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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緣起 공空 불이不二

slowdream 2022. 6. 1. 22:41

붓다께서 체득하신 진리인 연기緣起는 이 세상을 이루는 오온五蘊의 전개 법칙입니다. 12연기가 바로 그것이지요. 다양한 조건이 성립되어야 발생하는 존재인 법法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무아無我의 성품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영원불변하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가 없을 따름이지, 연기적 관계가 지속되는 상태인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형성작용이 항상하지 않기에, 형성력이 다하고 조건이 변하면 법 또한 존재상태를 지속하지 못하고 소멸합니다. 예를 들자면 짧게는 한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 길게는 한 삶에서의 육체의 생성과 소멸. 이렇게 연기한 법의 성품을 무상, 고, 무아 3법인이라 하죠.

 

진리인 연기는 대승불교가 등장하면서 공空 또는 공성空性으로 대체됩니다. 반야와 중관의 空사상이 ‘연기’를 고스란히 전승한 것이었으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空은 전혀 낯선 이질적인 형이상학적 세계를 드러냅니다. ‘실체는 없으나 실재하는’ 연기의 세계는 증발해 버리고,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 空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된 거죠. 조금 어려운 얘기일 수 있지만,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 ‘空의 상태’가 또다른 ‘실체’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불교 예불의식에서 빠지지 않고 읊어지는 ‘반야심경’이 그 좋은 예이겠죠.

 

여기에 덧붙여 화엄의 법계연기론이 등장하면서, 오온인 법의 실재성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희론의 영역으로 비상해 버립니다. 연기하는, 관계하는 법들은 상호의존적이기에 배타적일 수 없는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이지, 그렇다 해서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무너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이 혹은 같음同과 다름二이, 밀물과 썰물, 바닷물과 파도처럼 그 경계가 흐릿해서 분별할 수 없다는 그래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관계의 의존성이 법들의 동질성, 무차별성, 동일성으로 비약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대승불교 교리의 정점인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의 통일장이론이랄 수 있는 <대승기신론> 또한 불이不二사상 정립에 큰 몫을 합니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일심一心으로 귀결되며, 일심은 곧 여래장, 중생심, 불성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선종 6조인 혜능의 <6조단경>에서는 “번뇌가 곧 보리”라 단호하게 규정하기까지 합니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동전의 앞뒤와 같으며, 중생심에 내재된 불성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곧 부처라는 선언입니다. 감동적이지만,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약속입니다.

 

대승의 不二사상은 진속불이眞俗不二, 선악불이善惡不二 등 사유와 행위의 영역을 잠식하며 그 폐해가 극심합니다. 한국불교 최대종단인 조계종 승려들이 음주, 도박, 은처, 폭력 등의 사건으로 언론에 종종 등장하여 신심이 두터운 불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적잖은 것이 현실이죠. 그릇된 논리적 사유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도덕적 행위의 당위성을 훼손하고 무화시켜서는 안 될 일이겠죠.

 

붓다의 가르침은 ‘4성제’안에 죄다 녹아 있습니다. 3법인, 12연기, 8정도.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 무엇을 더하고 뺄 것이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2,500여년 전 붓다께서 거닌 옛길을 조심스레 복원하는 출가자와 재가자님들의 노력이 작게나마 결실을 보고 있어서 큰 의지가 됩니다. 세대교체가 크게 이루어지는 30년 후면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불교가 원래의 모습을 적잖이 되찾게 되리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