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언어의 사회적 담론의 가능성에 대한 한 상념
박진영
<미국 아메리칸 대학 철학과 교수>
1. 공안선의 언어는 사회적인가?
선불교 역사를 해체적으로 읽어나간 저서 《선을 통해서 보기》(Seeing Through Zen)에서 저자 죤 메크레는 공안선의 언어를 선불교가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한 장치라고 해석했다. 메크레의 주장은 공안선의 언어를 비트켄슈타인의 언어철학의 개념을 빌려 "선집안 언어 놀이" ("Zen monastic language game")라고 해석한 데일 라이트의 견해와 통하는 면이 있다.
메크레와 라이트 모두 공안선의 언어를 수행자의 깨침에 초점을 맞추던 지금까지의 해석과 달리 공안선의 언어가 선불교 사회, 그리고 선불교가 속한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 하는 선언어의 사회적인 성격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또한 선불교의 사회적 담론으로써의 역할을 생각해보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선불교가 과연 사회적 담론으로 가능한가하는 것은 한국불교학계에서는 낯선 주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메크레나 라이트가 보고 있는 공안선 언어의 사회적 담론으로의 역할에 대한 고려는 어쩌면 선불교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공안선의 언어를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여성학적 시학(詩學)에서의 언어 철학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는 공안의 언어, 나아가 선불교를 여성학적 입장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시도이며, 또한 선언어의 사회적 담론으로써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또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2. 페미니스트 시학과 혁명의 언어
쥴리아 크리스테바는 1968년의 사회혁명 이후 프랑스 공산당에 환멸을 느낀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과 더불어 1970년대에 중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의 결과는 《중국여인에 대하여》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저서에서 크리스테바는 동양과 서양에서 여성의 위치를 철학적인 견지에서 논하고 있다. /이쪽 편에서'라고 제목이 붙은 이 책의 1부에서 크리스테바는 서구에서 여성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세요소를 지적 한다. 일신론, 자본주의 그리고 가부장제가 그것이다.
서구 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그리고 성별의 관계를 규정해온 이 세요소가 크리스테바는 동일한 원리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다. 신과 인간을 철저히 이원적으로 보는 일신주의는 남성과 여성을 철저히 다른 부류로 이해하는 이원론과 연결되고 이는 무산자와 유산자가 분리되는 경제체제인 자본주의와 맞물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신론, 자본주의 그리고 가부장제 모두 신의 권위, 아버지라는 존재의 권위, 그리고 자본가의 권위를 바탕으로 하는 위계질서의 사고와 사회질서를 형성한다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중국은 크리스테바에게 철저한 성구별과 위계질서에 근간을 두고 있는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서구에 대한 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인과론에 근거한 사고, 음양의 상보적 역할, 그리고 도가(道家)에서의 모성의 존경은 크리스테바에게는 유일신에 근거한, 자본주의적, 가부장적 서구 사회의 모습, 그리고 그 사회에서 주변에 머무는 여성의 위치와는 다른 대안으로써의 동양의 모습을 제시했던 것이다.
단지 삼주 동안의 중국 방문으로 얻은 크리스테바의 동양에 대한 이와같은 생각이 동양에 대한 신비화와 일반화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테바가 동양사상의 중심에 비이원론적 성격을 보았다는 것은 동양사상을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도 아님을 말해준다.
사실상, 크리스테바가 그처럼 중국 사상에 있어서 음양의 상호보완적인 성격에 매력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중국을 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이원론적 세계관과 그 이원론 내에서 두 원소를 위계질서로 보는 서구 세계관에 제동을 걸고, 이 둘을 상보적 관계에서 이해하려는 자신의 철학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기도하다. 양극의 상호보완적 성격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생각은 그녀의 중국여행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중국철학을 접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체계에 상응하는 철학 사상을 하나 더 찾아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가 중국을 방문하기 이전에 저술한 그녀의 대표작으로 ?시적언어의 혁명?을 들 수 있다. 《시적 언어의 혁명》은 《중국 여인에 대하여》와 같은 해인 1974년에 출판되었지만, 그녀의 학위논문을 포함한 방대한 저서다. 이 책에서 크리스테바는 언어에서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을 ‘기호적’ ("the semiotic") 과 ‘상징적’ ("the symbolic") 이라는 두 개념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크리스테바가 사용하는 ‘기호적’ 과 ‘상징적’의 두 개념은 사실상 이들 표현이 일상용어로 쓰일 때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용어 자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기호적”이라는 것은 언어화이전, 즉 발화이전, 의미형성이전의 “비언어적인 것의 총체”를 담고 있다고 우선 설명할 수 있다. 이 ‘기호적’은 아직 기호가 아니며, 기표(signifier)도 아니다. ‘기호적’은, 언어이전의 것의 총체적 모습이라고 말했듯이, 언어체계에 의한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이다. 기호적은 정적, 고착적인 것에 대비되는 운동성과 즉흥성, 일시성 등의 성격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또한 프로이드적 리비도, 생명적 에너지 등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언어이전의 총체적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크리스테바는 이 ‘기호적’을 코라, 즉 여성의 자궁으로도 비유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된다. ‘기호적’이 언어이전의 미분화의 상태의 총체성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이 ‘기호적’의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기호적을 설명하려는 시도-지금 우리가 하고 있듯이-자체가 이미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고, 따라서 언어이전의 상태라고 하는 '기호적'을 언어 체계 내에서 분절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기호적' 이라는 것은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도덕경?의 첫 귀절을 떠올리게 된다.) 크리스테바도 이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가 비록 ‘기호적’이라고 마치, 이 상태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기호적’이라는 상태, 즉 언어적 분별 이전의 총체적 상태는 우리가 가상적으로 '기호적'이라고 이름을 붙일 뿐, 그 성격을 구체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기호적’을 가상적으로 언급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기호적’을 ‘기호적’이 아닌 어떤 것과 이미 혼합하고 있다. ‘기호적’에 혼합되어 비언어적 총체인 기호적을 언어적 표현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을 크리스테바는 ‘상징적’이라고 부른다. 상징적을 가장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언어체계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상징적’은 단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언어의 능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 즉, 그 근본에서는 총체적이며 미분화되어 있었을 우리의 사고를 분절하여, 그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에 정의를 주어,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그리고 그 분별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름과 이름 사이에, 개체와 개체 사이에 여백을 주는 행위 모두를 의미한다.
즉, ‘기호적’이라는 것이 언어이전의 미분화적 총체적 어떤 상태에 대한 가정이라면, ‘상징적’은 언어화를 통해 이 총체적이었던 것을 분절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기호적’과 ‘상징적’은 이원론적 체계를 지녔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언어와 비언어, 분별성과 총체성, 정체성과 운동성, 지속성과 즉흥성, 등 ‘기호적’과 ‘상징적’은 이원론에서의 양극을 서로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테바가 ‘기호적’과 ‘상징적’을 통해 언어와 의미형성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이 둘이 이원론의 양극과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양과 같은 상보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크리스테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형성은 '기호적' (비언어적 발화이전의 내용물)이거나, 혹은 '상징적' (언어적 구조와 체계)의 어느 한 쪽만 의해서는 가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의미형성과정은 언어의 내용을 형성하는 ‘기호적’이 언어체계자체인 상징적과 서로 연관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이전 분열화 이전의 총체성인 '기호적'이 상징적과 만나는 단계를 크리스테바는 '단정적 분열' (thetic break)이라고 부른다. 이를 우리는 아래와 같은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일상담론시적 담론 과학적 담론
도표에서 원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는 '기호적'이라고 상상해보자. 삼각형으로 나온 것을 '상징적'이라는 언어체계라고 가정하자. 상징적은 언어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규칙이며, 체제이다. 나아가 상징적은 언어뿐 아니라, 사회의 관습, 제도, 법질서 등, 제도화가 인간 존재에서 모든 제도화가 필요로 하는 규칙과 구조를 의미한다. ‘기호적’을 의미형성 과정의 전제로 제시함으로써, 크리스테바는 언어를 통해 형성된 의미는 이미 억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억압은 내적 균열을 형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우리는 물과 물을 담는 용기의 모습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내적 존재는 형태가 없는 물과 같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자체로써는 무정형이다. 이 무정형이 사회의 공유물인 언어적 표현을 통해 나타날 때, ‘기호적’이라고 크리스테바가 부른 무정형의 존재의 내면은 ‘상징적’이 제시하는 규칙에 순응하게 된다.
그렇다면 ‘상징적’이라는 규칙성이 없다면, ‘기호적’은 완전히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기호적이라는 내면에 완전히 충실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표시는 언어의 규칙, 그리고 나아가 사회, 관습적 체제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이라는 무정형의 내용물은 그것을 담을 그릇을 필요로 하듯이, 기호적은 상징적에 의해서만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담론에서 기호적이 상징적에 순응한 답론이다. 이에 비해 시적 언어는 이러한 일상담론의 규칙이 역반응으로 작용함으로써, 기호적의 무정형성이 상징적의 규칙을 위반하는 그리하여 기존의 질서체제에 흔들림을 일으키는 담론이다. 이 흔들림은 고착화될 수도 있는 기존 질서에 제동을 건다.
크리스테바는 시적언어에서 의미형성 과정을 위와 같이 설명하면서 이를 사회에서의 흔들림, 즉 혁명과 연결시킨다. 언어체제가 형성하는 의식의 고착화처럼, 사회체제의 제도, 관습 역시, 그 제도 관습의 형성을 위헤 억압되었던 목소리들이 나타나면 흔들림을 느끼게 된다.
시적 언어에서 시인의 역할을 사회 체제에서는 억압받는 소수의 목소리가 대변한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 혹은 이주노동자의 목소리, 또는 기존관습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 이들은 모두 사회라는 상징적 구조의 고정 질서에 제동을 거는 ‘기호적’ 으로 대표되는 삶의 역동성의 모습인 것이다. ‘기호적’과 ‘상징적’ 사이의 긴장관계는 삶과 사회의 고착화를 견제한다. 고착화는 정체성, 그리고 정체성은 죽음을 의미한다.
기호적, 삶의 역동성, 이 전적으로 사회의 구조와 규칙에서 메몰되지 않고, 그 사회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혁명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또한 개인의 정체성을 고착화시켜 자신과의 괴리를 낳는 거짓된 존재에 대한 실존적 존재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호적과 상징적이라는 도구를 통해, 시적 언어의 언어체제 내에서의 혁명적 성격을 설명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를 지배질서의 정체성과 주변자의 목소리가 지배구조에 내에서의 역할을 통해, 시적언어의 혁명의 사회성을 밝혀낸다.
3. 공안선과 이질성의 언어
크리스테바의 언어철학은 선불교의 언어와는 상관없이 형성된 사상이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선불교의 언어, 특히 공안선의 언어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선불교 언어는 일상생활의 언어와는 다른 이질성의 언어로 알려져 있다. 흔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화두다”라고 하는 우리말의 표현처럼, 공안은 그 자체가 일상의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공안이 우리에게 주는 풀리지 않음은 수학이나 과학적 이론이 풀리지 않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풀리지 않음, 혹은 이해할 수 없음이다. 화두, 공안의 이해할 수 없음은, 사실 이해할 수 없음이라기보다는 괴이함이다. 이 괴이함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를 생각해 보기 위해 ?벽암록?에 나오는 다음의 두 공안을 인용하는 것으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해 보자.
《벽암록》의 9칙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담고 있다.
한 중이 물었다. "조주는 무엇/누구인가?" (擧丞如何是趙州)
조주 답하기를 "동쪽문, 서쪽문, 남쪽문, 북쪽문" (州云 東門西門南門北門)
또한 《벽암록》의 17칙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담고 있다.
한 중이 향림(香林)에게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擧 僧問)
향림은 답하기를, ?오래앉아 있으니, 발도 저리고 허리도 아플 뿐이다.? (林云 坐久成勞)
대부분의 공안의 대화가 그러하듯이, 여기에 예로 사용한 두 공안 역시 질문과 답 사이의 괴리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조주가 누구냐는 질문에 동서남북문이라고 답한 조주나, 달마대사가 왜 중국으로 와서 선종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달마대사가 한 일이란 매일 앉아서 좌선 한 것 뿐이니 발도 저리고 허리만 아플 뿐이라고 말한 향림의 답은 질문에 대한 기대치의 대답을 부여하는데 실패(?)한 답이다. 그러나 실패라는 의미가 여기서 틀린 답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대치의 답을 제공하기를 실패한 공안의 답과, 틀린 답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공안의 질문과 답 사이의 괴리가 가지고 오는 효과를 공안은 설명되어서는 안 되는 것, 공안의 설명은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것, 알음알이를 일으킴이 없이 괴리를 뛰어넘는 것이 깨침의 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공안선이 알음알이라고 하는 것이 꼭 공안의 설명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위에 앞에 인용한 두 공안에 대한 《벽암록》의 기록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조주의 정체성에 대해서 묻는 위의 9칙은 첫 번째 단계에서는 조주의 재치있는 언어 장난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관음원의 선승 조주가 누구냐는 질문에, 조주성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다는 대답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질문을 던진 승은 누가 조주성에 대해서 물었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이 질문자가 기대했던 답은 선승으로써의 조주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인간 조주에 대한 질문을 장소 조주에 대한 것으로 답함으로써 조주는 인간 조주의 정체성을 결정지으려는 질문자를 곤궁으로 몰아넣는다.
주석을 시작하며 원오는 참선을 하여 도를 닦아 자신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말의 어귀를 분별하는 것(揀擇)을 결단코 피해야한다고 말한다. 원오는 덧붙이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간택하는 것을 피하면 된다” (至道無難, 有嫌揀擇)고 조주의 말을 인용한다. 간택을 피한다는 것은 언설을 통한 알음알이의 발전을 피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원오는 요즘의 선을 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통한 가르침이란 하근기의 수행인을 위한 방편으로 고안된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언어에 매달린다고 한탄한다.
그는 선종의 종지는 "언어를 끊어버리고, 형식 밖에 있는 진리를 보면되는 것이다‘ (須是斬斷言語 格外見諦)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말어귀의 간택을 피해야한다는 충고, 그리고 언어를 차단하고 형식 밖에 있는 진리를 보아야한다는 원오의 주장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자. 이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다.
1. 언어자체가 간택이라면, 이 언어의 간택의 성격을 극복하는 길은 없는가?
2. 언어를 차단하고 진리를 본다면, 이 진리의 성격은 무엇일까? 이 진리는 언어 밖에 있는가 언어 안에 있는가?
언어를 넘어서는 일정의 영역을 진리의 영역이라고 상정하고, 그 철저히 순수한 영역에의 도달이 수행의 마지막 목적지라고 상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깨끗하고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이론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언어를 끊으라고 말한 원오도 선수행자들이 조사가 말하는 것은 본래 아무 일도 없다 (本來無事)는 뜻이니, 밥 나오면 밥먹고 차가 나오면 차 마시라고, 마치 태평성대를 노래하듯 선수행을 오해한다고 한탄한다.
즉, 선이 언어의 분별을 끊고, 알음알이와 알음알이가 일으킨 감정, 의식, 계교를 끊으라고 말할 때, 이는 모두 것을 잊어버리는 무(無)의 상태, 비언어(非言語)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오는 말한다: 만일, 알음알이에 의한 판단을 극복하고 나면, 꿰뚫어 보는 것이 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예전처럼 여전히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원오가 말한대로, 하늘은 여전히 이전의 하늘이고 땅은 여전히 이전의 땅이다. 이 하늘, 땅, 산, 물을 지칭하는 우리의 언어도 여전히 예전의 언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간택을 철저히 피하고, 언어를 끊으라는 충고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육조대사 혜능의 ?육조단경?에서의 한 에피소드를 인용해 보자.
혜능의 제자 중 법달(法達)은 《법화경》을 칠년이나 공부하였지만, 그 경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칠년은 긴 시간이다. 법달은 칠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도 자신이 이 경전을 이해할 수 없다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혜능을 찾아가 이 경전에 대한 자신의 의심을 해결해 주기를 요청한다. 이런 법달에게 혜능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내린다.
마음으로 닦으면, 《법화경》을 돌릴 것이요, 닦음이 없으면, 《법화경》에 의하여 돌림을 당할 것이다. 너의 마음이 옳으면, 네가 《법화경》을 돌릴 것이고, 네 마음이 옳지 않으면《법화경》에 의해 돌림을 당할 것이다. 부처의 지혜에 근거한 견해를 내면 《법화경》을 돌릴 것이ㅛ, 중생의 마음에 근거한 견해를 내면《법화경》에 돌림을 당할 것이다.
칠년간의 《법화경》 공부를 《법화경》에 의해 돌림을 당한 것이라고 충고해 주는 혜능의 말은 선불교에서의 언어의 위치, 그리고 그 기능을 생각하는 우리의 논의의의 맥락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화경》이라는 언어화된 부처의 가르침을 수행의 장벽으로 만들던가, 아니면 가속제로 만드는 것은《법화경》 자체, 즉 언어 자체라기보다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자라 것이다. 수행자가 언어에 의해 “돌림”을 당하는 것, 즉 알음알이에 체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선불교는 언어를 끊어야 한다, 분별을 제거해야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에의 경계는 언어자체를 부정하는, 그리고 나아가 언어가 제거된 비언어적 순수한 어떤 영역을 상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언어의 제거가 불가능 하듯, 선불교의 사회에서도 언어의 제거는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선불교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 양식에 미치고 있는 다양한 영향력에 민감하다. 언어는 수행의 장애가 된다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수행을 위한 시동 장치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선불교사(禪佛敎史)다. 공안은 바로 이러한 장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혜능이 말한, 법화경에 의해 돌림을 당하는 상황에서 법화경을 돌리는 상황으로의 전환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논의한 기호적과 상징적의 긴장관계를 통해 시적 언어의 혁명, 나아가 사회에서 기존질서와 반세력사이의 긴장을 설명한 크리스테바의 언어철학이 공안선의 언어와 연결되는 점을 보게된다. 조주사문(趙州四門)의 공안에서 질문자가 조주화상에게 동서남북의 문이 있다는 것을 연결시킬 수 없었던 것은 무엇에 의한 것인가. 이는 ‘선사’와 ‘문’이라는 언어체제에 대한 질문자의 고정관념에 의한다.
문자그대로 보면, 사람의 신체와 문이 연결되어질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언어 규칙과 고착화된 사고양식의 닫힘을 한 발짝 넘어서 보면, ‘선사’라는 단어/개념과 문이라는 단어/개념의 관계를 전혀 설정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누가 조주성에 대해서 물었느냐고 하는 질문자에게, 조주는 ?그럼 무슨 조주를 말하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인간 조주와 장소 조주라는 두 영역의 경계는 어느만큼 견고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언어를 끊고, 틀 밖에서 진리를 보아야한다는 원오의 충고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보면 공안의 언어는 변혁의 언어다. 기존의 언어체제가 형성해 놓은 의미 영역의 경계선을 혼동시켜 질서의 고착화를 넘어서서 새로운 의미세계를 창조하는 시의 언어처럼, 공안의 언어 역시, 기존 사고 양식이 규정해놓은 의미의 범주의 고착화에 넘어선다.
따라서, 조주사문 고칙에 대한 서설인 수시(垂示)에서 원오는 말한다. ?장벽을 뚫어 보는 눈, 그리고 몸을 변화시키는 수단은 어떠한 것 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나는 다음의 고칙을 인용한다?고.장벽을 뚫고, 몸을 변화시키게 하는 공안의 언어는 그렇다면 주관적 관념론의 언어인가, 사회적 공공담론으로써 가능성을 안고 있는가? 다시말해, 공안의 언어는 개인의 깨침만을 위한 것인가, 사회변혁의 씨앗을 담고 있는가? 크리스테바는 '기호적‘과 ’상징적‘사이의 긴장을 최대화하는 시적 담론의 혁명성을 그대로 사회 담론의 가능성과 연결시켰다. 상징적의 한 대표적 체제인 가부장적 질서체제는 사회를 구성하는 전체적 생명력인 ’기호적‘에서 특정 요소만을 부각시키고, 그에 근거한 가치체제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억압된 요소들, 즉 여성의 삶은, 가부장적 질서의 고착화에 제동을 거는 내적 균열로 등장하게된다. 그러나 기호적이 상징적 내에서 혁명의 모습으로 나타나 상징적의 고착성에 맞서기 위해서 기호적은 상징적에 전적으로 순응하는데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적 담론에서 시적담론의 혁명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공안선의 언어가 시적 담론의 혁명을 꿈꾼다면, 그리하여, 공안을 수행하는 주체자가 ?장벽을 뚫어 보는 눈, 그리고 몸을 변화시키는 수단?을 삶에서 구체화 하기를 원한다면, 공안의 언어는 필시 사회적 담론의 일부가 도리 수 밖에 없다. 인간 조주와 장소 조주 라는 개념의 고착화를 거부하는 담론이 남성과 여성의 개념을 고착화를 용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언어의 혁명과 공안 언어의 사회담론으로써의 의미
《민중불교철학》에서 저자 여익구는 대승불교, 특히 화엄, 선, 천태 사상이 불교를 관념화했다고 비난한 바 있다. 화엄, 선, 천태의 사상은 이전 불교의 사회적이고 계율 중심적인 사고를 개인의 마음만을 중시하고, 개인의 깨침에 모든 초점을 맞춤으로써 불교가 사회와의 관계성을 잃고, 나아가 기존의 기득권을 변화시키는 사회개혁의 힘으로 작용하기를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은 또한 권위에 저항하는 불교이기도 하다.
고착화된 사고 양식에 제동을 거는 공안선의 언어는 고착화를 단지 언어적 영역이나, 개인의 사고 양식의 영역에만 국한하는 관념론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정 관념에 대항하는 공안선의 언어는 기존질서의 맹목적 권위에 대항하는 모습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죽이라는 선불교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은 급진적이기까지 하다. 화엄, 선, 천태사상을 비판한 여익구도 위의 책에서 만일 선불교가 주관적 관념론의 유아론적 형태를 벗어난다면, 선불교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사회변혁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민중불교철학의 이와같은 선의 언어에 대한 판단은 민중불교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깊이 새겨볼 만한 주장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크리스테바의 시적언어의 혁명이라는 주제를 통해 살펴본 언어철학과, 사고 양식의 변혁, 그리고 그의 사회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이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민중불교의 실천적입장을 밝히는 법성(法性)의 다음의 말은 우리의 논의를 더 분명히 해준다.
"화두는 거짓과 헛것을 부정함으로써 사물의 연기적 본질을 드러내는 밝힘의 언어 (能詮闊口)이자, 그러한 인식운동을 통해 밝혀지는 존재의 실상이다 (所詮實相). 곧 화두참구는 허위와 환상을 반대하는 사유운동이자 상황의 모순구조 속에서 인간의 자주성을 실현해 가는 창조적 역사운동이다. 그러므로 화두타파는 많은 관념주의적 선사들이 주장하듯 완전하고 성스러운 자아로 되어버리는 공부가 아니라, (중략) 아무것도 신비적으로 알아야할 것이 없는 곳에서 (無知無知늘 새롭게 사물을 구체화시켜내는 (無知而知) 알아감의 공부이다." 즉, "화두는 문제되는 상황에 대한 인간 자신의 실천적 물음" 이어야 하는 것이다.
공안선의 언어의 혁명성을 강조하여, 공안선을 사회혁명의 근간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공안의 언어를 무조건 알음알이에 대한 거부이며, 논리화의 부정이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을 다루고 있다고 신비화하여, 선불교의 혁명적 성격을 무력화 하는 것 역시 선불교에 대한 적절한 평가일 수는 없다. 법성은 《간화결의론과해》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교(敎)는 스스로 교이지 못하고 세계의 실상(體)과 인간의 창조적 실천(宗)이 언어화된 것이라 볼 때 교상(敎相)을 지양할 수 있고, 선(禪)은 스스로 선이지 않고 세계의 실상을 삶 속에 실현하는 인간 자신의 실천(宗)이라 정의할 때 선상(禪相)을 벗어날 수 있다.”.
또한 나아가, “모든 교설의 귀착처가 선(禪)이지만 선에 머물러야 할 선의 모습 (禪相)이 있다면 선은 다시 교(敎)라는 언어적 실천으로 발현되어 대중교화의 나룻배가 될 수 없을 것이고, 바라밀행이라는 사회적 실천으로 발현되어 모두를 해탈의 땅에 이끌어 들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메크레가 공안의 등장을 선불교가 자체의 사회성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라고 말한 것 역시 이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공안이란, 또한 선사와의 문답의 실제적 일어남이라는 행위적 성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안 자체가 문자화 되어 공안집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포함한다. 즉, 선불교를 단지 선사와 제자의 일대일적 법의 전수라는 맥락에서 당나라(618-907)를 선불교의 황금기로 보았던 견해와 달리, 최근 연구는 선불교의 쇠퇴기라고 보아온 송나라(960-1279)시대의 중국 불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왔다.
또한, 조당집(祖堂集. 952)을 비롯한 공안서적의 출판을 선불교 정신의 타락으로 보았던 견해와 달리,공안서적의 출판자체가 공안선의 형성의 주요 주제로 떠오르고 것 역시, 이글에서 논의한 선불교의 사회적 담론으로의 가능성과 관련이 있다. 즉 크리스테바가 말한 시적 언어의 혁명은 시적 언어가 이미 존재하는 언어 질서에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기존의 언어질서 없이 순수한 시적 언어만의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런 상황의 상상이 가
능하다면, 여기서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
공안선의 언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공안선 언어의 괴이함은 기존 언어체제와 만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만남이 없는 공안선의 언어란 맨너리즘과 신비주의 이외에는 어떠한 효과도 그리고 혁명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공안의 언어는 사회적 언어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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