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불교인식론 5-2. 즈냐나스리미뜨의 가탁이론

slowdream 2007. 9. 18. 23:28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또한 다음과 같이 가탁이론을 설명한다.


〔반론〕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면, 당신들은 대상의 두 종류 모두를 통합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제의 이론이 ‘모든 사물들의 속성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할 수 있겠는가?


〔답론〕 “그것(두 가지 입장)은 모두 가탁이론이다.” 사물은 단순히 결지나 현현에 의해서 가탁되며, 마음에서는 다른 목적과 결합한다. 그러므로 조건적인 요소들을 구분하기 위해, 외계의 대상은 단지 가탁이며, 궁극적 실재에서는 오직 개별상만이 다른 것들로부터 배제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동일하게, 모든 외계의 대상을 규정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로부터 배제된 형상은 분별적 인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순되지 않는다.


〔반론〕 그러나 당신이 하나 혹은 다른 것이 대상이라고 할 때, 그 의도가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그 의도는 다른 것에 의해서 부정될 뿐이다.


〔반론〕 그러므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그러나 진실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실용적인 사람은 진실로 알려진 대상, 즉 지각과 같이 대상에 대한 믿음으로 유도하는 결지에 의해 배제되는 현현에 관여한다. 왜냐하면 결지의 과정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 기능이 결여된 현현은 행위하는 사람에게 어떤 것도 대상으로써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잔디밭을 지나는 경우나, 신기루의 물과 같이. 결지는 현현과 분리될 수 없다. 마치 물에 가탁된 것과 같이. 그러므로, 행위를 위한 대상이 성립될 경우에는, 결지나 현현이 부재(不在)는 불가능하다. 두 과정의 현전은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하나가 구분된다는 의미는 대상의 성립을 위하여 단순히 세속적으로 이해된다.20)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지각과 추론의 대상들은 엄격하게 말해서 모두 현현과 결지가 요구된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결지가 없는 현현은 행위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대상의 현재가 아니다. 예를 들면, 잔디밭을 걸을 때,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잔디에 대한 감각적 지각이 있다고 상정해보자. 비록 그 감각적 촉각이 잔디를 느낀다고 할지라도 ‘잔디가 있다’라고 결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신기루’라는 결지는 적절하지 못한 결지이기 때문에, 이에 의존하는 행위는 기대했던 결과를 초래할 수 없다.


이 경우 행위를 성공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대상이 현존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현이 없는 결지에는 대상이 현존하지 않는다. 신기루의 예시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만약 태양 빛에 반사된 모래의 현현이 ‘물이 있다’라는 결지를 이끈다면, 현현과 결지가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적 성취를 위한 대상, 즉 ‘태양빛이 있다’라는 결지와 ‘태양빛의 현현’ 혹은 ‘물이 있다’는 결지와 ‘물의 현현’이 현존하지 않는다.


특히 후자의 두 경우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태양빛이나 물로써 대상을 단언한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그것들이 세속적인 입장에서 대상으로 묘사될 수 있을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여전히 대상이 아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이와 같은 관점을 추론의 공식에도 적용한다.


인식의 과정에서 현현하지 않거나 결지되지 않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마치 ‘말’이 ‘소’의 인식의 대상이 아닌 것과 같이. 그리고 개별상은 언어적 표현 가능한 인식에 현현하지 않으며, 의식적 형상은 언어적 인식에서 결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각각의 경우에 필수적인 요수는 결여된다. 필수적인 관계는 현현과 인식의 대상이 결지되어진 상태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이 추론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21)


어떤 것이 인식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에 현현하여야 하며 결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두 조건들 충족하지 못하는 것은 대상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소’를 인식하는 경우에 현현하지도 않고 결지되지도 않는 ‘말’은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추론에서 현현되는 것은 심리적 형상이고 결지되는 것은 개별상이다. 이것은 각각 두 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만을 충족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대상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비록 행위의 측면에서, 사물이 현현에 의해 단순히 행위의 대상인 것처럼 간주될지라도, 각각의 행위들은 결지의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현현에 근거하여 행위하는 습관적인 행위는 이전의 결지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행위가 없을 경우에는 결지도 없다.”는 한정이 필요하다.22)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습관적으로 행위하는 경우, 그 행위는 언제나 현현과 결지에 의존한다. 예를 들면, 공이 우리 앞으로 날아온다면, 어떤 결지의 과정 없이 현현에 의존하여 그 공을 피하는 행위가 가능하다. 즈냐나스리미뜨라에 따르면, 이와 같은 행위는 오직 이전의 결지의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행위를 지배하는 습관은 그 형상이 현현되기 이전에 그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하며, 그에 따른 적절한 결지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비록 결지의 과정 없이도 형상에 반응하는 순수한 습관적인 행위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행위 자체는 어디까지나 이전의 결지의 결과이다. 따라서 현현과 결지의 과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대상을 규정한다면 반론자는 즈냐나스리미뜨라가 규정한 대상의 범주는 인식과정에서 의식에 어떤 형태로도 대상을 규정지울 수 없을 만큼 제한적이라고 문제시 한다.


〔반론〕 그러나 지각의 경우에 파악되어진 찰나(刹那)의 결지가 아니라, 오히려 상속(相續)의 결지가 있으며, 이것은 상속의 형상이 아니다. 따라서 찰나와 상속에서 현현과 결지가 가능하지 않은데, 어떻게 지각에서 대상이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배제이론은 추론을 위한 것이다. 현현과 결지의 양자에 존재의 속성으로서 대상은 타당한 인식의 도구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당신의 대상에 대한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인식은 오직 현현이나 결지에 의해 규정되는 대상을 소유할 때에만 가능하다. 또한 그 대상들이 외계에 존재하든지, 의식에 내재하든지 표현될 수 있다.23)


다시, 반대론자들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에서 구분되는 지각과 추론의 대응적 관계에 주목한다. 언어적 표현의 인식으로서, 지각은 우리에게 파악된 순간이 현현하는 것이며, 결지는 외계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행위의 모두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현현과 결지는 아니다. 따라서 반대론자는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정의에서 지각의 경우에 대상은 성립할 수 없다고 반론한다. 언어적 표현은 추론에 한정되므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견해에 따르면 대상은 불가능하다.


불교인식론에서는 지각과 추론만이 오직 타당한 인식수단으로 인정되므로, 반대론자들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정의는 타당한 인식수단을 정의할 수 없으며, 타당한 인식이 알려질 수 있는 방법도 없다고 반론한다. 그러므로 반대론자들은 어떤 것이 현현되거나 결지되어야만 대상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반대론자들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진실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주장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오히려 내재하는 형상과 외계대상은 모두 지각과 추론의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답론〕 사물이 실재하는 상태에 대하여 가탁이론을 설한다. 현현과 결지는 모두 존재의 속성으로 대상성이 있다. 단지 세속적으로 구체적으로 대상에 관계하는 사람과의 가설적인 관계에서 ‘사물은 실재한다’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에게 대상은 각각의 찰나는 단절되지 않으며, 오직 그 사람이 찰나를 구분하는 경우에만 단절된다. 지각에서는 두 경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주장에 오류는 없다.24)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왜 반대론자의 반론이 타당하지 않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지각은 진실로 대상이 없다’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한다. 동시에 그는 지각과 추론의 대상으로써 대상의 범주가 보다 덜 제한적으로 규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음을 설명한다. 어떤 하나의 정의가 유용하고 적절하기 위하여, 어떤 것이 진실로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실재하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비록 궁극적인 실재에서 그와 같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인식의 정의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찰나의 대상이 현현하고, 그 대상이 지속적으로 상속되어 후속하는 행위가 그 대상을 취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과정에서 동일성을 유지된다고 믿는 일반 세속의 사람들에게 비록 궁극적으로 진제의 입장에서 지각은 대상을 취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속제적으로 두 대상, 비분별적인 것(파악된 순간)과 분별적인 것(결지된 상속의 순간)으로 구분된다는 설명을 이해시키기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의 두 대상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견지에서 철학적으로 가탁되어진 것으로 일반인을 위한 낮은 단계의 방편이다.


만약 “세속의 일반 사람들을 위하여, 지각되는 것과 분별되어지는 것, 예를 들어 ‘불’이라는 결지는 하나의 동일성의 형태로 현현함을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분명히 오류이다.”고 반론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불’이라는 결지에는 다른 것들이 현현한다는 기억 때문이 아니라, 결지된 불의 현현이 오류라는 범주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각에서 사물이 현현함을 증명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분별적 현현과는 다르다. 분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현은 지각에서 발생하는 현현과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인식의 형태를 달리함으로 사물의 현현을 부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탁이 있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실제는 없다.”25)


반론자들은 세속의 일반인들은 지각에서 파악되는 대상과 결지되는 대상을 구분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이 비록 부분적인 진리일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일반인들이 파악되는 대상과 결지되는 대상을 구분할 수 없을지라도 지각되는 대상의 시각적인 형상에 차이가 있다고 대답한다. 예를 들면, 이전에 보았던 ‘불’에 대한 경험이 기억이나 상상 속에서 분별의 형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음식을 조리한다’는 것과 같은 ‘불’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지금 여기에서 현전하지 않아도 이전에 경험한 ‘불’에 대한 기억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다’고 하는 ‘불’은 실제로 우리 앞에 시각적으로 현전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전의 경험에 기초하여 개념적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지각은 ‘파악되는 것’과 ‘결지되는 대상’들 간의 차이를 현상적으로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적 구분은 지각되는 대상이 의식에서 개념적으로 구성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와 추론에서는 ‘파악되는 대상’과 ‘결지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우리가 추론하는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서 지각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언어와 추론은 또한 지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반론하는 반론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불교 인식론이 역사적으로 지각을 설명할 때 마치 실재하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설명하는지 그 이유를 증명한다. 또한 실재하는 대상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적 정당성은 언어와 추론에 적용되지 않으므로, 지각에 대한 정의와 관계없이 언어와 추론은 실재하는 대상을 취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불교인식론의 지성사에서 지각과 추론에 대한 이론을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들은 동일하게 다른 모든 주장들에도 적용될 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배제에 대한 논의’에서 설명하는 언어와 추론에 대한 모든 주장의 핵심은 결국 지각이 진리라는 것이다. 지각에서 결지된 대상은 행위를 위한 외계의 대상이다. 그러나 의식에 현전하는 대상은 외계의 사물이 아니라 마음에서 구성된 형상이다. 지각이나 지각에 기초한 행위들은 의식에 현전하는 유용성과 행위성 모두를 내포하는 대상이 미리 상정되어 있다. 그리고 외계의 대상을 활용할 수 있는 심리적 형상은 행위할 수 있으므로 마치 언어와 추론이 실재하는 대상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지각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