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인식 대상과 범주의 상대화
즈냐나스리미뜨라는 타당한 인식 대상을, ‘파악되는 것’과, ‘결지되어지는 것’으로 구분하여 두 종류만을 인정한다. 지각의 대상에 대해서 ‘포섭관계의 분석(Vy�pticarc�)’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파악되어지는 것’과 ‘결지되어지는 것’의 구분 때문에, 타당한 인식의 두 가지 형태는 두 가지 대상, 보편상과 특수상 모두를 취한다. 인식 과정에서 현현되는 것이 파악되는 것이며, 인식 과정에서 대상은 결지되는 것이다. 지각의 경우에 파악되어지는 것은 개별상이고 결지되는 것은 보편상이다. 그러나 추론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4)
타당한 인식의 두 가지 형태인 지각과 추론은 개별상과 보편상 두 종류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인식 과정에서 현현되는 것이 ‘파악되어지는 것’이며, 인식 과정에서 대상이 작용하는 것이 ‘결지의 과정’이다. 지각에서 파악되어지는 것은 개별상이고, 결지되어지는 것은 보편상이다. 이 구분에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원칙적으로 마음과는 독립된 별개의 외부대상은 없다고 단정한다. 마음, 즉 심리적 작용과는 독립된 개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삼계(三界)가 오직 식(識)뿐이다.”라고 단언한다.5)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추론과 지각을 구분하는 기준인 실재하는 대상과 개념적으로 형성된 대상의 구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개별상은 지각의 대상이며, 보편상은 추론의 대상이라고 배타적으로 구분하던 전통적 분류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모든 파악되어진 대상은 무분별이며, 모든 결지되어진 대상은 분별이다. 그는 ‘결지’와 ‘분별’을 실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분별’과 ‘결지’는 동일한 사물을 지칭한다. ‘분별’이라는 용어는 언어와 관련되고, ‘결지’라는 용어는 인식에서 아직 파악되어지지 않은 대상과 관련된 행위와 상응한다.6)
결지되어지는 모든 것은 분별이며, 아직 결지되지 않은 모든 상태는 무분별이다. 비록 추론의 대상일지라도, 아직 결지되어지지 않은 대상은 무분별이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모든 인식 대상을 ‘파악되어지는 것’으로서의 무분별(無分別)과 ‘결지되어지는 것’으로서의 분별(分別)이라는 배타적인 두 범주로 분류한다. 이와 같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분류는 불교인식론의 전통에서 매우 독특한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불교인식론은 지각의 대상인 실재하는 개별상과 추론의 대상인 개념적인 보편상의 존재론적 구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는 타당한 인식의 대상에 대한 재개념화와 재분류 과정을 통해 개별상과 보편상이라는 개념을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이들 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의 구분을 해체한다. 즉 인식에 현현(顯現)하는 대상, 그 자체로는 개별상도 보편상도 아니다. 오직 결지라는 후속되는 행위에 의해서 개별상 또는 보편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보편상의 특징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의 동일성으로 구성된 형상이 모든 개별적 특수로부터 구분될지라도, 분별을 통해서 특수가 구성될 때 ‘보편’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형상 자체는 의식의 형상으로서 다른 곳에서도 다시 발생할 수 있으므로, 개별상에 속하는 보편이 아니다.7)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설명에 따르면, 보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단순히 의식에 생겨나는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존재론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는 개별적인 것들과 관련 있다. 그러나 개별상과 관련된 후속적인 형상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인식의 형상으로서 하나의 형상이 의식에 반영될 때, 우리는 그것을 지각한다. 그 지각의 형상은 보편상이 아니라 개별상이다. 인식 과정에서 형상이 반영될 때, 그것은 의식에 인지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음속에서 하나의 형상으로서 불은 단지 의식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해 보자. 단일하고, 찰나적인 하나의 형상이 ‘불’이라는 의식의 형상으로서 보편의 한 종류로서 우리에게 인지된다. 따라서 하나의 형상은 그것에 후속하는 마음 작용에 의존하여, 개별상이 되거나 보편상이 된다. 만약 형상이 하나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개별상과 관련된다면, 이것은 개별상들과 관계하는 보편상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형상으로서만 그 형상을 반추한다면, 오직 한 종류로서 하나의 보편과 관계하는 개별상이다.
그러므로 “지각에서 파악하는 것은 개별상이고 결지되는 것은 보편상이다. 그러나 추론의 경우에는 반대이다.”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지각의 과정에서, 첫 단계에 발생하는 형상은 개별상이기 때문에 파악되는 대상이 아니라, 지각의 대상을 파악하였기 때문에 개별상이다. 동일한 논리로, 추론의 첫 단계에 발생하는 형상은 보편상이기 때문에 파악된 대상이 아니라, 추론을 위해 파악되는 대상이기 때문에 보편상이다. 처음 의식에 발생하는 형상은 오직 다음 찰나의 결지의 과정에 의해서 보편상과 특수상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개별상과 보편상은 존재론적인 범주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형상은 후속되는 분별 과정을 통하여, 개별상과 보편상으로 구분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불교인식론의 다른 기본적인 개념들도 이와 같이 상황과 문맥에 따라서 상대화시킨다. 그에 따르면 내부와 외부의 구분은 존재론적인 분류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행위자의 행위(pravrtti)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행위’를 육체적, 언어적, 심리적인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즉 행위는 단순히 외부의 후속하는 심리적 대상과 관련된 육체적 행위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후속되는 인식 대상뿐만 아니라 의식의 형상에 직접 관여하는 언어적 심리적 행위도 포함한다.
의식의 형상은 직접적인 육체적 행위 없이도, 우리는 그 형상에 대해서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형상은 언어적 심리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에서 비록 심리적 대상일지라도 그것이 행위의 대상인 한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외계에 존재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언어적 행위란 의미론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다른 불교인식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진제(眞諦)의 세계와 속제(俗諦)의 세계로 이중적으로 구분한다. 즉 진제적 진리의 세계에서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는 속제적 진리의 세계에서, 우리가 긍정 혹은 부정적인 의미의 언어로 표현할 경우에도, 존재를 확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언제나 외계의 범주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의식의 형상이나 외계의 대상에 대한 진실한 확정은 없다. 속제적 진리의 경우일지라도 의식의 형상은 확정될 수 없으며, 오직 외계에 대한 확정이 있을 뿐이다. 진실로 자증지(自證智)의 대상인 의식의 형상은 언어에 의해서 확정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확정은 무용하며, 부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에.8)
예를 들면, “여기에 나무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나무의 존재에 대해서 확정하든, “여기에 나무가 없다.”고 표현함으로써 존재를 부정하든, ‘나무’라는 단어는 의식에 반영된 형상으로서 나무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의식에 반영된 형상으로서 나무는 ‘나무’라는 단어를 듣거나 이해하는 경우에만 현현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중복되는 과정이지, ‘나무’라는 존재에 대해서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과정은 무의미하다. 다른 한편 의미론적으로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분별의 과정에서 발생하지 않는 외계의 대상은 실질적으로 확정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상이 인지되지 않는데 어떻게 확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겠는가?9)
외계에 존재하는 대상 그 자체는 의식에 반영되지 않으므로 긍정이나 부정이 불가능하다. 결국 의식에 인지되지 않는 것, 즉 형상이 아닌 것은 그 자체로 긍정도 부정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외계 대상인 나무는 ‘나무’라는 표현에 의해서 지시되는 결지에 의한 가탁(假託, vyavasth�pita)과 같이,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오직 결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어떤 상황에서, 분별에 근거한 의식의 형상은 오직 분별로 인하여 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만이 있을 뿐이다.10)
오직 속제적 진리의 입장에서만 외부 대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듯이, 심리적인 형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도 가능하다. 그리고 대상을 긍정 또는 부정하는 심리적인 형상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이론에서는 외부적인 행위이다. 개별상과 보편상에 대한 구분과 마찬가지로 ‘외재(外在)’라는 개념이 대상을 존재론의 범주에서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대상과 관련된 우리의 의식에 의존한다. 대상이 오직 결지되어지는 경우에만 외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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