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식사상의 흥기
유식사상에서는 자기의 밑바닥에 아뢰야식을 세워 그 식으로부터 자기와 존재하는 세계의 일체가 변현(變現)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것은 식에 따라 자기를 실체시하는 것으로서 제법무아라는 불교 본래의 입장을 상실한 것이다라는 이해가 제법 널리 퍼져있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는 후기 유식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이 이해되어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초기의 유식사상은 이러한 것과는 거의 동떨어진 깊은 사상이었다고 짐작하고 있다.
유가행파는 유식사상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학파로서, 공관을 설한 중관파와 후대의 인도 대승불교의 두 유파를 형성하였다. 유가행(瑜伽行)이란 요가의 실천을 의미하지만 원어인 '요가짜리(yogacara)에는 '유행을 하는 사람', '요가의 스승'이라는 의미도 있다. 현장은 이것을 '유가사(瑜伽師)'라 번역하였다. 이 유가사들에 의해 유식사상이 발생하였다.
유가행파의 학설은 중국이나 일본의 법상종(法相宗)에 해당된다. '법상'이라는 것은 법 즉 부처님 가르침의 형태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조직한 학문이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대승적인 해석을 부여하여 구사론과는 다른 전개 방식을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유식사상의 발달
굽타왕조시대에 형성된 유가행파(瑜伽行派)는 <해심밀경(解心密經)>이나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摩經)>의 사상을 이어받아 조직된 학파이다. 이들은 요가의 실천을 통해서 유식(唯識)의 체험을 심화하고, 용수에 의해 체계화된 공사상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을 전개했다. 유가행파는 중관파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이 유가행파의 시조는 미륵(彌勒, Maitreya)이며, 그 후 무착(無着, Asa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이 유식설을 체계화시켰다. 유식파의 개조인 미륵 논사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무착이 미륵보살을 만나 유가행(瑜伽行)의 깊은 뜻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전설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중국과 티벳에도 전해졌으며 무착이 미륵보살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논(論)이 중국과 티벳에 각각 5부가 있다. 이 양자의 전승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를 종합하면 일곱 가지가 된다.
미륵의 저작으로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변중변론송(變中邊論頌)>, <금강반야경론송(金剛般若經論頌)>, <현관장엄론송(現觀莊嚴論頌)>, <법법성분별론(法法性分別論頌)>, <구경일승보성론(究境一乘寶性論)>이 있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은 유가행파의 기본서로서 본지분(本地分), 섭결택분(攝決擇分), 섭석분(攝釋分), 섭이문분(攝異門分), 섭사분(攝事分)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본지분(本地分)에서는 요가 행자가 수행해야 할 17개의 명상단계를 성명하고 있고, 섭결택분(攝決擇分)에서는 아뢰야식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유가사지론>을 제외한 나머지 저서는 모두 간결한 시구로써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구경일승보성론(究境一乘寶性論)>은 티벳에서는 시구의 부분이 미륵의 교설이며, 산문 주석은 무착의 저작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전체가 견혜(堅慧)의 저작이라고 한다. <구경일승보성론>의 저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륵의 뒤를 이어 유식사상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무착과 세친이다. 무착은 북인도 간다라 지방의 푸루샤푸라 출신으로 처음에는 소승불교로 출가했다가 나중에 대승불교로 전향하여 미륵의 가르침을 받고 이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무착의 저서로는 <섭대승론(攝大乘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현양성교론송(顯揚聖敎論)>, <순중론(順中論)>, <육문교수습정론송(六門敎授習定論)>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섭대승론(攝大乘論)>으로, 여기서는 대승불교의 특성을 10항목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 10항목의 배열은 현실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소지의분(所知依分)에서는 이전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켜 아뢰야식에 대해 논하고 있고, 소지상분(所知相分)에서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삼성설(三性說)을 논하고 있다.
세친은 대략 4 ~ 5세기 인물로 추정되는데, 무착의 동생으로 처음에는 소승교단에 출가하여 <구사론>을 저술하였지만 형인 무착의 영향을 받아 대승으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세친은 미륵과 무착의 대부분 저서들에 주석을 썼으며, 여러 대승경전의 해설서도 썼다. 유식설에 관련된 저작으로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삼자성게(三自性偈)>,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등이 있다. 세친의 주요 저작은 <유식삼십송>과 <유식이십론>이다.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은 <유가사지론>, <해심밀경>, <대승장엄경론>, <변중변론> 등을 바탕으로 해서 유식설의 요점을 30개의 시구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후 유식 사상가들은 <유식삼십송>에 대한 주석서를 써서 그들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대표적인 주석으로는 안혜(安慧)의 주석과 호법(護法)의 주석인 <성유식론(成唯識論)>이 있다. <유식삼십송>은 30개의 시구로 이루어진 것으로, 세친은 여기서 식(識)의 전변(轉變)이라는 관념을 도입하여 아뢰야식, 말나식(末那識), 전육식(前六識) 등 8식에 의해 현상 세계가 식의 현현(顯現)임을 설하고 있다.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은 약 20개의 시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서 세친은 소승불교를 비롯한 일반의 사상을 비판하여 ‘오직 식(識)뿐이며 외경(外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무착과 세친에 의해 대성된 유가행파는 하나의 학파로 계속 발전해갔다. 이후 연구는 주로 기본적인 경론에 대한 주석작업으로 이어졌다. 현장은 세친의 <유식삼십송>을 주석한 사람으로 십대(十大) 논사를 거론하고 있다. 이들은 호법(護法), 덕혜(德慧), 안혜(安慧), 친승, 난타(難陀), 정월(淨月), 화변(火變), 승우, 승자, 지월(智月)이다. 이 가운데 안혜와 호법의 주석만이 남아있다. 다른 주석들은 호법의 주석 가운데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세친 이후 유가행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진나(陳那)를 들 수 있다. 진나는 480 ~ 540년 경의 인물로 주된 저작은 인명(因明:논리학)에 관한 것으로 <집량론(集量論)>이 있으며, 유식에 관계된 것으로는 <관소연론(觀所緣論)>, <취인가설론(取因假說論)> 등이 있다. 논리학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에 공통된 학문으로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파를 니야야학파라고 한다. 니야야는 자기의 주장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승인하게 하기 위한 변론이다. 불교에서는 논리학을 인명(因明)이라고 하는데, 인(因)에 관한 명(明)이라는 뜻이다. 이전의 논리학에서는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인 인식근거(量)에 현량(現量:직접 지각), 비량(比量:추론), 비유량(比喩量:유추), 성언량(聖言量:성인의 말)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진나는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근거는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진나는 추론식을 종전의 오분작법(五分作法)에서 삼지작법(三支作法)으로 개량하였다. 오분작법(五分作法)은 종(宗:주장), 인(因:이유), 유(喩:실례), 합(合:적용), 결(結:귀결)로 구성되어 있다. 삼지작법(三支作法)은 종(宗), 인(因), 유(喩)로 구성된 것으로 유(喩)에는 동유(同喩)와 이유(異喩)가 있다.
진나 이후 인도의 모든 학파에서는 논리학이 중시되었으며,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 이를 사용하였다. 진나의 논리학은 법칭(法稱)에게로 이어져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8세기 이후 중관파 논서에서는 진나와 법칭 계통의 유식설을 유상유식(有相唯識)이라고 하여, 이를 무착 이래의 전통적인 학설인 무상유식(無相唯識)과 구별하고 있다. 유상유식(有相唯識)은 마음 안의 대상의 형상과 이를 지향하는 인식작용의 대응성, 즉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대응성에서 인식이 성립한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지각의 내용으로 파악되는 사물의 형상에 사유가 이와 합치하는 판단을 내릴 때 정확한 인식이 성립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무상유식(無相唯識)은 대상의 형상을 표상함과 이를 지향함, 즉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작용 자체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분별은 미혹한 것이며 진리는 직관에 의해 획득된다고 보았다. 대체로 유상유식(有相唯識)은 식(識)의 실유(實有)를 강조함에 대해 무상유식(無相唯識)은 식(識)의 무(無)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3. 팔식의 구조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심(心), 의(意), 식(識)으로 부른다. 이러한 용례는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발견된다. <아함경>에서는 인간의 정신 현상을 심(心), 의(意), 식(識)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心), 의(意), 식(識)의 체성(體性)은 염오성(染汚性)이라고 보았으며, 심의식(心意識)은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여겼다. 초기 경전에서는 각각의 개별적인 심리작용은 없었으며, 생각하고 사량하고 요별하는 심리작용을 총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주체적 측면과 작용적 측면으로 파악하고, 주체적 측면을 심(心), 심법(心法), 심왕(心王) 등으로 부르고 작용적 측면을 심소유법(心所有法), 심소법(心所法)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분류가 처음으로 시도된 것은 부파불교에서부터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인간의 정신현상을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로 분류하였는데, 심왕(心王)은 마음의 주체로서 인식주관이며, 심소(心所)는 개별적인 심리작용이다. 심왕(心王)이 바로 심의식(心意識)이며 이는 육식(六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마음의 작용을 구분하면서 심(心), 의(意), 식(識)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대비바사론> 제72권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의 무차별설(無差別說)과 차별설(差別說)을 같이 설하고 있다. 심의식(心意識)의 무차별설은 명칭의 차이만 있을 뿐 다같이 정신의 주체를 가리키며 체(體)가 동일하다는 것으로 이는 설일체유부의 견해이다. 심의식(心意識)의 차별설은 명칭과 교설의 시설, 의미, 업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체(體)는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심(心)은 집기(集起)의 의미가 있으며, 의(意)는 사량(思量)의 의미가 있으며, 식(識)은 요별(了別)의 의미가 있다고 설했으며 이는 정신의 주체이며 작용만 다를 뿐 체(體)는 하나라고 설하였다.
그러나 점차 유식설이 발달해가면서 유가행파의 유가사들은 선정 중에 심층적인 식의 흐름과 기능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래 부파불교시대부터 탐구되던 두 가지 문제인 윤회의 주체, 번뇌와 아집의 주체 및 의근(意根)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阿賴耶識), 번뇌와 아집의 주체는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식체(識體)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육식설(六識說)에다 아뢰야식(阿賴耶識)과 말나식(末那識)을 결합하여 팔식(八識)을 구성하였다.
팔식(八識) 가운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은 묶어서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하는데 이 식들은 각각의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외부대상을 요별하고 분별한다. 즉 안식(眼識)은 색경(色境)을, 이식(耳識)은 성경(聲境)을, 비식(鼻識)은 설경(舌境)을, 설식(舌識)은 미경(味境)을, 신식(身識)은 촉경(觸境)을 요별한다.
제6 의식(意識)은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키는데, 전오식(前五識)의 인식내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기억하고 회상하고 추리한다. 이 의식은 전오식(前五識)으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일어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번째는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일어나서 같은 대상을 인식하거나 아니면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일어났지만 의식이 단독으로 인식하는 경우이고[五俱意識], 두번째는 꿈을 꾸거나 망상, 공상 및 선정(禪定)에 들 때와 같이 의식이 독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五不俱意識]를 말한다.
제7 말나식(末那識)은 자아의식으로 제6식보다 사량분별작용이 강하고 집요하다. 즉 제6의식 깊숙한 곳에 잠재하는 이기성과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이 말나식인 것이다. 말나는 인도의 마나스(manas)의 음사어로 ‘이것저것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또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 원인으로 상정된다. 우리가 어떤 의도적인 행위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와 항상 같이하면서 업을 일으킬 때 이들에 의한 인상이나 여운 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하는 장소로서 아뢰야식이 활용되는데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식은 제6식보다는 깊고 제8식보다는 얕은 식이 상정됨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식을 제7말나식이라고 하며, 이 식에 의하여 업을 지어서 중생들이 결과적으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아뢰야(阿賴耶)는 인도의 아알라야(alaya)란 말을 그대로 음사한 것이다. 아라야란 ‘밑층에 깔려있는, 파묻히다’라는 말을 명사화한 것이며, ‘감추다, 간직하다’라는 뜻이다.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이렇게 모든 업의 산물들을 스스로 저장하는 능장(能藏)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세력들을 소장(所藏)할 장소로서의 처소로도 제공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아뢰야식은 앞에서와 같이 항상 제7 말나식의 집착과 아집 등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이 경우 제8 아뢰야식은 집장(執藏)의 뜻이 강하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의 본래 의미는 유루법(有漏法)이 현행(現行)하는 사이, 곧 아집 등이 활동하는 동안만 존재하는 것이지 아집 등이 없는 성인위에 오르면 이 식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4. 식의 전변
유식설에서는 마음의 주체적인 측면을 팔식(八識)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삼능변(三能變)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팔식(八識)은 인간의 마음이 표층에서 심층으로 향하는데 여덟 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삼능변(三能變)은 마음이 심층에서 표층으로 능동적으로 대상에 작용하는 면을 말한 것으로 이것이 식전변설(識轉變說)이다.
<중변분별론>에서 식은 대상으로서, 감관으로서, 자아로서, 육식(六識)으로 현현(顯現)한다고 설해져 있다. 즉 식의 현현은 설해지지만 아직 식의 전변을 설하지는 않는다. 식의 전변(轉變)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한 것은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이다. 전변(轉變)의 원어는 빠리나라(parinama)로 문자 그대로 변화하는 것, 달라지는 것이다. 전변이라는 말은 인도철학의 한 학파인 상키야 철학에서 근본 물질에서 시작하는 우주의 전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세친은 전변을 시간적 변화로 파악하하고 있는데, 전변에는 잠재심으로서의 아뢰야식이 형태를 바꾸어 표면심으로 나타나는 변화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유식설에 있어 전변(轉變)은 인전변(因轉變)과 과전변(果轉變)으로 나뉜다. 과전변(果轉變)에는 이숙(異熟)전변, 사량(思量)전변, 요별경(了別境)전변이 있다. 인전변(因轉變)이란 종자(種子)가 현행(現行)으로 전변하는 힘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 종자는 현행의 훈습에 의해 아뢰야식에 저장된 것이다. 즉 선(善)의 현행은 선의 종자를, 악(惡)의 현행은 악의 종자를, 무기(無記)의 현행은 무기의 종자를 아뢰야식에 저장한다. 이 인(因)과 같은 성질의 종자를 등류습기(等類習起)라고 하며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도 한다. 현행의 심리경험은 명언(名言)의 상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선악의 행위는 업종자(業種子)를 아뢰야식에 훈습하고, 이 업종자(業種子)에 의해 업의 과보가 생긴다. 이 아뢰야식 가운데 명언종자(名言種子)와 업종자(業種子)가 전변하는 힘을 인전변(因轉變)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전변(果轉變)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전생의 업의 과보로서 아뢰야식의 중동분(衆同分) 가운데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개인의 생존이 선택되는 것, 아뢰야식의 모태를 빌어 특정한 개인의 생존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총보(總報)의 과체(果體)로서의 아뢰야식이 성립하는 것으로서 전생의 업의 과보에 의해 인간으로 태어날 때 모태에 의탁하는 찰나에 인간의 아뢰야식이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이 개인적 생존의 아뢰야식 자체의 종자에서 현행의 8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숙전변(異熟轉變), 사량전변(思量轉變), 요별경전변(了別境轉變)의 세 가지 전변이 있다.
이숙전변(異熟轉變)은 아뢰야식으로, 자기의 모든 행위를 훈습하여 간직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모든 종자를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총보(總報)의 과체(果體)로서의 아뢰야식은 이숙(異熟)이라고 말해진다. 이숙(異熟)이란 과거 업의 결과로 생긴 것이지만 그 자신은 선도 악도 아닌 것은 의미한다. 이 아뢰야식도 식인 점에서 인식작용을 하고 있지만 식의 활동이 미약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 식의 활동을 하고 있는 점에서 현행(現行) 뢰야이며, 이에 대해 종자의 집합체인 점에서 종자(種子) 뢰야이다. 현행 뢰야와 종자 뢰야는 아뢰야식의 두 측면이다. 아뢰야식은 찰나멸하지만 그 가운데 성격이나 기억 등은 종자로 보존되어 개인의 인격을 형성한다. 즉 찰나멸을 되풀이하면서 변화해가는 것이다. 아뢰야식을 흔히 고정된 실체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아뢰야식은 인격의 주체로서 자아와 같지만 고정적인 실체는 아니다. 아뢰야식의 전변을 이숙전변(異熟轉變)이라고 한 것은 윤회의 주체로서 아뢰야식은 전생의 업의 결과로서 성립한 것이며, 이숙과(異熟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명언종자가 보존되어 있고, 그들도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닌 중성의 상태[無記]인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밝힌 것이 이숙전변이다.
사량전변(思量轉變)이란 말나식(末那識)을 말하며, 사량(思量)을 본성으로 하고 있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배후에 있으며, 사량에 의해 끊임없이 자아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식이다. 이것은 염오의(染五意)라고도 불리며,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더러워져있는 식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근거로 하여 생기며, 아뢰야식 가운데 스스로의 종자가 전변하여 성립한 식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자기의 자아로 잘못 인식하고 자아의식을 일으킨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배후에 있는 자아의식이지만 제6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처럼 명료하지는 않다. 말나식은 제6의식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도 활동하고 있으며, 기절했을 때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자아의식을 저절로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요별(了別)이란 판단 즉 인식활동, 식의 작용을 말한다. 아뢰야식이건 말나식이건 식은 요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을 판단하는 전6식의 작용은 특히 미세하지도 않고 대략적이기 때문에 전6식의 작용을 요별경전변(了別境轉變)이라고 한다. 전6식이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전5식과 제6의식(意識)이다. 전5식은 감각적 인식이며, 그 소연(所緣)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오경(五境)이다. 제6의식에는 감각적 인식과 동시에 활동하고 이 결과를 인식하는 것과 의식만이 단독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 전5식은 감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의식과 동시에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물들어 5식도 선(善), 악(惡), 무기성(無記性)이 된다고 한다. 의식은 외계의 사물을 실체적으로 구상하여 법집(法執)을 일으킨다.
5. 삼성설
유식사상은 용수의 공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공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하여 인식과 존재와 깨달음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삼성설(三性說)이다. 삼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변계소집성은 집착과 미망의 세계이며, 의타기성은 서로 의지하는 연기의 세계이며, 원성실성은 깨달음의 세계이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분별성(分別性)이라고도 하며, 범부의 인식내용이 허망함을 뜻한다. 범부가 인식하는 것은 성인이 인식하는 것과 다른 것으로, 현상세계와 자아를 집착하여 이를 고정적 실체로 인식하고 있다. 즉 이러한 범부의 인식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허망분별에 의해 거짓으로 분별된 인식이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인 것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의타성(依他性)이라고도 한다. 의타기(依他起)란 다른 것에 의존해 생긴다는 뜻으로 타(他)란 연(緣)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의타기(依他起)란 연기(緣起)와 같은 것이다. 식(識)은 수많은 연(緣)이 모여서 성립한 것으로 독자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연(緣)이 흩어지면 식(識)도 사라지게 된다. 식은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것이다. 즉 의타기성은 여러 가지 조건이 서로 화합됨에 따라 존재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우리의 현실세계이며, 모든 존재의 보편적인 모습인 것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진실성(眞實性) 이라고도 하며, 의타기성의 식(識)으로부터 허망한 분별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의타기성 이외에 특별한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상세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으로 의타기성의 진실을 각성하는 것이다. 즉 의타기성의 세계를 의타기성의 세계라고 그대로 자각하는 것이다. 실체를 그대로 자각하는 것, 존재의 진상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원성실성이다. 즉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인 주체가 원성실성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원성실성의 경지에서도 의타기성의 상(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미망에 싸여있는 것은 변계소집성이며, 자기를 깨닫는 것은 원성실성이다.
6. 유식의 수행
유식설에서는 미혹과 허망분별로 가득찬 세계를 자각하고 이를 전환하여 무분별의 세계인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설하고 있다. 즉 윤회의 세계에서 전환하면 깨달음의 세계가 드러나는데 이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유식설에서는 유가행의 수습단계가 발전하여 오위설(五位說)로 정착되었지만 이미 부파불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설해지고 있었다. 오위(五位)는 유식관의 진전을 나눈 것으로,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이다.
첫째 자량위(資糧位)는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축적하는 수행의 준비단계라는 의미이다. 즉 친구의 권유나 자기의 의지로써 유식의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믿고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 유식(唯識)이 자기 것으로 체험되지 않은 단계이다. 따라서 아집, 법집의 번뇌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단계이다.
둘째 가행위(加行位)는 이미 직접적으로 유식(唯識)의 수행으로 나아간 단계이다. 그러나 눈 앞에 어떤 대상을 설정하고 ‘이것이 유식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단계이므로 아직 참된 유식에 들어 갔다고는 할 수 없다. 즉 유식이라는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러나 가행위(加行位)에서 사심사관(四尋四觀) 사여실지관(四如實智觀) 등의 관법을 닦아 유식의 수행이 진전함으로써 유식에 통달한다. 이것이 세번째 통달위(通達位)이며,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즉 인식의 대상을 나로 집착하거나 법으로 집착하는 일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혜가 소연(所緣)에서 생기지 않을 때 유식성에 머문다’라고 한다. 소연(所緣)에서 앎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집착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집착하는 주체도 없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분열이 없어진 지혜이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한다. 이것은 상대를 떠난 지혜, 즉 공(空)의 지혜이다.
이 유식에 안주한 지혜를 견도(見道)라고 한다. 견도(見道)에는 진견도(眞見道)와 상견도(相見道)가 있다. 진견도(眞見道)는 근본 무분별지(無分別智)에 의해 생기며 유식의 성(性)을 깨닫는 것이고, 상견도(相見道)는 후득지(後得智)에 의해 생기며 유식의 상(相)을 깨닫는 것이다. 이 통달위는 성자의 부류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십지(十地) 중 최초의 환희지에 든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수행을 계속하여 제10지의 위(位)에 이르기까지가 네번째 수습위(修習位)이다. 즉 이 단계에서는 되풀이해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수습하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어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전의(轉依)를 실현하는 것이다. 앞의 통달위 단계에서도 무분별지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며 다시 번뇌가 생긴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분별지를 자주 수습하여 그 수습이 완성될 때 전의(轉依)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번뇌장(煩惱障)을 떨쳐버림으로써 열반을 얻고 소지장(所知障)을 떨쳐버림으로서 보리를 얻는 것이다.
수습위의 다음인 다섯번째 구경위(究竟位)는 불과(佛果)이다. 즉 오랜 기간동안 수행한 결과 마침내 마음이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에 머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출처: 달마넷 http://dharmanet.net/content/20020320/200203201016645534.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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