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한 再考
-화쟁의 소통(疏通)적 맥락
박재현
1. 머리말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이 있다. 전국시대에 공맹과 노장을 비롯한 수많은 유사(遊士)들이 중원을 떠돌며 자신들의 세계관과 정치관을 펼쳐 보이던 상황을 묘사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쟁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엄밀히 따져보면 ‘앞다투어 자기주장을 펼쳤다’는 뜻이지, 이론적으로 서로 ‘대립하여 다투었다’는 뜻은 아니다. 청대(靑代)의 유월(兪팟)은 《춘재당수필(春在堂隨筆)》에서 “백가가 쟁명하였는데 어떤 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어떤 것은 전해지지 않는데, 말에 근거가 있어 그것을 지켜 (하나의) 이치를 이룬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고 적고 있다.
유월이 백가의 대립과 다툼에 초점을 맞추어 쟁명(爭鳴)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백가쟁명에 이어서 올 말은 혹승혹불승(或勝或不勝), 혹은 혹승혹패(或勝或敗)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월은 혹전혹부전(或傳或不傳)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주장들 간의 대립과 다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주장들의 ‘난무함’을 염두에 두고서 백가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주장을 세우고 남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없을 수 없지만, 백가쟁명의 쟁(爭)에는 다툼의 의미보다는 ‘주장을 펼침’이라는 의미가 선재(先在)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논쟁(論爭)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백가쟁명의 쟁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이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발견되는데 이른바 화쟁(和諍)이다. 화쟁은 회통(會通)과 더불어 원효(元曉, 617∼686)의 사상을 대표하는 핵심적 개념이다. 그리고 이 사상이 불교이론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한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삼국통일을 이뤄내는 기능까지 담당했다는 사상사적 평가까지 이뤄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평가는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원효의 이론체계를 일종의 화해이론으로 이해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원효가 화해를 평생의 목적으로 삼을 만큼 당시에 대립과 다툼이 심각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파악되는 화해의 방법론은 기본적으로 양시론(兩是論)과 양비론(兩非論)이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와 같은 방법론을 화해이론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것이 이론체계가 될 수 있다손 치더라고 그것이 화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화해는 정치적 입장이나 노선은 될 수 있을지언정 특수한 이론체계로 성립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런데도 원효의 사상을 굳이 화해이론으로 이해하게 된 데는 어떤 선입견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선입견이란 화쟁(和諍)의 쟁(諍)을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논쟁(論爭)으로 이해하여 ‘이론적으로 서로 대립하여 다툰다’는 뜻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결국 원효의 문제의식은 대립과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었고, 그가 회통과 화쟁을 제기하게 된 목적 역시 화해, 즉 싸움 말리기에 있었다고 봤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원효는 더도 덜도 아닌 싸움판을 어떻게 중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평생을 고민하며 살다간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나는 여기서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넘어 화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원효의 문제의식과 그가 화쟁을 제출한 목적이 다툼과 화해의 구도로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와 같은 비판적 입장을 기초로 하여 화쟁사상이 도출된 배경과 목적을 새롭게 제시해 보기로 한다.
2.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과 문제제기
원효의 화쟁사상을 보는 모든 학자들의 시각을 일일이 거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자들의 시각에 대해 한 연구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원효)의 사상에는 모든 논의의 本意를 적출하여 一味로 엮음으로써 불필요한 ‘대립과 다툼을 화해시키는’ 會通과 和諍의 태도 및 그 논리가 일관되게 자리잡고 있다. 원효는 ‘특정 학파나 종파의식으로 인한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和諍과 會通의 정신으로 모든 經論을 소화하였고 그의 삶 역시 이에 충실하였다는 것은 원효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이 ‘한결같음’에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별 다른 반성 없이 그야말로 ‘한결같이’ 원효 당시의 불교 이론 사이에 그리고 특정학파나 종파 사이에 대립과 다툼이 있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효는 이러한 다툼을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해 왔다. 이처럼 원효의 역할이 대립과 다툼의 화해(reconciliation)와 조화(harmonization)에 있었으리라는 이해는 이 개념들의 영역(英譯)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처럼 원효를 이해했기 때문에 결국 그의 사상이 종합주의(syncretism)적 특징을 보이며, 원효는 물론 지눌 역시 한국의 화엄불교를 대표하는 위대한 종합주의자들(greatest syncretists)5)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을 두고 제기할 수 있는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원효 당대에 학파나 종파간에 대립이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먼저 원효의 활동기를 중심으로 해서 당시의 대표적인 승려들을 들어보면,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화하여 백고좌(百高座)와 팔관회(八關會)를 행하게 했던 혜량(惠亮)과 승려의 몸으로서 수나라에 군사를 비는 〈걸사표〉를 썼던 원광(圓光, 532∼630), 그리고 황룡사 구층탑 설립의 장본인이며 대국통의 지위에 올랐던 자장(慈藏, 590∼658) 등이 있다.
이들의 활동상을 염두에 둘 때, 원효의 활동기와 그 직전의 신라불교는 왕족중심의 종교로서 이론이나 종파와는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국가경영의 이데올로기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효를 비롯해서 의상(義相, 625∼702), 경흥(憬興), 태현(太賢) 등에 의한 교학불교의 발전이 눈에 띈다. 이들은 주로 당나라에서 유학한 인물들로 이들을 통해 볼 때, 신라의 교학불교는 주로 화엄학과 유식학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신라의 교학불교에서 배타적인 종파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신라불교에 본격적인 종파의 형성이나 유식과 화엄의 대립에 관한 문제는 원효의 사후, 다시 말해서 신라 하대에 이른바 5敎 9山의 성립 이후에나 논의할 수 있는 주제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원효 당대의 신라불교에 과연 불교학파와 종파간의 다툼이 있었다고 상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현존사료를 통해서는 신라시대에 열반종, 계율종, 화엄종, 법성종, 법상종의 다섯 교종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구산선파(九山禪派)도 분명히 신라 때가 아닌 고려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만일 당시 불교계의 대립과 갈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적(史的) 근거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는 한, 원효의 사상이 화해와 조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판단 역시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원효의 사상사적 역할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종합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원효의 입장에 관한 것이다. 사실 종합주의적인 방법론이 무슨 특별한 이론체계가 되기는 어렵다. 종합이란 결국에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의 타협과 절충에 불과할 뿐인데, 이러한 입장도 하나의 이론체계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회통불교를 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 역시 이러한 반성에서 도출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 때문에 최근 들어 회통 혹은 화쟁과 관련해서 작은 논쟁이 일고 있다. 한 쪽에서는 “한국불교는 회통적인가”를 묻고 다른 한 쪽에서는 “회통불교는 허구의 맹종인가”라고 반박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시각이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원효의 화쟁과 회통이 일종의 ‘화해이론’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원효의 화쟁을 과연 화해이론으로 전제해도 좋은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별다른 근거도 없이 원효의 사상이 종합을 지향하는 화해이론이라고 이해해 왔던 것일까? 우선은 화쟁(和諍)이라는 개념에서 ‘쟁(諍)’이라는 한자어가 갖는 전투적인 어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원효의 회통과 화쟁사상이 ‘대립’과 ‘다툼’을 전제로 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은, 바로 화쟁의 쟁이라는 글자에서 비롯된 것일 듯싶다. 그래서 화(和)는 자연히 화해(和諧)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사실 화쟁이라는 두 글자만 두고 보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론들이 서로 대립하여 다투고 있는 형국 말고는 달리 의미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만 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원효의 화쟁사상을 화해이론이나 종합이론으로 평가하게 했던 외부적 요인으로, 화쟁론과 회통론이 학계에 부각되기 시작했던 당시의 국내상황을 들 수 있겠다. “70년대에 이르러 한국학의 진흥을 계기로 한국불교 속에서 일관되는 무슨 맥을 찾으려는 노력이 단편적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 의천이 화쟁국사(和諍國師)의 시호를 원효에게 내린 것에서 ‘화쟁’이라는 단어가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평화를 부르짖듯이 해방 이후 사상의 혼란과 갈등 속에서 불교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이념은 회통―평화, 쟁론을 조화롭게 초월함, 통일, 원융무애, 거칠 것이 없는 자유자재한 해탈의 이상 등이 두루 한 데 녹아들어 있는 듯싶은―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원효의 화쟁을 화해를 통한 종합주의로 평가했던 기존의 연구성과들이 학설과 종파들간의 대립과 다툼이라는 불분명한 사실관계를 전제로 도출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종합주의로 읽는 것이 과연 얼마나 정합적인 판단인지, 그리고 그것을 원효 사상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별다른 반성작업이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여기서 원효의 회통과 화쟁이 대립과 다툼을 화해시키려는 외에 다른 목적에서 제출된 것이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 의도와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원효의 저술을 통해 본 ‘화쟁’의 소통적 의미
1) 《십문화쟁론》에서 보이는 ‘화’와 ‘쟁’의 용례와 뜻
먼저 원효가 화쟁론을 제기한 대표적인 저술인 《십문화쟁론》에서 화쟁에 대한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한 채 화(和)와 쟁(諍)이 쓰인 맥락을 통해 화쟁의 의미를 추측해 보기로 하자. 《십문화쟁론》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받는 느낌은 일단 대립과 다툼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화해(和諧)의 일서(一書)인 듯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서문에서 그것도 十門和諍論이라는 제목에 끼여서 등장하는 두 번을 제외하고는, 본문 가운데 諍이라는 글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和라는 글자 역시 제목에 끼여 나타나는 경우를 제하고 나면, 본문에서 “如理會通 如實和會”라는 구절에서 한 번 나타나고, 최범술(崔凡述)이 복원한 판본에 의하면 《십문화쟁론》 가운데 31장(張)에서 3번에 걸쳐 집중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만일 원효가 대립과 다툼이라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의식이 있었고, 이를 쟁이라는 한자어로 표현하고자 했으며 또 자신의 의도가 화해에 있었다고 한다면, 본문 내에서 다툼의 원인과 상황을 분석하는 데 충분한 논의가 있었어야만 한다. 하지만 원효는 본문 내에서 쟁이라는 한자어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원효의 문제의식의 출처가 대립과 다툼이라는 상황이 아니라 뭔가 다른 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쟁을 화해의 의미로 이해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쟁(諍)의 경우에, 이 말은 분명 언표상 ‘대립’과 ‘다툼’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자연히 화(和)를 화해의 의미로 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좀더 엄밀히 살펴보면 쟁에는 좀 다른 의미가 나타난다. 원효는 《십문화쟁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나는 적절하지만 남들은 적절하지 않다’고도 하면서 드디어 황하(黃河)와 한수(漢水)를 이루었구나.”
여기서 먼저 주의를 요하는 부분은,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릇되다”는 구절과 “나는 적절하지만 남들은 적절하지 않다”는 두 구절이다. 이 구절을 흔히 두 가지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다투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하지만, 엄밀하게 읽을 때 이 문맥은 두 가지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나만이 옳다’는 자신의 입장에만 갇혀 있는 상황을 기술한 것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문장은 모두 대화의 형식이 아니라 독백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름처럼 몰려온다는 비유와 황하와 한수를 이루었다는 비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상징에서 ‘무수히 많음’이라는 의미는 도출해 낼 수 있지만 ‘대립’과 ‘다툼’이라는 의미까지 도출하는 것은 비약임에 분명하다. 원효는 분명 폐쇄적인 온갖 주장들이 일체의 소통을 거부한 채 자기 속에만 갇혀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원효의 비유에서 또 주목을 끄는 것은, “비유하자면 청색과 남색의 체(體)가 같고 얼음과 물은 그 근원이 같다.”는 구절이다. 우리는 청색과 남색 그리고 얼음과 물이 서로 대립하여 다툰다는 상황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이 그 근원을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외형상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된다. 여기서 원효는 수많은 불교이론들이 그 근원을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외형상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바로 이 현재의 외면적인 모습에만 집착하여 서로들 자기의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서로간에 소통이 단절된 채 자기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는 형국을 쟁(諍)이라는 한자어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和)라는 글자는 살펴보았듯이, 제목에 포함되어 나타나는 경우을 제외하면 “如理會通 如實和會”라는 구절과 최범술이 복원한 부분에서만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통과 화회(和會)가 동일한 맥락을 타고 있으며 화해의 화(和)와 화회의 회(會)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차후 논의하겠지만 이는 화쟁이 회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범술이 복원한 《십문화쟁론》 31장(張)에서 화(和)가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만약 세속제에 의거해서 인연도리를 말하면, 인연이 화합(和合)하여 법이 生한다고 한다. 달리 또 세속제에 의거해서 인연도리를 말하여, 오온이 각각 합(合)하니 곧 사람이 생겨난다. 만약 오온이 비록 화합(和合)해도 사람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네 가지 인연이 비록 합(和)해도 또한 법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원효가 인연이 ‘모이는 현상 혹은 사건’을 화합(和合)이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화합을 줄여서 화(和) 혹은 합(合)으로 적기도 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화(和)에는 화해라는 의미 이전에 합(合), 즉 ‘모이다’ 혹은 ‘함께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러한 맥락은 원효가 그의 저술에서 “모든 법(諸法)이 인연(因緣)이 모인 것이므로(和合) 생멸(生滅)이 있다”고 설명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쟁의 화를 ‘모이다’ 혹은 ‘함께 한다’ 정도 이상으로 유추 해석해야만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원효의 《십문화쟁론》에서 회통과 화해, 화합 등은 동일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 하에서 배태된 것이며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인연이 화합한다고 했을 때의 ‘화합’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인연화합이라 했을 때의 화합이 물리적으로 자리이동을 해서 일정한 지점에 모인다는 뜻은 아니다. 인연화합이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서로 함께 작용하여 무엇인가(혹은 어떤 현상)를 생겨나게 한다(혹은 일으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합, 즉 모인다(合/會)는 것은 단순한 자리이동이 아니라 서로 간에 여러 가지 중층적인 인과관계가 얽혀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회통의 통함(通)은 이와 같은 화합의 의미를 보충한다. 결국 화쟁의 화는 화해의 의미보다는 ‘상이한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관계맺음이 다름 아닌 바로 소통(communication)이다.
《십문화쟁론》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는 원효의 기술방법도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원효는 먼저 공(空)과 유(有)의 문제 등 불교 이론상에서 민감한 주제를 하나씩 설정하고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상반된 입장을 각각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먼저 이들 각각에 대해 ‘적절하지 않음(非然)’을 지적한 다음에, 다시 일심(一心)에서 보면 두 입장이 어느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非不然)’고 말한다. 이와 같은 원효의 논의전개 방식을 염두에 두어 그를 화해론자로 보고, 그가 양시론과 양비론을 통해 대립되는 두 주장 간의 종합을 모색하고자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할 때 문제는, 과연 교학의 달인이었던 원효가 한갓 양시와 양비만으로 화해를 충분히 이루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점이다. 아울러 이렇게 본다면, 그가 양시론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일심 역시 시비가 발생하게 된 논의의 범주를 무한확장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희석하거나 무의미하게 하는 도구적 기능을 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원효를 화해론자로 읽게 되면,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일심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논의범주를 확장시켜 쟁점을 희석시키는 실용적 효과를 노리고서 제출된 것일 뿐이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십문화쟁론》에서 보이는 원효의 문제의식은, 대립과 다툼의 상황이 아니라 여러 가지 편벽된 주장(諍)들이 일체의 소통로를 막은 채 고착되어 있는 당대의 상황에 있었다. 때문에 원효는 먼저 이들 모두에게 시비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편벽됨(執)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상이한 주장들을 모아(和合) 소통(會通)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2) 다른 주요 저술에서 보이는 ‘화’와 ‘쟁’의 용례와 뜻
《열반경》은 부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설한 가르침을 모은 것이라 전해지면서, 불교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가르침이 이 경전에 들어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중시되어 왔다. 그 내용 중에서 특히 중국인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일체의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원효도 역시 《열반종요(涅槃宗要)》에서 《열반경》의 핵심을 열반(涅槃)과 불성(佛性)의 문제에 있다고 보고, 열반경이 이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다양한 주장들을 회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원효의 화쟁사상을 말하는 많은 학자들이 일찍부터 이 저서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원효의 《열반종요》에서는 쟁(諍)이라는 글자가 총 8번 나오는데, 이 가운데 4번은 이쟁(異諍)이라는 단어로 도출되고 나머지는 화쟁이라는 단어와 연관해서 나타난다. 먼저 이쟁의 언표상의 의미는 ‘달라서 서로 다툰다’는 뜻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쟁이라는 개념이 맨 처음 등장하는 《열반종요》의 대의(大意)를 말하는 부분에서의 맥락은 조금 다르다.
“(열반경은) 많은 경전들의 부분됨(편중됨)을 모으고, 만 가지 흐름을 한 가지 맛(一味)으로 돌아가게 하며, 부처님 뜻의 지극한 공(公)을 열어 보여 백가의 서로 다른 주장(異諍)을 모은다(和). (이렇게 하여) 드디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생(四生)들을 모두 (나와 남이라는) 둘이 없는 실성(實性)으로 돌아가게 하고, 긴 꿈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자들을) 모두 큰 깨달음이라는 지극한 과보에 이르게 한다.”
위의 문맥으로 볼 때, 일미(一味)가 곧 공(公)이므로, 부분(部分)은 사(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和百家之異諍”의 화(和)는 부분(部分)을 일(一)로, 사(私)를 공(公)으로 옮겨가게 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화는 부분과 사, 즉 자신만이 옳다는 폐쇄적 주장을 또 다른 폐쇄적 주장과 만나게 함으로써, 이들 모두를 소통을 통해 공과 일이라는 보편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화가 국부성(局部性)을 벗어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사생들을 모두 (나와 남이라는) 둘이 없는 실성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구절을 통해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둘이 없는 실성의 상태란, 곧 ‘나’라는 폐쇄성이 보편의 영역으로 돌아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쟁은 필자가 처음에 언급했던 백가쟁명처럼 ‘서로 다른 주장들이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며 난무한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을 뿐, 서로 다투거나 싸운다는 의미까지 도출되지는 않는다.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을 표현하지만 굳이 다르다(異)는 접두사를 붙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다툼이면 그냥 다툼이지 같은 다툼이 있고 다른 다툼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쟁(異諍)이란 ‘서로 달라서 다툰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서로 다른 주장이나 입장’이라는 뜻이다. 쟁은 아규먼트(argument)의 의미치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쟁을 무조건 대립과 다툼으로 몰아갈 필요는 없다. 입장의 차이는 곧잘 다툼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이 관계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쟁을 어떤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이나 입장들이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해도 의미파악에 전혀 무리가 없다. 화쟁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 등장하는 쟁(諍)의 맥락도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네번째로 ‘서로 다른 주장’(相諍)을 펴는 논의를 서로 소통시키는(和) 것을 보이도록 하겠다. 서로 다른 주장을 펴는 논의들이 일어나는 데는 여러 가지 단서가 있겠지만 (결국에는) 편벽되이 ‘서로 다른 주장’(異諍)을 세우기 때문이다. 법신(法身)은 늘 있는데 (반해서) 화신(化身)은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데, 이 두 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분분하다. 그런데 유독 보신에 대해서만 두 가지 집착이 제각각 일어난다. (이렇게) 제각각 일어나는 주장들(別起之諍)은 두 가지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보신도 법신처럼) 상주한다는 점에 집착하는 경우와 (보신 역시 화신처럼) 무상하다는 점에 집착하는 경우를 이른다.
위의 인용문에서 해석상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먼저 소제목에 해당되는 명화상쟁론(明和相諍論)이라는 구절에서, 쟁론(諍論)을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논쟁으로 이해하면 화(和)는 당연히 화해라는 의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쟁론을 이렇게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논쟁으로 이해한다면 이어지는 이쟁(異諍)의 번역이 쉽지 않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이쟁을 ‘다른 싸움’으로 번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별기지쟁(別起之諍)의 경우를 봐도, ‘제각각 일어나는 싸움들’보다는 ‘제각각 일어나는 주장들’로 푸는 것이 의사전달상 훨씬 분명하고 정확하다.
또 필자의 번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쟁을 굳이 다툼이라고 풀지 않아도 의미는 얼마든지 명쾌하게 전달될 수 있다. 그리고 보신과 관련해서 원효가 지적한 것처럼, 서로 다른 주장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서로 다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에만 집착(執)하는 데 있는 것이다. 결국 원효의 의도는 다툼을 말리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들의 집착을 깨뜨려 서로간의 소통로를 확보해 주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첫번째 문장의 화(和) 역시 집착을 깨뜨리고 서로 모은다는 의미이며, 화는 회(會)와 동일한 의미치를 가지므로 화는 회통(會通), 즉 소통하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한 원효의 주석을 통해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그의 주석 가운데서 쟁(諍)이라는 글자는 《별기(別記)》에서만 네 번에 걸쳐 나타날 뿐, 소(疏)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화쟁국사인 원효는 왜 정작 소(疏)에서 쟁이라는 한자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일까? 원효는 《별기》를 두고 스스로 참고하기 위한 것일 뿐 남에게 굳이 읽히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의 주석에서 원효가 최종적으로 치중하고자 했던 것은, 편벽된 주장들(諍)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들 간의 소통(通)에 대한 문제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원효는 《별기》에서도 《대승기신론》을 일러 “온갖 논의의 조종(祖宗)이요 여러 주장들의 잘잘못을 살펴 정하는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조종이라는 비유는 절묘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온갖 논의들(諸論)이 지금은 남인 것처럼 촌수(寸數)가 벌어지고 말았지만 본래 한 조상(祖)에서 갈라져 나온 자손들이라는 뜻이다. 결국 《기신론》은 모든 불교이론들이 서로 피가 ‘통하는’ 한 핏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족보(族譜)에 해당되는 것으로 원효는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삼성(三性), 즉 의타기성(依他起性)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그리고 원성실성(圓成實性)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각종 논의를 소개한 후에, “이 세 가지 성질이 같은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백가의 주장이 소통(和)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문장을 “백가의 다툼이 화해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로 해석해도 문법상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백가지쟁(百家之諍)’의 쟁(諍)과 ‘무소불화(無所不和)’의 화(和)를 각각 주장과 소통으로 이해하는 것이 원효의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에 비추어 더욱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효는 백가지이쟁(百家之異諍)이나 백가지쟁(百家之諍)이라는 표현 대신에 백가지담(百家之談)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대립과 다툼에 주목했고 쟁(諍)이라는 글자를 통해 이 의미를 담고자 했다면, 쟁은 결코 담(談)이라는 글자로 바꿔 쓸 수 없다. 담(談)이라는 한자어에서는 절대로 대립과 다툼의 의미가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원효는, “이처럼 아주 깊은 인연의 도리는 텅 비어 근거하는 바가 없고 탁 트여서 걸림이 없거늘, 이 가운데서 어떻게 서로 어긋나는 주장들(違諍)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쟁을 다툼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 문장에서의 위쟁(違諍) 역시 의미가 모호해진다. ‘서로 어긋나는 다툼’이라는 직역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위쟁이란 ‘서로 어긋나는 주장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원효의 저술은, 그의 최후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강삼매경론》이다. 여기서는 쟁이라는 개념이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이 가운데 본 논의와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많은 부분만 검토해 보기로 한다. 부처가 심왕(心王)보살에게, 무생(無生)으로써 무생행(無生行)을 증득했는지 묻자, 이 물음에 대한 심왕보살의 답변이다.
심왕보살이 말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생행은 그 성(性)과 상(相)이 비어서 고요하니,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마음속에 그릴 수도 없고,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생행을) 취하여 깨달아 얻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취하여 깨달아 얻는다면 이는 쟁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쟁과 논이 없어야 곧 무생행입니다.”
위의 인용문에 “취하여 깨달아 얻는다”는 것과 “쟁론이 된다”는 말의 의미상의 맥락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약 여기서 쟁론(諍論)이라는 말을 ‘다툼’으로 번역하면 “취하여 증득한다”는 말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취하여 깨달아 증득한다는 사실이 반드시 다툼으로 귀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하여 깨달아 얻는다”가 ‘자신의 주장이나 입장을 세움’으로 이어지는 문맥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여기서 심왕보살은, 쟁론이 취하여 얻음, 즉 억지로 ‘자기 것’만을 옳다고 우기는 데서 발생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앞서 필자는 입장의 차이가 곧잘 다툼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이 관계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주장과 입장이 대립되는 경우에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정작 대립과 다툼이라기보다는 ‘소통의 단절’이다. 쌍방 간에 대립과 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경우이다.
왜냐하면 부정적이나마 최소한의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이고, 언젠가는 화해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소통의 형식이 반드시 긍정적이고 친화적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주장과 입장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외면’하거나 ‘배제’하고 마침내는 서로 간의 소통이 ‘단절’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단절이란 모든 존재자(法)는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불교의 진리론인 연기법(緣起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인 것이다.
《열반종요》와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해석, 그리고 《금강삼매경론》에서 살펴본 화와 쟁에는, 《십문화쟁론》에서 확인했던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주장들을 소통시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처럼 원효가 소통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보였다는 사실은, 그의 행적과 또 다른 중요한 주장인 회통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4. 원효의 문제의식과 화엄학을 통한 해결점
원효의 생애와 관련해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에 접하게 된다.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가운데 〈원효불기〉(元曉不ヤ)편에 의하면 원효가 요석공주와 만난 것은 태종무열왕(재위 : 654∼660) 시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원효가 설총을 낳은 후 제도권 불교에서 이탈한 시기는 677년경으로 짐작되는데, 이후 그가 소성거사(小姓居士)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제도권 불교에서 떠나기 직전인 676년에 저술한 책이 바로 《화엄경소(華嚴經疏)》라는 사실은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원효의 입적 이후 가장 이른 시기에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고선사서당화상탑비(高仙寺誓幢和尙塔碑)〉에서는 원효의 저술로 《십문화쟁론》과 《화엄종요》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 두 가지 문헌이 원효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었음에 틀림없다.”
또 그가 백성들 속에서 《화엄경》의 구절을 인용한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내용의 노래를 퍼뜨렸다는 것 역시 예사롭지 않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원효의 사상이 화엄학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원효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라는 짧은 노래에 어떤 생각을 담고자 했던 것일까? 관련 부분을 《화엄경》에서 직접 찾아보기로 하자. 이 노래는 《화엄경》의 게송 가운데 한 구절인데 그 맥락은 다음과 같다.
그때에 문수사리가 현수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불자여, 모든 부처가 오직 일승(一乘)으로 생사를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모든 불찰(佛刹)의 일들이 고르지(同) 않아, 이른바 세계와 중생, 설법과 교화, 수명과 광명, 신통력과 중회(衆會), 불법(佛法)과 법주(法住) 등과 같은 것들이 모두 고르지 못해 일체의 불법을 갖추지 못해도 능히 위없는 보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까?” 그때 현수보살이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문수의 법은 항상 그러하니 법왕은 오직 한 법이라, 일체에 걸림이 없는 자는 한 가지 길로 생사를 벗어나니, 갖가지 부처의 모습이 하나의 법신이요 한 마음과 한 지혜 그리고 역무외(力無畏) 또한 그러하니라.”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일승의 ‘일(一)’은 ‘하나’라는 의미보다는 사사부동(事事不同)과 상대되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르다’(同)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법(一法)과 일체(一切), 일도(一道) 등의 ‘일’ 역시 마찬가지다. ‘일’에는 불찰(佛刹)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상이나 사건(事)에 대해 호오(好惡)나 우열(優劣)의 ‘분별적 인식을 하지 않는다(不二)’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원효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에는 중생계의 현상적인 나타남에 대한 분별의식에서 벗어나자는 함의를 담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왕실의 불교와 민간의 불교, 수행자의 불교와 비수행자의 불교라는 사회적 범주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범주의식을 넘어서야 만 한다는 것이 원효의 무애가에 내재된 주장인 것이다. 이처럼 ‘일체무애인’의 무애가 화해보다는 소통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십문화쟁론》과 《대승기신론》 등에서 보이는 원효의 회통적 입장의 근저에는 화엄학이 있었다. 원효의 교판을 통해 볼 때 화엄은 원교(圓敎)다. 원효는 화엄학이 모든 불교교설에 대해 글자 그대로 원만(圓滿)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원효는 화엄학의 소통적 효과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원효의 교학적 깨달음은 마침내 그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었다. 다름 아닌 바로 설총의 출생과 그로부터 이어진 소승거사로서의 행적이다.
만일 원효의 화쟁사상을 화해론으로만 본다면 불교 내부 종파 간 혹은 이설(異說) 간의 화해를 도모했다는 목적은 설명되지만, 정작 그가 설총을 낳고 남은 생애를 할애한 소승거사 시절에 대해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행적들은 그의 불교관과는 무관한, 깨달은 자의 기행(奇行)으로밖에는 더 이상 설명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그의 화쟁론을 소통이론으로 읽게 되면, 그의 기행은 출가자 집단과 일반민중의 소통이라는 그의 불교관에 기반을 둔 목적지향적 행동으로 분명하게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을 소통이론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회통이 화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화쟁사상의 연장선상에 있고 원효가 종합주의자였다면, 그는 회통(會通)이 아니라 회통(會統)으로 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회통을 화쟁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것이 아니라 화쟁을 회통의 연장선상에서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모아서 소통시킨다(會通)’는 원효의 목적의식을 염두에 두고서 화쟁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화쟁 역시 여러 주장들(諍)을 서로 모은다(和)는 의미가 되고 결국 화쟁과 회통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 상이한 언표에 불과한 것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을 대표하는 《십문화쟁론》에서 통(通)이라는 글자는 총 9회에 걸쳐 등장하는데, 서문에 사용된 통융(通融)과 본문에서 회통(會通)이라는 개념으로 각각 한 번씩 나타나고, ‘통왈’(通曰)이라는 말로 3번이 보이며, 나머지 4번은 통(通)이 단독으로 의미를 갖는다. 통융과 회통이라는 개념은 선입견에 의해 이미 오염되어 있고 통이 단독으로 사용된 경우는 단순히 ‘통한다’는 의미만 담고 있으므로, ‘통왈’로 사용된 경우만 주의 깊게 살펴보기로 한다.
원효는 먼저 성(性)의 유무에 대한 이견(異見)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성이란 중생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전제된 불성(佛性)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불성의 존재론적 위상, 즉 그것이 과연 중생 속에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이렇게 유무(有無)라는 존재론적 위배상황(相違)을 낳는 이 두 주장이 소통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하지만 원효는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여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또 만약 (주장을 세워) 말하기를 : “반드시 성(性)이 없으니 법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역시 (주장을 세워) 말하기를: “반드시 성이 있으니 법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것은 결정코 서로 어긋나는 잘못됨이 있으니 성이 있고 없음에 집착한 것이다. (이 두 주장을) 소통시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경에서 이르기를 ‘중생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성이 있음과 없음, (佛果를) 아직 얻지 못한 경우와 이미 얻은 경우의 중생들 모두를 널리 든 것이다. (그리고 또 경에서) “무릇 그 마음이 있으니 마땅히 보리를 얻으리라.”고 한 것은, (불과를 얻은 경우와 얻지 못한 경우의) 그 중간에서 성이 있지만 마음이 아직 그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원효는 불경에서 “중생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과 “마음이 있으니 마땅히 보리를 얻으리라”는 두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앞의 구절은 불성이 있다는 첫번째 주장과 통하고, 그 다음의 구절은 불성이 없다는 두번째 주장과 통하는 것이라고 증거로 삼고 있다. 이렇게 원효는 불성의 유무가 사실은 존재론적 위배상황(決定相違)이 아닌, 동일한 대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임을 확인시킴으로써 각 주장의 집착됨을 해소하고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논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대립하고 다투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대립과 다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절에 있다. 서로 다른 것들은 그 다름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삼는 까닭에, 그 다름을 끝까지 고수하고 더욱 공고히 한다. 그래서 외부와의 소통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다. “당시 신라 사회는 원광과 자장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 수용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 원효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십문화쟁론》에서 ‘통왈’이라는 어구는, 그의 회통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원효는 대립하여 다투는 두 주장을 화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주장들이 사실은 서로 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경전상의 전거(典據)를 들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원효의 문제의식의 출처가 대립과 다툼이 아닌 ‘단절’에 있었으며, 그의 목적의식 역시 화해가 아닌 ‘소통’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5. 꼬리말
기존에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원효 당시 불교의 이론적 혹은 종파적 대립과 다툼을 전제로 해서 그의 화쟁사상이 일종의 화해이론이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이 갖는 문제점은 적지 않다. 첫째는 원효 당대의 사회사적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은 채 불교 내부의 이론적, 종파적 대립만을 전제로 해서 원효의 사상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화쟁사상이 곧 화해이론이라는 이해는, 원효의 교학적 깨달음의 내용과 그의 말년 행적 사이의 관계를 정합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원효는 당대 불교 내부의 이론적 혹은 종파적 대립과 다툼을 문제 삼았던 것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전면적인 단절의 상황을 문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십문화쟁론》 등 그의 대표적인 저술을 통해 소통을 지향하는 이론으로 체계화되었다. 아울러 그의 말년 행적은 왕실 중심, 수행자 중심의 엘리트 불교의 벽을 허물고 일반 서민들과의 소통로를 확보하려는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의 화쟁과 회통은 다툼과 대립의 화해라는 의미보다는 모아서(會) 서로 통하게 한다(通)는 의미, 즉 소통에 가깝다. 화쟁의 쟁을 논쟁으로만 보게 되면, 논쟁의 부정적인 측면만이 두드러지게 되어 각 이론의 긍정적인 측면이 배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시 말해서 논쟁을 전제로 하는 한, 그 어떤 화해의 방식도 결국에는 배제와 차단의 또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효의 화쟁사상을 논쟁을 전제로 한 화해이론으로 볼 것이 아니라 소통이론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해야만 화쟁은 그의 불교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회통(會通)이라는 개념과도 연계되어 해석될 수 있고, 그의 교학적 이해와 말년의 행적 역시 정합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그의 불교관이 갖는 사회철학적 함의를 새롭게 규명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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