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사상

불교사상의 전개 3

slowdream 2007. 10. 9. 14:06
 


3) 천태사상(天台思想)


천태의 교리적 핵심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제법이란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고, 실상은 참된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제법실상이란 현실의 온갖 사물이 참된 존재라는 말로써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제2품 방편설에 나오는 말이다.


천태학의 소의경전은 <법화경>이며, 이 경을 중심으로 교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천태에서는 <법화경> 28품을 앞뒤 14품씩으로 나누어 본다. 앞은 적문(迹門)이라 하는데, 현실적으로 제법실상을 중심으로 불타의 금생교설을 총괄하였고, 뒤의 본문(本門)은 시간적으로 제법의 영원성을 지시하고 불타의 과거세의 온갖 행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천태학의 주요전적이라 할 때 <법화경>보다는 삼대부로 불리는 법화경의 세 가지 주석서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삼대부는 천태의 강의내용을 장안 관정(灌頂)이 필수 정리한 것이다. 천태종의 개종자인 지의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년에 학문과 수행이 원숙한 경지에서 독창적인 불교학의 체계를 세워 강설한 주석서인 <법화문구(法華文句)>와 법화철학의 정수요 원론서인 <법화현의(法華玄義)>와 수행과 실천의 대도를 밝힌 <마하지관>을 삼대부로 불러왔다.


먼저 <법화현의>는 <법화경>과 천태학의 총론적 연구서이다. 교상문(敎相門, 교학)의 대표 저서로서 <묘법연화경>이라는 경의 제목을 중심으로 하여 경전의 요지를 해석하고 붓다 일생의 교법을 체계적으로 논술하였다. 이른바 오중현의(五重玄義)로서 법화사상을 강론한 것이다. 곧 경의 제목, 주체, 근본, 작용, 교판의 다섯 기준에서 <법화경>을 중심으로 모든 경전을 분석 판별하여 법화우위를 주장한 것이다.


<법화문구>는 <법화경> 28품의 모든 문장을 해석한 주석서이다. 여기에서도 네 가지 기준을 설정하여 전형적인 경전 해석학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설법의 인연에 따른 해석이며, 그 둘은 듣는 이의 근기와 기호에 따른 해석이고, 다음은 불타의 입지가 법신(法身)의 본래불인가 아니면 화신불(化身佛)인가 등에 따른 차별적 해석이며, 마지막은 관심법 등 신행방법의 차이에 따른 해석이다.


삼대부의 마지막인 <마하지관>은 천태종의 실천적 관심법을 체계화한 저서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선정법은 천태 이전부터 전해온 여러 경전들의 내용을 모으고 정리한 것이어서 독특한 것은 아니지만 지의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천태의 교상판석


중국에서의 교판사상의 기원을 찾아본다면 동진시대의 라집(羅什)과 보리유지(菩提流支)의 일음교설(一音敎說)이 있었고 라집의 수많은 문하 중에서도 특히 도생(道生)의 사종법륜설(四宗法輪說)과 승예(僧叡)의 사교설(四敎說) 등이 있었다. 육조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진시대에 행해지던 교판사상이 점차 발달하여 ‘남삼북칠(南三北七)’의 교판이 형성되었다. 먼저 남방 삼가(三家)의 교판설을 살펴보면 이들은 불교를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나누었다. 돈교에 <화엄경>을 배대시켰으며 점교는 유상교(有相敎; 아함), 무상교(無相敎; 반야), 억양교(抑揚敎; 유마), 동귀교(同歸敎; 법화), 상주교(常住敎; 열반)로 나누었다. 북방 칠가(七家)의 교판설 가운데 광통(光統)과 혜광(慧光)의 사종판(四宗判)에서는 불교를 인연종(因緣宗; 비담), 가명종(假名宗; 戒論), 광상종(대품삼론), 상종(常宗; 열반, 화엄)으로 나누었다. 이 사종판은 후에 오시팔교(五時八敎)설 가운데 화의사교(化儀四敎)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천태대사 지의는 <법화현의>에서 ‘남삼북칠’이라 하여 이전에 정한 대표적인 교판 10 가지를 열거하여 전부 비판하고 자신의 교판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천태의 교판은 ‘남삼북칠’의 교판의 영향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며 종래의 교판을 종합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시(五時)와 화의사교는 비밀교를 제외하고 대부분 명칭이 이전의 교판 가운데 있고 지의는 그것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의는 불교의 모든 경교(經敎)를 불타가 설법한 차례와 순서에 따라 다섯 단계 즉 오시(五時)로 배열하였다. 여기에 설법의 방법과 형식에 따라 분류한 화의사교(化儀四敎)와 불타의 법의 내용을 일체교리를 분류한 화법사교(化法四敎)의 팔교(八敎)를 결부시켜 ‘오시팔교(五時八敎)’로 지칭되는 교상판석을 완성시켰다.


오시란 화엄시(華嚴時),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部), 반야시(般若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 일체의 경전을 설한 시기에 따라 분류하고 통일한 것이다. 화엄시는 불타가 <화엄경>을 설한 것을 말하고 그 시기는 성도 후 21일간이다. <화엄경>은 불타가 직접 깨달은 법을 조금도 수식을 가하지 않고 순수한 형태로 직접 설한 것이다. 아함시는 불타가 장아함, 중아함, 증일아함, 잡아함 등의 <아함경>을 <화엄경>을 설한 직후 12년 동안 설한 것을 말한다. 최초의 설법장소가 녹야원이었으므로 녹야시라고도 한다.


<아함경>은 이해력이 가장 낮은 사람을 위한 경전으로 간주되며 불타 최초의 설법에 해당한다. 방등시는 불타가 <유마경><능가경> 등의 여러 방등(方等)경전을 아함 이후 8년 동안 설한 것을 말한다. 방등경은 소승의 사고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엄하게 나무라면서 대승으로 이끌어간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소승불교를 배척하고 대승불교를 찬탄했으며 소승을 부끄럽게 여기고 대승을 흠모한 것이다. 반야시는 불타가 각종의 <반야경>을 방등 후 22년 동안 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空)의 근본진리를 해명함으로써 소승을 대승으로 길들인 것이 된다. 법화열반시는 불타가 <법화경>과 <열반경>을 반야 후 8년 동안 설하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은 통일적인 진리 내지는 세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열반경>은 불타가 입멸할 즈음에 하루 밤낮을 설했던 것으로 내용적으로 <법화경>과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오시를 통(通)과 별(別)로 구분해서 보았는데, 통오시란 오시는 시간상 구별이 아니라 설명내용의 분류이며 오시 상호간에 오시의 설법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별오시란 시간상의 차제를 분류한 것이다. 팔교는 화의사교와 화법사교이다. 화의사교는 설법의 방법과 형식에 따라 돈교(頓敎), 점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로 분류한 것이고 화법사교는 불타의 법의 내용으로 일체 교리를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로 분류한 것이다.


화의사교를 살펴보면 돈교는 직돈(直頓)의 의미로 점진, 유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단번에 대승의 심오한 법을 설하는 것을 말하며 화엄시에 해당한다. 점교는 점차의 의미로서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점진, 유인하는 것을 말한다. 소승으로부터 대승에 걸친 설법이 포함되며 아함, 방등, 반야시에 해당한다. 비밀교는 비밀부정교의 약칭이며 듣는 사람이 서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한 채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으로 모든 경전에 지칭된다. 부정교는 현로부정교(顯露不定敎)의 약칭이며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의미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소승과 대승의 모든 경전에 대하여 지칭할 수 있다.


화법사교는 지의의 독창적인 인식으로 지의의 불교관과 사상적 입장이 표출되어 있다. 장교는 경, 율, 론 삼장교(三藏敎)의 의미로서 소승불교를 가리킨다. 불교교리의 초보적인 단계로 특히 공(空)을 파악하는 방법에 강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사상으로는 자기 및 세계를 요소로 분석하여 진정한 존재물은 이 요소뿐이며 이것을 법체(法體)라 하고 삼세(三世)에 항존하기 때문에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를 주장했다. 바로 사물을 요소적으로 분석해감으로써 결과적으로 공무(空無)를 주장하였으므로 절공관(折空觀)이라고 평하게 되었다. 또 공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에 정체했다고 하여 편공(偏空), 단공(但空), 단공(單空)이라든가 허무공견(虛無空見)이라고 비판받았으며 장교의 공관이나 입장은 진리로 인도하는 방법이 졸렬하다고 하여 졸도관(拙度觀)이라고도 지칭된다.


통교는 공통의 교법이라는 뜻으로, 앞의 장교에도 통하고 뒤의 별교, 원교에도 통하며 또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의 삼승(三乘)에 공통되는 교리이다. 즉 대승과 소승에 공통되는 교리이다. 장교가 사물의 생멸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데 비해 통교는 사물 그대로에 합치하여 전체적으로 공이라고 본다. 바꿔 말하면 사물의 당체(當體) 그대로 공이라고 하여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체공관(體空觀) 또는 즉공관(卽空觀)이라고 불린다. 생멸에 관해서는 생(生)을 고집하지도 멸(滅)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생과 멸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간략하게 무생관(無生觀)이라 지칭된다. 장교의 졸도관에 대하여 이것은 교도관(巧度觀)이라고 지칭된다. 대승의 경전 가운데 특히 <반야경>이 통교를 대표한다.


별교는 앞의 장교와 통교, 뒤의 원교와도 구별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다. 오로지 보살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서 이 점이 이승(二乘)과 같지 않으며 대승에서 설한 특별한 가르침이다. 교리로서는 공(空)으로부터 가(假)로 나아가며 현실의 한량없는 모습에 대한 자유자재의 대응을 설한다. 그리하여 다시 중(中)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별교에 있어서 공(空), 가(假), 중(中)은 점차적이고 단계를 낮춘 것으로서 원융상즉에까지 이루지 못한다. 중(中)은 공(空), 가(假)에 대해 특별한 것이고 목적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중(但中)이라고 평해진다. 이러한 점에서도 별교라고 지칭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전으로 <화엄경>을 들 수 있다.


원교는 원유, 원만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진리 내지 세계를 총합적으로 보는 입장이다. 공가중(空假中)에 대하여 말하면 별교처럼 차제의 삼관(三觀)이 아니고 원융상즉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다. 공가중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참으로 적당함을 얻어서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진(眞)이 되는 등, 여러 가지 사물이 본래 지녀야할 바를 얻어서 무작(無作), 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원교에 가장 적합한 경전으로 <법화경>이 거론된다.


이상에서 천태의 교판론인 오시팔교(五時八敎)설에 대해 살펴보았다. 현대의 문헌고증에 의할 때 천태의 오시의 배열은 사실과 다르며, 오시팔교에 대한 역사성도 의문시된다. 그러나 오시팔교설은 천태대사의 불교관을 표명한 것으로 천태교학을 체계화하고 그것을 불타의 설법(說法)과 설시(說時)에 의거한 것으로 보면 그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천태의 지관법문


천태사상은 크게 교상문(敎相門)과 관심문(觀心門)으로 나누어진다. 교상문은 이론적인 측면으로써 교학적으로 사상을 체계화한 것으로 ‘오시팔교(五時八敎)’가 대표적인 예이다. 관심문은 수행적인 측면으로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천태지의의 실천론은 지관(止觀)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지관은 지의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말로써 지(止)는 범어 samatha로 바깥 경계를 쫓아 일어나는 모든 잡념과 망상을 그치고 마음을 고요히 지니는 방법으로 곧 적정(寂靜)을 뜻한다. 관(觀)은 범어 vipasyana로 어떤 대상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지관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가운데 정(定)에 속하는 정도이지만 지의에게 있어서 지관은 인도에서 의미하던 것을 넘어서 보다 넓고 깊은 차원을 나타낸다. 그에게 지관은 보다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선정(禪定)적인 면과 선혜(禪慧)적인 면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지관은 크게 나눠서 점차(漸次)지관, 부정(不定)지관, 원돈(圓頓)지관의 세 가지가 있다. <마하지관(摩訶止觀)>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지관은 천태지의가 남악 혜사(慧思)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라고 한다. 점차지관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점차적으로 지관을 실수(實修)하는 것을 말하고, 부정지관은 때와 경우에 따라 심천(深淺), 전후(前後)가 서로 호응되는 것을 말하고, 원돈지관은 전체적, 종합적으로 곧바로 실상의 구극을 체득하고 체현하는 것을 말한다. 천태지의의 저서 가운데 점차지관이 중심인 것은 <차제법문(次第法門)>이며, 부정지관이 중심인 것은 <육묘법문(六妙法門)>이며, 원돈지관이 중심인 것은 <마하지관>이다.


오시팔교의 화법사교에 의하면 장교에서는 석공관(析空觀)을, 통교에서는 체공관(體空觀)을, 별교에서는 공가중(空假中)에 대한 차제삼관(次第三觀)을, 원교에서는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을 닦는다. <마하지관>에서 말하는 원돈지관은 이 원교의 지관법으로 천태실천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지관>은 천태실천론의 궁극적인 이상인 원돈지관을 오략십광(五略十廣)의 조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략(五略)은 발대심(發大心), 수대행(修大行), 감대과(感大果), 렬대망(裂大網), 귀대처(歸大處)로 구성되어 있다. 발대심(發大心)에서는 열 가지의 틀린 생각을 제시하면서 사성제나 사홍서원 혹은 육즉(六卽) 등의 교설을 매개로 삼아 생각을 바르게 하며,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의 지관의 구극을 향하여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수대행(修大行)에서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에 관하여 사종삼매(四種三昧)의 지관 실천법을 설명한다. 감대과(感大果)에서는 지관의 성과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렬대망(裂大網)에서는 지관의 달성에 의해 세간의 미혹이라는 그물이 파열되는 것을 말하고, 귀대처(歸大處)에서는 지관이 귀착해야 할 곳을 밝힌다.


오략(五略)을 확대해서 설명한 것이 십광(十廣)으로 대의(大義), 석명(釋名), 체상(體相), 섭법(攝法), 편원(偏圓), 방편(方便), 정수(正修), 과보(果報), 기교(起敎), 지귀(旨歸)로 구성된다. 대의(大義)에서는 오략(五略)의 대의를 기술하고, 석명(釋名)에서는 상대지관관, 절대지관, 천태가 의미하는 지(止)의 세 가지 뜻과 관(觀)의 세 가지 뜻을 밝힌다. 체상(體相)에서는 지관의 체와 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섭법(攝法)에서는 리혹지행위교(理惑智幸位敎)의 여섯 가지 법에 의해서 일체법을 포섭하고 다시 그 여섯 가지 법이 상호포섭되는 것을 나타낸다. 편원(偏圓)에서는 대소(大小), 반만(半滿), 편원(偏圓), 점돈(漸頓), 권실(權實)에 대해서 상술한다. 방편(方便)에서는 25방편을 설하고, 정수(正修)에서는 지관의 대상인 십경(十境)과 지관의 방법인 십승관법(十乘觀法)에 대해서 기술한다. 과보(果報)에서는 관법을 성취해서 얻는 불과(佛果)에 대해서, 기교(起敎)에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에 대해, 지귀(旨歸)에서는 불과(佛果)를 성취해서 모두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 화엄사상(華嚴思想)


<화엄경>은 화엄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준말이며, 범어로는 Mahavaiplya-buddha-ganda-vyuha-sutra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소(小)에 대한 상대적인 입장이 아니라 절대적인 대(大), 상대가 끊어진 극대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절대의 대(大)라고 할 수 있다. 방광(方廣)이란 넓다는 뜻인데 특히 공간적으로 넓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방광(大方廣)’이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붓다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말한다. 그 붓다를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화엄(華嚴)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이다. 화엄을 범어로는 Ganda-vyuha라고 하는데 Ganda란 잡화(雜華)라는 뜻이고, vyuha란 엄식(嚴飾)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화엄이란 잡화엄식이라는 말 그대로 갖가지의 꽃을 가지고 장엄한다는 뜻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대방광불화엄경>은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부 경전 자체 내에서도 설처(說處)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리도량이며, 설한 시기도 성도 직후로 되어 있다. <팔십화엄>에는 시성정걱(始成正覺)이라 하고, <육십화엄>에도 시성정각이며 세친이 지은 <십지경론>의 저본이 된 <십지경>에는 제이칠일(第二七日)이라고 하였다. 또 천태교판에서도 <화엄경>을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최초 삼칠일 즉 21일 동안 말씀하신 경이라고 하고 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경전의 한역본으로는 60권, 80권, 40권으로 된 <육십화엄>, <팔십화엄>, <사십화엄> 등 3부 <화엄경>이 있다. <육십화엄>은 동진시대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 의해 418에서 420년에 번역되었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되었다. 이를 진본(晋本)이라 하고 또는 화엄대경 중 먼저 번역되었다고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 <팔십화엄>은 대주(大周)시대 실차난타(實叉難陀)에 의해 역출되었으며 이를 주본(周本)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 <사십화엄>은 당의 반야(般若)가 798년에 역출하였으며 입법계품의 별역으로 <입불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可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 본래의 이름이다.


그러나 <육십화엄>이나 <팔십화엄>은 처음부터 대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화엄경>을 구성하고 있는 각 품이 별행경으로 먼저 성립되어 있었으며 그 지분경을 모아 어떤 의도하에 조직적으로 구성한 것이 웅대한 화엄대경인 것이다.


법계연기(法界緣起)


중국 화엄종에서는 화엄을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이며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으로 보고 있으며, 그 화엄세계는 법계연기의 세계라고 보고 있다. <화엄경>의 불보살세계를 ‘인과연기 이실법계(因果緣起 理實法界)’의 법계연기로 나타낸 것이 화엄종의 종취라고 화엄종의 대성자인 법장은 밝히고 있다. 이러한 법계연기설은 청량을 거쳐 규봉종밀대에 와서 사종법계설로 확정된다.


종밀은 <주법계관문>에서 청량징관의 <화엄경소>를 인용하면서 사종법계의 의의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주법계관문>은 두순이 지었다고 하는 <법계관문>을 종밀이 주석한 것이다. <법계관문>에서는 진공관, 이사무애관, 주변함용관의 법계삼관을 설하고 있다. 먼저 진공관(眞空觀)은 모든 법은 실성이 없어 유(有)와 공(空)의 두 가지 집착을 떠난 진공인 줄을 관함이다. 다음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은 차별있는 사법(事法)과 평등한 이법(理法)은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합하는 것임을 관함이다. 끝으로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은 우주간의 온갖 사물이 서로서로 일체를 함용하는 것으로 관함이다.


지엄은 법계연기를 보리정분의 정문(淨門)연기와 범부염법의 염문(染門)연기로 나누고 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법계연기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과 인불가설(因分不可說)로 나누고 그것이 십불자경계(十佛自境界)와 보현경계(普賢境界)라고 하고 있다. 종밀에 이르러서는 사종법계설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법계란 Dharma-dhatu의 번역어로 연기현전하는 우주만유이다. 이 법계의 체는 일심(一心)인데 원명구덕의 일심이며, 총해만유(總該萬有)의 일심이다. 따라서 법계란 일심체상에 연기하는 만유이다. 그래서 우주만유의 낱낱 법이 자성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법계라 한다. 이 법계를 설명하는데 사(事)와 이(理)의 구별을 세워 논한 것이 사종법계설인 것이다.


사종법계는 사(事)법계, 이(理)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이다. 이 네 가지 법계설은 모든 우주는 일심에 통괄되고 있으며, 이 통괄되는 것을 현상과 본체의 양면으로 관찰하면 네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화엄의 무진법계는 사사무애법계를 말한다. 사(事)법계는 모든 차별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을 계(界)란 분(分)을 뜻한다. 낱낱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제각기의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는 것이다. 개체와 개체는 공통성이 없이 차별적인 면만을 본 것이다. 이(理)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이(理)는 원리, 본체, 법칙, 보편적 진리 등을, 계(界)란 성(性)을 가리킨다. 궁극적 이(理)는 총체적 일심진여이며, 공(空)이며 여여(如如)이다. 우주의 사물은 그 본체가 모두 진여라는 것으로 개체와 개체의 동일성, 공통성을 본 것이다.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는 이와 사, 즉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법장은 <금사자장>에서 금사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금이라는 금속은 이(理)의 미분화된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사(事) 혹은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하여 표상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의 경계라는 것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는 개체와 개체가 자재융섭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화엄의 법계연기이다. 이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는 이사무애(理事無碍)를 바탕으로 하여 의지의 전환이 있어야 가능한 직접적인 깨달음의 세계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과 실천행을 통해 현현하는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늘 그렇게 있는 세계이나 이해나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현실화해야 하는 세계이다.


십현연기(十玄緣起)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계연기를 체계적으로 관찰한 구체적 설명이 십현연기와 육상원융(六相圓融)이다. 십현연기는 십현문(十玄門)이라고도 한다. 십(十)은 원만구족의 만수(滿數)이고, 현(玄)은 현묘, 문은 사사무애법문이다. 10가지 심오한 신비의 무애세계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십현문이 설해지고 있는 중국 화엄전적으로는 지엄의 <화엄일승십현문>, <수현기>와 법장의 <화엄오교장>, <화엄경문의강목>, <금사자장>, <탐현기>와 징관의 <화엄경소>, <현담>, <화엄약책> 그리고 종밀의 <원각경대소> 등이 대표적이다.


법장은 <화엄오교장>에서는 스승인 지엄의 십현문설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나 <탐현기>에서는 그것을 약간 수정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탐현기> 이후에 보이는 십현설을 신십현(新十玄)이라 하고 그 이전의 십현설을 고십현(古十玄)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신십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신십현은 동시구족상응문, 광협자재무애문, 일다상용부동문, 제법상즉자재문, 은밀현료구성문, 미세상용안립문, 인다라망경계문, 탁사현법상해문, 십세격법이성문, 주반원명구덕문이다. 이 가운데 광협자재무애문과 주반원명구덕문은 고십현에서의 제장순잡구덕문과 유심회전선성문을 고친 것이며, 은밀현료구성문은 고십현의 비밀은현구성문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은 십현연기의 총설이다. 동시는 선후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고, 구족은 모두 섭수하여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체 제법이 열 가지 뜻을 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여 원만히 조화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열 가지 뜻이란 교의(敎義), 이사(理事), 경지(境地), 행위(行爲), 인과(因果), 의정(依正), 체용(體用), 인법(人法), 역순(逆順), 감응(感應)이다.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은 연기 제법에 각각 광협이 있으면서도 무애하다는 것이다. 이는 간격이 멀든 가깝든 간에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장애없다는 뜻이다. 광(廣)은 밖이 없다는 무외(無外)의 뜻으로 넓음이란 한계를 갖고 있지 않아 밖이 없는 것이다. 협(狹)은 안이 없다는 무내(無內)의 뜻으로 가장 좁음이란 그 자체 안에 공간을 갖고 있지 않아 안이 없다는 것이다. 큰 것과 작은 것에 자성이 없기 때문에 큰 것과 좁은 것이 서로가 서로를 포섭하는 것이다. 좁은 것과 넓은 것은 하나와 전체로 말할 수 있으므로 서로 자유롭게 구애됨이 없이 서로 교환될 수 있다. 이는 고십현에서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이다. 순수한 것과 잡된 것이 본분위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일념에 구족하여 원융무애하다는 의미이다. 순수한 것과 잡된 것이 섞여 있으니 순수한 것은 순수한 대로 잡된 것은 잡된 대로 제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은 하나와 전체가 서로 용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는 전체에 들고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어 무애자재하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다. 그러면서도 각기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하나와 전체가 혼란되지 않는 상입(相入)을 말한다. 상입이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여 걸림없이 융합하는 것이다. 하나란 하나라는 자성을 가진 확정적인 하나가 아니라 연기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지만, 하나는 하나로서 전체가 아니고 전체는 전체로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전체가 아니고 전체도 하나가 아니다. 각각 제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은 모든 요소들이 서로 동일시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인 차별로부터의 자유이며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타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종합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진다. 서로 비춰보고 서로 동일시한 결과 함께 조화하여 움직인다. 상입(相入)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걸림없이 융합하는 묘용(妙用)의 측면이라면, 상즉(相卽)은 서로 자기를 폐(廢)하여 다른 것과 같아지는 체(體)의 측면이다. 두 가지가 하나로 융합하는 즉(卽)은 물과 물결처럼 한 물건의 체 그대로가 다른 물건인 뜻으로 말하는 ‘즉’이다.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은 고십현에서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이다. ‘비밀은’과 ‘현’으로 된 것을 ‘은밀’과 ‘현료’로 정리한 것이다. 비밀 즉 숨은 것과 현료 즉 드러난 것이 함께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금사자장>에서는 우리가 금사자를 접할 때 사자로서 사자를 볼 때는 사자뿐이고 금은 없으며, 금을 볼 때는 단지 금뿐이고 사자는 없으나 금사자는 금과 사자를 합하여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 <화엄현담>에서는 반달의 예를 들고 있다. 반달은 반은 빛나고 반은 어둡다. 그러나 감춰진 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을 지구에서 보면 큰 공만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작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달 자체가 늘어났다 줄어들지 않는다. 그 반달은 밝음과 어둠이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밞음 아래에 어둠이 있고 어둠 아래에 밝음이 있다. 하나로 많은 것을 섭수하면 하나는 드러나고 많은 것은 가리워진다. 많은 것이 하나를 거두어들이면 많은 것은 드러나나 하나는 가리워진다. 한 터럭이 법계를 섭수하면 곧 나머지 터럭의 법계는 모두 가리워지고 나머지 낱낱 터럭의 가리워지고 드러남도 또한 그러하다. 한 편은 보이고 한 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둘다 갖추어져 있어서 하나가 성립되면 다른 쪽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은 미세한 것의 신비를 말하는 것이다. 미세란 인간의 이해가 닿는 곳을 넘어서 고도로 작고 정밀하다는 의미이다. 하나가 능히 많은 것을 함용하므로 상용(相容)이라고 하고, 하나와 많은 것이 섞이지 않으므로 안립(安立)이라고 한다. 무한세계가 작은 먼지나 티끌 속에 존재하며, 이들 세계의 일체 먼지 속에 또다시 무한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일념 중에 모든 것을 구족하여 가지런히 나타나 명료하지 않음이 없음을 겨자씨를 담은 병에 비유하기도 하고 화살이 빽빽히 꽂친 화살통에 비유하기도 한다.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은 인다라망의 비유에 의해 상호 반영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천 궁전에 걸린 보배망의 각 보배구슬마다 서로 다른 일체 구슬이 비쳐 무진한 것처럼 법계의 일체도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연기상유(緣起相由)하여 무애자재하다.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은 모든 연기된 존재가 그대로 법계법문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당체가 그대로 연기 현전한 것이므로 두두물물이 다 비로자나 진법신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는 곧바로 법의 상징이고, 법이 비유이고 비유가 곧 법이다.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은 십세가 시간에 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즉, 상입하여 하나의 총합을 이루지만 그러나 전후 장단의 구별이 뚜렷하여 질서가 정연한 것을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각각 삼세가 있어 구세(九世)가 되고 그 구세는 한 생각 일념에 포섭되므로 십세(十世)이다. 또 일념을 열면 구세가 되므로 합하여 십세가 된다. 그래서 일념이 십세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념이지만 십세는 낱낱이 서로 혼잡함이 없이 완연히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은 주체와 객체가 조화롭게 함께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홀로 생겨나는 것은 없다. 우주법계에는 어느 한 사물도 홀로 생겨나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서로 주인이 되고 객이 되어 모든 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십현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바꾼 것이다.


육상원융(六相圓融)


십현연기와 더불어 육상원융 또한 화엄무진연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또다른 측면으로 중시되고 있다. 육상이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말한다. 이는 총별, 동이, 성괴라는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이나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한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가 성립한다는 설이다.


모든 존재는 다 총상, 별상, 동상, 이상, 괴상, 성상의 육상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이 육상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일체가 되어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기로써 이루어진 모든 존재는 반드시 여러 가지 연(緣)이 모여 성립된다. 그러므로 거기에 성립된 총상(總相)은 부분을 총괄하여 전체를 만들고 있다. 또 별상(別相)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과 부분을 말하는데 이것이 총상에 의지하여 원만하고 완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총상이 없으면 별상이 없고 따라서 총상 밖에 별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동상(同相)이란 별상의 하나하나가 서로 조화되어 모순되지 않고 성립되는 힘을 균등하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상(異相)이란 별상이 서로 혼동되지 않고 있으면서 제각기 상을 잃지 않고 조화되어 있는 모양이다. 성상(成相)이란 별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총상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부분이 다만 집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모여서 하나의 전체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괴상(壞相)은 별상이 총상을 성립시키면서도 별상 제각기의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서 총상의 모양으로 혼융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육상을 집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가령 총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을 총괄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별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그 자체를 이른다. 동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서로 힘을 합쳐 집을 조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이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은 각각 가로와 세로로 되어 있어 다른 유형이 되고 있음을 말한다. 또 성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각각 인연이 되어 집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괴상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집을 조립하여 성립시키고 있으면서도 각각 자기의 본 모양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육상의 관계를 체상용(體相用)의 관계로 나누어 보면 총상과 별상은 연기의 체(體)라고 보고, 동상과 이상은 연기의 상(相)이라고 하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의 용(用)이라고 할 수 있다.


5) 정토사상(淨土思想)


인도에서 비롯된 대승불교는 그대로 중앙 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 한국, 일본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정착하였으며, 그 가운데서 널리 신앙되어진 사상 조류의 하나가 바로 정토사상이다. 한국불교에서도 원효 이래로 신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신앙적으로나 교학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밀교와 선종이 급진적인 발전을 하고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정토사상은 후퇴하게 되었고 점차 주술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정토사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대체로 정토사상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 드러난 것은 대승불교가 흥기한 시대라고 보고 있다. 이는 정토계 경전군이 편찬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정토사상, 정토계 경전군이라고 하는 것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관한 사상이나 경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정토(淨土)라고 하는 용어는 대승불교 일반에서 쓰이는 술어이며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한정해서 쓰이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정토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불국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이 어느 새 아미타불의 극락국토만을 정토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거의 모든 대승경전에서 아미타불의 극락정토가 언급되고 있으며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왕생극락에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곳도 있다.


정토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극락’과 ‘아미타불’ ‘본원(本願)’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정토신앙의 요체이다. 왕생은 아미타불의 본원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바로 부처의 본질인 중생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지혜와 자비가 아미타불의 본원을 통해서 중생에게 회향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란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말이다. 범어로는 두 가지로 표현된다. 즉 Namo-Amitabha은 Namas + a + mita + abha과 Namas + a + mita + ayus의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Namas는 귀의한다는 말이며, a는 부정의 의미를 지닌 접두사이다. mita는 헤아린다는 말이다. abha는 광명이며 ayus는 생명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광명에 귀의합니다’ 내지는 ‘헤아릴 수 없는 생명에 귀의합니다’라는 말이다. 무한 광명(無限光明)에 귀의하고 무한 생명(無限生命)에 귀의한다고 하는 말은 법에 귀의하는 것이며, 진리 그 자체에 귀의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총동원하여 진리 그 자체에 귀의하는 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이다. 그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한다. <무량수경>에서는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불불상념(佛佛相念)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불(佛)과 불(佛)이 서로 염한다’는 것은 부처가 염불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미타삼매에 들어 <무량수경>을 설하셨으며 무한 광명과 하나가 되고 무한 생명과 하나가 되어 저절로 진리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 왕생극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속적인 욕망이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으며, 순수 가치만이 존재하며 순수 신앙의 세계로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정토사상으로 불교를 볼 때에 불교는 염불이며, 나무아미타불만이 불교인 것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많은 대승경전 가운데서 가장 많이 읽히고 연구되어 온 경전은 ‘정토삼부경’이다. 정토삼부경이란 정토 경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경전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강승개(康僧鎧) 역이라고 전해지는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2권, 강량야사(畺良耶舍) 역이라고 전해지는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 1권, 구마라집 역으로 전해지는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1권을 말한다.


<무량수경>에는 옛날부터 오존칠결(五存七缺)이라고 말하여지고 있으며 모두 열두 가지의 번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열두 가지로 번역되었는지 의심스럽다. 현재 남아 있는 다섯 가지의 번역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설아미타삼야삼불살루불단과도인경(佛說阿彌陀三耶三佛薩樓佛檀過度人道經)> 2권은 일반적으로 <대아미타경>이라고 불려진다. 후한의 지루가참이 번역했다고 한다.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4권은 <평등각경>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후한의 지루가참이 번역하였다고 하며 위나라의 백연이 번역했다는 설도 있으며 서진의 축법호가 번역했다는 설도 있다. <불설무량수경> 2권은 <대경(大經)> 혹은 <위역(魏譯)>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중국, 한국, 일본에 가장 많이 유포된 경전이며 일반적으로 무량수경이라고 할 때에는 이 경전을 가리킨다. 위나라의 강승개가 252년에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량수여래회(無量壽如來會)> 2권은 당나라의 보리유지가 706년에서 713년에 걸쳐 번역하였다. <대무량수장엄경(大無量壽莊嚴經)> 3권은 송나라의 법현이 991년에 번역하였다.


<무량수경>은 정토사상의 모든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이 유포된 위나라의 강승개가 번역한 <무량수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량수경>은 상하의 두 권으로 되어있는데 상권은 여래정토(如來淨土)의 인과를 설하고 있으며 하권은 중생왕생(衆生往生) 즉 중생들이 극락에 왕생하는 인과를 설하고 있다. 여래정토의 원인은 48원(願)이며, 그 결과는 극락정토이다. 중생이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원인은 염불이며 염불의 결과는 왕생극락이다.


<관무량수경>은 흔히 ‘왕사성의 비극’이라고도 불리워진다. 인도에서 전래된 경전들은 거의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번역이 있지만 이 <관무량수경>은 한 가지 번역밖에 없다. 물론 범어로 된 원전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관무량수경>이라는 제목은 본래의 이름은 관극락국토무량수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觀極樂國土無量壽佛觀世音菩薩大勢至菩薩)인데 이것을 줄여서 <관무량수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 경의 이름의 내용은 극락국토의 장엄과 그 나라에 계시는 무량수불과 좌우에서 부처님을 보좌하고 계시는 관음, 세지의 양대 보살을 관하는 경이라는 것이다.


관(觀)한다는 말에는 관견(觀見)과 관지(觀知)의 두 가지 뜻이 있다. 관견이란 극락정토의 아름답고도 불가사의한 장엄을 마음속에 그려 보는 것을 말하며, 관지란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하는 절대 신심을 말한다. 이 경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악인을 구제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인이란 진실을 구하면서도 진실과 거리가 멀고 선을 가까이하려 하지만 선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과 공간에서 죄업이 막중한 범부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두번째 특징은 여인성불(女人成佛)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불설아미타경>은 5세기 초에 구마라집이 번역하였으며, 그 밖에도 현장이 650년에 번역한 <칭찬정토불섭수경(稱讚淨土攝受經)> 1권이 있다. <아미타경>은 극락정토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공덕장엄(功德莊嚴)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공덕장엄은 국토, 의복, 음식 그리고 육체나 정신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렇게 공덕장엄을 널리 설하는 이유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중생의 업인 작은 선근으로도 왕생할 수 없다고 구정하고 있다.


다만 하루 내지 이레동안 염불한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이 이것을 믿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동서남북과 상하의 육방(六方)의 항하사제불(恒河沙諸佛)이 광장설(廣長舌)을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으면서 증명하고 있으며 경계하고 있다. 왕생극락을 의심하는 것은 육방의 항하사제불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되며, 왕생극락을 믿는 것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것은 석존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석존의 말씀을 믿는 것은 육방의 항하사제불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미타경>은 구회일처(俱會一處)의 사상을 가지고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모든 중생이 마침내는 극락정토에서 모두 함께 만남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6) 선사상(禪思想)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禪)이란 말은 고대 인도의 사유 명상법인 요가에서 비롯된 것인데, 붓다의 깊은 사유와 정각을 통해 불교의 실천 수행인 선정(禪定)으로 체계화된 말이다. 요가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 경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고대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印章)이나 성자의 흉상 등의 발굴로 입증된 것처럼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인들이 인도를 침입하기 이전에 이미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행된 요가 명상의 사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요가는 약 5000년 내지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가란 각자의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통일시키는 수행방법을 말한다. 요가(yoga)란 말은 ‘연결시키다’라는 의미로서 yji(연결하다)라는 어근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가라는 말이 사유하다, 명상하다라는 의미로 문헌상에 최초로 기록되고 있는 곳은 기원전 6세기경에 성립된 <카타우파니샤드>이다. 여기서는 ‘명상사유를 통하여 다섯 가지 감각을 제어하고, 산란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이며, 이와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정지되어 움직이지 않고 잘 유지해 가는 것을 요가라고 한다’고 요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禪)이라는 말은 인도 원어를 한어로 음사한 것이므로 한자 자체에는 본래의 의미가 없다. 한자의 선에는 ㄱ)땅을 깨끗하게 하여 천지의 신을 제지낸다, 하늘을 제지낸다, 산천을 제지낸다, ㄴ)토지를 개척한다, ㄷ)천위(天位)를 양도해 준다, ㄹ)조용함 등의 의미가 있다. 이 의미들 가운데 인도 원어에 해당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조용함뿐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의 형태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 중국선에는 한 스승에서 한 제자에게로 직접 불법(佛法)을 전수하는 ‘사자상전(師資相傳)’의 수수(授受) 형태가 보여지는데 이것은 인도불교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다.


선이란 원래 범어의 dhyana, 팔리어의 jhana의 음사이다. 원어는 마음을 통일하는 것, 마음을 특정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역해서 정려(靜慮), 의미를 첨가해서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유가(瑜伽; 요가), 삼매(三昧) 등과 함께 고래로 인도에서 중시된 명상의 실천을 나타내는 말의 하나이다.


중국선의 전개


중국에서의 선의 역사도 이와 같은 선의 본질적 성격을 고려하면 불교가 처음 전래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후한대의 안세고나 지루가참이 번역한 초기의 소승, 대승의 여러 경전 가운데는 직접 선 내지는 삼매의 실천을 선양한 곳이 몇 군데 보인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볼 때, 선은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후에 곧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선의 실천에 열심인 불교인 즉 선자(禪者)가 점차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불교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선과 유사한 종교적 실천방법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장자>에서 설한 진인(眞人)의 호흡법이나 이것에 영향을 받아 후에 태식법(胎息法)으로서 완성된 신선방술의 호흡법이 그것인데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 경지의 표현도 불교의 선의 경지의 그것과 대응하는 면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중국선이 노장사상이나 신선도와 종종 교섭하면서 전개되어가는 것은 오히려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양상을 가진 선의 실천은 선자들을 배출하면서 각지로 전해져 갔다. 그러나 북위시대가 되면 다시금 새로운 선이 중국에 전해지게 된다. 이것이 이후 중국선의 개창자가 되는 보리달마(菩提達摩)의 선이다. <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페르시아 출신이다. 중국으로 건너와 양녕사 구층탑의 금반(金盤)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종소리가 바람을 머금고 울려퍼지는 것을 듣고 “나는 150살이 되는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사원은 보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입으로 나무(南無)를 외우고 매일매일 합장했다고 한다. 또한 담림의 기록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인도 국왕의 셋째 아들로서 대승의 도에 마음이 끌려서 출가하여 세상에서 뛰어난 덕을 갖추었으나 멀리 산과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건너 왔다고 한다. 보리달마의 출신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으며 건너온 경로에 대해서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서역을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달마의 가르침은 이입사행(二入四行)으로 총괄되는 것으로 즉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으로 구별되는 행입(行入)이다.


먼저 이(理)에 들어가는 이입(理入)이란 마음을 편안히 하는 실천으로서 그것은 경전의 취지를 깨달아서 중생의 동일한 진성(眞性)을 깊이 믿고 벽관(壁觀)에 확고히 머물러서 차별, 상대의 입장을 떠나 진리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다음에 행에 들어가는 행입(行入)에는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의 네 가지가 있다. 보원행(報寃行)이란 어떠한 괴로움이 닥쳐도 그것을 자기의 악업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달게 받아 들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 소득도 없는 죄라고 호소하지 않는 것이다. 수연행(隨緣行)이란 고락, 득실은 모두 연에 의한 것이라고 관하여 마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스스로 도에 따르는 실천이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 만유는 공이며, 현실의 세계는 편안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아무 것도 구하거나 원하지 않는 실천이다. 칭법행(稱法行)이란 본래 청정한 진리에 들어맞는 실천을 말하며, 직접적으로는 더러움이나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관(空觀)에 입각해서 행해지는 육바라밀을 말한다. 이상에서 보리달마의 선은 명확히 공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구체적, 현실적이라는 것, 그리고 벽관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보리달마의 선은 혜가(慧可)에게로 전승되었다. 혜가는 6년간 달마에게 배우고 일승을 깊이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선사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확실한 것은 그에게서부터 능가종(楞伽宗)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능가종은 <능가경>을 소의로 연구하며 그 정신을 추구하였는데 <속고승전>에는 달마가 이것을 혜가에게 전하고, 혜가가 처음으로 그 요지를 체득한 것으로 이후의 계보에 기재되어 있다.


후세의 전등설에 따르면 선종의 제3조는 승찬(僧璨)이다. 승찬의 사적은 현재 거의 알 수 없으며 <속고승전>에 혜가문하의 한 사람으로 ‘찬선사’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설에는 사공산에 숨어서 좌선에 전념하고 12년간 그를 섬긴 도신에게 법을 전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제4조 도신(道信)의 사적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12살이 지나자 서주 완공산에 들어가 두 스님에게서 10여년간 선을 배웠으며 601년 경에 출가하여 길주사에 머물렀다. 그 후 형산으로 향하는 도중 주위의 만류로 노산의 대림사에 10년간 머물렀으며 초대를 받아 쌍봉산에 들어가 문도 500명 이상의 대교단을 형성하였다. 저서에 <보살계본>,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도신의 사상적 입장은 명백하지 않다. 그러나 <능가사자기> 등에 의하면 그가 천태 지의와 마찬가지로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중시하고 그것을 통해서 불성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신의 선은 문하의 홍인(弘忍)에게 계승된다. 그는 황매현 출신으로 7세 때 도신에게 사사하고 마침내 그 법을 이었다. 수행시 낮에는 노역에 종사하고 밤에는 열심히 좌선했다고 한다. 황매현의 동쪽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선을 알렸으므로 그의 선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동산법문의 사상적 내용을 분명히 알기는 어렵다.


홍인 이후 선종은 크게 북종(北宗)과 남종(南宗)의 두 파로 나뉜다. 이 가운데 처음에 우세했던 것은 북종선으로 숭산, 장안을 중심으로 북지(北地)에 널리 전해진 선계통이며 그 대표적 인물은 신수(神秀)이다.


신수는 젊어서 노장, 유학에 정통하고 652년 낙양의 천궁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50세 가까이 되어 홍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6년간 사사했다. 홍인의 법을 이은 후 의봉(儀鳳)년간에 형주 옥천사의 승적에 속하여 그 근처에서 도문사를 열었으며 그의 주변에는 많은 수행자가 모였다고 한다. 701년에 측천무후의 부름을 받아 가마를 타고 어전에 들어갔으며 그 때 그는 가신(家臣)의 예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양경(兩京)의 주주(注主), 삼제(三帝)의 국사라고 불리운다. 저서에 <관심론> 1권, <화엄경소> 30권, <묘리원성관> 등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후대의 서적 인용 가운데서 그 일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신수 다음 대까지는 보적(普寂)이나 의복(義福) 등의 활약으로 북종선이 융성했지만 그 후로는 점차로 쇠약해져서 주류의 자리를 완전히 남종선에게 양보하게 된다.


남종선의 시조는 혜능(慧能)이다. 혜능의 선조는 대대로 범양에 살았지만 아버지의 좌천으로 인하여 신주(新州)민이 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남해로 이주했으며 집이 가난하여 땔나무를 팔아서 어머니와의 생활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이윽고 어느 날 마을의 손님 한 사람이 숙사로 돌아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홍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8개월간 방아지기로 생활하면서 법을 이었다. 이 때 혜능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라고 전한다. 그 후 676년에 <열반경>의 학자로서 이름난 인종(印宗)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후 소주의 조계 보림사에 거주하면서 많은 선자를 키우고 선풍을 날렸다. 남종선은 도생(道生)에 의해서 시작되는 돈오(頓悟)사상의 전통 위에 서서 본래 자기의 청정성, 완전성의 철저한 자각을 지향하고 있다.


혜능의 문하 가운데서 남종선의 정통성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또한 그 입장을 분명히 한 이가 신회(神會)이다. 신회는 양양 출신으로 오경, 노장을 배운 후 출가하여 혜능의 만년에 그 평판을 듣고 문하가 되어 수년간 배웠다. 720년 칙명에 의해서 남양의 용흥사에 머물고 732년에는 융성을 자랑하는 북종에 대해서 종론(宗論)에 도전했다. 745년 경에는 낙양의 하택사에 들어가 크게 남종선을 선양했으나 753년 북종의 입장에 선 관리에 의해서 유배되어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2년 후 안록산의 반란을 계기로 다시 낙양에 초대되어 국가정책의 협력을 통해서 양경(兩京)의 부흥에 공헌하고 숙종으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신회의 만년은 그 자체가 북종의 몰락과 남종의 흥기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혜능의 선을 계승한 것 가운데서 점차로 발전해간 것은 홍주종(洪州宗) 즉 남악 회양(懷讓), 마조 도일(道一)의 계통이다. 그 주된 이유의 하나는 마조 도일이 선사상의 혁신을 이룩하고 선을 중국에 토착화시켰기 때문이다. 도일은 한주 출신으로 속성은 마씨이다. 어려서 홍인의 법을 이운 지선의 제자인 처적(處寂)에게 배우고 구족계를 받았다. 이윽고 회양의 문하에 들어가 심인(心印)을 전해 받은 후 강서의 임천, 홍주 등에서 크게 선을 알렸다. 본격적인 선의 융성은 강서(江西)의 마조와 혜능의 문하의 청원 행사(行思)의 법을 호남(湖南)의 석두(石頭)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조의 선은 80여 명의 제자들에 의해서 장안을 위시하여 각지로 전파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백장 회해(懷海)가 유명하다.


회해는 선종 사상사에서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첫째는 당시까지 대부분 율사에 속해 있던 선원을 독립시키고 대소승의 계율을 집약, 절충해서 교단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이것은 선종의 사회적 독립의 기초가 확고해진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마조의 선이 자유로운 생활의 절대긍정에 빠질 위험에서 구제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마조의 정신을 토대로 당시 이미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던 승려의 노동을 명확히 긍정하여 ‘하루 노동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사상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선종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지지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지만 동시에 출가자의 생산노동, 경제행위를 엄격히 부정하는 불교의 전통적인 노동관을 뒤엎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중국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말의 회창의 폐불사건은 이미 쇠퇴하고 있던 불교계를 사정없이 습격하였다. 그 때 파괴된 사원이 약 4만5천이며 환속된 승려는 26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원을 의지처로 했던 불교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거의 멸망의 위기에 빠져들었지만 오직 선종만은 그렇지 않았다. 선종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단숨에 상승기류를 타고 당말에서 오대에 걸쳐 눈부신 오가(五家)의 선시대를 출현시킨다.


오가(五家)란 선풍의 상위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서 위앙종, 임제종(臨齊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을 말한다. 여기서 다시금 송대에 임제종에서 분리된 황룡(黃龍), 양기(楊崎)의 2종을 합쳐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고 한다. 이 오가칠종은 어느 것이나 혜능의 남종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출전: http://compassion.buddhism.org/main5/01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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