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편지 1

slowdream 2024. 6. 29. 04:46

제가 ‘최애’하는 E선생님 반갑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철학자들을 거론하면서 아는 척하는 태도 이면에는 아주 못된 심보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 사상, 사유라 일컫는 정신적 행위에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 한계가 뚜렷한 까닭입니다. 삶은 ‘생로병사’의 현상적 틀에 갇혀 있지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헌데, 사유라는 행위는 ‘생사’를 외면하거나 혹은 신비적 영역으로 던져놓고서, ‘희로애락’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몇 달 전 모임에서 K선생에게 이런 얘기를 슬쩍 짓궂게 건넨 적이 있습니다. “K선생, 이제까지의 모든 사유, 철학, 사상은 말입지, 붓다의 가르침에 비교하자면 놀이터에서 흙장난 하는 아이들 수준이거든.” 아...그때 K선생의 표정이 아주 오묘했습니다. 뭐, 이녀석 아는 척하는 수준을 넘어서 꼴값을 떠누만...ㅎㅎ...저는 K선생의 사유가 사유에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아, 물론 조카뻘이었어요. ㅎㅎ

 

 

....철학사
근대와 탈근대
접점
관계

기꺼이...

이 모든 단어가 개념정리가 필요해보이는 어려운 용어네요!

저는
오히려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아니
무엇이고 싶은가?

관계 이전에 이런 질문이 철학
특히
서양의 현대철학의 흐름이라고 봅니다

이성과 자유
거칠게 서양철학은
이게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관계는
그 질문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그 유명한
To be or not to be
처럼
주체가 중요한 문제여서
인식론적 사고보다는 존재론적 사고...
그래서 나아가서
객체
즉,
타자의 중요성도
인정할 수 있는 반발력이 가능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아니

무엇이고 싶은가?”...

 

E선생님의 ‘무엇’ 화두가 저는 결국 ‘관계’라는 문자에 수렴된다고 봅니다. 관계는 실체적 존재의 폐기이며 그 모든 바깥인 ‘타자’를 머금은 ‘연기’적 존재인 진정한 ‘자아’의 생성, 변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E님이 ‘관계’를 고전적인 실체적 존재의 부산물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좀 서운합니다. 제가 얘기하는 ‘관계’라는 개념은 실체적 태도인 존재론과 인식론을 극복한 ‘연기’적 태도인 존재론과 인식론입니다. 실체적 존재론의 관계가 아닌 연기적 존재론의 관계인 것이죠. 일전에 올린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배타독립적인 관계냐 상호의존적인 관계냐죠. 또한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도 존재가 ‘동시적이며, 중첩적이며, 다중적인’ 속성을 갖고 있음을 꿰뚫어야 정확한 인식이겠죠. 사실, E님과 제가 한통속인 것이죠.

 

들뢰즈가 니체, 스피노자를 무척 아꼈다는 것은 선생님도 익히 아시겠지만, 저는 경험론자로 명명된 흄도 분명 그 명단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는데요. 어쩌면 들뢰즈의 언설 어느 구석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 <천 개의 고원>을 읽은 지 20여년 정도 되어서 기억이 흐릿합니다.

 

흄, 스피노자,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라깡, 하이데거, 들뢰즈, 데리다...제가 좋아하는 철학자들인데요, 그들은 알게 모르게 붓다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단순한 까닭에서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산스크리트어로 전승된 대승불교 문헌 번역서를 접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요.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선불교는 이렇게 답합니다. ‘모른다(不識).’ 그러나 붓다는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신과 물체로 이루어지는 상호의존적인 경험적 복합체’라고 말입니다. 그것 참, 이보다 심오한 존재에 대한 정의가 있었는지. 더 나아가서, 존재가 의지하는 시간과 공간, 주체 안팎의 상호작용, 삶의 연속성 혹은 불연속성,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지요. 사유는 경험에 의지하고, 경험은 사유에 의지하지요. 희로애락을 뛰어넘는 생사의 경험도 개별적 경험의 수준에 갇히게 마련이겠죠. 그런 층위에서는 선불교의 ‘몰라’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몰라’의 외연을 확장하면 ‘알아’ 아닐까 싶습니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이니깐. 고백하자면, 저는 희노애락이 아닌 생사를 화두로 세워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사유의 바깥을 또 그 바깥을 욕망하자는 그런.

 

일면식 수준에 머무는 관계라서 제가 E선생님에게 어쩌면 주제넘는 얘기를 건네는 듯도 싶지만, 님의 식견이 제 생각을 좀더 세련되게 다듬는 힘을 주기에 참 고맙습니다. 오프에서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