 몸은 모든 괴로움과 고통의 진원지다. 몸의 집착은 무상감과 괴로움만을 키울 뿐이다.
그러나 부처는 다르다. 중생이 부처로 사고방식을 순간적으로 확 바꿔버리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부처는 사고방식이 전적으로 확 바뀌어버린 중생이다. 우리는 종종 부처님은 중생과 아주 다른 특별한 위인처럼만 생각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과 너무 멀리 떨어진 성인으로만 간주한다.
대승불교에 와서 부처님은 각고의 고행 끝에 간신히 기적같이 도달한 아주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은 신과 같은 분으로 여겨져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지존의 인물이다.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하여 죽기를 각오한 고행의 수행을 거쳐서 언젠가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그런 이상적 인물로 착각한다. 나는 현재 부처가 아니지만, 수행과 노력의 결과로 드디어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 미래완료형이 부처가 아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 그냥 부처라는 것이다. 부처는 삼천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의 꽃처럼 수많은 노력과 의지의 성과로 피게 되는 그런 꽃이 아니다. 성철 큰 스님의 말씀처럼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옳다. 부처를 절대로 이상주의적 시각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이상주의는 부처를 어떤 관념의 기획투사나 관념적 대상으로서 바라본다. 돈오점수(頓悟漸修)도 순간적으로 부처를 직관하지만, 그러나 부처가 현실적으로 되기 위하여 오랜 고행적 수행의 끝에서 결국 마무리될 수밖에 없다는 도덕주의적 관점이다. 선가에서 말하는 성불은 갑자기 부처를 보고 또 갑자기 부처를 닦는다는 것은 사고방식의 일대전환을 뜻한다.
그러므로 수행의 의미는 불심을 도덕적으로 닦으려는 노력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심을 현행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불심의 자기 방편이다. 주력(呪力), 염불기도, 참선, 간경 등과 같은 방편은 불심을 현행적으로 유지, 지속시키기 위한 불심의 자기 요구다.
중생심과 불심은 같은 시간에 현행적으로 동시에 인간의 마음속에 불이(不二)로서 현존한다. 인간의 마음이 사고방식을 나타낼 때에, 소유론적 방식으로 마음의 사고방식이 나타나면 중생심이고, 존재론적 방식으로 마음의 사고방식이 드러나면 불심이다. 그렇다. 오직 차이의 기준은 소유냐 존재냐 하는 것이다. 중생의 소유심은 ‘금강경’의 가르침처럼 사상(四相=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의 의식에 집착되어 있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이 사상 가운데 가장 소유욕을 대표하는 것은 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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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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