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 있는가
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및 서울대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현재 서울대 철학사상 연구소 특별연구원. 서울대 강사. 논문으로 <하이데거에서 존재론적 차이와 형이상학의 문제>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하이데거와 철학자들><하이데거와 근대성>등이 있다.
그날도 여전히 바빴다.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A에겐 요사이 별로 실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모처럼 계약이 성사될 것 같아 급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행히 한강대교는 비어 있었고,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다리 중간쯤에서 누군가가 난간 위에 한 발을 올려 놓고 있지 않은가! 순간 자살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A는 얼른 차를 멈추고 그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오직 죽음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때 난간 위의 그 사람은 이 한많은 세상을 그래도 살아볼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저하는 그를 A가 잡는 순간, 그의 손길에 놀란 그 사람은 그만 강물로 떨어졌고, 이튿날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 그렇다면 이런 A의 행동은 좋은 일이었을까, 나쁜 일이었을까? 그의 행동의 좋고 나쁨을 나누는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먼저 동기의 면에서 보자면, A의 행동은 일단 좋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감수하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 순수한 마음은 오히려 칭찬받을 만한 것이겠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비난받아야 할 것은 바쁘다는 핑계로 못 본 척 지나가 버린 보통의 운전자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과의 면에서 보자면, A의 행동은 분명히 나쁜 일이다. 비록 동기는 순수했으나, A의 행위는 자살 의도를 철회하고 다시 잘 살아갈 수도 있었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선의에서든 미필적 고의에서든 그의 행동은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따라서 악의적 살인에 따른 형벌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분명 좋은 일로 평가받을 만한 사안은 아닌 것이다. 결국 동일한 행동도 그것을 동기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결과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선과 악으로 확연히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이차대전이 한창이던 독일의 어느 곳. 히틀러의 수행 비서인 B는 요즘 들어 심한 번민에 쌓여 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의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사회의 혼란에 염증을 느껴 일찍이 국가사회주의당에 가입한 B는 히틀러야말로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재현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겼고, 그런 그를 보좌하는 자신의 일에 무한한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대량 학살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B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이 자국민의 희생은 예상보다 심각했으며, 그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독일의 부흥이 도리어 독일의 파괴로 귀착되어 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차라리 히틀러를 암살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떠올랐다.
그의 이런 결심을 방해하는 것은 상관에 대한 불복종이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살인하지 말라는 가톨릭의 가르침이었다. 현실이 비참해질수록 어릴적의 신앙에 자기도 모르게 경도되어 가고 있었고, 사실 비서에 불과할 뿐 실제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그에게는 살인이 심각한 문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B는 히틀러를 암살해야만 할까, 아니면 그러지 말아야 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살에 찬성할 것이다. 히틀러를 암살함으로써 수백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행동의 좋고 나쁨을 그것이 가져올 결과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좀더 많은 행복을 야기하는 행동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수의) 살인을 막기 위해 (소수의) 살인을 한다는 역설적인 입장으로서,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발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결과와 목적을 강조하는 입장에 대해서, 어떤 원칙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히틀러의 암살에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고, 이런 원칙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초기부터 모든 사람들이 이 원칙을 지켰더라면, 히틀러와 같은 인물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히틀러 자신도 살인을 재미삼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름대로의 대의명분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적 실현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히틀러도 그의 암살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이런 우스운 일치를 극복하기 위한 길은 원칙에 대한 예외 없는 존중뿐이다. 그러나 예외 없는 규칙이 어디에 있으며, 무시이래로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이 저질러져온 것 역시 사실 아닌가? 이러한 현실을 무시한 채, 원칙의 고수만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처럼 서로의 꼬리를 무는 반박의 순환, 그 중심에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을 목적 달성의 결과에 둘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동기의 원칙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을 탐구하기에 앞서, 도대체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하는 선악 자체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보통 선이란 말에서 착함과 좋음을 떠올린다. 선(善)이라는 한자어가 온순한 양(羊)을 표상하여 만들어졌듯이, 착함으로서의 선은 어질고 고운 마음씨를 뜻한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性善)’고 할 때, 그가 말하는 본성의 선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뜻하는 것인데, 이렇게 어진 마음이 곧 착함으로서의 선이다.
이에 비해 좋음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싫다’의 반대로서 ‘좋다(好)’는 주관적인 감정 표현인데 반해서, ‘나쁘다’의 반대어로서의 ‘좋다(善)’는 객관적인 가치 평가이다. 예를 들어 “그 의사가 좋다”고 할 때, 전자의 의미로는 “나는 그 의사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지만, 후자의 의미로는 “그 의사는 훌륭하고 유능하다”, 다시 말해 “그 의사는 환자의 건강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만한 능력이 있어서 진단이나 투약을 잘하는 자이다”라는 뜻이다.
서양의 윤리학에서 논하는 선은 착한 심성이나 개인적인 호감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훌륭하다’ ‘유능하다’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에서의 좋음이다. 이런 식의 좋음을 뜻하는 선을 영어로는 good, 라틴 어로는 bonus, 그리스 어로는 agathos라고 표현한다. 이 세 가지 단어는 단순히 문자적인 번역을 넘어서, 각 시대의 세계관까지도 반영한 말들이다.
먼저 그리스 어 agathos는 주로 훌륭함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좀더 나은 상태를 뜻하는 aga와 연관된 말인 agathos는 보다 훌륭하고 좋고 바람직한 것으로서의 어떤 ‘완전함’을 상징한다. 이럴 경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최대한 구현하여 그런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이 좋은 것, 즉 선이다. 예를 들면, 좋은 물병 훌륭한 물병은 물병을 물병이게 하는 물병의 본질[물병다움=용도]을 완전하게 실현한 것이고, 좋은 인간 훌륭한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인간의 본질[인간다움=이성]을 완전하게 실현한 자이며, 좋은 국가 훌륭한 국가는 국가를 국가이게 하는 국가의 본질[국가다움=정의]을 완전하게 실현한 나라이다.
이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물의 고유한 본성을 완전히 발휘하여 자기의 존재의미를 충족시키는 것을 선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라틴어 bonus는 주로 즐거움이나 행복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시대인 중세에서 선은 자연적 본성의 발휘라기보다는 전능한 신의 의지의 발현이다. 이제 완전한 존재인 신은 선 그 자체이고, 행복은 그런 신을 신앙함으로써 채워지는 충만한 기쁨으로 간주된다.
이런 식의 행복과 기쁨을 뜻하는 beo와 그런 것을 가져다 줌을 뜻하는 dou에서 유래한 말이 바로 bonus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특별 수당쯤으로 알고 있는 보너스는 원래 신을 묵상하거나 신앙하는 것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일종의 배당금처럼 할당된 행복이나 기쁨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근대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행하였는데,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말이 영어 good이다. 이때 good은 주로 유능함 또는 유용성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결합과 일치라는 뜻의 ghedh와 관련된 중세 영어 god에서 유래한 good은 원래 ‘∼에 적합한’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것에 적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하는 데 적당하고 유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good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능력이나 쓸모가 있다는 유용성의 측면이 강조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근대에는, 특히 산업혁명 이후의 영미 계통에서는, 인간이 바라는 목적이나 욕구가 충족되어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곧 선이고 바람직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산업주의와 자본주의가 세계화의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오늘날, 선의 표준적인 모델은 이런 식의 유용성이다. 이런 입장을 좀더 극단화시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쓸모가 있는 유용한 사람, 그런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바로 좋은 사람이고, 그렇게 되는 것이 곧 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서양에서 선은 훌륭함이나 완전함, 즐거움이나 행복 또는 충만, 유능함이나 유용성 등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선의 반대로서의 악은 불완전함과 무능함과 결핍을 그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인간의 이성적 본질과 사회의 합리적 규범과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와 신의 엄격한 명령 등을 위반함으로써 야기되는 모든 불행과 고통과 죄가 바로 악이다.
이처럼 위반으로 인한 고통이 곧 악이라는 점은 악의 영어형인 evil과 bad를 분석해 보아도 알 수 있다. evil은 ‘초과’라는 뜻의 upel과 관련된 중세 영어 ivel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적당한 한계를 넘어선’이라는 뜻이고, bad는 ‘강요’라는 뜻의 bheidh와 관련된 중세 영어 badde에서 유래한 말로서 본래 ‘괴롭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이 정신적인 이성인 이상, 육체나 물질이나 감각은 선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악과 관련될 수밖에 없게 된다.
더욱이 선악과를 처음 따먹은 것이 여자였다는 신화 이래로, 여성은 육체나 물질이나 감각의 화신으로서, 정신과 이성의 소유자인 남성을 악으로 유혹하는 존재로 간주돼왔다. 이제까지 말한 선(good)과 악(bad)이 우리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면, 옳음과 그름에 해당하는 것은 정(正, right)과 사(邪, wrong)이다. 우리말 ‘옳다’는 ‘바르다’와 관련된 말이다. 이 점은 ‘옳다’에서 유래한 ‘오른’쪽과 ‘바르다’에서 유래한 ‘바른’쪽이 모두 같은 방향[右]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바르다’는 직선처럼 올곧은 어떤 원칙에 잘 ‘맞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름이나 맞음이라는 뜻의 옳음은 주어진 평가의 기준이나 원칙에 잘 부합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옳다는 뜻의 영어 right의 고어형 riht는 원래 ‘직선을 따라 움직인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똑바르고 올바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right에는 옳음과 오른쪽이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직선을 곧바로 따라가기에 올바른 것이라는 뜻도 함축돼 있다. 결국 우리말 ‘옳음’과 영어 right는 상당히 유사한 발상법 하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양자는 직선처럼 곧은 것을 진리나 원칙으로 상정하고 이것에 따르는 것을 옳음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처럼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원칙을 일종의 직선적 이미지로 표상하는 것은 한자어에서도 나타난다. 바르다거나 옳다는 뜻의 정(正)은 사람이 땅(一)에 발(止)을 딛고 똑바로 서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리나 규범에 똑바로 들어맞음이 옳음이라면, 옳지 않음이란 그런 것에 잘 맞지 않아 뒤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는 옳지 않은 것은 그른 것이고, 그른 것은 어긋나거나 틀어진 것이며, 틀어진 것은 곧 틀린 것이다. 또한 그름을 뜻하는 영어 wrong의 어원 wring은 본래 ‘뒤틀린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양자 사이의 비슷한 발상법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좋음과 나쁨 혹은 옳음과 그름에 관해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단순히 어원학적 분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들에 관한 철학적인 용법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였다. 즉 윤리학에서 ‘좋음’은 주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유용한 것’인데 비해서, ‘옳음’은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에 순수하게 따르는 것’을 뜻한다. 좋음과 옳음의 이런 의미는 다음 장에서 도덕 판단의 기준을 논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의사가 있다”와 “그 의사가 좋다”는 다른 차원의 말이다. “그 의사의 행동은 늦었다”와 “그 의사의 행동은 옳았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의사가 있다”는 것은 그가 부재중이 아니라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말이며, “그 의사의 행동이 늦었다”는 것은 그의 조치가 시의적절하지 못해 환자의 치료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양자는 모두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 관한 진술이다.
그것들은 좋든 싫든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관한 기술이며,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인 존재(is)에 관한 판단이다. 이에 비해 “그 의사가 좋다”는 것은 그가 훌륭하고 유능하다는 말이며, “그 의사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그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잘 수행했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는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의 여부보다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고 바람직하고 옳으냐 하는 평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그것들은 있으면 좋을 어떤 가치에 관한 평가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인 당위(ought)에 관한 판단이다.
윤리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인 도덕판단은 전자와 같은 사실판단이나 존재판단이 아니라, 후자와 같은 가치판단 혹은 당위판단이다. 다시 말해 도덕판단이란 당위와 가치에 관한 평가 진술로서, “어떤 것이 좋다 / 나쁘다”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 것이 개인이나 개인의 행위 혹은 개인의 양심 등일 때 그것은 개인윤리적 도덕판단이며, 그 어떤 것에 해당하는 것이 사회의 구조나 제도 또는 정책 등일 때 그것은 사회윤리적 도덕판단이다.
종래의 윤리학에서는 개인윤리가 중심이었다. 개인의 행복이나 쾌락, 우정, 용기 등이 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란 단순한 개인의 총합 이상의 것이며, 사회의 기본 구조는 개인의 성격과 희망, 나아가 개인의 지능과 능력까지도 결정하는 엄청난 힘을 지녔다는 것이 밝혀져 감에 따라 사회윤리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서양에서 공리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은 이러한 일종의 사회윤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개인의 책임을 사회라는 맥락에서 재규정하는 사회윤리에서는, 개인을 지배하는 논리와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다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우선적으로 작용하여 개인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지주가 농노를 착취하는 봉건체제 하에서 지주의 자선 행위는 개인윤리적으로는 선일 수 있지만, 사회윤리적으로는 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상실을 막기 위해 지주가 춘궁기의 농노에게 식량을 원조해 주는 것은 도리어 농노의 저항 의식을 마비시켜, 부당한 체제를 영속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윤리를 무시한 채 체제 자체의 정당성을 미리 가정해 놓고, 개인 윤리만 문제시하여, 그 체제 내의 모든 개인들이 선해지면 사회도 선해지리라 기대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발상법은 당연히 져야 할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사회에 전가하는 무책임을 양산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파렴치한 범죄자에게 그의 개인적인 책임을 먼저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범죄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그러한 일이 발생할 만한 사회의 배경을 미리 정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경우, 개인들을 모두 구제하다 보면 사회 전체도 구원되리라는 소박한 종교적 낙관주의는 사회윤리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나아가 사회의 모순을 합리화하는 지배자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일체 중생의 구제를 추구하는 불교는 개인의 완성과 아울러, 개인의 행위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배경적 구조의 정화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개인윤리적으로 보느냐 사회윤리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도덕판단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개인윤리든 사회윤리든 양자가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공통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지시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고, 이런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윤리학의 임무라고 보는 생각이다. 행위의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윤리학을 규범윤리학이라 부르며, 이것이 윤리학의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사실판단과 존재판단에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를 사실에 대한 경험적 검증을 통해 결정한다. 예를 들어 “그 의사가 있다”는 판단의 진위를 알려면, 그 사람이 실제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여, 그 판단의 내용과 사실이 일치하는지를 보면 된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 가치를 평가하는 규범윤리학에서는 도덕판단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사실판단에서처럼 그렇게 일의적이지 않다. 가치판단과 당위판단은 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평가인데, 행위의 평가는 그 행위의 원인인 동기와 그 행위의 결과라는 최소한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행위의 동기나 그 동기가 의무로서 고수하고자 하는 원칙, 행위의 결과나 그 결과를 통해 실현되는 목적이라는 두 가지의 진영 중 어느 쪽에 기준점을 두느냐에 따라 선과 악, 정과 사의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도덕판단의 기준을 동기나 의무나 원칙에 두는 입장을 일러 의무론(deontology=deon 의무+logos 이론)이라고 한다. 즉 의무론이란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행위의 원칙이 의무로서 주여져 있다고 봄으로써, 여기에서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는 이론을 말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직관적으로 인정되는 도덕적 의무나 원칙이 마치 율법처럼 부과되어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주로 히브리적 전통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무론에서는 양심에 비추어 자명한 의무와 그것을 무조건 지키고자 하는 동기의 순수성과 원칙의 예외 없는 고수 등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윤리학에서 ‘옳음’이란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에 순수하게 따르는 것’을 뜻하고, ‘좋음’은 주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유용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었다. 이런 정의에서 보자면, 원칙의 고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의무론은 좋음보다는 옳음을 우선시하고, 옳음에 의해 좋음을 규정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옳다고 하는 것은 결과 이전의 문제이므로, 어떤 결과가 오건 도덕적 원칙은 예외 없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앞서 예를 든 히틀러의 암살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 된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명하게 인정하는 원칙인 이상, 정당한 살인이란 인정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사 한 사람의 살인을 통해 다수의 살인을 막는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더라도, 살인하지 말라는 의무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옳은 원칙이기에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덕 규칙을 준수하는 데 전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의무론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상황에 따른 예외가 없는 규칙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훨씬 심각하고 처참한 상황의 초래를 막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택되는 선의의 거짓말이나 살인 등이 현실에선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무론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원칙들 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해결하기가 몹시 힘들다는 점이다.
각자 고수하고자 하는 원칙이 상충될 때는 그 결과를 보고 우선 순위를 판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은 이미 의무론이 아니라 결과 중심의 목적론으로 되고 만다. 여성 고용 할당제라는 예를 들어 보자.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를 늘려 남녀의 차별 구조를 개선해 보려는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 일선 기업주들의 반응이 미온적이자, 이를 시정하고자 매해 신규 채용 인원의 일정 부분을 여성의 몫으로 할당하라는 의무 조항을 정부가 마련했다고 하자.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이 제도에 대해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관행과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만인은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워 그 제도에 반대할 것이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여성을 우대하는 것은 거꾸로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칙을 중시하는 동일한 의무론이더라도, 지지하는 원칙이 무엇이냐에 따라 찬반이 판이하게 갈리는 사례를 우리는 낙태의 문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은 태아도 인간이라는 주장과 ‘살인하지 말라’는 원칙에 의거해, 낙태에 대해 반대할 것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태아는 인간이다. 따라서 태아를 죽이는 낙태는 그르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진보적인 여권론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신체를 자기 의지에 따라 처리할 수 있다”는 원칙을 내세워, 낙태에 찬성할 것이다. 국가, 종교, 관습, 남성 등에 의한 여성 육체의 억압이나 간섭을 배제하고 여성의 신체적 자율권을 옹호하는 그들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이상, 낙태 여부에 대한 선택권도 당연히 여성 자신에게 있고, 그의 결정에 따라 얼마든지 낙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설사 상충되더라도 원칙의 고수를 척도로 삼는 의무론과는 달리, 도덕판단의 기준을 행위의 결과나 목적에 두는 입장을 일러 목적론(teleology=telos 목적+logos 이론)이라고 한다. 즉 목적론이란 인간이 추구할 바람직한 목적을 제시함으로써, 여기에서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는 이론을 말한다. 그리하여 목적론에서는 행위의 목적과 그 목적이 실현된 결과와 그 결과가 가져오는 효용성 등을 중요시한다.
이것은 행위의 결과를 미리 예상하여 계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성적 사유에 의한 헤아림을 중시하는 그리스적 전통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옳음이 원칙의 준수와 관련되고 좋음은 주로 결과의 유용성과 관련되는 이상, 결과의 효과를 강조하는 목적론은 옳음보다는 좋음을 우선시하고 좋음에 의해 옳음을 규정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행동을 옳거나 그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행동이 가져올 결과의 좋고 나쁨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앞서 예를 든 히틀러의 암살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 된다. ‘살인하지 말라’는 원칙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뿐인데, 히틀러의 경우엔 오히려 그를 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목적론에서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고, 도덕적 원칙을 지키고 어기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행위의 결과에 비추어 언제라도 도덕적 원칙에 예외를 허용하는 목적론은 의무론과는 정반대로 너무 느슨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결과의 효용성에 따라 지나치게 많은 예외를 허용할 경우, 원칙이나 규칙 자체의 보편성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으로 준수되지 않는 원칙이 과연 원칙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목적론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결과의 효용성의 크기가 비슷할 경우, 이것을 해결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여성 고용 할당제라는 예를 다시 들어 보자. 애당초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를 늘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므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 제도에 찬성할 것이고, 이 제도가 시행되면 여성들은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역차별의 소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 제도에 반대할 것이고, 그 제도가 폐지되면 남성들은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비슷하므로,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오는지 평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행복을 이렇게 외형적 숫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면에서 검토해 볼 수도 있다. 행복을 경제적 효용성과 관련해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작업의 숙련도와 경쟁력 면에서 훨씬 우위에 있는 남성들을 좀더 많이 고용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부가 증대될 수 있고, 국민의 일부인 여성들도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에 반해 행복을 동등한 대우와 관련해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성 고용 할당제 자체가 원초적 평등이 침해됨으로써 야기된 문제이므로, 남녀의 본래적 평등을 위해선 여성 고용 할당제라는 일시적 불평등은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불평등과 역차별은 일시적이나, 그 결과 차별이 폐지된다면 그 제도의 가치는 영속적이고, 따라서 그 제도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적이든 질적이든 결과가 가져오는 행복이 비슷할 경우, 목적론적 효용성을 평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은 낙태의 문제에서도 확인된다. 목적론은 오직 결과가 가져오는 이익에 의해서, 즉 욕구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성취하는 정도에 의해서 어떤 것의 정당성 여부를 판정한다.
따라서 목적론에서는 원칙의 고수는 중요하지 않으며, 낙태는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의해서만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의 충족을 통한 행복감을 자각할 능력이 아직은 없다고 여겨지는 태아의 이익은 배제하고, 오직 태아의 지속적 생존이 임산부나 그의 가족과 사회 및 출생 후의 아이에게 가져올 이익만을 고려하여, 각 사례들마다 결과를 비교한다.
먼저 임신으로 인해 산모의 건강에 심각한 위험이 초래될 경우, 낙태할 때 올 결과[산모의 건강 회복]가 낙태 안 할 때 올 결과[산모의 사망] 보다 유리하므로, 목적론자는 낙태에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남아선호 사상에 사로잡혀 여아를 제거하고자 할 경우, 낙태할 때 올 결과[성비의 붕괴와 남녀의 불평등 조장]가 낙태 안 할 때 올 결과[성비의 유지와 남녀의 평등에 기여] 보다 불리하므로, 목적론자는 낙태에 반대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는 달리 단순 쾌락의 산물로 임신된 아이를 제거해 자신들의 부담을 줄이려 하는 경우에는, 결과를 장기적으로 보느냐 단기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찬반이 갈린다. 장기적으로 볼 경우, 낙태할 때 올 결과[성문란 풍조의 조장]가 낙태 안 할 때 올 결과[성문란 풍조에 대한 경종] 보다 불리하므로, 낙태에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볼 경우, 낙태할 때 올 결과[부모의 부담 감소]가 낙태 안 할 때 올 결과[고아원 설치 등 사회적 부담의 증가] 보다 유리하므로, 낙태에 찬성할 것이다.
이처럼 결과의 효과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목적론에서 결과의 행복을 비교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잘 보여준다. 이상에서 제시된 의무론과 목적론의 갈등은 한마디로 원칙과 효과, 동기와 결과의 긴장이며,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명분과 실리의 충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갈등은 인간의 행위가 계속되는 이상, 결코 쉽게 풀리지 않는 도덕적 딜레마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에 대한 좀더 다른 시각이 필요한데, 이것을 우리는 불교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불교 윤리의 기본적 입장을 잘 표현해 주는 말로 이른바 칠불통계(七佛通戒)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많은 선을 받들어 행하되,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여기서 첫 번과 두 번째 구절은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하라(止惡修善)’는 뜻으로, 이것은 어떠한 형태의 윤리나 도덕에서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교훈이다. 그런데 선을 하고 악을 하지 말라는 것은 ‘좋은 일을 하면 즐거운 과보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괴로운 과보가 온다(善因樂果 惡因苦果)’는 원리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이렇게 악을 폐하고 선을 권하기 위해서도 선과 악은 즐거움과 괴로움만큼이나 확연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일반적인 윤리는 선과 악의 분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윤리학에서 논하는 선은 악과의 관계에서 악과 대립된 선, 즉 일종의 상대적인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인 악에 대해서, 선은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인데, 이렇게 부귀영화나 무병장수라는 미래의 즐거운 과보를 약속함으로써, 세간의 상대적인 선은 인간에게 집착심을 유발시킨다. 결국 선과 악의 상대적인 분별의 근저에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번뇌심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의 선을 유루선(有漏善)이라고 부른다.
선과 악의 분별이 집착과 번뇌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상,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한다고 해서, 생로병사로 인한 근원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 상태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착과 번뇌를 낳을 뿐인 이원적인 분별심 그 자체를 가라앉혀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는 것이 세 번째 구절의 내용이다. 윤리적으로 선과 악을 논하기에 앞서, ‘선과 악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원래 상태(善惡未分前本來面目)’로 되돌아가, 상대적인 의미에서 선과 악에 매달려 머리를 아프게 하지 말고(不思善 不思惡), 오히려 보다 넓은 차원에서 선도 악도 넘어서라는 것이다.
이렇게 선과 악을 초월하여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최고의 선(勝義善)이며, 선과 악의 상대적 분별과 대립[對]이 끊어진[絶] 절대적인 선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탐욕(貪)과 분노(瞋)와 무지(痴)로 인해 끝없이 새어나오는(漏) 번뇌가 마침내 차단되기 때문에, 그것을 일러 무루선(無漏善)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선악 이전의, 선악의 경계선 너머의 본원적 절대성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일반적 윤리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적 종교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선악을 초월한다고 해서, 선악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선악 이전의 청정심의 자리로 돌아가, 그 자리를 윤리와 선악의 원천으로 삼음으로써,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저절로 세간의 윤리 규범에 상즉(相卽)하여 전혀 잘못됨이 없는 상태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이야말로 선악 초월의 자유(自由)와 선악 즉응(卽應)의 자재(自在)가 만나는 곳이며, 세속선과 승의선, 상대적 선과 절대적 선, 세간적 선과 출세간적 선, 유루선과 무루선이 융통하는 접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처음의 두 구절과 세 번째 구절을 결합하여, 네 번째 구절에서 그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회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회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출세간은 세간에서의 도피나 은둔이 아니라, 세간 속에서의 출세간화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자신을 위해(自利) 지혜를 구하는 것(上求菩提)과 아래로는 중생을 위해(利他) 자비로 교화하는 것(下化衆生)이 둘이 아니며, 개인의 깨달음의 추구와 깨달음의 사회화가 서로 조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의 사회화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단순히 깨달은 개인의 수를 늘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 등을 깨달음에 적합한 배경으로 가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개인윤리와 사회윤리가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불교의 윤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선을 표현하는 말로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이 팔리어 pun 이다. 번영과 번창과 성공을 뜻하는 push와 관련된 말인 pun 는 선한 행위, 그런 행위로 생기는 복이나 공덕, 좋은 과보를 가져다 주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즐겁고 좋은 과보에 해당하는 것에는 일차적으로 무병장수나 부귀영화 등이 속하지만, 윤회를 당연시했던 당시의 인도인들에게 가장 좋은 과보는 무엇보다도 천계에 태어나는 것(生天)이었다.
이처럼 ‘좋은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뜻의 pun 는, 그것이 즐거운 결과의 창출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행복을 가져오는 유용한 것’이라는 뜻의 영어 good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과보가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라면, 가장 나쁜 과보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墮地獄)일 것이다.
따라서 좋은 과보와 관련된 선이 pun 라고 표현된다면, 좋지 않은 과보와 관련된 악은 a라는 부정접두사를 결합해 apun 라고 표현될 수 있다. 또한 악에서 나쁜 과보로 인한 괴로움을 강조할 경우에는, 원래 고통이라는 뜻을 지닌 말 pa a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상과 같은 선악은 모두 즐거운 과보나 괴로운 과보와 연관된 상대적인 개념들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분별과 대립을 넘어서 절대적인 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팔리어 kusala이다. 물론 이 말은 pun 처럼 상대적인 선을 나타낼 때에도 쓰이지만, 절대적인 선을 지칭하고자 할 경우에는 언제나 kusala라는 표현만 사용한다.
이러한 용법은 “세상의 선과 악 양쪽 모두의 집착에서 벗어나”(법구경 412)라고 할 때의 선이 pun 인 반면, 부처님께서 “나는 29세에 선을 구하여 출가하였다”(장아함경)고 할 때의 선은 kusala라는 데서도 확인된다. kusala의 이러한 용법은 인도의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원래 적합함이나 건전함이라는 의미를 지닌 kusala는 교묘함이나 숙련됨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것에 적합함은 어떤 것에 잘 들어맞음을 의미하는 바, 이 어떤 것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다르마(dharma, 法)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절대적인 선이란 곧 ‘다르마에 잘 들어맞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다르마야말로 불교 사상의 정수이다. 본래 ‘떠받치다’ ‘유지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다르마는 십여 가지의 의미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다음의 네 가지다.
첫째, 인간 사회를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사회의 ‘질서’나 카스트 제도상의 ‘의무’를 뜻하는데, 불교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통 인도 사회에서는 그 말을 주로 이렇게 사용했다.
둘째, 세계 만물을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우주의 ‘질서’나 만물의 ‘법칙’ 또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것은 종래의 협소한 용법이 불교의 등장으로 인해 훨씬 확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셋째, 이런 만물의 법칙에 의해 지탱되어 유지되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사건들’이나 ‘사물들’을 의미한다.
넷째, 그런 만물의 법칙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가르침’이나 ‘교리’ 혹은 ‘경전’ 등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 불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는 두번째인데, 여기서 만물의 법칙이란 곧 연기(緣起)를 가리킨다. 연기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수많은 조건들(緣)이 상호의존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난다(起)는 뜻이다. 이처럼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영원불변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없다(無常)고 하는 것이며, 자신만 고립되어 존속하는 실체도 없다(無我)고 하는 것이다.
즉 연기이기에, 무상이고 무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서, 일체를 고정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겨 거기에 매달릴 때 괴로움(苦)을 느끼지만, 그러한 이치를 깨달아 더 이상 얽매이지 않을 때 진정한 자유(涅槃)를 얻는다. 따라서 연기를 다르마 또는 법(法)이라고 한다면, 무상과 무아와 고와 열반은 그런 법의 징표(印)로서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연기라는 다르마를 본 자를 붓다(佛)라 하고, 그런 다르마에 잘 들어맞은 것을 절대적 의미의 선, 즉 승의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악 초월적인 선으로서의 kusala는 악에 대한 상대적인 선을 지칭하는 good으로는 다 담아내기가 힘든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옳음이나 바름을 표현하는 말로는 팔리 어 samma彭 있다. 이것은 ‘함께’나 ‘하나의’라는 뜻의 sam解 연관된 말로서 적절함이나 정확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함께 하나로 된 것은 여럿이 합쳐 하나로 된 완전한 상태를 함축한다는 점에서, samma愎 무수한 수행을 통해 다르마에 따름으로써 성취된 열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옳음이란 ‘다르마와 하나가 됨’ 또는 ‘다르마에 따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어떤 것에 따름으로써 올바르다’는 뜻의 영어 right와 유사한 발상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따르는 대상이 하나는 다르마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신의 섭리나 율법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내용이 판이하다고 하겠다.
옳음(正)의 반대로서 그름(邪)을 불교에서는 miccha 또는 mithya偏箚 한다. 이 말은 사악함이나 잘못을 의미하지만, 그 어원이 ‘충돌’이라는 뜻의 mith에 있음을 볼 때, 그 본뜻은 ‘다르마에 어긋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름을 뜻하는 영어 wrong 역시 그 어원적 의미가 뒤틀림이나 어긋남에 있다고 하는 것은 양자의 유사성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양자 또한 그 어긋남의 대상에 있어서는 내용이 상이하다. 이상에서 우리는 불교에서 통용되는 선악과 정사의 의미를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불교에서는 상대적인 선 너머의 절대적인 선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반적인 윤리학과는 다른 불교 윤리의 특징인 것이다.
윤리학에서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고 도덕판단을 내릴 때, 그 대상이 되는 어떤 것에는 개인의 행동이나 사회의 구조 등이 해당된다. 이처럼 도덕판단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행위를 불교에서는 업이라는 관점에서 다룬다. 업(業, karma)의 산스크리트 어원 kr.는 ‘하다’ 또는 ‘만들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만든다는 것에는 만드는 의도와 만들어진 결과물 등이 관련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kr.에서의 ‘하다’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다’이고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하다’이다. 그래서 이러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업도 의도나 동기로서의 ‘의지’, 그런 의지를 동반한 활동인 ‘행위’, 그런 행동에 의해 남겨진 ‘영향력’이라는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 업은 단순히 ‘행위’ 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원인의 측면[의지]과 결과의 측면[영향력]을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의지를 동반하지 않은 활동은 단순한 운동일 뿐, ‘행위’나 행동은 아니다. 따라서 불교적 도덕판단의 대상은 반드시 의지를 동반한 활동이며, 이 ‘의지(cetana 思)’야말로 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불교적으로 보자면, 고의로 범하지 않은 살인은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처음에 거론한 한강의 자살자의 경우에서 A의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처럼 의지의 발동으로 인해 업이 일단 이루어지면, 반드시 ‘영향력’을 미쳐 그 과보를 받는다. 업은 마치 식물과도 같아서, 일단 씨앗이 뿌려지면 과보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지를 지닌 인간이 업을 일으켜 자신의 선악(善惡)업에 따라 생사를 유전하면서 고락(苦樂)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곧 업설의 취지이다.
이러한 업설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사는 신의 뜻이나 숙명이나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스스로가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자업자득(自業自得)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도 숙명도 우연도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행위뿐이며, 또 이처럼 자유의지를 인정할 경우에만 도덕적 책임의 소재지도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둘째, 업(業)과 보(報)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선악의 행위는 세력이 강하므로 행위가 그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그 행위자에게 여력을 남기는데, 이런 업보의 인과관계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쳐 계속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고의로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현세가 아니면 후세에라도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한 행위는 언젠가는 꼭 행복한 결과를 맺으리라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확신이야말로 선한 행위를 한 자가 불행을 당하기도 하는 우리 주변의 현실에 대한 의미있는 처방이 될 수 있다. 어떤 일을 할 것이냐를 결단하는 것은 자기 의지의 자유이지만, 일단 지어진 업은 그에 해당하는 과보를 반드시 받는다고 하는 업설의 두 가지 의미는 자유와 필연 사이의 불교적인 조화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업보의 사상을 다룸에 있어 꼭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과에 어둡지 않아야 하지만, 인과에 떨어져서도 안된다(不昧因果 不落因果)”는 점이다. 좋은 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나쁜 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인과업보의 필연적 관계성을 잘 인식하여 언제나 선업을 쌓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즐거운 과보에 대한 목마른 기대는 집착과 번뇌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인과업보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상대적 선의 세계와 선과 악 모두를 초월하는 절대적 선의 세계가 원융상통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화의 관점에 바탕을 둔 인과업보의 사상이 선과 악에 대한 불교적 도덕판단의 기초를 이룬다.
이제 불교의 인과업보 사상에 담긴 의무론적 요소와 목적론적 요소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앞서 윤리학에서 목적론은 행위의 목적과 그것이 실현된 결과와 그런 결과의 행복을 얻는 데 유용한 효용성 등을 강조하는 이론이라고 했었다.
간단히 말해 목적론이란 욕구의 충족을 통해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을 추구하는 논리라고 하겠다. 그런데 불교의 업설에서는, 선한 행위는 즐거운 과보를 악한 행위는 괴로운 과보를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고 하여, 업과 보 사이의 필연적 인과관계를 강조했었다. 따라서 목적론이든 업설이든,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목적론]과 즐거운 과보를 가져다주는 것[업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행복한 결과란 고통의 부재나 욕구의 충족 또는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쾌락 등을 의미하고, 즐거운 과보는 부귀영화나 무병장수 혹은 천계에 태어남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업설에서 진정으로 지향하는 것은 욕구의 충족을 통한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욕구의 소멸을 통한 행복의 추구라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서는 미래의 과보를 약속함으로써 집착을 야기하는 상대적인 선에 머무르지 않고, 집착에서 벗어나 무루(無漏)의 마음으로 행하는 절대적인 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업설과 의무론의 관계를 살펴보자. 의무론이란 양심에 비추어 자명한 의무와 동기의 순수성 및 원칙의 고수 등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의무론에서는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선의지]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불교의 업설에서는,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과 악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은 본인 의지의 자유이지만, 전자는 즐거운 과보를 후자는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의무론이나 업설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의 내용은 양자가 상이하다. 의무론에서의 순수한 마음이란 신의 섭리나 율법 또는 양심에 따르는 것인 반면, 불교에서의 순수한 마음은 다르마에 따름으로써 탐욕과 분노와 무지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그 내용이 상이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의무론에서처럼 규칙의 일방적인 강제나 율법적인 의무를 완고하게 고수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동기에서 여러 가지 방편(upa a)을 고려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순수한 마음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업설에서 의지(cetana, 思)를 중시하는 시각을 발견함으로써, 업설에 담긴 의무론적이고 동기론적인 요소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업은 심리적 작용처럼 마음으로 짓는 업(意業)과 신체적 활동처럼 몸으로 짓는 업(身業)과 언어적 표현처럼 입으로 짓는 업(口業)이라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구의(身口意) 3업은 언제나 의지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므로, 업이라는 행위의 본질은 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결과로서 나타난 행위의 선악보다는, 그 행위를 낳게 한 동기나 의지라는 마음의 선악을 더 중시한다. 또한 신구의 3업에서 의업은 사업(思業)으로, 신업과 구업은 사이업(思已業)으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분류 방식 자체가 행위(業)의 비중을 의지(思)에 두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사업이란 행위를 하려는 의지적인 마음 작용을 뜻하고, 사이업이란 의지적인 사업(思業)이 그치고(已) 신체와 언어의 행위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데, 양자는 모두 의지를 중심에 놓는 분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의지나 마음으로 말미암은 행위를 중시하는 선악관은 마음을 본질로 하는 선악관을 낳는다. 즉 불교에서 불선(不善) 또는 악의 근본은 탐욕(貪)과 증오(瞋)와 미망(痴)이라는 세 가지 번뇌의 마음(三毒心)이며, 선의 근본은 이러한 세 가지 번뇌의 마음의 소멸인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 순수한 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삼독심에서 벗어나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自淨其意], 인과의 업보에 더 이상 빠지지 않기[不落因果]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순수한 마음의 동기와 바람직한 결과를 동시에 강조하는 것을 볼 때, 업설의 진정한 의미는 순수한 마음을 무시한 채 즐거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에만 밝은 것[목적론]도 아니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효과적인 여러 방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동기의 순수성이나 원칙의 고수만을 고집하는 것[의무론]도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제대로 이해된 불교의 업설은 동기론과 결과론, 의무론과 목적론 사이의 중도인 것이다. 물론 이때의 동기란 삼독심에 빠지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서, 자아의 집착에서 나온 이기심이 사라진 동기를 말하며, 결과란 여러 가지 방편들을 통해 최고선으로서의 열반을 성취하는 것 또는 그런 최고선을 실현하기에 알맞게 사회적 배경을 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찾기에 앞서,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근원 상태를 먼저 보고, 여기에서부터 어떻게 선과 악으로 갈라져 나가는지를 관찰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도달된 근원 상태가 더욱 의미 있으려면, 세간의 선악 구분을 무가치한 것이라 하여 던져 버리지 않고, 세간이나 사회의 배경적 구조를 그런 근원 상태에 근접하게끔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불교의 윤리란 도덕과 도덕 이전의 조화이자, 개인적 완성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 윤리와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 윤리의 만남이라고 할 것이다 .
출처 http://budrevi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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