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사상

유식사상

slowdream 2007. 10. 9. 14:19
 



유식사상(唯識思想)


유식학개론 요약집(李萬 ,東國大學 佛敎學科 교수)



-목 차-


1. 유 식 설

1) 유식설

2) 8식의 구조

3) 심성설


2. 유식의 수행

1) 유식의 수행

2) 오위


1. 유 식 설


불교에 있어서 주요한 사상은 어디까지나 샤캬무니 붓다가 깨달으신 진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는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하거나 '발원(發願)하는 종교', 혹은 '수행의 종교' 등으로 나눌 때도 있다.


그리하여 이를 마음의 종교라고 정의할 때면,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인식론적인 접근이나 관념론적인 설명이 대두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이론적인 고찰을 불교에서는 특히 유식사상이라고 하여 대승불교 교학의 한 분야로서 일찍부터 다루어져 왔다.


다시 말하면 이 유식사상은 불교사상 중에서도 우리들이 각자 소유하고 있는 마음을 종교학적인 측면에서 자세하게 취급하고 있는 분야로서 일종의 불교심리학과도 같은 것인데, 이는 마음의 구조와 그 심리작용 등을 잘 인식하고서 활동하면 궁극적인 목적인



성불(成佛)의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원리와 그 수행성을 강조한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교설된, 이론적인 면과 실천수행적인 면을 간추려 보면,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계는 세 가지의 성질〔삼종자성(三種自性)〕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계를 결과적으로 생성케 한 우리의 마음에 관한 자세한 정의(定義) 등이 그 주요한 사상으로 대두되고 있다. 또한 이렇게 이론적인 면이 강한 유식사상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불교하는 한 종교를 표방한 사상이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실천덕목인 유가행(瑜伽行)을 중점적으로 가미하여 대승불교에서 최고의 가르침으로 그 자리를 굳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식사상이 불교 교학적인 면에서 검토, 연구될 때에는 자연 소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 등의 미비점을 알 수 있게 하며, 이보다 앞서 유행했던「반야경」계통의 공(空)사상 등이 그 진의를 상실하고서 지나치게 공허한 사상으로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대승불교의 교의를 바로 알기 위해서도 유식사상이 흥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의 사상은 미륵(彌勒, Maitreya, 270∼350)과 무착(無着, Asa ga, 310∼390) 그리고 세친(世親, Vasubandhu, 320∼420) 등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며, 중요한 경론(經論)으로는「해심밀경(解深密經)」과「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섭대승론(攝大乘論)」,「유식삼십송(唯識삼십송)」 및「성유식론(成唯識論)」등을 들 수가 있다.


1) 유식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 원리를 관찰하여 보면,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 가치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이 세상의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마음의 인식 여하에 달려 있다는 이 유심설(唯心說)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은 이 세계에 관한 개념은 물론이고 사상이나 감정 등을 모두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가 있는데, 정작 마음은 그 성질이 상주하여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라 일단 일어난 순간에 없어져서 다시 다음 순간의 그것과 교차되는 것으로서 마치 폭포수에서 물이 계속하여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생각이나 복합적인 사고가 형성되면, 그것을 유지해 줄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 상태에서는 계속해서 한 흐름으로 유지해 줄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 상태에서는 계속해서 한 흐름으로 유지되는데, 이러한 경우를 일컬어서 '마음의 흐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나서 모든



것이 그대로 의연하게 존재한다는 실재론(實在論)에 관한 인식 그 자체도 사실은 마음이 만들어낸 표상(表象)에 불과하며, 외계의 실재가 마음에 영사(映寫)되어 표상이 형성된 것이 아니고, 마음 스스로가 표상을 만들어낸 결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이 현상계를 성립시키고 있는 세 가지의 성질〔삼종자성(三種自性)〕에 관하여 논할 때에도 이를 다분히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정의하고 있다.


즉 그 가운데의 첫째는 우리들의 평소 밝지 못한 견해 등으로 말미암아 실체가 없는 것을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잘못 착각하여 아는 '가립적(假立的)인 존재형태의 것〔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인정하는데, 이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에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편견과 선입견 등의 감정을 가지고 편벽되게 처리하여 결과적으로 괴로움을 유발하는 착각이나 환상과 같은 존재를 말하며, 두 번째는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독립적으로 항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 등이 인연이 되어서 생성된다는 이른바 '서로 다른 것에 의존하는 존재형태의 것〔의타기성(依他起性)〕'을 인정하며, 세 번째는 위와 같은 두 가지의 성질들을 모두 떠나서 진실한 것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 '원만한 존재형태의 것〔원성실성(圓成實性)〕' 등으로 그 성질을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성질의 관계를 예를 들어서 말하면, 투명한 수정(水晶)을 황색이나 녹색의 바탕 위에 올려 놓으면 이 색깔이 수정에 비쳐서 호박(琥珀)이나 벽옥(碧玉)으로 보이지만, 실제 거기에 있다고 생각되는 호박이나 벽옥은 사실 '가립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수정 그 자체도 또한 본래부터 있었던 불변의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존재형태의 것'이며, 수정에서 호박이나 벽옥을 상상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를 '원만한 존재'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유는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이 이 현상계를 관찰할 때에 이러한 세 가지의 성립조건이 항상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여 올바른 인생관을 확립할 때에 필연적으로 전제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반면에, 그것을 바로 우리 마음의 올바른 인식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들 존재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마음의 주체(主體)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아뢰야식(alaya-vijn na)에 관한 내용이다. 이 아뢰야식은 인간 존재의 근저에 항상 상존해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으며, 그 흐름은 일생 동안 끊어지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생존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쳐서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중생이 어떤 행위나 행동을 하는 한 그것은 대개 선업이거나 악업을 지어서 그 결고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때에 아뢰야식이 업력의 귀의처에 사용되어 그 속에 심종자(心種子)가 잠재하고 있다가 그에 알맞는 환경이나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모든 세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서 현상계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어떤 창조주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며, 그것은 각 개인이 평소에 지은 선악업의 결과에 따라서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이 본래부터 업을 짓지 않아서 마음속에 선악업의 종자를 함유하고 있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강조되지만, 중생들은 우선 집착과 무지 등으로 그 마음이 선점(先占)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업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 ― 업에 의하여 오염된 마음 ―을 정화시켜 주는 종교적인 실천덕목인 수행이 필요한데 그것이 다름 아닌 유가(瑜伽, Yoga) 행인 것이며, 이는 완전한 인격자로 나아가는 먼 길이자 바로 가까운 수행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2) 8식(識)의 구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인간 인식의 궁극적인 실체인 아뢰야식의 오염 정도의 여부가 중생과 성인(聖人)으로 구별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아뢰야식은 그 성질과 구조에 있어서 어떠한 양상을 띠고 있는가. 이를 설명할 때에는 대개 다른 인식 주체들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즉 우리 인간은 그 마음의 주체가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과의 상호관계를 아울러서 설명해야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8식설(八識說)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몸은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과 정신 등의 복합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에 해당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이라고 하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인식활동을 할 때에는 특별히 이를 안근(眼根), 이근(耳根) 내지는 신근(身根) 등으로 명칭한다. 더 나아가서 이들 인식기관들의 대상〔境界〕은 각각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등으로서 오직 이것들만을 상대하여 인식활동을 하는데, 만약에



눈을 통하여 물질을 분별했을 때에는 이를 눈으로 인식했다고 하여 안식(眼識)이라고 하며, 내지는 몸의 감촉을 통하여 알았을 때는 이를 신식(身識)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 즉 5근(五根)과 이들 인식기관이 분별하여 아는 5식(五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정신 부분에 해당되는 분야가 바로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키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이 의식은 우리의 신체 외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분야로서, 눈 등의 감각기관으로는 볼 수도 없고 만져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이 아니고, 앞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저 깊은 곳에서 항상 동반하여 일어나거나 아니면 독단적으로 활동하는 정신적인 소산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의 대상을 불교에서는 특별히 '법경(法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법이란 일체제법(一切諸法)과 같은 존재로서 유형적인 모든 사물은 물론이고, 무형적인 관념까지도 포함해서 말하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다섯 가지의 근과 이들의 저류에 항상 흐르고 있는 의근 등 여섯 가지의 경계〔六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그 대상들인 여섯 가지의 경계〔六境〕를 합치면 십이처(十二處)가 되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일체(一切)'라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12처설'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귀로 들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내지는 몸의 촉감들을 통하여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외에 어떠한 기억력이나 상상력을 통해서라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이들 모두를 통해서 도저히 감득할 수 없다면 설령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존재한다고 해도 인식 주체인 자기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인식론적인 해석에서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일어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경우가 있는데, 먼저 한 가지는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일어나서 같은 대상을 인식하거나 아니면 5식과 함께 일어났지만 의식이 한눈을 팔아서 올바른 인식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 등 아무튼 전오식과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그것이고, 또 한 가지는 꿈을 꾸거나 망상, 공상 및 선정(禪定)에 들 때와 같이 의식이 독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소승불교시대에서는 이와 같은 다방면에 걸쳐서 그 인식활동의 범위가 넓은 6식설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우리들의 인식활동의 원리를 대변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본존성(保存性)과 때에 따른 단속(斷續)의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서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로서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변화하지 않고 상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상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다름 아닌 제8 아뢰야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은 우리들이 잠을 잘 때나 심지어 죽어서 혼백(魂魄)이 떠돌아 다닐 적에도, 내지는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에도 그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으로서 6도(六途) 윤회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제8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부러 우리가 어떤 의도적인 행위,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전인수 격으로 끊임없이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및 아애(我愛) 등 4종의 근본 번뇌와 항상 같이하면서 업(業)을 일으킬 때에, 이들에 의한 인상(印象)이나 여운(餘韻) 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하는 장소로서 아뢰야식이 활용되는데,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정신은 제6 의식(意識)보다는 깊고 제8 아뢰야식보다는 얕은 제7 말나식(末那識, manas-vijn na)이라는 의식이 상정됨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7 말나식을 일컬어서 자아의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識)에 의하여 업(業)을 지어서 우리 중생들이 결과적으로 세세생생 윤회케 되는 것이다.


한편 제8 아뢰야식은 이렇게 모든 업의 산물들을 스스로 저장하는 능장(能藏)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세력들을 소장(所藏)할 장소로서의 처소로도 제공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아뢰야식은 앞에서와 같이 항상 제7 말나식의 집착력과 아집 등에 의하여 유린 당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이럴 경우 제8 아뢰야식은 집장(執藏)의 뜻이 강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유루법(有漏法)이 현행하는 사이, 곧 아집(我執) 등이 활동하는 위치까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아집 등이 없는 성인위(聖人位)에 오르면 이 식(識)의 이름은 자연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3) 심성설(心性說)


그러면 이와 같은 심층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마음은 그 성품에 있어서 어떠한 경향을 지니고 있는가. 이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활발한 연구와 관찰들이 있어서 합당한 이론과 일부 수긍이 가는 해석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이견(異見)들이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흔히 외부와의 접촉에 의하여 감정을 느낄 적에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前五根〕에 의한 것은 몸으로 직접 느끼고, 제6 의식의 분별에 의한 것은 마음으로 느끼지만, 제7 말니식이나 제8 아뢰야식 등에 의하여 얻어지는 감정은 사수(捨受)라고 하여 쾌감이나 불쾌감과는 상관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마음은 궁극적으로 어떤 감정을 산출해 내는 발생지가 아니고, 항상 중립과 냉정을 잃지 않는 존재로서 고요한 바다〔靜海〕와 같은데, 이는 특히 제8 아뢰야식의 특성〔무리무기성(無覆無記性)〕을 나타낸 것으로서 이 중에서 제7 말나식은 항상성(恒常性)은 있지만 그 번뇌적인 성질 때문〔유리무기성(有覆無記性)〕에 고요하지 못하고 번잡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마음은 본래 그 자체에 생각이나 사고 등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무엇을 잘못 인식하여 자연히 심리적인 갈등이나 번민 등이 초래되었을 경우에 홀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이미 어느 정도의 선천적인 특성〔본유종자설(本有種子說)〕도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일부는 후천적으로 전혀 새롭게 자기 자신의 업에 의하여 살아가면서 형성되어 간다〔신훈종자설(新熏種子說)〕는 이른바 복합적인 성격〔본신합생설(本新合生說)〕이 강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하여 형성된 우리들의 마음은 전철식(前七識)이 선악업을 지어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항상 이를 모두 수용하여 보존하는 것을 그 특질로 삼고 있는데, 아뢰야식의 이러한 성질을 무기성(無記性)이라고 한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업을 일으키는 원인은 선성(善性)이나 악성(惡性)의 분별력에 의하여 시작되지만, 그 결과가 아뢰야식 내에 수용될 때에는 중성(中性)의 상태, 곧 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도 아닌 무기성〔비선비악(非善非惡)〕의 것으로 저장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특별하게 이 제8 아뢰야식을 또한 이숙무기성(異熟無記性)의 것이라고 일컫는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현명한 부모는 그 자식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과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식 가운데에는 모든 업의 세력들이 풍부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면 이것은 진여(眞如)나 법성(法性)과 같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이 아뢰야식이 만일에 진여와 같이 변치 않아서 무위법(無爲法)이 된다면, 이에는 본래 작용이 없고, 또한 오고감이 없으며, 변치 않는 진리와 같기 때문에 여기서는 현상계의 제법이 생성될 수가 없다〔無爲無作用說 : 眞如凝然說〕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성의 것은 반드시 현상계를 낳을 수 있는 유위법(有爲法)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대승불교 전반에서는 이러한 제8 아뢰야식에 진여성(眞如性)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잡념법(雜念法)으로 취급하고 이보다 더 깊은 불멸의 어떤 것을 상정하여 제9 아마라식(阿摩羅識, amala-vijn na)을 세우는데, 이는 오염되지 않아 깨끗하다는 의미에서 무구식(無垢識)이라고 하거나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고 한 데서 그 진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으로 중국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유식학의 교의를 설정하면서 모든 대승불교의 사상을 포섭하고 천착했지만, 또 한 가지의 면에서는 대승불교의 이념과 개념을 달리하고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유의종자차별설(有爲種子差別說)에 입각한 오성각별설(五姓各別說)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세계를 자세하게 관찰하여 보면 일체 유정(有情)들은 모두가 다 평등치 않다는 견해로서, 삼승(三乘)이 진실이고 일승(一乘)은 방편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선천적으로 5가지의 부류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각자의 아뢰야식 중에 간직되어 있는 지혜종자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보살종성(菩薩種姓)으로 태어난 사람은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독각(獨覺)이나 성문종성(聲聞種姓)의 이승(二乘)으로 태어난 사람은 각각 벽지불( 支佛)과 아라한(阿羅漢)이 될 수 있고, 이상 3가지 경우의 어느 쪽도 아닌 불확실한 종성〔不定種姓〕의 사람도 노력의 여하에 따라서는 2승을 거쳐서 마침내 성불할 수 있지만, 문제는 처음부터 전혀 붓다가 될 성품이 없다는 무불성종성(無佛性種姓)인 것이다. 말 그대로 불성이 없기 때문에 도저히 성불할 수가 없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알반적인 교의〔一切衆生 悉有佛性〕와도 어긋나는 독특한 사상인데, 이와 같은 무불성론자를 또한 일천제(一闡提, icch ntika)라고도 하여 (일)천제 무불성설을 주장하는 것은 오직 이 종파만의 교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방편으로서 현실의 세계를 직시하면 이와 같이 여러 부류의 중생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하나의 교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유식의 수행(修行)


이 세계는 오직 한 마음의 조작에 불과하다고 많은 경전에서 설파하고 있는데, 이 마음을 마치 허공과 같이 두루하고 모든 중생들에게 내재하고 있는 밝게 빛나는 것으로 간주하면 여래장(如來藏)사상이 되지만, 이를 윤회의 기로인 아뢰야식으로 해석하면 유식(唯識)사상이 된다. 이와 같은 윤회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 번뇌의 세계를 그려내는 한편으로 이의 전환에 의해서 최고 실재인 지혜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이름하여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되니 허망한 인식들을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전환하여 지혜를 증득하는 과정이 유식사상도 종교의 한 덕목인 이상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1) 유식의 수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계의 사물들을 눈여겨 관찰하여 보면, 거기에는 다 그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어서 서로 조화롭게 잘 정리되어 있으며, 초저녁이면 뒷동산에서 울어대는 소쩍새의 소리가 하도 서글퍼서 우리의 심금(心琴)을 애잔하게 울려 주는데, 이러한 자연적인 원리와 이치 및 우리들의 감정 등에 관하여 이를 지극한 마음으로 주의 깊게 성찰하는 것을 삼마타(三摩)와 비발사나(毘鉢舍那, vipas-yana), 즉 지심(地心)과 관찰(觀察)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념은 여러 유가(瑜伽,Yoga)수행 중의 한 방법으로서 유가실천의 체험을 묘사하는 가운데 유식(唯識, Vijinapti-matra)이라는 이론적인 술어가 처음으로 나 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자면 유가를 닦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갖가지의 영상은 다만 우리의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범한 자각적인 체념이 유식설을 성립시킨 내면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유식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유가를 실천하는 사람', 즉 유가사(瑜伽師,Yogacara)라고 불렀으며, 이들 또한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이름했다.




이 유가사들은 일찍이 초기 유부계통(有部系統)뿐만이 아니고 부파불교의 내부에서도 여러 논사들과 함께 교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지만, 뒤에 유가행파를 형성한 사람들의 선조는 학설의 경향으로 미루어 볼 때 광의의 유부적인 토양 가운데서 출현되었다고 단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전적으로 의지한 바는 유부의 교학보다는 자기들의 체험이었으며, 그 체험을 뒷받침한 것은 당시에 이미 확립되어 가고 있던 대승불교의 선관(仙官) 즉 공관(公館)을 받아들인 것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비로소 대승의 유가사가 탄생된 것이며 이 유가사들의 독특한 관법이 바로 유식관으로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유식관에 관한 것을 알아보면 먼저 '지념(止念)'과 '관찰'에 관한 내용은 불교의 어는 유파에서나 흔히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수행 방법이므로 유가행파의 특색을 지관법에서 찾는 것은 불합리하지만 이를 골격으로 하여 대승보살도의 체계를 세워서 그것을 유가수행의 단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오직 이 학파만의 창안이다.


즉「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에 설해진 내용을 보면,


① 진리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가르침을 듣는다.

② 들은 가르침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사유한다.

③ 마음이 대상이나 자기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그 본래의 상태로 된다.

④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은 없는 것으로 확실하게 관찰 한다.

⑤ 자기 존재의 근거를 완전히 없애고, 진리의 세계에 융화해서 일체의 중생과 평등한 입장에 서서 오염을 벗어난다.


라는 것이 유가수행의 단계인데, 첫 번째의 진리의 세계에서 흘러나온 가르침이란 곧 붓다의 교설인 성전 등을 스승에게서 잘 듣고 이를 스스로 독송하거나 이해하는 최초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근원적인 사유란 진리의 세계로부터 유포된 가르침을 듣고서 그 내용을 지식수단에 의해 잘 검토하여 의미를 명확하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진리를 보다 철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체험을 다시 체험하는 추가적인 체험이 필요한데 바로 이런한 추가체험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이 2단계를 거치면 마음은 오염되지 않는 투명한 상태로 된다. 그러므로 번뇌의 근원은 여기에서 끊어지고 번뇌가 없는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보살은 그 마음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며, 주관에 의하여 가립(假立)되어진 대상이나 영상은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렇게 근거의 전환에 의한 체험을 얻어서 자기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중생과 평등한 입장에 서서 오염된 번뇌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 보살이다.


이러한 경지에 오른 보살은 번뇌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접에서는 성문(聲聞)이나 독각(獨覺)과도 같지만, 자기 한 몸의 해탈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중생구제에 종사하여 세계를 정화하는 활동에 직접 뛰어든 점에서는 성문이나 독가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느 진리 그 자체이며, 오염을 제거하고 공덕을 쌓는 것이 그 자신에게는 어떠한 감소나 증대도 가져오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5가지의 단계를「장엄경론」에서는 차례로 용기(容器), 안치(安置), 경(鏡), 광(光) 및 근거(根據) 등의 개념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에서 용기란 여러 가르침을 배워서 이를 마음 가운데에 축적해 나가는 과정을 마치 물을 그릇에 채우는 것에 비유한 것이며, 근원적인 사유란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이 이러한 가르침을 바르게 깨달을 가능성을 마음 가운데에 안치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다음으로 어떤 대상이나 자기로부터 집착을 여읜 마음은 암울하지 않아서 마치 거울과 같다는 것이며,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 주는 마음은 밝은 빛과 같아서 마침내 번뇌를 가졌던 자기 존재가 없어지고, 진리 그 자체가 자기의 근거로 자작되는 최종적인 근거의 대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심(止心)과 관찰을 골격으로 한 유가에 관한 수행법이 일찍부터 유가행파에 의하여 유행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것을 유식관이라고 한다.


2) 오위(五位)


이러한 유가행(瑜伽行) 수습의 단계들이 발전하여 유식사상에서 소위 오위설(五位說)로 정착되었지만, 부파불교 시대부터 이미 이와 유사한 내용들이 설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구사론(俱舍論)」의 현성품(賢聖品)에 의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청문(聽聞)과 사유(思惟)로 말미암아 마음이 해탈의 방향으로 굳어지는 단계인 순해탈분(順解脫分 : 3賢位)과 번뇌가 없어진 세계로 방향이 정해지는 단계인 순결택분(順決擇分 ; 4善根位)의 경지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다시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단계를 거친 다음에 마지막으로 아라한(阿羅漢, Arhan)이 되는 것이 소승의 성현들이 거치는 수습단계(修習段階)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유가에서 지향하는 목표와 소승에서 바라는 이상이 비록 다를지라도 그 수습과정 자체는 완전히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 유가의 5단계는 후에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 말하는 5위, 즉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및 구경위(究竟位)에 각각 해당되는데, 지심과 관찰은 가행위에서 근원적인 사유의 단계로 실수(實修)되고, 다시 견도위에서는 지심이, 수습위에서는 관찰이 진리의 체현이라는 궁극적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모든 인식활동으로 얻어진 번뇌를 정화하고, 이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첫째, 자량위는 수행의 첫걸음으로서 옛날에 먼 길을 가려면 노자(路資)와 식량(食糧)을 준비해 가듯이 진리인 붓다의 말씀을 깊이 신해(信解)하고서 대승의 순해탈분, 즉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등 삼십심(三十心)을 닦는 단계를 말한다. 이 위치에서 중요한 것은, ㉠ 좋은 벗〔善友〕을 만나는 것이고, ㉡ 지혜를 얻고자 하는 자신의 굳은 의지〔作意〕가 필요하며, ㉢ 이러한 여건들을 충분히 갖추고〔資糧〕출발하여, ㉣ 신해(信解)로서 부처님께서 보여 주신 가르침을 강한 정신으로 믿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는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 되는 번뇌는 아직도 정화되지 않아서 허망한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 번뇌의 뿌리인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별도의 지혜행(智慧行)과 복덕행(福德行)이 요구되는데, 지혜를 얻으려는 수행이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실천덕목인 것이며, 남을 위하는 복덕행도 이와 함께 닦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가행위(加行位)에서는 먼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어서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심식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능취와 소취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없애고 진실한 견해를 일으켜서 번뇌가 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데 진력하는 대승불교에 있어서 순결택분을 닦는 단계를 말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부터는 근원적인 사유가 시작되는데, 진리의 세계로부터 유포된 가르침을 듣고 그 내용을 지식수단에 의해서 잘 검토하여 의미를 명확하게 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은 본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체험을 다시 체험을 다시 체험하는 일이 필요한데, 근원적인 사유란 이 추가체험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추가적인 체험을 수행해 나가는 가운데서 자연히 신심(身心)은 경쾌해지고 여러 가지의 신통력도 일어나며,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는 4종의 선근(善根)도 차례로 생겨나는 것이다. ㉠ 난위에서는 대상에게 부여된 명칭은 단지 가립적인 것으로서 진실한 실체는 없다는 것을 알며, ㉡ 정위에서는 대상은 환영(幻影)과 같이 주관에 의하여 역시 가립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를 말한다. 이어 ㉢ 인위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외계 대상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여의어서, 그 결과로 ㉣ 대상을 받아들이는 심식도 또한 없다고 깨닫는 것이 마지막 세제일법의 단계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예를 들어 말하면, 불을 일으키기 위하여 나무와 나무를 서로 문지르면 불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그 마찰열에 의하여 주변이 따뜻해지는 것과 같이, 번뇌를 없애는 불이 생기기 전에 접촉된 선근을 이에 비유하여 난(煖)이라고 하며, 정(頂)이란 산꼭대기를 의미하는데,



이 선근은 그래도 불확실한 선근 가운데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며, 인위에서는 선근이 확정되어서 가르침인 진리를 수용하는 위치를 말하며, 세제일법위에서는 아직도 번뇌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세계 가운데서는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르는데, 이 다음의 단계는 성자(聖者)의 경지인 초지(初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셋째, 통달위(通達位)는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보살들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존재의 성품과 형상을 통달하여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 이를테 'c0 위치에 이르기 위하여 꾸준히 자량과 가행의 단계를 거치면서 수행한 결과 진리에 계합되는 안목 등이 생겨서 진여를 체달하고 달관하게 된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체달한 경지이기 때문에 이를 또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하며, 이는 보살의 초지(初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지에서도 아직까지 인간이라는 궁극적인 존재는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기 깨문에 이와 함께 하는 번뇌는 요지부동이라는 것이다. 몸에 침투된 번뇌는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으며, 각종의 종자(種子)를 함장(含藏)하고 있는 아뢰야식은 변화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번뇌들이 이 단계에서는 '혹 항복되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는 경우〔或伏或起〕'도 있기 때문에 근본되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기 위해서는 수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넷째, 수습위(修習位)에서는 통달위에서 아직도 정화하지 못한 부분을 더욱 정화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단계로서 긴 기간에 걸쳐서 끊임없는 수도와 그로 인하여 체득되는 무분별지의 발현에 의하여 아뢰야식중에 있는 번뇌와 주객체의 잠재력을 함께 단절하고, 의지할 바를 대전환하여 부처님의 경지를 직증(直證)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십지(十地)의 단계라고 하여 보살들이 오랜 기간〔二大阿僧祗劫〕에 걸쳐서 나머지 번뇌의 소멸을 위하여 전식득지(轉識得智)아른 수행을 계속하는 단계를 말한다.


다섯째, 구경위(究竟位)란 이렇게 보살들이 수많은 기간에 걸쳐서 수행을 한 결과 마침내 마음이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에 머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우리 중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신체적인 감각이나 의식 등의 주관적인 인식활동을 통하여 얻는 모든 알음알이들이 완전히 제거되어 다시는 번뇌나 망상과 같은 삿된 생각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출전: http://compassion.buddhism.org/main5/05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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