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겉옷과 속옷, 분별과 무분별

slowdream 2024. 7. 26. 20:07

겉옷과 속옷, 분별과 무분별

 

 

존재의 속성은 ‘無常, 苦, 無我’입니다. 세상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형되고 변화합니다. 그렇기에 존재는 늘 불안정하고 불완전합니다. 당연한 이치의 귀결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제외한 모든 사상과 종교는 여기에서 멈춰 있습니다. 존재가 왜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느냐에 대한 까닭을 밝히지 못한 것이죠. 그 원인은 바로 ‘무아’입니다. 고유의 자기원인, 자기성질, 곧 실체를 갖지 못하고 연기하기에 존재는 불안정하고 변화합니다.

 

무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세계를 ‘실체적’으로 인식합니다. 실체적 인식이란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모순대립의 관계를 말합니다. 연기적 인식은 상호의존적 대립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실체가 없지만 연기하는 존재로서 실재합니다. 연기를 자칫 잘못 이해하면 엉뚱한 길로 어긋나 버립니다. 그 좋은 예가 노장자와 선불교로, 그들의 주장인 無分別, 不二사상이 그것입니다. 노자의 무위(자연질서), 유위(인간질서)는 장자에게서 무분별과 분별로 세련되게 다듬어집니다. 그 여파로 왜곡된 ‘主客불이’ ‘眞俗불이’ ‘善惡불이’ 구호가 중생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지요.

 

한국불교의 큰 스승 원효 스님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같다는 것은 다른 데서 같은 것을 구별하는 것이고, 다르다는 것은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힌 것이다.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힌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누어 다른 것을 삼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데서 같은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없애서 같은 것을 삼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같은 것은 다른 것을 없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다른 것은 같은 것을 나눈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둘이 없으며 구별됨이 없다... (원효,<금강삼매경론> 230쪽, 은정희 역, 일지사)

 

같음과 다름(同異) 자리에 있음과 없음(有無), 일어남과 사라짐(生滅), 가고 옴(去來),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常斷) 등 대립적 개념들을 집어넣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결론은 ‘무분별’ ‘불이’입니다. 이는 장자의 ‘混沌七窺’ 비유에서 비롯합니다. 혼돈에 일곱 개 구멍을 뚫었더니 시름시름 앓다가 일주일만에 죽어버렸습니다. 분별 이전의 자리(카오스)에 분별의 감각기능(코스모스)을 주었더니, 고유의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는, 일반의 상식을 엎어버리는 뛰어난 비유입니다. 이 아름다운 사유와 필력에 취해, 아직도 한국의 일부 선사들은 ‘분별 이전의 그 자리’ ‘참나’ ‘진아’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그것’을 외치고 선량한 대중들을 윽박지릅니다.

 

붓다께서도 ‘무분별’을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무번뇌분별’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분별하지 말고, 탐욕 없고 성냄 없는 맑고 밝은 지혜에 의지해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존재들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죠. ‘諸法實相如實知見’의 경지, 상태입니다.

 

연기적 사유는 이렇습니다. 선악이 있습니다. 무분별이기에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고 둘이 아닌 혼돈의 상태,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 민낯은 아닙니다. 선과 악의 경계는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양변은 실재적 개념이며 여읜다는 의미는 선과 악의 경계가 무화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연기하기 때문에, 선에 속했던 존재, 행위가 관계의 맥락에 따라 악에 속하기도 하며, 악에 속했던 존재, 행위가 선에 속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무분별, 무아의 사유입니다. 참된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입니다. 용수의 <중론> 이후에 '(사상)중도'라는 이질적 개념이 등장한 뒤로, 양변을 여읜 지혜의 자리가 곧 '무분별'로 이해됩니다. 붓다의 가르침인 '중도'는 오직 8정도입니다. 

 

또한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측면에서 연기, 인과질서는 '동시성, 이중성, 다양성'의 속성을 갖습니다. 씨앗은 열매를 맺어야만 씨앗으로서 원인으로 존재합니다. 씨앗이 썩어 거름이 될 수도 있고, 짐승의 간식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즉 결과와 원인이 동시에 발생합니다. 또한 결과인 열매는 씨앗을 원인이게끔 하는 원인이 되며, 씨앗은 또한 원인인 열매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과는 이중적, 중첩적 속성을 갖습니다. 또한 열매를 놓고서도, 이는 어떤 사건, 사태의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음식이 되기도 하고, 인테리어 장식품이 되기도 하며, 흉기가 되기도 하며, 쓰레기가 되기도 합니다. 무한에 열려 있는 다양성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속성들 모두가 결국 '무아'로 귀결됩니다.

 

무아를 체득하지 못한 채 세상을 관조하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5취온’입니다. 유정물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 곧 정신과 육체에 ‘자아’를 덧입혀서 ‘내 것, 나, 나의 자아’로 바라봅니다. 무너지지 않는 ‘영원불변의 나’ 혹은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자아’를 세우고서 세계를 마주합니다.

 

자아란 허깨비며 착각이며 혼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를 이루는 정신과 육체가 여러 조건들에 의존해서 형성되고 사라지는 경험적 개체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삶의 풍경은 전혀 다르게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식론적 전환인 ‘깨달음’이며, 그 깨달음이 일상에 접목되어 체화되고 심화되는 과정이 존재론적 전환입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 귀결은 이상적 인격체인 ‘아라한’입니다.

 

‘내 것, 나, 나의 자아’라는 왜곡된 인지와 지각은 ‘겉옷’이라 비유할 수 있습니다. 5취온이 바로 겉옷이며, 매트릭스이며, 가상현실입니다. 이 겉옷을 벗으면 속옷만을 걸친 몸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5온입니다. 속옷은 겉옷과 달리 ‘무아’인 존재의 성품, 속성입니다. ‘겉옷, 속옷’의 비유는 근본불교, 아비담마불교에 충실한 해피스님의 설법에서 따왔습니다. 해피스님의 인터넷사이트에는 엄청난 양의 좋은 자료들이 쌓여 있습니다. 손품을 아끼지 말고 방문하여 붓다의 소중한 가르침을 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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