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성스러운 진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
삶은 그 자체로 모순적 행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살기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기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 참혹한 삶의 아이러니라니. 돈, 사랑, 명예, 건강, 권력 등 모든 것을 쥐었든 일부만을 누렸든 삶은 여지없이 죽음으로 종결됩니다. 죽음을 거부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장치도 무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의 궁극적 의미를 붓다께서는 ‘고통, 불만족’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 전하신 진리는 ‘연기법’이며, 연기하는 법들이 펼쳐지는 현상계의 실상을 ‘4聖諦-4가지 성스러운 진실’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4성제는 ‘고성제-고집성제-고멸성제-고도성제’입니다. 또한 연기하는 법들의 보편적 성품이 ‘3法印’ 즉 ‘無常, 苦, 無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고는 ‘불완전’입니다. 인식대상인 객관적 법의 성품으로서의 고는 ‘불완전’이며, 인식주체인 주관이 대상과의 만남에서 갖는 느낌은 최종적으로 ‘고통, 불만족’입니다.
느낌만을 강조하다 보면, 삶의 궁극적 의미는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 결정되는 ‘주관적 관념론’에 갇히게 됩니다. 객관적 대상에 초점을 오롯이 맞추면, 인식 주체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의 궁극적 의미가 결정되기에 ‘객관적 관념론’에 머물게 됩니다. 인식주체와 대상은 상호작용하는 까닭에 삶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가 요구되는 까닭입니다. ‘무분별’을 강조하는 禪家의 오랜 습성 탓에 한국불교는 자칫 주관적 관념론에 빠질 우려가 큽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 불만족이 왜 ‘성스러운 진실’일까요? 지극히 당연하게도 苦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비로소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하는 까닭입니다. 苦에 대한 분명하고 정확한 이해가 불교의 첫걸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멸하는 법은 ‘생로병사’를 겪습니다. 이것은 과거 삶의 과보로서의 苦입니다. 태어남도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첫번째 화살을 맞음’입니다.
붓다께서는 ‘두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 당부하셨습니다. 첫번째 화살은 이미 받은 과보이니 어떠한 노력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 두번째 화살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애별리고 愛別離苦, 원증회고 怨憎會苦, 구부득고 救不得苦, 오취온고 五取蘊苦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은 내 뜻과 달리 마침내 헤어지고, 미워하는 대상 역시 내 뜻과 다르게 만나게 되며,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 모든 고통과 불만족은 결국 이 몸과 정신을 ‘내 것, 나, 나의 자아’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내 밖의 대상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과 집착, 이 몸과 정신을 내 것, 나, 나의 자아로 의심하지 않는 인지의 전도와 왜곡이 바로 두번째 화살입니다. 우리는 하루, 한시간만에도 수없이 많은 두번째 화살을 맞습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탐욕과 집착의 마음이 덩달아서 발동되는 까닭입니다.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을 수 있다면, 결국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至福의 상태인 해탈, 열반을 가리키는 언어적 비유로는 소멸 사라짐 niroda, 해탈 벗어남 vimutti, 열반 꺼짐 nibbana 등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자유, 완전한 해방 또한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범주에서의 해방과 자유는 세속적이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며 반복적이라면, 소유를 동력으로 하는 욕망과 착각을 토대로 하는 존재의 덫에서의 해방은 출세간적이고 전체적이며 최종적이고 영원합니다.
역사 이래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많은 노력과 희생을 거듭하면서 빛나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물질적 환경이 개선되면서 의식주와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이 완전하게 구성되면 인간의 자유는 최종적으로 완성될까요? 시스템의 완전성이 가능하느냐에 대한 문제와 함께, 공동체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추어진다 해도 결국 공동체 구성원들 개개의 혹은 집단적 욕망의 문제가 인간의 자유에 걸림돌이 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붓다, 노자, 소크라테스 등 인류 지성사의 정점인 ‘축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250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정의, 평등, 자유’를 갈구해 왔지만, 실제로는 무지와 야만, 폭력, 착취로 뒤덮여 왔습니다. 국지적으로 평화롭지만 전체적으로 참혹합니다. 좁게는 한 가정 내에서 부부간에, 부자간에, 연인간에, 친구간에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서 씨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지려면 옛날에 좋아졌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는 상관없이 인간 삶의 풍경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붓다의 진단인 ‘사성제’가 참으로 소중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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