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적 존재론과 인식론
2500여년 전 붓다께서 발견한 진리인 연기법은 오랜 세월 전승되면서 윤색되고 변질되고 더 나아가 왜곡된 상태입니다. 부파불교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특히 힌두교 사상과 중국의 현학(노장자), 유학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정도가 심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중관의 공(空) 사상과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으로 인해서 큰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연기법은 쉬운 듯 어렵고, 단순한 듯 복잡하며 심오합니다.
연기법의 정형구는 이렇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것)이 있다. 이것이 발생함으로써 저것(이것)이 발생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것)이 소멸한다.”
있음과 없음(有無), 발생과 소멸(生滅)은 가장 중요한 인식의 토대이자 관문입니다. 이들 사건, 사태, 현상은 상호의존적인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문제는 실체론적인 차원이냐, 연기론적인 차원에서 조망하느냐에 따라 그 이해가 크게 달라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 무엇’인 실체, 본질이 없다는 것이 무자성(無自性), 공,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이 곧 조건이 모여서 있게 되고 발생하고, 조건이 흩어져서 없게 되고 소멸한다는 연기의 이치입니다.
간단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공간적인 비유입니다. 두 개의 나무토막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서 있습니다. 그 둘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有無의 차원입니다.
시간적인 비유입니다. 이는 선후가 발생하기에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生滅의 차원입니다. 씨앗이 여러 조건에 의지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씨앗은 1차적인 가까운 원인인 조건입니다. 열매는 그 과보인 결과입니다.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뒤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씨앗은 열매가 맺어져야 씨앗으로 존재합니다.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 씨앗은 거름이 되거나 새나 짐승의 먹이가 되겠죠. 즉, 원인과 결과는 시간을 초월하여 동시적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기법이 여기에서 마무리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도 실체적 존재론이자 인식론입니다. 원인인 씨앗에게 열매는 어떤 관계로 정립될까요. 씨앗에게 열매는 자신을 씨앗으로 존재(발생)케 한 원인이며, 씨앗은 열매에 대해서 결과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숙한 연기적 존재론이자 인식론입니다.
현상계는 정신과 물질, 선과 악, 미와 추, 진실과 거짓 등 이분법으로 분별됩니다. 이분법이 아니라면 연기라는 이치 자체가 세워질 까닭이 없겠죠.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존재들을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모순적 관계로 이해하면 실체적 존재론으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이해하면 연기적 존재론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실체는 없되 실재하며, 사태(관계맺음, 맥락)에 따라 선이었던 존재가 악이 되고, 악이었던 존재가 선으로 그 속성이 바뀝니다. 원인이 결과 되고 결과가 원인으로 그 속성이 바뀝니다. 연기법을 인과법이라기보다는 조건법으로 설명하면 그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집니다.
대승불교의 불이(不二)사상은 이러한 이치에서 논리적 비약을 합니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닙니다. 선도 없고 악도 없습니다. 이분법적인 현상계에서 선과 악, 진과 속의 경계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고정불변의 실체로서의 선과 악, 진과 속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존재의 속성이 연기할 따름입니다.
동전이 있습니다. 앞뒤가 있습니다. 동전을 뒤집습니다. 그럼 동전의 뒷면일까요? 아닙니다. 인식주체인 나에게는 앞면입니다. 뒷면이 앞면으로 속성이 바뀐 것입니다. 이는 존재의 구조적 속성의 변화입니다. 동전으로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교환가치를 지닌 돈입니다. 동전을 던지며 놀면 장난감입니다. 앞사람 눈을 향해 던지면 흉기입니다. 이는 존재의 기능적(작용, 역할) 속성의 변화입니다.
붓다께서 법의 속성, 성품을 ‘무상, 고, 무아’라 규정한 까닭입니다. 개별적 성품, 속성은 관계 속에서 늘 변화하기에 보편적 성품, 속성만을 논할 따름입니다. 연기의 정형구에서 구체적인 개별성을 결여한 ‘이것, 저것’이라 지칭한 까닭도 같은 맥락입니다.
요즘은 과학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물리학, 심리학, 뇌과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학자들이 불교와 접점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교사상의 핵심인 연기법에 매료된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해는 실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불교 내부에서도 혼란스러운데, 바깥에서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주관이 배제된 객관적 사물과 사태에 인식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주관과 객관이 관계맺음으로써 그 존재의 속성들이 발현됩니다. 물리적 실재인 달은 모든 인식 주체에게 달일까요? 그렇다면, 실체론입니다. 수행자에게 달은 진리이며, 짖는 강아지에게는 낯선 침입자이며,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는 애틋한 추억의 한 장면이며, 어린아이에게는 토끼가 사는 동화속의 나라입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참으로 아리따운 여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연인이지만, 호랑이에게는 단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기론입니다.
실체적 존재론과 인식론의 세계는 매트릭스인 허상이며, 속제이며, 세간법입니다.
연기적 존재론과 인식론의 세계는 제법실상인 실재이며, 진제이며, 출세간법입니다.
파초화상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무문관> 44칙
모든 화두가 그렇듯이 이 화두 또한 어렵지 않게 타파됩니다. 실체냐, 연기냐가 그 열쇠입니다.
'***풍경소리 > 如如한 날들의 閑談'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지 1 (0) | 2024.06.29 |
---|---|
라깡, 하이데거, 헤겔 그리고 붓다 (0) | 2024.06.15 |
윤회 있는가, 없는가? (0) | 2024.04.29 |
고통이 성스러운 진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 (0) | 2024.04.15 |
4가지 음식과 알아차림 (0) | 2024.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