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자이며 철학자인 자크 라깡에게 세계는 3가지이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상상계는 거울 단계로 이미지화한 자아가 비로소 출현하지만 세계와 자아를 동일시한다. 상징계는 상상계를 벗어나 언어질서와 사회구조에 편입되는 세계이다. 원초적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깨지고, 성숙한 자아와 타자인 세계와의 대립적 관계가 펼쳐지는 의미생성의 장이다.
실재계는 언어 곧 의식, 사유로써는 포획할 수 없는 언어와 사유의 바깥, 무의식의 장으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균열시키는 근원적 힘이다. 라깡은 이를 ‘대상 a'’로, 좀더 직관적인 ‘구멍’으로 지칭한다. 상상계와 상징계는 실재계의 ‘구멍’으로 인하여 구조적으로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는 진단이다. 이는 곧 우리 모두 정신질환인 ‘편집증’과 ‘분열증’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주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있다. 이름표는 스스로 작성할 수 없으며, 살아가는 내내 새로이 마주하는 타자가 그 이름표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소년, 학생, 젊은이, 우등생, 불량아, 판사, 과장, 사장, 군인, 의사, 환자, 건달, 사기꾼, 수행자, 남편, 아내, 도둑놈...주체는 이러한 이름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부정하는데, 이는 곧 타자의 인정을 요구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요구와 인정 사이의 간극과 괴리 정도에 따라 관계의 친밀도가 정립된다. 그런 까닭에 주체는 타자의 지배적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으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따름이다. 라깡과 푸코의 스승인 알튀세 또한 ‘주체는 타자의 호명’이라고 일갈했으며. 어쨌든, 주체의 욕망은 실현되지 않으며, 소실점 너머로 자꾸만 미끄러져 간다.
현대철학은 나치에게 협력했던 하이데거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이제껏 철학이란 녀석은 ‘존재자’에게 복무했지 ‘존재’를 탐구한 적은 없었다며 존재 탐구의 열매로 ‘현존재’를 출현시킨다. 어렵지 않게 이해하자면, 하이데거의 존재는 ‘구멍’이며, 존재자는 ‘실체적 자아’이고, 현존재는 ‘연기적 자아’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근대철학자이자 망상가인 헤겔의 변증법 또한 ‘구멍’을 얘기한다. 변증법은 ‘반론의 메커니즘’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는 변증의 동력을 구멍이라 규정한다. 존재이든 사실이든 자기완결성을 품지 못하는 까닭에 반론과 부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단절과 상속, 부정과 긍정의 이중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라깡과 하이데거, 헤겔의 현실진단은 낯설지 않다. 2,500여년 전, 붓다께서는 존재와 사태의 보편적 속성이 ‘無常, 苦, 無我’라고 정리하셨다. 이를 3법인이라 한다. 고는 인식주체의 느낌의 측면에서 ‘고통, 불만족’을 가리키며, 인식대상인 세계의 측면에서는 ‘불완전, 불안정, 결여, 결핍’ 등으로 이해된다. 이는 곧 라깡과 하이데거, 헤겔의 ‘구멍’에 다름 아니다. ‘타인은 지옥’이기에 그 시선에 포착된 주체는 끝없이 ‘내출혈’에 손상될 수밖에 없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적 독백, 해체철학자인 데리다와 들뢰즈의 ‘차이’ 개념과도 맥락이 닿는다.
모든 존재는 그 속성이 변하며 영원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을 자신이게끔 하는 그 무엇을 갖고 있지 않기에 ‘실체는 없되’ 실재한다. 양자물리학자 리 스몰린은 존재를 인과질서의 흐름으로 이해하면서 “동일성은 부정하지만, 연속성은 긍정한다”라며 심오한 철학적 멘트를 날린다. 동일성과 재현의 不在로 인해 나와 세계는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늘 출렁거린다. 현상계는 구멍으로 인하여 균열되고 욕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욕망의 주체는 욕망이며, 그 배후에 ‘실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깡은 욕구 need, 요구 demand, 욕망 desire을 구별하고, ‘요구-욕구=욕망’이라는 방정식을 도출했다. 욕구는 상상계에, 요구는 상징계에, 욕망은 실재계에 배치해도 무리가 없다. 그런즉 욕망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구성되는 현실의 구멍이며 결핍이며 불완전하며 불안정한 존재의 속성이다. ‘구멍과 차이’ ‘고’를 인식한다면, 균열과 미끄러짐을 확인한다면, 욕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욕망하지 않는 욕망’으로 삶의 방향이 전개될 것이다.
의식이 지향성을 갖기에 인식작용은 인간의 감각기관이 대상, 세계와 마주하면서(접촉, 만남) 발생한다. 그 결과 대상에 대한 정보가 감성과 이성으로 이루어진 마음에서 재해석되고 판단되어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가 자리잡는다. 욕망의 발생이다. 욕망은 스스로 일어나고 소멸하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내 마음의 생김새가 욕망의 형태와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제각기 다른 꿈을 꾸고,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표정이 다르다.
‘불완전, 불안정, 결핍, 구멍, 차이, 상호의존성’의 마음으로 세계를 대할 때와 ‘완전, 안정, 완결, 동일성, 배타독립성’으로 세계를 대할 때, 나의 욕망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띄기 마련이다. 존재는 자기완결성을 갖지 못하고 의존적으로 발생하고 존재하기에, 결핍과 욕망, 구멍은 필연적이다. 이는 “나는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나의 자아도 없다”라는 최종적 귀결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경험적 개체에 지나지 않는 소박한 나의 하루가, 소유를 동력으로 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착각을 동력으로 하는 ‘존재의 욕망’에서 서서히 멀어져가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온전한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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