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로 불교를 읽고 불교로 해체를 읽다
집중 인터뷰 | 동서를 회통하는 철학자, 김형효
대담자
조성택(본지 편집주간·고려대 교수)
한형조(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이도흠(본지 편집위원·한양대 교수)
김형효 선생은 196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벨기에 루벵(Louvain)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에서 공부하였으며, 같은 연구원에서 1968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9년 공군사관학교를 시작으로 서강대학교, 정신문화연구원,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등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구조주의》 《데리다의 해체철학》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원효의 대승철학》 등이 있다.
■ 편집자주 : 김형효 선생은 자기 철학을 하는 몇 안 되는 국내 철학자 가운데 한 분이다. 왕성한 연구 활동과 동서고금의 철학세계를 넘나드는 지적 편력은 선생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이 2006년 8월의 퇴임 강연 주제였다는 사실은 선생이 이제 불교를 통해 자신의 학문을 정리, 통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본지는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선생이 불교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불교의 새로운 해석 또는 지평의 확대 가능성은 어떤 것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구성의 철학에서 해체의 사유로
조성택 :
선생님을 뵈면 항상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서양철학부터 시작해서 동서의 사유 패턴을 모두 정리해 오셨는데 그러한 선생님의 학문적인 과정이랄까 수행의 계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형효:
저에게는 불교가 늦게 찾아왔습니다.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 정도……. 예전에 박종홍·이기영 교수님 등에게 불교를 배웠습니다만 이해도 잘 안 되고 의문도 풀리지 않고, 잘 여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편력이 많았습니다. 박학다식이 목적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든 공부해 보면 한계가 보이고, 한계가 보이면 그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처음에 실존주의·현상학에서 시작해서 프랑스 가톨릭 철학자인 마르셀에게까지 갔다가 현상학에 들어갔는데, 현상학을 공부해보니까 세상에는 의식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현상학은 인간의 운명의 문제를 다룰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의 자유라는 것도 자기의식의 자유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의식을 제약하는 구조적인 요인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조주의로 가게 되었습니다.
구조주의는 인간과 모든 역사와 문화의 하부구조를 말하니까 일종의 무의식학이거든요. 의식학에서 무의식학으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겠죠. 무의식학을 공부하니까 인류학을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인류의 무의식을 설명해주기 때문이죠. 그 다음에는 라캉 계통의 인간 정신의 무의식을 알아야 하고, 또한 언어가 인간 사고를 제약하는 기본적 요소이기 때문에 인류학, 정신분석학, 언어학 이 세 분야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해보니까 지하 세계에 들어간 기분이랄까, 현상학에서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느꼈고 하여튼 오묘하고 어려우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조성택 :
그 지하실에서 새롭게 느끼신 것은 무엇인지요?
김형효 :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구조주의는 뼈만 얘기하지 피가 흐르는 생명에 대해서는 배제한다는 걸 깨달았죠. 다른 한편으로 박종홍 선생님의 영향인데, 한국 사람은 한국철학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 또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유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맹자》를 국문으로 읽었는데 서양철학자로서 보니까 너무 심심하고 기대보다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후에 한문을 공부하면서 《논어》 《맹자》를 보니까 차츰차츰 그 맛을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이 동양철학의 맛이구나 싶어서 공맹(孔孟)에 몰두하다가 성선설(性善說) 말고 악(惡)을 설명하는 순자도 알아야겠다 싶어 순자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맹자 와 순자를 비교하는 책을 쓰기도 하고, 그러다가 박종홍 선생님의 유훈을 따라 한국철학으로 오면서 퇴계, 율곡도 공부하고 다산도 조금 공부했습니다. 한형조 선생님, 다산으로 박사논문 쓰시면서 공부할 때 제가 많이 물어봤죠?
한형조 :
네, 그때 다산을 매개로 선생님과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눈 것이 생각납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선 곧 불교로 가셨잖아요?
김형효 :
선생님과 다산에 대해 귀찮을 정도로 묻고 토론을 하다가 불교 쪽으로 오면서 원효에 대해 의심나는 것들을 연구했죠 . 구조주의가 너무 구조만 따지다보니까 그것에 반발하다가 데리다를 알게 되었어요.
20대 후반 유학시절인데, 당시에는 데리다에 대해 교수들은 언급도 하지 않았어요. 그 무렵 데리다의 《목소리와 현상》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당시 책 표지에다 “데리다는 미쳤다.”라고 썼어요.
그런데 구조주의를 알고 나서 보니까 데리다에서 불교 냄새가 엄청나게 나는 거예요.
데리다의 이론으로 원효를 봐야만 원효가 읽혀지겠다고 생각했어요. 원효가 “불연지대연(不然之大然)이고 무리지지리(無理之至理)” 라고 하는데 ‘무리(無理)’와 ‘지리(至理)’가 왜 같이 붙어 있는지 ‘불연(不然)’과 ‘대연(大然)’이 왜 같이 붙어 있는지 그 사이에 갈지(之)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게 말이 안 된단 말이지. 그렇게 말이 안 되는데 그걸 대승의 오묘한 진리니까 그렇게 이해하라고 하면 한숨밖에 안 나오는 거죠.
또 학생 때 노자 《도덕경》을 배웠는데 노자 1장과 2장은 완전히 결이 안 맞습니다. 노자 1장은 무(無)의 형이상학이라고 배웠는데, 2장을 보면 완전히 유무(有無)가 상생(相生)하고 장단(長短)이 상생하는 내용이 나오니까 결이 맞지 않는단 말이죠. 이것에 대한 의문이 있었는데 선생님들께 질문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의문이 다시 떠오르더란 말이죠. 그때 “아! 이렇게 읽으면 되겠다. 맞아! 이게 이 소리야.”라는 깨달음이 왔죠.
그래서 제가 원효(元曉)와 노자(老子)를 꺼내서 보니까 너무도 놀라운 것이 《금강삼매경론》 서문이 확 풀리는 것 같고 노자 《도덕경》 81장도 확 풀리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시경(詩經)》의 한 문구처럼 “부지수지무지 족지도지야(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也: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춤을 추고 발을 들어 동동거린다.)”의 경지에 올라 너무너무 좋아서 옆에 누구라도 있으면 “내가 알았어.” 하고 뛸 정도로 환희심이 차오르더라고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학생들이 안 믿어요. 전혀 과거의 노자 해석과는 다르니까. 학생들이 권위에 눌려가지고 얼굴만 쳐다보며 의아하게 생각하더군요. 그래서 “이 사람들아, 자네들이 지금은 내 말을 안 믿지만 100년이 지나가면 믿게 될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장성국 교수가 지금은 세명대 교수인데, “선생님, 하와이 대학에서 나온 〈Journal of Chinese Philosophy〉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노자와 데리다를 비교한 논문이 7편이 나와 있습니다.”라고 했어요. 이때 제가 얼마나 좋았던지, 응원군이 나타난 거죠. 그래서 그 논문을 보니까 제가 한 이야기와 논지가 통하길래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읽히고서 강의와 비교해 보라고 했죠. 그래서 불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노장과 불교, 그리고 동시에 하이데거에 들어가게 되었죠. 이전에는 하이데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알았지만 와 닿지 않아서 자기화가 안 되는 거죠. 데리다가 제게 눈을 뜨게 해준 거죠. 데리다를 통해서 하이데거와 노장과 불교를 모두 이해하게 된 거죠.
이도흠 :
그렇게 데리다를 통해 불교를 읽고 나서 본 진리와 선생님의 세계는 전과 분명히 다를 터인데 무엇이 특히 다른 점이었나요?
김형효 :
철학이란 동서고금에 너무 많고 철학사를 보면 너무 복잡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회의가 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철학은 대단히 간단해서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구성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해체철학입니다.
구성주의는 자연의 인간동형론이죠. 다시 말해, 인간을 설명할 때 자연과 비교하여, 즉 인간만 얘기하면 동어반복에 그치니까 변증법적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여서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모든 이성주의 철학과 동양의 주자학을 들 수 있습니다. 구성주의 철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형이하학적인 구성주의로 세상을 어떻게 편리하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그런 의미의 형이하적인 구성주의가 있고, 형이상적인 이성주의가 있는데 도덕형이상학적으로 정의의 입장에서 세상을 재편하겠다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명사에서 보면, 편리의 진리는 자본주의와 직결되고 정의의 진리는 사회주의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지만 철학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둘 다 이성에 의해서 세상을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에 있어서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해체주의는 바로 이러한 구성주의의 철학적 한계에서부터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해체주의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해체주의적 전통이 있었는데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과거 독일의 심미주의 시인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대표적이고, 동양은 노장사상과 불교가 해체주의를 대변해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해체주의는 인간이 진리를 구성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보편적인 자아든 이기적인 자아든 간에 인간의 자아에 의해 생각된 진리로 세상을 구성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세상은 이미 여여(如如)하게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무명(無明)에 의해서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괴롭습니다. 세상엔 여여한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세상에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도덕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제가 볼 때, 해체주의가 중요한 것은 서양 구성주의는 전부 택일의 구조를 갖기 때문입니다. 정의/불의, 선/악, 미/추 등 택일의 문제로 만드는데, 세상은 그런 택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반드시 그 그림자(shadow)로서 비진리를 갖게 마련이고, 모든 선은 자기 이면에 불선의 요인을 다 갖고 있고, 미는 추의 면을 갖고 있습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나누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분별심입니다. 지킬과 하이드는 같은 사람이고 선과 악은 같은 것의 양면성인데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로 나누어서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를 박살내겠다는 생각으로는 절대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와 해체를 공부했습니다.
조성택 :
선생님의 지적 편력이자 사상세계를 요약해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선 노장과 불교, 포스트모던의 해체철학을 하나의 사유로 보고 계십니다. 그것을 묶는 것을 지금 말씀해주셨고. 그럼 그것이 시대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어떤 차이점을 갖는지요?
김형효 :
인(因)과 연(緣)의 문제입니다. 노장과 불교를 같은 해체로 보더라도 인과 연이 다르면 다른 해체적인 사유가 나오게 됩니다. 불교는 인도 베다를 변환시킨 것인데 중국에서는 그런 전통이 없지 않습니까?
베다철학은 오랜 수행의 전통이 있는데 노장에는 그런 수행이 없지 않습니까? 이론적으로는 선/불선이 종이 한 장처럼 붙어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불성이나 신성, 본성을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노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연에 따라서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보더라도 독일의 신비주의적인 면과 수학적이고 명징한 차이도 연(緣)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성택 :
연(緣)에 따른 차이라는 것은 좋은 비유 같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부처가 되고 못 되고의 차이는 연(緣)에 있다고 했거든요.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고, 버터가 되고, 치즈가 되는 것도 그 인(因)은 같은데 연(緣)의 차이에 따라 기본적인 변화를 설명하고 있거든요. 참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이도흠 :
데리다를 말씀하시면서 선생님께서 이분법과 분별심을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도 데리다를 읽다가 세상을 이데아와 그림자, 진리와 허위, 이성과 감성, 말과 글 등 양자로 나누고, 이 가운데 전자에 우월권을 준 폭력적 서열제도가 모더니티(modernity) 위기의 핵심이라는 지적을 접하고 바로 이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인간과 자연으로 나누고 전자에 우월권을 주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시한 거죠. 이 패러다임에선 홍수를 막는 방법은 인간이 자연에 맞서 댐을 쌓는 것입니다.
그 댐이 당장의 홍수는 막았지만, 그 물이 썩어 그 물에 사는 생명체를 죽이죠. 비유하면 바로 이것이 근대성의 모순이라는 것이죠.
저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선 여러 차례 비판하는 글을 써왔지만, 근대성의 모순과 위기에 대한 대안의 사유로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불교를 대안의 사유로 지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도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일 듯합니다. 즉 어느 하나만이 대안이 아니라 불교에 모자라는 점을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완해주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이거죠. 이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죠.
김형효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제가 잘 안 씁니다. 왜냐하면 그게 요즘 너무 유행이 돼서 격이 떨어져서, 뭐랄까 장삿속 비슷하게 돼서 좋아하지 않고, 또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턱없는 것을 가지고 나와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니까요. 고전음악도 광고음악으로 자주 쓰면 격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되어서 그 말은 제가 좋아하진 않는데요, 제가 볼 때 모더니즘은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합니다.
특히 모더니즘에서 중요한 것은 편리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대화를 녹음하는 것도 다 편리인데, 이것은 다 과학기술의 소산이 아닌가. 과학기술의 소산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경시는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저는 자본주의론자는 아닙니다만, 자본주의가 준 문명의 해택을 부정하면 위선에 빠집니다. 자본주의가 갖는 물신숭배와 배금주의적 요소는 배격해야 하지만 과학기술의 혜택은 경시할 수 없습니다.
제 대답이 이도흠 교수님의 질문에 꼭 맞는 것은 아닙니다만, 문명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도덕주의가 세 번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맑스 엥겔스이고, 둘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이고, 셋째는 보드리야르입니다. 세 번 모두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이상을 밖에 투사하여 그것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다는 거죠.
맑스가 먼저였고,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도구적 이성이 아니라 해방적 이성주의로 가자고 했죠. 해방적인 이성주의는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를 계속 개발해서 해방으로 가려는 시도인데, 저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성은 택일의 논리인데, 택일의 논리로는 절대 인간을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하버마스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지금도 인기가 있고 많은 분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인간이 이성적인가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낍니다. 그나마 이성적이랄 수 있는 교수들도 세미나 할 때 보니까, 자기와 대립되는 의견이 나오면 그걸 꼭 코믹하게 제압하든지 아니면 속으로 앙심을 품고 다음에 보자는 식으로 나온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버마스가 말한 이성적인 의사소통에 의한 인간의 해방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절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원초적인 호오(好惡)의 감정이 있기 때문에 이 호오의 감정을 무시하고서는 이성이란 것이 빛 좋은 개살구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하버마스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 논리도 제가 볼 때 상당히 이성주의적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도덕주의적인 이성을 갖고서는 절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모더니즘의 장점은 인류에게 가난을 해결해준 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도 배설물이 있는데, 그것이 배금주의이고 황금만능주의이고 물신숭배주의이므로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볼 때 그 극복의 대안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사회주의나 이성주의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물신숭배를 극복하지 않습니다. 이성에 의해서는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호오를 지우는 불교 본연의 수행방식에 의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되,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려서 인간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불교이지 않을까. 모더니즘의 장점은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에 있다고 보는데, 자본주의의 경제 체제를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지나친 물신화를 이길 수 있는 길이 불교의 해체주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유의 사유에서 존재와 연기의 사유로
한형조 :
응용 부분 쪽에 다시 논의가 나올 것 같군요. 그 전에 그러한 사유의 기반을 조금 더 짚어봤으면 싶고요. 조성택 선생님이 노장 불교와 포스트모던의 차이, 인연에 대해서 물었는데 저는 공통부분에 대한 논의가 더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공통 기반 중에 하나는 이름, 실체적 사고에 대한 반성이랄지 이름의 상대성에 대한 문제, 이성주의적 사고에서는 이것을 절대화하고 있거든요 . 그런데 노장과 불교에서는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사물의 모습에 대해 절대화하지 말라는 기본틀이 있고, 이것이 포스트모던의 근대성의 ‘노모스’에 대한 지평하고도 맞물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을 선생님께서는 차연(差延)의 논리로 대입하셨는데 그 부분을 좀더 설명해 주십시오. 두 번째는 세상이 그대로 존재하는데 인간의 부당한 개입이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하는, 존재하는 것의 절대성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형효 :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많은 분들이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저는 그것이 와닿게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의 그 말은 세상을 명사적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존재자는 명사입니다. 이 찻잔, 볼펜, 종이처럼 명사적으로 보는데, 세상을 전부 쪼개서 명사적으로 보는 거죠. 존재를 이렇게 명사적으로 생각하니까 존재는 존재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실체론적인 사고방식으로 가게 되죠. 찻잔이란 것, 물이란 것, 볼펜이란 것과 같이. 그렇게 보면, 결국은 명사에 대한 개념적인 파악이 중요하게 되어서 모든 사유가 소유론적인 사유로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독일말로 ‘ begriff ’가 개념인데, ‘ begreifen ’하면 ‘ 잡다 ’ 아닙니까? 영어의‘ seize ’, ‘ grasp ’가 잡는 것, 파악하는 것인 것처럼. 그래서 이성이 무(無)에서부터 신(神)까지 어떻게 개념으로 잡아 나아가는가가 헤겔의 개념철학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이성이 다 파악해 내고 손아귀에 넣는 것이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서양철학은 개념철학, 명사철학이 되어서 세상을 전부 명사화하려고 했습니다. 서양어를 보면 명사가 상당히 발달해 있습니다. 이 의자의 팔걸이 부분에 대해서도 모두 명칭이 있는데, 보이는 모든 것을 명사화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거죠.
이렇게 서양 사람들은 명사적인 사고를 해 왔는데, 하이데거는 이것을 소유론적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개념적 사유를 알음알이라고 해서 거부하는데, 저는 이것이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는 쉽게 말하면 비소유거든요. 소유론적으로 세상을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는데 세상을 산, 흙, 낙엽 이렇게 쪼개 버리면 이게 존재자가 되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것, 동사로 보게 되면, 세상에는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없거든요. 조그만 것이 움직여도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거죠. 이것이 불교의 연기설과 관계됩니다. 존재가 일체 존재와 관계되기 때문에 쪼개서 보면 존재자가 되어 버리지만, 전부 하나로 얽혀 있다고 보면 전체를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존재를 설명할 때 데리다의 말소리 중심주의에서처럼, 제가 거짓말하면서 참말을 동시에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거짓말을 하면서 동시에 참말을 합니다. 내가 100% 참말만 하는 사람도 아니고 100% 거짓말만 하는 사람도 아닌 것처럼, 동시에 착종(錯種)으로 보자 이거죠. 이렇게 착종으로 보는 것이 차연(差延)적인 사고방식을 낳았습니다. 모든 것은 연(緣)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그 관계를 빼고서 명사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제가 볼 때 차연이란 말도 데리다가 먼저 쓴 것이 아니고 하이데거가 먼저 썼습니다.
하이데거가 20세기 해체주의의 시작인데 오히려 서양학자들도 하이데거를 제대로 이해를 못한 것 같아요. 제가 서양에서 하이데거 강의를 들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이유가 서양의 일류 철학자들도, 제가 잘난 척 하려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니까 설명이 안 된다 이거죠. 하이데거가 왜 인간의 실존을 짐이라고 보았는가? 짐은 업(業)이란 말이죠. 그런데 왜 짐이라고 보았는가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해줘요. 저도 잘 이해를 못했고. 그런 의문들이 있어서 제가 하이데거를 배우고 읽었지만 논문을 쓸 수가 없었죠. 제가 이해 못하는 걸 어떻게 논문을 쓰겠어요.
명사적인 사고방식을 떠나서 동사적으로 세상을 봐야 하는데, 동사적인 사고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타동사이고, 다른 하나는 자동사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타동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주체가 돼서 신이 세상을 창조하여 외부적으로 제조했다는 사고방식이니 타동사라는 거죠.
내가 무엇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불교는 주체도 없고 목적도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동사인데 바다에서 거품이 스스로 일어나고 태양에서 빛이 스스로 나오듯이 우주는 무(無)에서부터 에너지가 자발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무라는 것은 무한대의, 무진장의 에너지 보고를 말하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일어나기 때문에 자동사적인 세계관이고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이거죠.
그러니까 재귀동사죠. 불교는 자동사인 동시에 재귀동사인 우주관이고 기독교 신학은 타동사적인 우주관인데, 타동사적인 우주관이 하이데거가 볼 때 제조적인 사고방식이고, 이는 중세기에 이른바 신에 의해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근대를 넘어오면서 인간이 세계를 도덕적이고 기술적으로 제조한다는 사고방식과 같다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대단히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라는 거죠.
이제 불교나 노장은 창조나 제조의 사고방식, 명사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차연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죠. 한국의 문제도 차연적으로 봐야만 우리의 인식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늘 한국은 너와 나를 나누어서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싸우는데 그렇게 해서는 절대 문제가 안 풀리죠.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저것이 없이 이것이 일어나는 법이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일어났다면 자기도 연(緣)의 책임이 있는데 이것을 모른다면 절대 세상 문제가 안 풀린다고 봅니다.
이도흠 :
근본적으로 서양은 실체론적 사고를 하기에 사람에 대해 물을 때에도 “너는 누구인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동양은 관계의 사유를 하기에 사람에 대해 물을 때, “너의 아버지는 누구지?” “너는 형제 가운데 몇 째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피어 워프의 가설대로 “언어는 세계의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기에 이런 사고의 패러다임 차이가 언어에도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 아닌가요?
한형조 :
그러니까 우리 어법은 관계에 포인트를 두고 존재를 보여주고 있는데 서양은 완전히 소유형식으로 되어 버리는 거죠. 이러한 어법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서양 쪽에서 들어온 논의가 조금 생소해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아 보입니다.
대학 시절, 언어분석철학을 처음 듣고 곤혹스럽고 적응이 안 되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언어는 객관사물을 지시하고 언어의 구조를 알면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동양적인 것은 항상 욕망과 연계되어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개념이나 인식 자체가 욕망과 지위의 표현이라는 거죠. 오늘 유무(有無)를 말씀하셨는데, 한자의 ‘유(有)’자가 갑골문 어원으로는 벼를 움켜쥐고 낫으로 베는 형상입니다. 일종의 탈취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거죠.
존재한다는 게 객관적인 세계의 양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세상을 내가 자기화하고 동일화시켜 나가는 근본적인 욕망의 구조 안에서 유무의 개념이 이해됩니다. 어떻게 보면 무(無)는 춤출 무(舞)자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합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춤추는 양상 움직이는 양상을 보여주는 기호 같고, 유는 소유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김형효 :
있을 유(有)자가 낫으로 베는 형상이라는 재미있는 얘길 하셨는데, 뱅브니스트라고 프랑스의 유명한 언어학자가 있습니다. 일반언어학자인데, 그의 글을 보면 have 동사가 피동형으로 안 쓰인다는 거죠. “I have man”은 되는데 “Man is had by me”라는 말은 절대 안 쓰인다는 거죠. 이처럼 어느 나라의 언어든지 have의 의미를 갖는 동사는 수동태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한자에 ‘있을 유(有)’자가 “ 가지다”라는 뜻도 되고 “있다”는 뜻도 되듯이, 또 우리말도 “ 가지고 있다”로도 쓰이듯이, 인간의 원초적 무의식에서는 having과 being은 거의 같다는 것이죠.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문제인데, 말하자면 같이 동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제8아뢰야식에 중생의 종자와 부처의 종자가 같이 있듯이 이것이 같은 것인데, 이것이 being으로 가면 부처가 되고 having이 되면 중생이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소유론적 사고를 갖고 세상을 보면 전부 중생이고 존재론으로 보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죠. 바로 그런 점에서 보면 have와 be는 거의 이웃사촌이고, 부처와 중생처럼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저는 뱅브니스트의 그 이야기는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인류 역사에서 불성이나 존재의 세계는 밀려나 버리고 소유와 지성의 논리가 앞서 나갔던 것이 아니겠는가? 창세기의 신화를 봐도 아담과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먹으면 신처럼 선악을 알게 돼서 안 된다는 것이었죠. 선악을 안다는 것은 분별심이 생겨나는 것인데 그것을 결국 먹었거든요. 그러니까 분별심이 생긴 거죠. 그 분별심이 생기면서 동물적인 본능 대신 인간의 지능이 들어와서 이 사회를 만들었는데, 칸트가 인류 역사는 지능의 발달사와 같다고 보았던 것도 마찬가지죠 .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 동안 서양의 이성적인 요인, 도덕적인 이성이건 기술적인 이성이건 간에, 그 이성이 결국 인류 역사를 지배해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결국 소유와 존재가 같이 있지만 소유 쪽으로 방향을 틀고 올 수 밖에 없었던 거죠.
21세기에 들어서 소유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소유의 문제를 존재의 문제로 돌리느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궁극적으로 단 한 가지로 보는데, 그것은 중생이 갖는 소유의 마음씀을 어떻게 존재로 돌리느냐 하는 자리바꿈 그것밖에 없다, 내가 자리를 바꾸어야지 세상을 바꾸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이나 유교는 세상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억지로 바꾸려고 하면 절대 안 바뀝니다. 세상은 말하자면 인간 마음의 사이버 공간인데 그 헛것을 자꾸 바꾸려고 하니까,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다 보면 새로운 환(幻)을 만들어내서 자꾸 괴롭히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욕망을 너무 부정적으로 봐서 모든 욕망은 전부 소유로 봅니다만, 사실 존재도 욕망이요, 원력(願力)도 욕망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소유의 욕심으로부터 존재의 원력으로 바꾸라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은 달라진다는 거죠. 저는 그것이 인류에게 주는 아주 중요한 희망의 메시지라고 봅니다. 욕망도 존재론적 욕망이 있고 소유론적 욕망이 있는데, 욕망을 너무 무시하면 무기(無記)에 빠져서 목석(木石)처럼 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절대 목석이 아니거든요.
한형조 :
불교나 노장을 읽을 때 저도 꽤 곤혹스러웠던 것이 유무에 대한 해석입니다. 불교 책을 봐도 어떤 때는 존재의 측면에서 유무라는 근본 욕망이 있고 그게 이분법이니까 극복해라, 이렇게 나오는 것이 꽤 있고, 또 화엄이나 노자 2장을 보면 유무가 동거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한 쪽을 고집하지 않도록 보다 넓은 안목으로 가자고 하는데, 이 두 가지가 서로 얽혀 있어서 읽을 때마다 착종이 되니까 상당히 혼동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차연이라는 논리는 존재의 측면에서 유무를 얘기하는 것이겠죠?
김형효 :
제가 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유무(有無) 개념은 생멸로 대신해서 보는 경우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보면 생(生)이 있으면 반드시 멸(滅)이 있게 마련이고 멸이 없는 생이란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때문에 유와 무도 이중성에 의해서 차연의 논리가 되는 것이고, 절대 무(無) 즉 공이 되어서 생사를 모두 초탈한 그런 개념으로서, 연기법에서는 연기가 생멸 세계이니까 그런 유무가 분리 안 되는 이중성으로 있지만, 유무를 모두 벗어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초탈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극복되는 공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읽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한형조 :
선생님, 그러면 유무를 소유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보라는 것은 자기의 세속적 욕망을 개입시켜서 사물을 계획 짓고 정당화하지 말고 존재의 흐름을 그대로 수용하고 순응하라는, 그렇게 해석되는 것인가요?
김형효 :
한 교수님 말씀에서 암시를 해주셨는데, 서양은 소유의 철학이다 보니까 기독교 신학이든 현대분석철학이든, 무(無)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죠. 그들에게 무라는 것은 허무든지 무의미, 둘 중에 하나죠. 하이데거가 자꾸 무를 말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데, 무가 없는 유는 필연적으로 소유로 바뀝니다.
같은 유라도 무를 배제하고서는 필연적으로 존재자/소유로 바뀌어 버립니다. 무야말로 모든 유가, 존재자나 소유로 미끄러지지 않고 이것이 존재로 있게 해주는 중요한 약입니다. 인간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먼 훗날의 일로 보니까 자꾸 탐욕스럽게 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있음 자체를 소유로 조작하지 않고 존재로 느끼게 하는 중요한 약이 무(無)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나 불교에서 무(無)를 매우 강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형조 :
공(空)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을까요?
김형효 :
그때는 공(空)과 같은 것이죠. 무가 없는, 죽음을 배제하는 사유는 속물화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서 인문학의 철학 교육도 도덕처럼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봅니다. 한국은 너무 당위가 넘쳐나서,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당위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에요.
말은 옳지만 그렇게만 해서는 인문학이 병을 고치는 약이 안 된다 이거죠. 윤리학 교수인데 자기의 이익 앞에서 다른 사람 못지않게 탐욕스러운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제가 놀랬어요. 시급히 당위를 벗어나서 존재론적인 사유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사유가 아니라 비소유의 사유이고 전체를 하나로 보는 사유죠, 일즉일체(一卽一切)처럼. 당위는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진짜 자기의 마음을 바꾸는 교육을 해야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섭니다.
자리이타의 욕망의 길
한형조 :
우리 식의 해소랄지 치유라든지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성택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욕망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부탁드립니다.
김형효 :
저는 욕망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결국 인간의 마지막은 욕망이에요. 욕망을 배제하면 인간은 설명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이성이 아니고 욕망이라 이거죠. 인간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이, 이 우주가 욕망이라는 거죠. 그래서 욕계(欲界)입니다. 적어도 세상은 욕계이기 때문에 욕망을 배제할 수 없고, 불교가 말하는 무욕(無欲)은 having에서 being으로 바꾸듯이, 소유론적인 탐욕을 존재론적인 원력으로 돌리는 것, 욕망을 없앤다는 말은 당위를 또 얘기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당위를 자꾸 얘기해봐야 자꾸 상기만 되어서 머리만 아프고 안 되지, 안 되는 걸 억지로 얘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유론적인 탐욕을 어떻게 하면 존재론적인 원력으로 치환시키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이 매우 중요한데, 세상은 살려는 의지로 꽉 차 있다는 것이죠. 의지가 매우 좋은 뜻인데, 주자학적인 당위 혹은 칸트적인 당위론에 너무 영향을 받아서 의지라고 하면 ‘당위를 실천하기 위해서 억지로 힘을 꽉 주는 것’이란 식으로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게 의지를 생각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저도 옛날에 의지를 그렇게 생각해 왔거든요. 그런데 의지란 그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욕망의 다른 뜻을 의지로 봐야 합니다. 선(善)은 절대 옳은 것이 아니고 좋은 것,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선이 좋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지 선이 옳기 때문에,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거든요. 이것은 아주 자발적으로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모두 도덕적이냐 하면 아니거든요. 그럼 뭐냐?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본능적인 욕망과 본성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본능적인 욕망과 본성적인 욕망은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절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결국 수행한다는 것은 본능적인 욕망을 본성적인 욕망으로 휙 바꾸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하지 말라고만 하면 인간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는데 또 죽어야 하니까 죽음도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는 동시에 그 사이에는 상극(相克)도 있어서 서로 잡아먹지 않습니까? 자연은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처절하고 비극적인 곳이죠. 그러나 자연의 상극이 동시에 생명을 도와주기도 하는데 이것이 자연의 필연법입니다.
캐나다에서 늑대가 순록을 잡아먹으니까 순록을 기르는 사람들이 늑대를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면 순록이 잘 자랄 줄 알았는데 순록이 비실비실하면서 더 죽는다는 거예요. 천적이 있어야 에너지가 넘치는데 천적이 없다 보니까 더 죽는다 이거죠. 진드기도 인간의 피부에 병을 옮기는 것은 나쁘지만 동시에 우리 몸의 죽은 피부를 다 먹기 때문에 방안 공기를 정화시켜 준답니다. 양면적인 것이죠. 노자가 선(善)과 불선(不善)이 세상의 양면성이라고 했던 말은 세상의 필연적인 법이예요. 그것이 부처님의 법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자연은 아(我) 중심으로 욕망이 움직이지 않고 ‘그것’이 움직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이데거가 ‘Ich denke’ ‘내가 생각한다’ 대신에 ‘Es denkt’ 곧 ‘그것이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죠. 해체철학에서는 이제 ‘내가 생각한다’는 사유로부터 ‘그것이 생각한다’는 사유로, 욕망은 ‘내가 욕망한다’가 아니라 ‘그것이 욕망한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서산대사가 임종 전에 “80년 전에는 그것이 나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그것이 되었다.”라고 했는데, 내 마음이 우주 대자연의 여법한 그것과 일치되었다〔心物合一〕는 뜻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제 욕망도 내 욕망, 내 중심의 소유보다도 그것의 욕망, 우주의 욕망에 따라서 내가 살아갈 때, 서산대사처럼 대우주의 법도와 일체가 되어서 자연처럼 산다, 여여(如如)하게 산다 이것이죠 . 욕망이란 결코 무시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자연 자체가 욕망입니다. 다만 자연은 존재론적 욕망이지 절대 소유론적 욕망을 하지 않습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 보면 온몸이 근육질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생각하는 사람은 몸도 별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지 무슨 운동선수 같은 몸을 가진 사람이 생각을 하나?’ 하고 잘 이해가 안 갔어요. 늘 화두로 남아 있었는데, 파리 로댕박물관에 가서 로댕에 관한 책을 보고서 제가 탁, 그걸 알았습니다.
로댕의 지도교수였던 장 조레스(Jean Jaures)가 사회주의자였고, 로댕 자신도 사회주의를 대단히 신봉했어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그 그림자가 깊어지는 시기였는데, 그걸 보니까 지옥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로댕이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을 제작하고 그 위에서 ‘내가 어떻게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바꿀 것인가’ 하는 고민 때문에 앉아서 지옥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계급투쟁에 의한 지옥 같은 세상이고 빈부격차로 지옥 같은 세상이기 때문에 내가 이걸 고쳐야겠는데, 고쳐야 하니까, 의지가 발동을 하니까 힘이 콱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로댕의 작품을 그렇게 해석을 했어요.
그런데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는 근육질의 사고, 뭘 억지로 해야겠다는 사고가 아니고 미륵반가사유상처럼 근육 없이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사고, 혁명을 해야겠다는 사유가 아니고 자신을 관조하는 사유로 바뀌는 시대가 올 것이고, 그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철학, 사유의 지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이데거가 철학의 종말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모든 아상(我相), 아(我)의 의지, 아사(我思), 이런 자기중심의 의지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어요.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야 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바뀌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려면 이런 무의지와 무아상의 시대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도흠 :
욕망은 본능적이고 본성적인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은 것으로서의 선(善)과 연결시켜서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여기 비용을 아끼기 위해 폐수를 강에 그냥 버리는 악덕 기업주가 있다고 칩시다. 그가 폐수를 버리지 않게 하는 방법은 첫째 그 스스로 도와 덕을 닦아 그 짓이 나쁜 짓임을 알고 그만두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어느 날 자신이 버린 물을 자신도 먹고, 또 그 폐수를 먹고 자란 물고기를 자신의 가족이 먹음을 알고서 그만두게 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존재론적 사고를 넘어선 연기의 사유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연기의 이치만 깨달아도 개인의 욕망을 타인의 욕망을 위하여 유보하는 배려와 자비의 세계가 저절로 이루어지리라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이들이 연기적 사고를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세상은 타락과 위기의 극에 달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아직 연기를 깨닫지 못한 자에게 폐수를 버리지 않게 하는 방법, 곧 인간의 심성수양에 더해서 사회적이고 시스템적인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의 심성을 억압하는 시스템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앉아서 도만 닦는다고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지는 않겠죠.
김형효 :
지금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저는 아까도 옳은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얘기했는데, 저는 이 우주 최고의 화두는 이익(利益)이라고 봅니다. 불교에서도 이익이 중요합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요익중생(饒益衆生)이자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아니겠는가?
불교에서 지혜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저는 만인에게 어떻게 이익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지혜라고 보거든요. 절대 지혜란 공허한 것이나 개인의 이익을 보겠다고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7 말나식이 중요한데, 여기가 모든 이기심의 자리이자 모든 평등성지의 자리이지 않습니까? 이 식(識)이 홱 바뀌어 버리면 모든 중생에게 지혜를 주는 자리이기 때문에 욕망이라도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자리이타를 일으키는 지혜를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불교의 진리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익이란 매우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만물의 욕망이 모두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데 단지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불교의 삼신불에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 있지 않습니까? 마명의 《대승기신론》에 보면 화신불이 동시에 용대(用大)라고 했습니다.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라고 했는데 그 중에 용대가 중요한 것이 활용의 위대함인데, 결국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까닭은 무엇인가, 어떻게 마음을 활용해야 할 것인가, 그 활용의 견본을 보여주신 것이죠.
부처님 말씀은 우주의 체대인 허공의 무한한 비어 있음, 그리고 체대가 스스로 분비하는 에너지의 광대한 힘, 이것이 보신불인데, 그것을 갖고서 인간들이 어떻게 마음을 활용할 것인가 하는 활용의 방식을 보여줬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국에서는 종교적·정치적·사회적 근본주의 때문에, 근본주의가 너무 중시되어 체대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지 말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자리이타(自利利他)로 활용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만약에 이익이 된다면 하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도흠 :
제가 질문한 핵심은 자리이타가 되기 위해서라도 하나는 차이나 연기에 대한 인식을 해야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럴 수 있는 조건도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을 때는 자리이타라는 것이 윤리적이고 당위적인 목표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인식과 조건이 같이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형효 :
자리이타는 이 세상의 법이라 이거죠.
이도흠 :
그것을 깨달으면 되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 조건이나 시스템도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체대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 용대에서는 인간 서로가 서로의 부처를 만나게, 곧 서로 사랑하고 보듬고 서로를 자유롭게 하도록 하는 시스템과 구체적 제도와 방법이 필요하지 않은가 합니다.
김형효 :
원효의 화쟁도 과거에는 당위적으로 보더라고요. 그건 당위가 아니고 자연의 여실한 법이라 이거죠. 자연의 여실한 법이 화쟁인데, 그것을 배워서 인간 사회에 적용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도덕적인 당위나 의무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자리이타도 자연의 여실한 법이고, 부처님은 자연의 여실한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내 마음을 활용해야만 그렇게 되는 것인가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용대(用大)라는 말은 단순히 쓰임이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활용이다, 이겁니다. 마명의 《기신론》의 그 부분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결국 자연의 이치를 인간이 쓰는 겁니다.
한형조 :
도덕주의와 이성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자리이타가 사회적으로 시장 쪽하고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의 논란은 이익과 손해의 양자택일 식으로 생각해왔는데, 그렇지 않은 게 기본인 것 같아요. 자장면 집을 운영하는데, 음식이 맛이 있고 제대로 만들어 줘야 손님도 많이 오고 돈을 버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교환에는 도덕이나 이익, 손해가 끼일 자리가 없죠. 일종의 공존의 사고고 자리이타의 현장이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우리가 이런 측면은 고려하지 않고 충돌의 측면만을 너무 고려한 게 아닌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존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충돌하는 갈등은 오히려 소수이거나 조정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본다면 이미 베이스는 자리이타의 교환의 현장입니다. 그걸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이 불교의 인식과 상당히 연관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김형효 :
보조지눌의 《원돈성불론》에 “모든 공교기예(工巧技藝)가 다 보조광명(普照光明)의 지혜다.”라고 했는데, 이는 불성(佛性)이 어떻게 실현되느냐는 것입니다. 각자가 가진 재주를 살려서 음식 만드는 요리사는 요리사로서 부처가 되라는 것이죠. 요리에 재주가 있으면 요리를 해서 돈 벌고, 돈 벌어서 성취해서 그것을 이타(利他)로 행하면 된다는 것이죠. 저는 우리 사회가 자유사회로 가야지, 반대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각자가 자기 재능을 따라서 신바람 나게 일하면서 자기 성공을 남에게 나누어 줄 때, 이것이 자리이타의 길이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탐욕이 많은 사람이 기업을 운영하면 그 기업은 안 된다고 봅니다. 노사문제도 생기고, 세상에 자기 혼자 이익 보려고 하는 걸 누가 참아요. 돈 벌어서 같이 잘살자, 이렇게 안 되면 기업주가 기업을 일으키지 못해요. 장군도 혼자 출세하려고 부하들을 희생시키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마음을 탁 비우고, 오로지 군인의 소명이 있어서 선업을 닦겠다는 마음으로 , 장사하는 사람이 선업을 닦겠다는 그 마음, 그것이 부처되는 길이고, 그것이 보조 국사가 《원돈성불론》에서 자기 개인의 업을 선업으로 돌리라고 한 것이죠. 요리사가 요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의 미각을 즐겁게 해주고, 위생적으로 해주어서 돈도 벌고, 돈 벌어서 좋은 데 잘 쓰고, 사회적으로 보시하고, 그것이 부처의 길 아니겠습니까. 부처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막스 베버가 말한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란 것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조성택 :
이야기가 현실 문제로 왔습니다. 선생님의 불교 입문 계기가 지적 편력의 과정이었고, 수행이라는 문제가 삶에 들어오면서 지금도 수행을 많이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론적 측면에서는 대승불교에서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실제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 한국 불교, 제도적 측면에서의 한국 불교의 그런 측면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형효 :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저는 재가나 출가에 관계없이 모두가 승(僧)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물론 출가자와 재가자의 계(戒)에 차이는 있습니다만, 부처님에 귀의한다면 모두 승(僧)인데 너무 제도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출산율 저하 때문에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출가 승려의 수가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출가자와 재가자의 간격이 줄어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한국 불교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방송에서 본 것 같은데, 현각 스님이 “한국 스님들 너무 높아요.”라고 하시더라고요. 불자들에 비해서 너무 높다고 했는데 그게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재가자가 이런 얘기하면 출가자들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겁니다. 만사가 방식의 문제인데, 출가자 내부에서 그 얘기가 나와야죠. 재가자에게만 하심(下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반 대중과 신도들에게 하심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공경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봉사하고 베푸는 발심을 출가자 내부에서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외부에서 이런 말을 하면 자연히 기분이 안 좋아질 거라고요. 그래서 저는 내부에서 그 얘기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그 얘기가 내부에서 나올 거라고 봅니다.
조성택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우석 사태에서 보면 지관 스님이 불교계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문제, 즉 불교계가 세속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다른 종교보다 많이 서툴거든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김형효 :
저도 그걸 잘 모르겠는데, 저는 황우석 박사처럼 생물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전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잘 얘기 안 하거든요 . 황우석 씨가 100% 매도되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고. 지관 스님이 그렇게 한 것도 황우석 씨가 그렇게 되기 전의 얘기 이지 않아요? 그래서 좀 다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실제로 얼마만큼 진실한지 거짓말을 했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일체 모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고. 단지 의심하는 것은 왜 미국이 섀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죠. 결국 특허권 문제도 그 이익이 엄청나다던데, 미국이 국가 이익을 위해서 입을 틀어막은 것인가,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조성택 :
좀더 큰 범위, 예를 들어서 생명공학이라든지 생명과학, 또 과학기술과 문명발전 전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전에는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고 하셨지만,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말씀해 주셨는데, 자본주의의 다른 측면을 보면 과학과 문명 그리고 생명을 공학에서 다루는 문제에 대해서 불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김형효 :
그 문제는 저는 잘 몰라요. 모르는 사람이 괜히…….
한형조 :
저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유교와 불교의 차이일 수도 있고……. 구성과 해체를 대비시켜서 말씀해 주셨는데, 해체 쪽, 특히 노장이나 불교에서는 사회 문제의 구체적인 이슈에 대해서 철학이나 교리와 연계되는 것에서 피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문제를 대하는 태도나 시각에 대해서는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데, 가령 특정 이슈에 대해서는 완전히 오픈되어 있는 것 같아요.
불교 안에서도 보면, 지금은 우파 연대까지 나와 있지만 그전까지는 남북통일이 불교적 진영의 축이었습니다. 생명공학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비판적이더니 황우석 교수가 불교계의 대표격으로 뜨니까 지지하는, 이런 식으로 왔다갔다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사회 이슈에 대해서 불교가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불교에 따라서 다양한 의견을 갖게 되고 오픈되어 있는데, 저는 그것도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원성의 자원이라고 할까요. 불교를 통해서 우파가 되기도 하고 좌파가 되기도 하고, 통일이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게 되기도 하고.
이도흠 :
그런데 그게 진짜 다양성이나 차이로서 오픈되어 있으면 괜찮은데, 제가 보기에는 어떤 집단의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요. 결국 황우석 교수 문제만 봐도 그런 것이 많이 작용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요.
한형조 :
그런 것은 비판해야죠. 그런데 불교의 이익과 관계되기 때문에 지지하고, 비리가 문제가 된 이후에도 처리하지 않고 우기는 것은 문제이지만, 그 문제를 뺀다면 사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접근하는데 전체의 이익이나 공동체의 선이랄지 그것의 총량, 요익의 총량에 비추어 볼 때 작은 흠이나 논리적인 모순이나 태도 같은 것들은 오히려 사소하게 취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보다 더 큰 시각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의 실체를 모르니까 뭐라고 단언은 못합니다만, 크게 봤을 때 결과적으로 인류에게나 집단에게 이익을 가져다 줬다고 봅니다.
한국 불교의 미래
조성택 :
저는 한국 불교의 미래에 대해서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에 불교 붐이 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불교가 저런 식의 수행이고 저런 식의 불교 운동이면 좋겠다고 하는 하나의 모범을 봤다고 생각했어요.
미국 불교의 특징은 지식인 불교이고 실천 불교입니다. 가족 간에 불교를 같이 믿고 수행을 일상화하면서, 동물보호, 채식주의, 환경보호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불교의 전통이 더 오래되었으니까 더 잘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아직도 기복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모습이나 출·재가 간의 너무나 엄격하면서도 형식적인 존경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한국 불교의 미래가 상당히 어둡다, 오히려 미국이나 유럽 불교를 수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갖고 있습니다.
김형효 :
제가 유럽에 있을 때는 불교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잘 몰랐습니다. 최근에 들어보니까 불교 붐이 일어나고, 또 지식인 불교도 일어나고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저는 다른 곳에서는 유럽에서 불교가 제3의 중흥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1기는 인도이고 제2기는 중국인데 제3기는 유럽과 미주를 포함한 서구에서 불교가 중흥된다, 앞으로 거기에서 훌륭한 현자나 성자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렇게 보면 서구의 새로운 지식인 중심의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불교를 일으킬 것이라고 봅니다.
현각 스님이 프랑스에 가서 불교신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 가정주부가 자기가 왜 불교도가 되었는지 마치 한국의 불교학자가 얘기하듯이 그 수준으로 얘기를 하더랍니다. 저는 그것이 상당한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좀 바뀌고 있답니다. 경전도 공부하고 참선도 공부하고 봉사활동도 하려고 한답니다. 우리도 달라지는 기미가 보인다는 것이죠.
한형조 :
제일 시급한 게 지식인인데, 미국은 기본적으로 기복에 관련된 종교적 열망을 기독교가 담당해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처럼 법당이 있는 공간이 중요하지 않고 참선하고 이야기하는 공간이 확대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기복 불교에 대해 그 폐해는 많이 얘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기복을 완전히 뺄 것이냐 하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은 기본적인 힘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 복만 찾는 것은 문제이지만, 보다 큰 회향의 힘을 통해서 불교를 만들어가고, 다시 자기 삶으로 육화시키는 과정이 중요한데, 그 대목에서는 아직 미흡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형효 :
저도 같은 생각인데요. 복(福)이란 것이 영어나 불어로 번역이 안 됩니다. 복은 한국 문화의 독특한 부분인데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의 기본구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을 절대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가끔 절에서 보면 나이 많은 보살들이 무릎도 안 좋은데 108배 하는 것을 보면 성스럽기도 해요. 가슴에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그렇게 절하는 분들 보면 나는 저런 신심이 없구나 싶어서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느끼는 것이 저 마음이 자식이나 남편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고 이웃에 가고 나라에 가서 확장되면 바로 그것이 보살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 씨를 살려서 회향하는 길을 가르쳐줘야 하고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문화의 토대에 샤머니즘적인 문화가 오랫동안 있어 왔기 때문에 불교를 받아들일 때도 복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우리 문화의 하부구조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복을 그냥 공짜로 비는 기복(祈福)이 아니라 수복(修福), 복을 받기 위해서 복을 닦으라는 것으로 수용한 것이죠. 복은 안 닦고 공짜로 빈다고 되는 게 아니고 스스로 복을 닦아야 되요. 저도 기도를 해봤는데 기도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변해요. 처음에는 원하다가, 자기 자식 입학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자기 남편 출세하게 해달라고 빌다가 나중에는 오랫동안 기도하다 보면 자기 마음이 서서히 변하게 된다 이거죠. 그러니까 복을 너무 부정적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
조성택 :
그렇습니다. 저도 작년 여름에 그런 경험을 했는데,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 어려운 일을 피하려고 기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게 안 되다가, 나중에 기도가 조금 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게 내가 지은 업이면 받겠다는 자신감이 생겨났어요. 기도의 효력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김형효 :
그게 바로 복을 받는 거죠.
조성택 : 박성배 교수가 그런 얘기를 자주 하세요. 처음에 출가해서 해인사에 있을 때 선배 스님들이 삼천 배를 보름만 하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보름 동안 삼천 배를 매일 했는데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자기 나이가 70이 넘으면서 무효험이 기가 막힌 효험이었다는 걸 느꼈다는 거예요. 만일 그때 삼천 배를 해서 기도가 이루어졌으면 그분 표현에 의하면 기도병신이 되었을 거라는 거예요. 일만 생기면 기도를 했을 거라고. 그런데 70이 돼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기가 막힌 효험이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해요.
김형효 :
참 역설적이네요. 가끔 종교학자나 불교학자들이 복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데, 저는 그 의견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해야 복을 받는지 인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우리 문화고, 서양인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의 복은 조금 다르니까요. 우리 문화의 문법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거죠.
이도흠 :
불교도 역사성을 무시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우리는 기존의 신앙에 불교를 융합하다 보니 대웅전과 산신각이 한 절 안에 공존하는 형상을 갖게 되었고, 미국은 자본주의의 풍요와 물화(reification) 속에서 내면의 빈곤, 불안, 소외를 겪다 보니 마음공부에 주력하여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고. 하여튼 진(眞)과 속(俗),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절에 부처와 산신령이 공존하듯, 깨달음을 추구하는 삶과 복을 빌고 빌어주는 삶이 하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불성(佛性)의 생활화
조성택 : 지금까지 주로 불교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불교도 어떤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김형효 :
현대화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가톨릭에서 기도문 등을 현대 각 나라의 언어로 바꾸었듯이 우리 기도문도 모두 한국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봐요. 《반야심경》도 한국어로 바꾸어서 해야 되겠고. 그리고 관례나 의식, 복제 등을 불교의 전통을 살리면서 어떻게 시대에 맞게 바꾸어 나갈지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미래 지향적으로 불교가 우리의 미래를 살려준다는 생각이 젊은 사람들에게 와 닿게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참선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기도문이나 의식이나 복제를 현대적으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불교에 불변의 요인도 있을 것이고 가변의 요인도 있을 텐데, 가변적인 것은 바꾸자 이거죠, 시대에 맞게. 그러다보면 불교가 더 우리 대중들에게 와 닿지 않을까 합니다.
대만에 있는 성운 스님, 저는 그 분 참 좋더라고요. 불교방송에 보니까 어느 고승이 법회를 하는데 만 명 정도가 모였는데 상당히 대중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그러면서도 대중들의 생각을 교화시켜서 환희심에 차서 나갈 수 있도록 해주더라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고승들도 좀 그렇게 다가가서 생활 속에서 내 마음에 내가 부처를 모시고 산다는 환희에 찬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산중 불교에서 시중 불교로 내려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조성택 :
성운 스님 같은 경우에는 세속적인 문제에도 상당히 밝으시죠.
김형효 :
그것이 지혜 아니겠어요? 우리나라에도 지혜가 없어서 나라가 헤매는데 그러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거죠.
한형조 :
제가 불광사에 두어 번 가봤는데 규모도 굉장하고……. 주요 경전을 대만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 시리즈로 있었어요. 아프리카에서도 유학 온 사람도 봤어요.
조성택 :
미국에서도 성운 스님은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저한테 공부했던 낸시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대학원에 온 이유가 성운 스님을 뵙고 불교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비올라를 전공하다가 음악을 접고 불교학을 공부하겠다고 나선 것이죠. 서래사 대학(University of the West)도 성운 스님이 설립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형효 :
병원과 대학, 이 두 가지의 세상 사업을 참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고승대덕들이 참선을 어느 정도 한 다음에 시중에 내려와서 시중이 바로 법당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참선도 생활 참선으로, 운전할 때도 밥 먹을 때도 공부할 때도 늘 그렇게, 선(禪)도 좌선만 가르치지 말고 생활선을 가르쳐서 전 국민이 불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참선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어떨까 합니다. 미국에서도 불교신자만 참선하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선이, 수행이 생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성택 :
용화사의 송담 스님 같은 경우는 생활 속에서 참선하도록 가르칩니다. 재가자들에게도 조용한 데서 참선 못하게 합니다. 시끄러운 데서 소리 나는 데서 하라 이거예요. 우리 생활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가르치시는데, 문제는 그런 가르침이 일부 그룹 내에서만 머물고 있는 거예요. 그게 탁 터져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김형효 :
제가 불교계 스님들을 잘 몰라서 종단 내부의 문제는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가 훌륭하고 좋으면 마음을 열고 따르지 않고 ‘제까짓 것 뭐’ 이렇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계에도 보면 ‘제까짓 것’ 해가지고 뭐가 힘이 안 생기는 것 같은데, 누구에겐가 좋은 점이 있으면 서로 선양해서 우리 문화로 만드는 데 도와주고, 서로 덕담도 좀 해주고 했으면 좋겠어요. 식자들이 그런 것은 잘 안 해주는 것 같아요.
한형조 :
제가 보면 눈송이 같아요. 눈덩이라는 게 기본 씨앗이 뭉쳐져 있어야 굴러가면서 다양한 것들이 조금씩 붙어서 자기화할 수 있는데 중심이 없으면 다른 요소들을 끌어들일 수가 없죠. 듣다 보면 남의 말 중에 한두 가지씩은 들을 게 있을 것 아닙니까. 자기가 모르는 분야는 모두 학습의 대상이 되는데, 그 정도를 하려면 기본적인 자기 씨앗이 있어야죠.
김형효 :
우리 문화의 편협이 문제입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가 뭐냐 하면, 지식은 돈이나 명예처럼 소유로 갖고 있는 것이고, 지혜는 내가 지혜인이 되기 바라니까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귀담아 듣게 된다는 거죠. 제 자랑이 아니라 제가 최근에는 작은 이야기를 들어도 섬광이 팍 오면서 가르쳐 주더라 이거예요.
텔레비전에서 스님이 나와서 법문을 하실 때, 엊그제도 새벽 1시 반에 성수 스님이 법문하시면서 아주 쉬운 말로 하시는데 이게 팍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 소유로서의 지식이 아닌 존재론적인 지혜와 한 몸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배워가는 가운데 반야지혜를 얻고 싶어요. 지식도 돈처럼 질투의식이 있어서 남의 지식에 질투하는 것이 우리를 자꾸 좁게 만듭니다.
한형조 :
배워가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는 반야지혜를 얻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승가에서 말하는 즉각적이고 돌발적인 깨달음의 최종적인 경지와는 조금 다를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김형효 :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수행이 깊지 못해서 그 정도는 잘 모르겠고요.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으로 부처가 된다 이거죠. 그게 오래 지속이 안 되어서 그렇지. 그래서 저는 점수(漸修)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은 순간적입니다. 예컨대 산보할 때 지나가는 아이가 너무너무 예뻐서 제가 환희심에 넘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손자가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데, 너무너무 예뻐요. 그 마음이 부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아기를 보고 마음에 불심(佛心)이 가득해서 가다가 어떤 사람하고 탁 하고 부딪치면 순간 기분이 상하면서 조금 전에 있던 불심이 사라지거든요. 그런 것 같아요. 부처가 멀리 있지 않고 부처가 되는 길을 누구나 다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돈오점수가 저는 옳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행하는 것도 순간 깨닫는 불심이 오래가도록 해서 금방 왔다가 금방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저는 수행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너무 확철대오만 생각하고, 큰 것만 생각하는데 잘못하면 그것이 근본주의로 가기 쉬워요.
한형조 :
《육조단경》에도, 혜능이 《금강경》을 듣고 마음이 환해졌다고 하지 확철대오했다는 말은 없거든요. 5조 홍인의 문하에 가서도 그렇고 나중에 10여 년 동안 산에 있으면서도 어떤 계기를 통해서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는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저는 돈오의 근본 취지는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이라고 했지만 좀 더 거칠게 해석해서 돈(頓)자가 이미 깨달아 있다는 뜻이라는 거죠.
조성택 :
그렇죠. 돈(頓)은 ‘단박에’라는 시간의 특수한 계기로 해석하는데, 돈의 의미는 그게 아니고 ‘이미 되어 있는(completeness)’이라는 것이죠. 사과 먹는데 한 입 딱 먹고서 ‘아, 이게 사과 맛이구나’ 하고 아는 것이지 한 입 깨물었다고 10분의 1만 알았다는 것은 아니죠. 그렇게 되면 지식이라는 것이고, 지혜는 한 번 알면 와! 하고 아는 것이죠. 그러니까 돈(頓)이란 것이 시간의 특수한 계기는 아니라는 것이죠.
김형효 :
맞습니다. 와 닿습니다.
한형조 :
돈교와 점교의 차이가 거기서부터 전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점교는 초기에서부터 우리는 중생이고 따로 부처가 있어서, 수억 겁을 태워 버리고 가야 하는 단계적으로 구분된 것으로 보는데 돈교는 누구나 이미 다 깨달아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스스로 확인하고 살 것이냐, 그래서 돈오점수가 돈교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조성택 :
그런데 저의 말도 그렇고 한 선생님 말씀도 자칫하면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뭐냐 하면, 기독교에서 구원의 문제를 얘기할 때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그리스도가 되면서 이미 다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은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위해 교회에 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보는 것이죠. 반대편의 신학자는 교회에 가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정통설에서는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에 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불교에서도 이미 깨달아 있다는 것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면, 수행자들의 만행(萬行)에서 잘못 나가게 하는 부분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문제들이 거기에서 발생하는 것이죠.
김형효 :
지금 조 교수님 말씀 들으니까 생각나는데, 도마복음이 외경인데, 거기 113장인가 보면, 마지막 장 바로 앞인데, 예수님 제자들이 천국은 언제 오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오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놀랐죠. 예수님 말씀은 천국은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는데 너희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지요. 이미 세상이 천국인데, 천국은 여기 왔다 저기 왔다 이런 식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식으로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이야기는 방금 말씀하신 그 이야기와 딱 맞네요.
조성택 :
신학에서는 카이로스적인 시간과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구분하는데, 전 돈점이 그런 문제라고 봅니다. 항상 영혼의 시간인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크로노스적인 연대기적 시간을 이렇게 안고 있는 거예요. 영혼을 바탕 삼지 않고서는 상대적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돈(頓)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해서 점(漸)적인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반대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김형효 :
저는 앞으로는 기독교 신학도 역사신학에서부터 마음의 신학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의 신학으로 바뀌면 앞으로 종교적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고, 우리가 모두 리틀 그리스도가 되는 거죠. 예수는 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 거죠. 불성을 찾든 그리스도성을 찾든 본성을 찾든 양지(良知)를 찾든 아무 관계가 없고, 그렇게 되면 미래에서는 종교의 구분이라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앞으로는 많이 바뀔 것 같아요. 철학도 바뀌고 신학도 바뀌고 우리 불교도 조금 더 바뀌고, 그래서 불성 중심의, 불성을 생활화해 나가는 것으로 바뀔 것 같아요.
조성택 :
불성의 생활화, 결국 마지막에 선생님 말씀의 주제어를 찾은 것 같습니다.
한형조 :
그전에 깨달음의 사회화인가, 뭐 있었는데, 좀 안 맞아서 현실화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은데 불성에 포인트를 맞추는 것이 더 현실성 있어 보입니다.
조성택 :
또 불교가 갖는 장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불교를 자꾸 사회화하려고 해도 잘 안 맞거든요.
김형효 :
불성의 생활화. 그래서 저는 양명학이 좋습니다. 주자학보다는 양명학이 좋아요. 한국의 유교도 조선조 주자학적인 테두리를 자꾸 얘기하니까 시대에 안 맞아서 거리가 생기는데, 한국 유교도 자꾸 변화해서 양명학적인 해체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불교나 노자나 양명이나 서양의 해체철학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전혀 종교 가지고 싸울 일도 없고, 연(緣)이 다를 뿐이죠.
이도흠 :
전에 테레사 수녀의 수기를 보니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고 빈민들이 고난에 있을 때 신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이 죽은 게 아니라 빈자들의 모습으로,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으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인데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이것을 읽고서 상당히 불교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레비나스는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눈에서 신을 발견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불성을 생활화 한다는 것이 매일 타인의 눈에서 부처를 발견하고 타인의 욕망을 위해 나의 욕망을 연기하는 것,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김형효 :
네, 저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조성택 :
김형효 선생님, 좋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형조 선생님, 이도흠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
녹취 정리 / 마해륜(고려대 철학과 박사과정)
출처 / 불교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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