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2)
지난 호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테마를 주로 서양 철학 일반의 입장에서 탐구했었다. 이번 호에서는 그 주제를 먼저 중국 철학의 시각에서 다룬 다음, 이제까지 논의되었던 각 입장들을 불교 사상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특히 중국 철학의 입장을 비중 있게 다루려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 문제에 관한 한 중국 불교의 사상은 그 이전의 도가적·유가적 인성론과 상호 밀접한 영향 속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불교의 인간 본성론에 관한 탐구는, 도가·유가와의 관계 속에서 불교가 중국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철학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탐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 철학의 기초를 수립했던 제자백가들의 시기에 그들 쟁명의 중심에 섰던 문제가 바로 인성(人性)에 관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주 왕실의 와해로 인한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에 가장 요구되었던 것은 훌륭한 통치자(聖人)의 출현이었고, 그런 통치자의 제일의 덕목은 피치자의 본성에 관한 분명한 이해에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중국적 철학의 영원한 사유 축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계에서 보더라도, 하늘이 명한 것(天命)으로서의 인성(人性)이야말로 인간 속에 부여된 하늘의 요소로서, 그것으로 인해 천과 인이 감응하여 합치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철학의 역사 속에서 전개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의 기본 경향이 이미 성(性)이라는 한 글자 속에 함축되어 담겨 있다.
성(性) 이란 문자 그대로 심(心)과 생(生)의 합성이다(從心從生). 여기서 생(生)이란 ‘하늘이 부여하여(天之就)’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생긴 것(與生俱生)’ 그래서 ‘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生而有)’을 의미하니, 이것은 인간이 나면서부터 지닌 자연스러운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움을 생리적인 것으로 본다면 생은 곧 본능과 욕망을 의미하고, 이런 자연스러움을 도가적인 것으로 본다면 생은 바로 그런 작위적 욕망이 배제된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서의 원초적 생명 상태를 뜻한다. 둘 중 어느 입장을 취하든, 양자는 모두 인간의 본성을 인간과 자연 또는 동물 사이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하여 해석하는 것으로서, 인성을 자연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심(心)은 인간의 본성을 여타의 자연 사물과의 차이점에 주목하여 해석하는 것으로서, 인성을 윤리 도덕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향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이것은 정통 유가의 기본 입장이기도 한데, 맹자는 생 대신 심에 치중하여 성(性)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인의(仁義)의 덕이 내재해 있으니, 이런 도덕적 본성으로서의 인성이야말로 인간을 금수와 구별시켜 주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인간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이런 도덕적 본질로서의 성(性)이 바로 전 우주의 이치(理)를 담보하고 있다(性卽理)고 하여, 인성에 관한 논의에 본체론의 계기를 끌어들였다. 이럴 경우 생으로서의 성이 생 이후(生以後)의 형이하적인 것(形而下者)을 가리킨다면, 이(理)로서의 성은 생 이전(生而前)의 형이상적인 것(形而上者)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나면서부터 자연스러운 것’을 뜻하는 생으로서의 성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심으로서의 성은 본능(instinct)과 본질(essence)의 이중적 복합태로서의 인간 본성(human nature)이라는 서양 철학의 개념과 상당히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성과 윤리적 도덕성을 구분하는 중국 철학의 인성론이 ‘사물에서 본 것(物上看)’과 ‘이치에서 본 것(理上看)’의 차이라면, 동물성과 이성적 사유성을 구분하는 서양 철학의 인간 본성론은 ‘사실적 측면에서(de facto)’ 본 것과 ‘원리적 측면에서(de lego)’ 본 것의 차이인데, 이는 매우 비슷한 발상법이라고 하겠다.
적어도 맹자 이전의 고자(告子)의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성은 생리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 본능적인 습성이나 욕구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것은 “성을 조절해야만 날로 발전할 수 있다(節性 惟日其邁).”는 《상서(尙書)》의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맹자》에 실려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고자는 “타고난 것을 일러 성이라 하니(生之謂性)” “식욕과 색욕이 곧 성이다(食色性也).”고 주장했다.
또한 이처럼 음식을 먹고 싶어하고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본능으로서, 그런 것 자체에 대해 선과 악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인간의 본성에 선과 선 아님의 구분이 없는 것은 마치 물 자체에 동과 서의 구분이 없는 것과도 같다(人性無分於善不善也 猶水之無分於東西也).”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인성에는 본래 선악이 없는 것이라면, 인의(仁義)의 도덕은 오직 후천적인 교육이나 학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의 어느 한편으로 고정시켜 보지 않고, 성현의 교화나 자신의 수양에 의해 선해질 수도 있다는 가변적 가소성(可塑性)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럴 경우 도덕적 선함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본성 그 자체가 절제와 억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절제가 무너진다면 인간은 악으로 기울기 쉽다는 이런 생각은 당시의 통치자들에게 항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었고, 그리하여 통치자들은 그것을 피치자인 백성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명분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맹자(孟子:B.C. 372∼289)가 보기에, 인간의 본성에는 절제의 대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길러야(存養) 할 면도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고자처럼 모든 생물이 태어나자마자 가지게 되는 식욕이나 성욕 같은 것을 인성으로 본다면, 도대체 인간이 개나 소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비록 인간과 금수가 다른 점이 ‘거의 드물다(幾希)’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극히 미소한 측면이야말로 인간이 인간 되는 까닭(所以)으로서, 인간과 동물을 구별시켜 주는 인간만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금수보다 나은 것(善于禽獸)’이 있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점을 소인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군자는 반대로 그것을 능히 배양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군자가 본성으로 지니는 인의예지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단순히 생리적인 욕구 이외에도 인의예지라는 도덕적 원리가 마음속에 그의 본질로서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싹이고,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이 예(禮)의 싹이고,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은 지(智)의 싹이니(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이런 네 가지의 마음을 ‘선한 단서(善端)’로 삼아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의 덕(四德)으로 확충시킬 때, 성(性) 전반이 비로소 선화(善化)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의 요지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 맹자가 생리적인 측면에서 성을 규정하던 그때까지의 관행에 제동을 걸고서, 처음으로 심리적인 면에서 성을 설명하여 성선설을 주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을 동물과는 다른 사회적 도덕성에서 찾는 시도로서, 인간 자신을 주체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중국 인성론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더욱이 이로 인해 유가 사상은 비로소 인간을 만물과 구별하고 천명과 연결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둘째, 맹자의 성선(性善)은 사실 심선(心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인간의 본성을 마음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인성론을 심성론에서 연구하는 중국적 사유의 효시가 된다. 이제 심이 인성의 주체적인 담당자가 되고, 인성은 오직 심에 의해서만 실현되고 완성된다. 이때의 마음은 물론 사단심(四端心)이지만, 이를 한 마디로 하면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다.
이런 마음으로 가능한 것이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 즉 어진 정치(仁政)이다. 이것은 인정의 근원을 인성(人性)에 두는 것으로서, 심성론적으로 해명된 인성론이 정치철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결국 맹자 인성론의 총강령은 “그런 마음을 보존하고 그런 본성을 배양함으로써 하늘을 섬기는 것(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최고 존재인 천(天)도 단지 인간의 심과 성을 통해서만 구현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은 천명에서 유래한 것이고, 심 역시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天之所與我者)”이니,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萬物皆備於我).”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구비 능력에 있어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으므로, “성인과 나는 같은 부류이고(聖人與我同類)” “사람은 모두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人皆可以爲堯舜).”고 본다. 이것은 성취 가능성을 평등화시킴으로써, 이상적인 상태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중국적 현실주의(chinese realism)의 발로이다. 그런데 위에서 열거한 의미들 중 특히 둘째와 셋째의 것, 즉 인간의 본성을 마음의 문제로 보고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성의 차원에서 다룬 것은 “자기의 마음이 불성이고(自心佛性)”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후대 중국 불교의 인성불성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상과 같은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하고서, 오히려 고자의 노선을 따라 인성을 재해석한 이가 순자(荀子:B.C. 315∼238)이다. 말기로 치닫는 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추악한 면들을 몸소 겪은 그로서는 인간의 성품 속에 존재하는 이기적 욕망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람이 선하려고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人之欲爲善者 爲性惡).”고 생각하는 순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성(性)이란 바람직하고 선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지니는 자연스러운 감정(情)으로서, 기본적으로 “이로움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하는(好利惡害)” 이기적 경향으로 인해 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인의(仁義)와 같은 도덕적인 선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학습하고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것(僞, 거짓이란 뜻이 아니라 人과 爲의 합성이다.)이다.
따라서 “악을 버리고 선을 생기게(棄惡生善)” 하기 위해서는,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키는 것(化性起僞)”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의를 일으키고 법도를 제정하여 사람의 성정을 교정하고 꾸며서 바르게 해야 한다(是以爲之起禮義 制法度 以矯飾人之情性而正之).”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韓非子)는 성악설을 자신의 법치론의 이론적 토대로 삼았으며, 이를 수용한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기도 하였다. 일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단지 그 주안점에서의 차이일 뿐 그 지향하는 바는 그리 다르지 않다. 심의 동기면에 관점을 둔 맹자가 성을 심선(心善)으로 해석하여 “선한 마음을 간직하여 본성을 기르는(存心養性)” 내성(內省)의 길을 강조한 데 비해, 정(情)으로 인한 결과면에 관점을 둔 순자는 성을 정악(情惡)으로 해석하여 “본성을 교화시켜 예의 법도를 일으키는(化性起僞)” 습행(習行)의 길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이라는 도덕성의 시각에서 해석한 다음, 인의예지라는 도덕적 선을 고양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과연 선과 악이라는 도덕성에 의해 규정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런 입장에서의 반론의 제기를 우리는 장자(莊子:B.C. 359 ?∼289 ?)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장자는 노자를 계승하였는데,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하였다. 이 말은 도의 본성이 자연이듯이(道性自然), 천지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자연에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여기서 자연(自然)이란, 사물들의 집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텅비어 태연하고 담담하며, 적막하고 작위가 없는 상태(虛靜恬淡 寂寞無爲)”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꾸밈 없이 질박한 자연스러운 것이지, 인의(仁義)나 정욕(情欲)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소박함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이 본성을 얻지만(素樸而民性得也)”, 만약 인의를 본성으로 생각한다면 “그 본성을 해칠것이니(削其性也)” “인의를 추구하는 것은 성인의 죄과이다(爲仁義 聖人之過也).”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물이 도를 얻어서 생겨나는 것을 덕(德)이라 하고(物得以生謂之德)”, 이 “덕의 발현이 생명(生)이며(生者德之光也)”, 이런 “생명의 본질이 바로 성(性)이다(性者生之質也).” 이처럼 덕을 발현시키는 근본이 도이고, 덕이 발현된 생명의 본질이 성이라면, 생명의 타고난 본질인 성은 곧 도의 구현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는 바로 만물의 본체(萬物之本)이므로, 성은 당연히 체(體)와 연결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이 우주의 본체인 도의 구현태라는 점에서, 인성론이 본체론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그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지 만물 내에서의 인간의 위상에 대한 설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인성론과 본체론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이 도에 의해 형성되고 도는 성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라면, 성과 도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은 없고, 본체론으로부터 말하는 것을 일러 도라 하고, 인성론으로부터 말하는 것을 일러 성이라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究天人之際)’이 중국 고대 철학의 기본 전통이고, 노장(老莊)과 공맹(孔孟)이 모두 천인합일에 관해 논한 것이 사실이지만, 인도(人道)를 주장한 공맹보다는 천도(天道)를 주장한 노장이 더 본체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중국 본체론의 기본 도식인 체(體)와 용(用)을 철학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노장 계열에서부터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체(體)란 “열두 가지 부속 기관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 전체를 가리키는 총명이다(總十二屬也).”라고 풀이되고 있다.
한 마디로 체는 곧 몸인데, 이 몸은 각 기관을 통일한 ‘전체’이기도 하고, 이렇게 결합되어 구체적인 모습을 갖게 된 ‘형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통일된 전체는 언제나 ‘하나’이다. “만물은 모두 도로부터 말미암아 생겨나고(萬物皆由道而生)”, “사물은 모두 제각기 이 하나를 얻어서 이루어진다(物皆各得此一以成).”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도는 만물의 근본이 되는 하나이다. 이렇게 도처럼 전체를 하나의 근원으로 통일하는 전일성(全一性)으로서의 ‘본체(本體)’가 바로 ‘전체’로서의 체이다. 이에 비해 용(用)은 창이나 방패를 시렁 위에 얹어 두었다가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사용은 감추어 두었던 근본적인 것이 드러난다는 측면에서는 ‘현상(現象)’이고, 그렇게 드러난 것을 부려 움직인다는 측면에서는 ‘작용’이다. 이렇게 볼 때 체를 ‘전체를 통일하는 하나’로 이해할 경우, 체와 용의 관계는 본체와 현상의 관계가 되며, 체를 단순히 ‘모양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체와 용의 관계는 형체와 작용의 관계가 된다. 노장 사상을 계승하고 체용의 논리를 처음으로 철학적인 의미에서 거론한 왕필(王弼:226 ∼ 249) 자신은 체와 용을 형체와 작용의 관계로 보았으나, 그후 남북조 시대의 불교나 송대의 성리학에서는 체와 용을 주로 본체와 현상의 관계로 규정하였다. 혹자는 체용의 논리가 《기신론》이나 혜능에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 이미 위진 현학 때부터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에만, 중국화된 불교의 형성에 있어서 도가적 본체론의 요소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가적 자연 본체론과 이와 연관된 불교의 진여 본체론 등에서 제기된 우주적 본체론의 색채를 입혀서, 원시 유가의 도덕적 인성론을 형이상학적으로 확대 해석한 사람이 바로 주자(朱子:1130∼1200)이다. 여진족의 금(金)에 쫓겨 나라의 반을 상실한 남송(南宋) 시대의 사람이었기에, 상처받은 한족의 중화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외래의 사상인 불교와 탈속적인 도가 사상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도가와 불교에 대해서 유학을 새롭게 수립하는 것은 한 마디로 무(無爲, 無心)에 대한 유(理氣)의 확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사상의 최고 범주인 도(道)를 무(도가)나 공(불교)이 아닌 이(理)로 봄으로써, 도가와 불교와는 차별되면서도 원시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는(道統) 새로운 사상(新儒學)을 정립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주자는 도와 이가 거의 같은 뜻임에도 불구하고, 도를 이의 의미로 대체하여 사용하고자 했다. 주자식의 표현에 의하면, ‘도’가 ‘오래도록 통하는 것(萬古通行者)’ 또는 ‘비교적 넓은 것(較寬)’을 의미한다면, ‘이’는 ‘오래도록 바뀌지 않는 것(萬古不易者)’ 또는 ‘비교적 실질적인 것(較實)’을 뜻한다.
여기서 실질적이라고 하는 것이 ‘이’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인데, 그것은 ‘이’가 ‘도’와 같이 우주론적인 원리이면서도 인간사의 이치(人事之理)와 무관하지 않은 원리라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는 필연의 존재법칙(所以然之故)’임과 동시에 이것을 근거로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연(當然)의 가치법칙(所當然之則)’이기도 하다. 우주는 이러한 이와 기(氣)로 되어 있다. 이가 ‘천지를 이끄는 것(天地之帥)’으로서 천지의 원리 또는 생명의 근거(生物之本)라면, 기는 ‘천지를 채우고 있는 것(天地之塞)’으로서 천지의 구성 요소 또는 생명의 자료(生物之具)이다. 그런데 우주적인 필연의 법칙이 인간 사회에서의 당연의 이치와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근거가 된다는 것은, 우주적인 원리(天理)가 인간 속에 함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이(人之所得於天之理)”를 성(性)이라 하니, “성이 바로 이이다(性卽理).” 이것은 인간의 본성(性)이 우주 만물의 이법(理)과 같다고 주장함으로써, 인성론에 본체론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것임과 동시에 인간 사회와 무관한 도가적인 무위(無爲) 본체를 비판하는 것으로서, 소위 성리학(性理學)이란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처럼 인간이 받아 지니고 있는 우주의 이치를 천지지성(天地之性) 또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계의 근원인 이에서 온 것이기에 순수하고도 지극히 선한 것이며,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부연된 본성(本然之性)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듯이, “전적으로 이만 가리키는(專指理)” 본연지성도 “이와 기가 뒤섞여(理與氣雜)” 구체적인 육체를 구성하는 기질(氣質, 氣는 陰陽을 質은 五行을 가리킨다.)을 떠날 수는 없으니, 여기서 나온 성품을 일러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한다. 기의 맑고 탁함의 차이에 따라, 기질지성에도 선하고 악한 차이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비록 본성은 만인 보편의 것으로 똑같이 순수하고 선한 것이지만, 기질은 개인마다 차이나는 것으로 충분히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분을 통해 인성의 선악을 해명하려는 시각에서 볼 경우, 맹자의 성선(性善)은 본연지성만 보고 기질지성을 보지 못함으로써 성악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 것이 되고, 순자의 성악(性惡)은 기질지성만 보고 본연지성을 보지 못함으로써 성선의 측면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처럼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에서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함으로써, 인성의 선악 논쟁을 해소하려한 주자는 이번에는 마음의 체용(體用) 관계를 통해서 인성의 선악 문제를 설명한다.
“마음에는 체와 용이 있는데(心有體用)”, 아직 발현되기 전의(未發) 본성(性)을 마음의 체라 하고, 이미 발현하여(已發) 움직이는 정감(情)을 마음의 용이라 한다. 그런데 본성으로서의 마음(心之體)은 우주의 이치를 체현한 도심(道心)으로서, 항상 지극히 선한 것이지만, 정감으로서의 마음(心之用)은 욕망과 유혹에 이끌릴 수 있는 인심(人心)으로서, 악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유가의 모든 사상가가 그러하듯이, 주자 역시 인륜적 도덕성의 고양을 통한 치세(治世)의 수립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도 선악의 기원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할 수밖에 없었고, 선과 악이라는 상반되는 요소를 정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심이나 성을 도심과 인심, 성과 정,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식으로 양분하였다.
그렇게 한 다음, 맹자적 존심(存心:선한 마음의 간직)과 순자적 화성(化性:악한 정감의 교화)을 종합한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천리의 보존과 인욕의 제거)의 실현을 위해, 악의 경향성을 지닌 인심의 정감과 기질지성을 부정시하는 엄숙주의의 길을 열어 놓았다. 더욱이 주자처럼 인간이 인의예지의 도덕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萬物之靈)이 된다는 식으로 인간만의 본성을 강조할 경우, 우리는 그런 품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동물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 다른 민족, 다른 사상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특정한 입장에 의해 사전에 각인되었을 때 야기되는 보편적인 문제라고 하겠다.
이제 불교에서의 인간본성론을 다룰 차례가 되었다. 이에 대한 논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 인간에 관한 논의는 인간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종속 관계, 또는 같은 피조물인 인간과 자연 사물 간의 우열 관계에서 다루고, 중국에서는 인간을 천지의 도와의 도덕적 합일이라는 천인 관계 속에서 다룬다. 그러나 불교에서 인간은 윤회와 해탈의 과정이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루어진다.
생명을 가진 사물이 자신이 지은 행위의 영향력(業力)에 따라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띄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되풀이하며 흘러가는 것을 일러 윤회(輪廻, sam.sa-ra, 흘러감)라 하고, 이런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일러 해탈(解脫, moks.a, 벗어남)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사람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은 윤회의 여섯 단계(六道) 중 하나인 인(人, manus.ya)이다. manus.ya의 manu가 사유를 뜻한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능히 생각을 가지고 일을 꾸며 사유 관찰하는 고로 마누샤라 이름한다(以能用意思惟觀察所作事 故名末奴沙).”
그러나 인간은 이런 식의 분별 사유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무분별의 지혜로 전화시킬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각과 신체와 언어를 가지고 있고 “교만을 가지고 있으나 이 교만을 능히 파괴할 수도 있으므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又復人者名有慮慢 又復人者能破慮慢).” 결국 인간이란 그가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윤회에 머물 수도 해탈을 이룰 수도 있기 때문에, 윤회의 육도(六道 : 地獄, 餓鬼, 畜生, 阿修羅, 人, 天)와 해탈의 사성(四聖 : 聲聞, 緣覺, 菩薩, 佛)은 미계(迷界:어리석음의 세계)와 오계(悟界:깨달음의 세계)라는, 주체자의 마음가짐에 따른 두 가지의 단계로 압축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유(有)라는 고정적 실체로 간주하여 생각하면 육도의 미계가 생기고, 일체를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비실체적 사유 방식으로 생각하면 사성의 오계가 생기는 것이니, 미오(迷悟)의 그 마음가짐을 떠나 열 개의 세계들이 따로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도 이처럼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계의 출현 방식을 지적하는 말이지, 조물주의 의지에 의한 창조나 절대적 정신에 의한 구성처럼 추상적 관념론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 인간은 창조신과 피조물, 하늘(天)과 땅(地)이라는 두 실재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의 마음가짐에 따라 미계(迷界)와 오계(悟界)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존재는 단순한 부유(浮游:이리저리 떠돌아다님)가 아니라, 어리석음을 딛고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전미개오(轉迷開悟)의 뚜렷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인간을 미오의 이중적 복합성과 마음가짐에 따른 전미개오의 가능성으로 규정하는 방식은 불교의 거의 모든 사상에 담겨 있다. 모든 것에는 고정적 실체성이 없어(諸法無我), 영원 불변하지 않는다는 것(諸行無常)을 모른 채 어리석게도 일체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기지만(一切皆苦), 그것을 체득하여 깨달으면 번뇌의 불꽃이 가라앉는다는(涅槃寂靜) 사법인의 가르침, 그리고 괴로움이라는 현상(苦)을 직시해 괴로움의 발생 과정(集)을 알아내어, 괴로움의 제거 방법(道)을 통해 괴로움의 소멸 상태(滅)에 이른다는 사성제의 가르침 등은 모두 미오 간의 관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특히 십이연기에서 잘 나타난다. 다르마(dharma)에 대해 무지하므로(無明), 명목적인 삶의 의지를 앞세워(行), 물질과 비물질의 일체를 분별 인식한 후(識, 名色, 六入, 觸), 거기서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을 느껴(受), 즐거운 것을 갈망하여 집착하니(愛, 取), 그것을 영원히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有), 무상한 생노병사에 괴로워한다(生, 老死)는 것이 십이연기의 내용이다.
그런데 십이연기에는 이처럼 괴로움의 발생 과정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소멸 과정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무명으로 인해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명을 제거하면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아울러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무지(無明)로 인해 괴로움 속에서 헤매는 미계(迷界)에 있지만, 자각(明)을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난 오계(悟界)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무명과 명으로 표현된 미오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오계의 부처란 바로 다르마에 대해 깨달은 자이고, 그런 깨달음의 내용인 다르마 자체는 여래의 출현 여부와 관계 없이 존재하다는 것은 미와 오의 관계에서 본래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시사해 준다. 모든 것이 다르마를 본성(法性)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法界)인 이상, 비록 그런 다르마에 무지하여 거기에 맞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살면서 미계에서 헤매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삶보다는 다르마를 깨달아 오계의 삶을 사는 것이 무시 이래로 있어 온 저 일체의 본성에 부합하는 본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명과 미계의 현실이 비본래적인 것으로서, 번뇌에 물든 염오(染汚, kilissana)된 것인 데 비해, 명과 오계의 가능성은 본래적인 것으로서, 번뇌에 물들지 않아 청정(淸淨, pabhassara, suddhi)한 것이다. 인간의 상황이 미오의 이중적 복합성으로 되어 있고, 전미개오가 오직 마음가짐의 전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교에서 인간의 탐구가 마음의 탐색으로부터 시작하며, 그것이 비본래적 현실성과 본래적 가능성 혹은 염과 정의 구도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을 염과 정의 구도에서 탐색하는 것은 서양에서 이성과 동물성, 유가에서 선과 악, 도가에서 정(靜)과 동(動)의 구도에서 인간을 보는 것과 대비된다. 불교적 인간관의 이런 구조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심성본정 객진소염(心性本淨 客塵所染)”이다. 이러한 관점이 초기 불교 이래의 전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증지부경전》에 다음과 같은 것이 나와 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밝게 빛나고 있다. 단지 일시적인 번뇌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여기서 ‘일시적인’이라고 옮겨진 a-gantuka는 ‘손님(客)처럼 잠시 왔다 가는’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거울에 잠시 내려앉은 먼지(塵)와도 같기에, 보통 객진(客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더럽혀진 오염이 이렇게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이것은 당연히 본래의 상태에서는 밝게 빛나는 청정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마음의 본성(citta-pr.akrti)’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심성본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번뇌가 손님이라는 것은 본래의 마음이 주인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이토록 마음이 중심이므로,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되니, 마음이 주인되어 마음이 시키는 것이며(心爲法本 心尊心使)” 따라서 “마음이 더러워지면 중생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면 중생이 깨끗해진다(心惱故衆生惱 心淨故衆生淨).”고 한다. ‘심성본정 객진소염’이 가리키는 상황은 비유하자면, 구름(번뇌)이 달빛을 잠시 차단하지만 구름이 지나가면 달(마음)은 도로 본래대로 밝게 빛나는 것과도 같다. 이럴 경우 달은 구름에 의해 가려지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원래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 자체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불변(不變)’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생과 멸이라는 대립적 분별 의식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 없이’ 본래 그대로 있는 진여(眞如)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초월적 절대자의 고정 불변이나 영생 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청정’이라는 것도 선과 악의 이분적 가치 판단에 물들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극악과 반대되는 절대적 최고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을 받들어 행하되,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는 칠불통계(七佛通戒)도, 단순히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하라는 윤리적 교훈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본래 상태(善惡未分前本來面目)’로 돌아가 선악에 물들지 않은 청정함을 회복하라는 주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심성본정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것을 사단(四端)의 선심(善心)을 주장하는 맹자식의 성선설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마음의 이러한 본래 그대로의 면목을 일러 ‘본성(prakr.ti)’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이 마음은 ‘본성청정심(prakr.ti-prabha-svara-citta)’이라고 표현된다. 그리고 본성은 ‘자기만의’ 고유한 성질이라는 점에서는 자성(自性, svabha-va, 자기 존재)과 통할 수 있으므로, 본성천정심은 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을 일체의 진상으로 보는 대승 불교의 기본 입장과 자성청정심이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자성의 공이든 자성의 청정이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진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저 ‘그러그러하다(如如, tathata-)’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대해서, 무자성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상호의존(緣起)하기에 고립적 실체성(自性)이 부정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보는 데 비해서, 자성청정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이원적 분별에 의해 더해질 것도 덜해질 것도 없이(不增不減) 제 스스로 본래 그러한 상태’로 본다.
진여라는 동일한 상태에 대해서, 전자는 실체성(자성)의 부정 쪽에서 보고, 후자는 본래성(본성)의 부각 쪽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공관(空觀)을 주장하는 반야계 경론서들에서는 “생사를 여읜 자(善逝)를 포함해 모든 것이 무자성이므로 곧 자성청정이라 한다(一切法與善逝等而無自性 此如是說卽自性淸淨).”고 하여, 자성의 청정을 자성의 없음, 즉 공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마음의 본성이 불생불멸하여 항상 청정한 모습인 것은 마음과 마음의 상이 모두 공하기 때문이다(心性不生不滅 常是淨相 心心相空故).”고 하여, 자성청정심을 공성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자성청정심과 공성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자성청정을 마음의 본성으로 지닌 인간의 본성 역시 공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야사상과 중관사상은 ‘심성본정 객진소염’의 가능 근거가 공성에 있음을 주장할 뿐, 마음 자체의 작용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식사상에서는 ‘심성본정 객진소염’이라는 정과 염의 구조를 아뢰야식을 통해 종합적으로 파악한다.
아뢰야식(a-laya-vijn~a-na, 阿賴耶識)이란, 아뢰야라는 말에 저장(藏)이라는 뜻이 있듯이, 심리적 경험 활동에 의해 산출되는 잠재적 형성력(種子, b1-ja)들을 축적하여 간직하고 있는 의식(藏識)을 말한다. 우리는 보통 경험 활동의 주체가 자아이고, 그 활동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밖에 따로 실재한다고 여기지만, 활동의 주체는 마음이며,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vijn~a-na)에 의해 알려진 내용(vijn~apti)에 불과하다(vijn~apti-ma-tra, 唯識). 유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단지 찰나찰나 생멸하는 마음이 일정 기간 지속되는 것을 자아라는 개념으로 묶어 집착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자아의식(제7식, 意)과 대상의식(제6식, 識)을 총괄하여 마음의 흐름(心相續)에서 주체가 되는 일종의 잠재의식이 바로 아뢰야식(제8식, 心)이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아뢰야식은 정과 염, 선과 악의 의지처가 되며, 마음이 정(淨)이나 염(染)이 되고 행동이 선이나 악이 되는 것은 그 근저에 아뢰야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 복합성의 중도적 성격은 존재의 상태를 3종으로 분석한 소위 3성(性)이론에서도 나타난다.
유식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의식된 세계로서, 전(全)7식과 아뢰야식이 서로 매개되어 상호의존적으로 대상을 형성하는 것(依他起性, paratantra-svabha-va)인데, 이것은 의식 자신에 의해 언어를 통해 실체화되면서 두루 분별되고 집착되는 것(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a-va)이 되기도 하지만, 상호의존적으로 형성된 것 자체는 원래부터 공(空)의 상태로 완성되어 있는 것(圓成實性, parinis.panna-svabha-va)이다. 이것은 의타기성을 중심으로, 변계소집성이라는 현실과 원성실성이라는 본래적 가능성을 통일하는 것이며, 연기된 세계가 일시적으로는 분별되고 있지만 원래적으로는 이미 완성된 것이라고 하여, 객염(客染)과 본정(本淨)을 종합하는 것이다.
또한 원성실성이란 의타기성의 본질을 공성으로 이해한 것이기 때문에, 공성을 주장하는 중관과 유식이 마치 무(無)와 유(有)처럼 모순된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며, 공성으로서 원성실성에서는 의식이 진여와 합일되고 주객이 무이(無二)로 되어 ‘대상도 마음도 아울러 없게 되기(境識俱泯)’ 때문에, 유식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간주하는 것도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유식 사상에서는 인간의 상황에 담긴 미오나 염정의 이중적 복합성과 전미개오(유식의 표현으로는 轉識得智)의 가능성을 아뢰야식과 3성 이론을 통해 나름대로 종합하고 있지만, 심성본정보다는 범부의 마음 상태를 해명하는 객진소염 쪽에 비중을 더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해 여래장 사상에서는 심성본정 쪽에 강조점을 두고 객진소염과의 통합을 모색하고 있다. 여래장(如來藏, tatha-gata-garbha)이란 여래와 태(胎, 태아 또는 자궁)의 합성어이다. 여래(tatha-gata)는 진여(tatha)에 도달(agata)한 자이고, 진여는 일체의 진상인 법성(法性)으로서 모든 것에 편만해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일체 중생은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래장이 여래의 태아라고 하는 것은, 가능성의 차원에서는 태아가 그대로 성장하면 여래가 될 수 있는, 그래서 여래와 같은 종족(gotra)이 되는 것이지만, 현실성의 차원에서는 아직은 여래가 아니고,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태아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능성 차원에서 드러나는 여래와 중생의 동일성은 인간 본래의 심성본정을 가리키고, 현실성 차원에서 나타나는 여래와 중생의 차이성은 인간 실존의 객진번뇌를 함축한다. 이것을 《승만경》의 표현대로 하면, 객진번뇌성은 진여의 충만함이 ‘비어 있는’ 일시적인 허망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여래장(空如來藏)이고, 본성청정성은 진여의 충만함이 ‘비어 있지 않은’ 본래의 원만구족한 것이라는 점에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다.
그러나 공여래장이든 불공여래장이든 동일한 진여의 은폐와 구현으로서, 양자는 기본적으로 무자성의 일체이고, 더욱이 여래의 본성인 법성이 곧 공성이기 때문에, 여래장은 공성의 유적(有的)인 표현일 뿐, 공성을 위반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래장이 공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잘 보여주는 표현이 바로 불성이다. 불성(佛性)에 해당하는 인도 원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보통 붓다―다투(buddha-dha-tu)를 그 해당어로 본다.
붓다란 법(法, dharma)을 보아 깨달은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법을 본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담보해 주는 표현이 다투이다. 다투의 어근 dha-는 ‘야기하다, 일으키다’ 또는 ‘놓다, 위치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전자의 뜻으로 할 경우, 다투는 ‘야기하는 것’(因)이고, 붓다―다투는 ‘부처가 되게 하는 근원’이나 ‘부처가 될 요소’ 등을 의미한다.
후자의 뜻으로 할 경우, 다투는 ‘야기되어 놓여진 것’(界)이고, 붓다―다투는 ‘그런 근원에 의해 야기되어 부처와 한 종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불성을 전자의 의미로 해석할 경우, 그 해당어는 붓다―가르바(buddha-garbha, 佛藏)가 되고, 후자로 해석할 경우에는 붓다―고트라(buddha-gotra, 佛姓)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투의 이런 용법은 다르마―다투(dharma-dha-tu, 法性·法界)에도 적용된다. 다투의 첫번째 용법에 따를 경우, 다르마―다투는 ‘모든 존재자의 현상을 야기하는 근원’으로서의 ‘연생성(緣生性, prat1-tyasamutpannatva)’, 즉 법성(法性)을 가리키고, 그 두번째 용법에 따를 경우에는 ‘연기라는 원리 하에 마치 하나의 가족이나 종족처럼 공존하며 모여 있는 것’ 다시 말해 ‘연기한 제법(prat1-tyasamutpanna- dharma-h.)’, 즉 법계(法界)를 가리킨다.
법을 본 자를 부처라고 하는 이상, 부처를 되게 하는 근원은 법이고, 이 법에 해당하는 것이 일체의 근원으로서의 법성이며, 법성은 바로 연기성과 공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성은 곧 법성이고 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불의 가능 근거와 일체의 존재 근거가 공성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은 곧 인간과 세계 모두가 공함에 의해 드러난 진여이며(佛性者 卽是人法二空所顯眞如)”, 인간과 세계가 모두 공으로서, 분리되지 않는 “무이의 성이 바로 불성이니(無二之性 卽是佛性)”, “불성이 없다는 것은 바로 공성이 없다는 것이다(無佛性者 卽無空性).”고 말할 수가 있다.
심성본정 객진소염이라는 미오의 이중적 복합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여래장이고, 그것의 이론적 토대가 공성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불성이지만, 여래장과 불성은 모두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인도에서 여래장 사상이 성립된 이래 후대로 갈수록, 여래장보다는 불성이라는 표현이 더 잦아지고, 특히 중국 불교에 이르러서는 여래장 사상을 체계화한 《보성론》이 거의 잊혀질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중국 불교에서 여래장이 불성으로 대체되는 것은 붓다―다투를 불성으로 옮김으로써, 중국인들이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불성이란 단순한 번역 용어 이상이며, 거기에는 불교 사상과 중국 전통 사상 간의 상호 침투 관계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불성의 중국적 수용의 첫번째 특징은 불성의 인성화이다. 붓다-다투를 불성으로 옮길 때의 그 성(性)자는 단순히 추상명사형의 어미가 아니라, 중국의 유가적 인성론상의 성, 즉 일반 사물의 특징(物性)이나 동물의 특징(獸性)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人性)과 연결된 말이다.
이제 성불의 가능 근거를 의미하던 붓다―다투가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되며, 그렇게 인성화됨에 따라, 맹자 이래로 인성론을 심성론의 차원에서 다루어왔던 중국인들은 불성 사상에 담긴 심성본정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축도생(竺道生)은 맹자식의 성선을 불성론적으로 해석하여, “성선(性善)에서 선이란 이(理→다르마)의 오묘함이고 성이란 근본으로 돌아감이다(性善者 妙理爲善 返本爲性也).”고 했고, 혜능(慧能)은 심성본정을 곧바로 ‘인성본정(人性本淨)’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불성이 인성화되고 심성화됨으로써, “성이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性卽是心 心卽是佛)”, “마음을 밝히는 것이 성을 보는 것이고(明心見性)” “성을 보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見性成佛).”라는 선불교의 기본 주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불성론이 인성화 심성화됨에 따라, 후대의 신유학은 오히려 보다 더 쉽게 불교의 사상을 흡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불성의 중국적 수용의 두번째 특징은 불성의 본체화이다. 본체론이란 만물은 자신의 전일적 근본(體, 본체)을 터전으로 삼아 조화롭게 작용하고 있는 것(用, 현상)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중국에서의 본체론은, “만물은 모두 도로부터 말미암아 생겨난다(萬物皆由道而生).”고 주장한 도가사상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그 도는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을 성으로 삼고, 자연은 그 도를 체로 삼으니, 즉체즉성(卽體卽性)의 도즉자연(道卽自然)이 되어, 성은 곧 체와 연결된다. 이것은 본성을 심성의 차원에서 다루는 맹자와는 달리, 본성을 본체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법성과 공성으로서의 진여실상이 만물의 근본이고, 불성은 이런 법성과 다르지 않으므로, 불성 역시 기본적으로는 본체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중국에서 성이 체화(體化)되어감에 따라, 불성도 본체화되며, 이렇게 내 속에 있는 만법의 근원으로서 본체화된 불성을 일러 본성(本性) 또는 자성(自性)이라 부른다. 그래서 혜능은 “스스로 본성을 보니(自見本性)” “자심에서 진여 본성이 문득 현현한다(自心頓現眞如本性).” “만법은 자성을 따라 생하니(萬法從自性生)” “만법은 자성에 있다(萬法在自性).”라고 말한다.
이 때의 자성은, 공은 곧 무자성이라 하여 부정되는 중관불교의 자성과는 다른 것이다. 혜능의 자성은, “만경은 스스로 여여(如如)한 것이니, 만약 이렇게 본다면, 바로 무상보리인 자성인 것이다(萬境自如如 若如是見 卽是無上菩提之自性也).”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이(無二)의 진여본성이 차별 없이 여여하게 제 스스로 있음(自在)을 표현하는 말이다. 연기하여 여여한 상태에 대해서, 그런 상태에선 고립적 실체로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 무자성(無自性)이고, 그런 상태는 분별에 의해 좌우됨 없이 그 자체로 본래 자재하다는 점에 주목하면 자성(自性)이다.
따라서 진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무자성과 자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진여 공성은 무자성이기도 하고, 자성이나 실성(實性)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진공(眞空)을 묘유(妙有)의 실상(實相)으로 긍정하는 태도인데, 이런 태도를 갖고 있기에 혜능은 “자성은 진공이다(自性眞空).”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성과 자성이 모두 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불성을 본체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실체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서양철학에서 본체(noumenon)는 정신(nous)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불변의 예지계를, 현상(phenomenon)은 이런 불변의 본체를 토대로 드러나는(phainomai) 덧없는 감성계를 의미하는 데 반해서, 중국철학에서 체(體)는 한 몸과도 같이 융화된 전체를, 용(用)은 이런 전일적 체 내에서의 역동적이고도 다양한 작용들을 가리킨다. 서양철학에서는 본체와 현상이 실체적으로 분립하지만, 중국철학에서는 체와 용이 상즉(相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불교에서의 본체도 인간과 만물을 떠나 실체적으로 독립 실재하는 별유일물(別有一物)이거나, 만물을 실제로 생성시키는 우주론적 발생 기능을 지닌 초월적 주체이거나 한 것이 아니다. 만법 중 진여의 공성을 벗어나 성립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이렇게 만물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전일적 터전이 되기에 그저 본체라 할 뿐이며, 이런 공성으로서의 본체는 무상이면서도 실상(無相而實相)인 불이(不二)의 존재이므로, 특정의 실체로 한정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실체화될 수 없는 공성이 바로 불성의 내용인 이상, 불성은 공성과 연기성의 자각 가능성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희망적 어법으로 간주해야지, 그런 불성을 실체적으로 미리 주어진 어떤 성품으로 고정화시켜서는 곤란하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중국의 불교인들에게 불성의 인성화는 불성이 인간의 본성으로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고, 불성의 본체화는 그렇게 심성화된 불성이 만법의 근본인 진여 공성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이제 우리는 불교에서 인간의 본성은 불성이며, 그것도 ‘공성으로서의 불성’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공성으로서의 불성’이 철학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바를 간략히 살펴보기로하자.
첫째, 공성으로서의 불성은 인간 본성의 비고정성과 그로 인한 자유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서양철학이나 전통 중국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본능적 요소(instinct, 生)와 본질적 요소(essence, 心)로 구분한 후, 동물성과 이성,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악성과 선성, 자연성과 도덕성 중에서 어느 한 측면을 부각시켜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이런 특정의 측면으로 한정될 경우, 그런 본성의 능력을 지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고, 더욱이 인간 자신이 그런 요소에 의해 제약받음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을 특정한 것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그런 본성의 장악을 통해 타자를 지배하려는 미리 전제된 의도 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런 본성의 이름으로 지배의 주체 자신이 속박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연기적 시각에서 보자면, 본능의 욕망(愛)과 본질의 이성(識)은 모두 자기의 지속적 존립을 의도로 한 의지 활동(行)의 산물로서, 연기성과 공성에 대한 무지(無明)로 인해 야기된 것들이다.
연기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고정된 실체로 환원될 수 있는 단순성(simplicity)의 존재가 아니라, 상호 연관된 중층적 구조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복잡성(complexity)의 존재이며, 이런 관계의 망 속에서의 인간의 본성은 공성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성으로서의 불성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은 욕망의 충동이나 이성의 사유나 맹목의 의지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존재이며, 그런 것들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과 사유와 의지의 자의적 구사나, 그런 것들의 주체로서의 자아의 자발성이 아니라, 욕망과 사유와 의지의 중도적 극복이며, 그런 것들을 공화(空化)시키는 진여 실상의 수용성이다. 자유(自由)란, 그 말의 기원인 선(禪)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이성적 ‘자아로부터 비롯함(自我由)’이 아니라, 진여의 ‘자성으로부터 비롯함(自性由)’인 것이다. 사유하면서 그런 사유의 능력(이성)을 자신만의 우월성으로 확대 재생산해 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유하면서도 사유를 떠나는 머물지 않음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며(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그것이 곧 공성의 자유이다.
둘째, 공성으로서의 불성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화해시킬 수 있는 조화로운 인간본성론을 창출할 수 있다. 불성과 법성이 모두 공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본성이 공성으로서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종적 우월성의 표시가 아니라, 자연과의 불이(不二)적 연관성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우월적 본성을 빙자한 어떠한 인간 중심주의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기보다는 ‘공성으로서의 불성을 지닌 중생’인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한 지배의 화신도 아니고, 동물적 욕망의 노예만도 아니다. 그런 인간은 자신과 한 생명의 그물로 연결된 일체의 존재에 대해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자신이 중심임을 주장하지 않는 탈중심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중심주의의 올바른 극복은 서양의 동물행동학에서처럼 인간을 동물과 동질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비롯한 일체생명과 인간과의 상호보완적 관계성(연기 공성)을 자각하여 회복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와 공이라는 비실체적 상호의존성을 공통의 본성으로 하여 자연과 인간이 화해를 이룰 때, 진정한 생태학적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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