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갈등과 폭력의 심화에 대한 불교적 대안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한겨레문화비평학교 담임강사,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계간 《문학과 경제》 주간,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문화변동과 인간, 그리고 문화연구》(공저) 《생명에 관한 아홉 가지 에세이》(공저) 《기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공저) 등이 있다.
2003년 10월 부안은 제2의 광주였다. 1만여 명의 주민과 7천여 명의 전투경찰이 맞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어디 부안뿐이랴? 노무현 정권 들어 한국 사회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자본과 노동, 친미와 반미, 국가와 시민 사이의 갈등은 연일 신문지상을 수놓는다. 이런 상황에 대해 언론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민들이 사회 혼란이나 국가혼란으로 동일시하며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다.
그러나 갈등의 표출과 대립이 곧 사회불안은 아니다. 갈등이 표출하면 권력과 자본을 잃게 될 기득권층은 모든 방법과 매체를 동원하여 이를 사회불안으로 몰아붙이고 갈등을 드러내지 않는 안정된 사회를 지향하도록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폈다. 갈등이 표출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열린 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한국 민중의 의식이 성장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제 시대 초기에 대다수 한민족이 일본을 선진 문명의 지혜를 베푸는 자로 생각했을 때 친일파와 민족 독립파 사이의 갈등은 없었다.
해방 이후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대다수 국민이 미국을 민주주의의 모범국, 공산도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혈맹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때 친미와 반미 사이의 갈등은 없었다. 유신 정권 초기에 국민 대다수가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를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대장정이라고 생각하여 국가의 동원에 기꺼이 나설 때 독재수호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 갈등은 없었다. 이에서 보듯 갈등을 사회혼란과 동일시한 것은 수구 언론과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
갈등이 있는데도 이를 표출하지 않고 가슴에 담고 있는 부부는 언제인가 헤어지지만 갈등이 있을 때 이를 드러내는 부부는 이를 통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사태를 해석하고 상대방의 견해를 수용하게 된다. 갈등과 갈등의 표출을 통해 부부는 더욱 돈독해진다.
부부 싸움이 칼로 물 베기인 것은 이 때문이다. 사회 갈등도 이와 유사하다. 마르크스(Karl Marx), 다렌도르프(Ralf G. Dahrendorf), 코저(Lewis A. Coser), 짐멜(Georg Simmel) 등 다양한 갈등 이론가들은 좌에서 우에 이르기까지 이념과 연구방법이 다양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대립과 갈등이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통합과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데 동의한다. 짐멜의 말대로 갈등은 그 자체가 사회적 얽힘의 한 형식이다.{{ Georg Simmel, Conflict and the Web of Group-Affiliation(NewYork: Free Press, 1955), p. 13. 박영신 편저 『갈등의 사회학』(서울: 까치, 1980), 19쪽에서 재인용. }}
갈등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갈등의 당사자들이 이데올로기적 조작에서 벗어나 현실을 구체적으로 직시하는 것이다. 부안 사태에서 정부의 발표와 수구 언론의 보도만 읽고 핵 폐기장 건설을 지역발전의 호기로 여기던 부안의 순진하고 질박한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자 반핵 운동의 전사들이 되었다. 미국을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 제3세계를 원조하는 큰 나라로 알던 제3세계 청년이 그들이 저지른 고문과 학살을 경험하고서 반미 투사가 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라크 전이 테러리즘을 막고 후세인 독재 치하에서 이라크 민중을 구원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한 성전인가? 다가오는 에너지 위기 시대에 대비하여 세계 2위의 석유 매장국을 성조기의 깃발 아래 두기 위하여, 중동, 더 나아가 잠재적인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 프랑스에 대해서 미 제국의 확고하고 유일한 패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재고 무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무기를 실험하면서 미국의 네오콘과 유착관계에 있는 군산복합체를 살찌게 하기 위하여, 공포를 더욱 조장해 미국민 다수가 이성을 잃어야만 재선에서 당선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여, 부시는 수만 명이 죽고 미국과 전세계를 혼란과 갈등으로 내모는 대학살극을 단행하고 있다.
91년 걸프전 이후 미국의 경제봉쇄로 죽은 이라크인만 170만 명이다. 이런 현실을 알고도 부안 사태를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붙이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두둔할 사람은 드물다. 이처럼 갈등의 상당한 부분이 이데올로기적 조작에서 비롯되기에 당사자들이 현실, 현실에 담겨 있는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첨예한 인식을 하면 갈등은 해결된다.
반면에 현실 자체에 대한 이해관계가 맞설 경우 갈등의 해결은 쉽지 않다. 가령 한강에 밤섬을 지나는 다리를 놓는 문제의 경우 환경론자들의 입장을 따르면 이는 서울의 유일한 철새 도래지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개발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서울 강남과 강북의 교통체증을 해소하는 대안이다.
이 상황에서 양쪽은 팽팽히 맞선다. 이런 경우의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까? 원래 국가는 양쪽의 이해당사자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이니 국가가 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국가는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보다 어느 한 편, 특히 권력과 자본의 편에 서서 다른 한 편의 희생을 강요한 적이 더 많았기에 정당성과 신뢰를 상실하였다. 국가를 대변한 정부의 어설프고 편파적인 개입이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킨 대표적인 예가 부안 사태이다.
우리는 부안 사태를 통하여 한국 사회도 양쪽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고 권위를 갖는 중재기구가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아직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시골의 마을을 보면 갈등이 거의 없거니와 발생한다 하더라도 마을 어른의 중재로 조정된다. 논에 물을 대는 문제에서 토지나 집안 사이의 다툼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설사 양자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갈등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을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많으면서도 지혜롭고 마을 사람의 존경을 받는 노인이 나서면 갈등은 의외로 쉽게 풀린다. 복잡한 사회에서 노인 역할을 하는 것이 민간 조정기구이다.
미국의 「컨센서스 빌딩 인스티튜트(Consensus Building Institute: 합의도출기구)」는 세계적인 갈등 조정 전문기관으로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갈등을 조정하였다. 한국 사회도 집단 사이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해결할 민간 중재자가 필요하다.
민간 중재자가 있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안 사태가 타산지석이다. 부안 사태가 그토록 격렬해진 이면엔 정부와 지자체, 지역 언론의 집요하고 조직적인 사기극과 진실 은폐가 있다. 핵 폐기장 건설에 따른 위험성에 관한 정보는 거의 알리지 않고 이를 유치하면 한 가구당 5억원 씩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정부, 지자체,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조직적으로 사기를 쳤고, 이에 속아 위도 주민들은 유치를 청원했고 부안 주민들이 나중에 사실을 알고 반대를 하자 한국수력원자력의 광고를 받아먹은 언론은 이를 지역 이기주의로 매도하여 부안을 고립시켰다.
바로 이런 것들이 순진하고 질박한 부안 주민들이 집단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과 인간적인 존엄성, 민주주의, 환경과 생명에 바탕을 둔, 고길섶의 표현을 빌면, '절대공동체'를 구현하게 한 동력이다. 반면에 미국 보스톤에서 대규모의 다리를 건설하려는 문제로 맞서자 <컨센서스 빌딩 인스티튜트>는 몇 개월 동안 이해당사자들의 충실히 의견을 들었고 사전 조사도 치밀하게 진행하여 갈등 당사자들의 이견을 조금씩 좁혀갔고, 마침내 양쪽 모두 만족하는 결과를 끌어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면, 공정하고 합리적인 민간 중재기구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갈등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해야 하며 모든 결정은 갈등 당사자들의 합의를 통해서 하되 결정과정 또한 투명해야 갈등이 원만히 해결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21세기 들어 갈등을 야기하는 자로 미디어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 이미지다.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이미지가 실체를 대체하고 있다. 대중매체는 현실과 아무런 관계없이 이미지를 만들어 현실을 조작하고 대중들은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매체가 만들어 주는 이미지에 따라 바라보고 행위를 한다. 우리는 지금 세르비아 하면 인종청소나 강제 수용소를 떠올린다. 그때 세르비아에선 인종청소가 자행될 정도로 인종간, 종교간, 문명간 갈등이 치열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에 인종청소도, 강제수용소도 없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하리스 실라이지치 외무장관은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국무부 장관의 조언대로 미국 광고대행사 루더핀사와 비밀계약을 체결한다. 이 광고사는 비쩍 마른 백인 남자가 더워서 상반신을 벗고 우연히도 철조망을 배경으로 자세를 취한 사진에 "죽음의 수용소, 강제 수용소" 등의 제목을 부쳐 미디어를 통해 확산시킨다.
"죽음의 수용소, 강제수용소" 등의 제목을 달자 서양인들은 이 사진을 보고 나치의 강제수용소를 떠올렸고 세르비아에 대한 폭격을 주장한다. 이것으로 이미 전쟁의 종말마저 결정되었다. 지금 승전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는 밤늦게까지 사람이 오가고 투자 상담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번성을 누리고 있다. 반면에 패전국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는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암울한 침묵 속에 있다.{{ 더 상세한 논의는 다카기 도루, 『전쟁 광고대행사 - 정보 조작과 보스니아 분쟁』(서울: 수희재, 2003)를 참고 바람.}}
이처럼 이미지는 현실을 왜곡하고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하여 이미지를 만든 자가 의도하는 행동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의도된 현실을 형성한다. 이미지가 의도된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21세기의 영토는 치열한 이미지 전쟁의 터로 변하고 있다. 이미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기에 정치에서 사회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치열한 이미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백인과 서양 문명의 이미지는 유색인과 제3세계의 이미지를, 지배층이 만든 이미지는 피지배층의 이미지를, 사회적 다수자의 이미지는 사회적 소수자의 이미지와 갈등을 일으키고 이를 자기 안에 포용하면서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한다.
한 나라의 차원에서 보면 지배층과 피지배계층의 갈등과 헤게모니 투쟁은 이미지 투쟁에서 극에 달하며 전자의 승리로 끝나기 십상이다. 엘리트층의 이미지는 서민의 이미지를 대체하고 이는 지배층의 지배를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광고기획사의 말대로 월 300만원을 아무런 고민 없이 용돈으로 지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삼성카드를 쓰고 지펠 냉장고를 쓴다면 문제는 그리 크지 않다.
이들 광고 텍스트들은 감미로운 노래와 색상, 꽃, 촛불, 자전거와 양복, 스니커즈 등으로 중산층의 이미지를 창출한다. 대중들은 광고 텍스트의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멀쩡한 냉장고나 자동차를 고급의 것으로 대체한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과잉소비를 하여 자본가의 이윤을 늘려주고 대신 자신은 더욱 가난해진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이 실제로 중산층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소비양식만 그런 것인데 고급 냉장고를 사용하고 고급요리를 만들고 있는 한 그들은 이미 중산층이다. 서민이면서도 자신이 중산층으로 상승한 양 착각한다. 그들은 광고 텍스트에서 중산층으로 묘사된 모델과 자신을 동일화하면서 점점 자신에게서 소외된다. '사이비 행복의식' 속에서 계급갈등과 불만은 자연히 사라진다. '반역을 향한 동경' 또한 희미해진다.
결국 그들은 이 이미지에 취하여 서민적 이미지를 낡고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지배층에 포섭된다. 주로 미국 중산층의 이미지에 마취된 대중들은 미국 중산층의 상품을 소비하고 생활양식을 수용하고 나아가서는 '꿈의 양식'마저 바꾼다. 그리하여 미국 중산층이 바라보는 방식대로 세계를 바라보고 꿈을 꾼다.{{ 이 부분은 마텔라르가 "미국 만화영화를 통해 제3세계 어린이는 그들의 눈이 아니라 미국인이 제3세계를 바라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도록 한다."라고 지적한 것을 이 상황에 맞게 수정해서 사용한 것이다. Dorfman and Mattelart, David Kunzzle(tr.), How To Read Donald Duck: Imperalist Ideology In The Disney Comic (New York: International General), p. 95.}}
이미지가 만든 갈등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일체가 공(空)함을 깨달아야 한다. 해방 이후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하이트 맥주 광고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가짜가 진짜를, 모본이 원본을 대체하는 세계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 광고에 등장하는 지하 150미터 암반수의 시원한 모습은 진짜 지하수를 촬영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지하수를 찾아 촬영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이미지 속에 있는 차고 달고 신선하고 시원하며 깨끗한 지하수의 이미지를 다 내포할 수 없다. 그러기에 크라운 맥주는 우리의 이미지대로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한 가짜 지하수를 만들었다. 이 광고로 크라운사는 거의 독점적으로 시장을 형성하던 경쟁사를 오히려 부도 위기로 몰고 갈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옮김(서울: 민음사, 1992), 40쪽.}}라는 장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우리는 가짜가 진짜를, 모본(模本)이 원본을 대체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흑인들이 백인들에 비하여 폭력적인가? 미국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흑인들이 살인 강도로 자주 등장하기에 우리는 흑인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이미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장에서 흑인들은 이를 보고 자신들에게 열등감을 가지며 백인들은 흑인에 적대적이 된다. 이를 통해 흑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정당화하고 억압당하고 차별을 당하는 흑인들이 이에 저항하게 된다. 이렇듯 이 세계에서 우리가 이미지와 시뮬라시옹을 현실로 착각하는 한 우리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으며 주체는 없고 조작당하는 대상만 있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우리가 이미지에 취하여 현실을 잊는다면 새로운 시대는 희망의 세기가 아니라 절망의 세기일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삼라만상을 쉬바신이 빚어낸 환상으로 본다. 그 환상에 취하여 삼라만상을 무엇, 무엇으로 구분하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실상이라 여긴 것들조차 우리 마음속에서 투사한 것이자 우리가 어떤 틀에 따라 삼라만상을 갈라 그리 부른 것이다. 그러니 존재는 카르마의 총합일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이 공한 것이다.[畢竟空] 이 모든 것이 허상인 줄 인식하는 데서 우리는 온전할 수 있다. 저것이 실상이라는 집착과 자성(自性)의 인식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가장(假裝)된 삶에서 벗어나 실제 삶을 되찾을 수 있다.
물론 이미지가 이데아에 대한 그림자로만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마들렌 빵 냄새를 통해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듯 이미지는 근원으로 다가가는 열쇠이다. 시와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며, 시와 예술을 감상하며 황홀할 수 있는 것은 시어들이 엮어내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기 때문이다. 노년의 신사가 문득 어머니 자궁이 빚어내는 원초적인 따스함 속에 푹 파묻히고, 감옥에 갇혀 있는 무기수가 고향의 향기로운 꽃밭을 마음껏 뛰놀도록 '매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미지이다.
중국의 황제가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는 이유로 궁정 수석화가에게 벽화를 지우라고 하명하지 않았던가. 언어가 의식의 층위에서 논리적 순서에 따라 의미를 담고자 한다면, 이미지는 무의식 속에서 머물던 것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린다. 이 이미지의 창출 속에서 의식을 넘어선 인간의 창조성이 움튼다. 그러기에 이미지는 언어의 구속을 넘어 세계의 실체로 다가가는 매개체이자 상징의 폭력과 억압에서 일탈해 코라(chora)로 회귀하게 하는 방편이다.
이미지는 언어기호나 이성으로 다다를 수 없는 실체로 우리를 다가가게 한다.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세계를 느끼고자 하면서 상징과 코스모스가 가려버린 카오스를 향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가상이다. 사이버 세계에서 남북통일을 수만 번 이룬다 해도 실제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호와 이성의 한계를 넘어 초월과 환상과 경이의 세계로 다가가는 것도 좋지만 가상을 해체하고 실체를 직시하는 이성 또한 필요하다. 야만과 무지몽매함을 밝혀주는 것은 이성의 빛, 계몽의 힘이다. 이성이 없는 사회가 아편에 취한 성(城)이라면, 감성이 없는 사회는 기계가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진정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가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가운데 이미지와 기호, 감성과 이성을 종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든 갈등이 해결될까? 아니다. 부부싸움이 칼로 물 베기인 것은 서로 사랑하여 상생(相生)을 추구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니라 칼로 무 자르기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연기(緣起)의 패러다임이다. 갈등은 연기를 모르고 아상(我相)에 집착할 때 생기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한 이후 서양의 현대철학은 나와 남을 명백히 구분하고 세계를 이항대립적으로 바라보았고 주체의 동일성을 명료하게 인정하였다. 그러니 자연이든 세계이든 인간 밖의 것들은 모두 주체가 해석하거나 변화시키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주체, 인간, 남성, 서양으로 동일화하자 주체에게 객체, 인간에게 자연, 남성에게 여성, 서양에게 동양은 개발하고 착취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를 동일화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파괴로 나타났다.
20세기는 배제의 담론이 지배한 역사였다. 폴 포트(Pol Pot)를 만난 이들은 그가 아주 온화하고 지적이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하고 과묵하며 따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달하는 170만 명을 킬링필드로 보냈을까? 그의 뜻만큼은 숭고하였다. 캄보디아 농촌을 보고서 그는 캄보디아 전체를 농촌처럼 서로 배려하고 연대하며 순박한 인심을 가진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도시와 시장, 학교를 없애버리고 안경을 낀 사람도 '도시스러움'을 갖고 있다고 처형할 정도로 '도시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서 절대 순수한 농촌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동일성의 사유는 나와 타자를 갈라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은 폭력을 낳는다. 앞에서 말하였듯 대립과 갈등은 새로운 통합과 발전의 원동력이자 그 자체가 사회적 얽힘의 한 형식이기에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갈등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바뀌는 것이다.
21세기, 이라크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러시아에서, 그리고 한국의 곳곳에서 폭력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최근 미국은 이라크에서 포로들에게 비인간적인 고문과 폭력을 자행하여 전 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다. 오리엔탈리즘과 백인우월주의에 젖어있는 백인에게 유색인은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눌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전쟁의 불안과 공포는 포로들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기 십상이고 아군의 피해는 이를 정당화한다. 권력이 절대적으로 교도관들에게 주어진 교도소 구조 속에서 교도관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수감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권력을 확인하고픈 유혹에 빠지기 쉬우며, 전쟁의 불안과 교도소의 폐쇄된 강박 속에서 수감자를 괴롭히는 것은 특별한 유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폭력은 피해 당사자들을 사물화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라크 포로들은 피가 흐르고 온기가 느껴지는 생명체가 아니라 마구 때리고 능멸하고 고문을 하면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구조적 폭력 또한 문제이다. 한 가장이 굶주려 죽어 가는 자신의 아이를 두고 볼 수 없어 지나가는 우유 배달 자전거를 습격하여 우유 몇 통을 강탈하였다면 그 폭력만 폭력인가? 그를 생존조차 하지 못하게, 가장으로서 자존심과 권위를 송두리째 앗아간 것 또한 폭력이다. 신자유정책으로 졸지에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가 성조기를 불태우는 것은 폭력이고 세계의 10억에 달하는 인류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제3세계의 외채를 20여년 만에 2조 달러로 32배나 늘어나게 한 것은 '폭력'이라는 어휘를 제쳐놓고 무엇으로 부르겠는가.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인간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고 (생존욕구), 보다 나은 삶을 살려하고(복지에 대한 욕구),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하고 (정체성에 대한 욕구),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자유에 대한 욕구) 욕구들에 대해 "피할 수 있는 모독"을 가하는 것이다. 자원을 불평등하게 분배하고 착취하는 것, 피지배층의 자율성이나 자치권 확보를 저지하는 것, 피지배층을 서로 분열시키고 갈등하게 하는 것, 피지배층을 사회에서 일탈시키고 소외시키는 것, 더 넓게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종속의 관계로 놓고 수탈하는 것, 가부장주의로 여성의 사회진출과 활동을 막고 안방에 가두는 것이 모두 구조적 폭력의 양상들이다.
그러기에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갈퉁(Johan Galtung)은 구조적 폭력을 "인간이 지금과 다른 상태로 될 수 있었던 잠재력과 현재 처해있는 상태와의 차이를 제공하는 요인"으로 정의한다. 제3세계의 농부가, 변두리의 빈민이 서구인이나 중산층 어린이에 비하여 특별히 게을러서 가난한가?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구현할 교육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은 누구이고 자신의 능력을 실현할 기회를 봉쇄한 것은 무엇인가?
왜 인간이 이리 서로 갈등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는가.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교환가치를 사용가치보다 우선시하면서 물화(物化)가 인간을 지배하였고 서로를 소외시킨 데, 소외된 인간들이 돈과, 물질, 자본의 가치를 한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된 데 주요 원인이 있다. 그럼 왜 폭력이 일상화하고 구조화하였는가?
폭력의 세 축은 국가와 자본, 그리고 미국이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배층은 양자를 행하여만 지배층을 유지할 수 있다. 정당하지 않을 것을 하면서도 저항을 받지 않고 지배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지배의 요체이다. 피지배층이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을 때 지배는 공고하다. 허나 그를 의심할 때 피지배층을 가장 쉽게 통제하는 방법은 폭력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뚱의 말은 항상 옳은가?
모든 권력이 총구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총구에 의존할수록 권력의 헤게모니는 약해진다. 피지배층은 채찍을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채찍을 가로채기도 한다. 심지어는 채찍을 빼앗아 대신 휘두르기도 한다. 이에 21세기의 지배층은 겉으로나마 폭력을 숨긴다. 은폐된 폭력은 제도적 폭력으로 변형되고 제도적 폭력은 구조화한다.
자본은 폭력을, 폭력의 이미지를 이용한다. 자본의 지배를 정당하지 않다고 보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자본은 구사대를 부르고 경찰을 호출하고 군대를 동원한다. 자본은 때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처럼 기업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하여 전쟁도, 쿠데타도, 학살극도 서슴지 않는다.
석유 등 원자재를 싼값에 확보하기 위하여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자를 정권에 앉히기도 하고 중금속이 든 약이나 식료품을 판매하여 수만의 사람들을 불치의 병에 걸려 죽게도 한다. 원유를 바다에 쏟아 부어 수많은 동물들을 죽이고 폐수를 방류하여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도, 수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그들도 모르게 새로운 무기나 약품의 실험대상자로 삼아 암 등의 질병으로 죽게 하는 것도 이들이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잘 매개하는 것은 대중문화이다. 야만적인 폭력은 직접적인 대신 국부적이다. 그러나 문명화한 폭력은 확대 재생산되기에 그 피해는 깊고도 넓다. 문명화한 폭력은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간접적으로 자행되기에 겉으로는 폭력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폭력의 이미지는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가 그들의 폭력을 부추긴다. 그럼에도 대중문화는 폭력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문화산업은 이를 상품화하여 팔아먹는다.
국가와 자본과 미디어가 견고하게 연합한 실체가 바로 미국이다. 한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자원를 확보하기 위하여 제3세계를 침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과 기아로 몰아넣고, 한 나라의 독재자를 지원하여 고문과 학살, 민주 인사의 탄압과 암살에 가담하고 그 대가로 자원을 확보하고 불공정한 시장을 유지하고 압도적으로 우월한 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이데올로기와 상징과 이미지를 쉴새없이 전파하는 것이 미국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증은 「한국 대중문화 텍스트의 미국 이데올로기」, 『문학과 경계』, (2002년 여름호)를 참고 바람.}}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라면 이 체제 자체를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다. 국가와 자본이 폭력을 조장하고 일상화, 구조화하고 있다면 시민세력이 연대하여 이들을 견제해야 할 것이다. 21세기는 국가와 자본에 시민이 또 한 축으로 자리하여 삼자의 균형을 정립(鼎立)하는 시대이다. 미국이 악의 근원이라면 제3세계의 다중들이 세계사회포럼처럼 자율적이고 진보적인 운동을 세계 차원에서 연대하는 것이다. 허나 과연 그러면 인간은 존엄해지고 인간에 대해, 자기 주변의 자연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것인가? 그럼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사회주의에서는, 중세 봉건제도하에서는 그러했던가?
결국 해인사의 폭력을 잠재운 것은 실상사의 아힘사[불살생]였다. 수천 캐럿의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금강산 전체를 준다 할지라도 자기 목숨과 바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를 그리 소중히 여기니 다른 이들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 아힘사의 정신이다. 겉으로 보면 소극적인 정신 같지만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겼듯 아힘사는 다른 이를 나처럼 사랑하여 보듬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나처럼 소중하게 여길 때 (타자들에 대한) 폭력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면 우리는 폭력에 물든 우리의 심성을 아힘사의 정신으로 닦아야 하리.
아힘사를 실천할 때 중요한 것은 고(苦)를 '개인적 고'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것이다. 태국의 불교환경, 평화 운동가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의 말처럼 이제 구조적 폭력이 바로 고이다. 반야를 얻으려는 이들은 현실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탐구하는 이들이다. 단지 피지배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난과 억압과 착취, 소외를 짊어져야 하는 이들의 뼈마디 시린 고통, 사회적인 모순이 낳는 고통에 대해서는 왜 애써 눈을 감았는가? 부당하게 채찍질을 받으면서도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면 그는 행복한가?
그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굴종과 억압의 삶을 개선할 꿈을 헛된 욕망으로 간주하여 버린다면 그들의 삶이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진과 속이 하나인데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설사 정토에 가서 왕생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살아서 이 고통을 받는 것보다 얼마나 더 나은 지 의문이다. 마음의 해탈과 사회의 해방이 하나가 될 때 진정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술락의 지적처럼 반야로 구조적 폭력을 인식하고 연기적 세계관으로 세계를 바라보아 심성을 개발한 이들끼리 연대를 하여 인간이 모두 소중한 사회, 폭력이 없는 사회를 이룬다면 그야말로 모두가 해탈을 이룬 사회, 진과 속이 하나인 사회이다.
우리는 이제 동일성의 철학에서 연기(緣起)의 철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여야 한다. 라캉(Jacques Lacan)은 서양을 지배해 온 주체중심, 동일성의 사유를 비판한다. 욕망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가? 이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핍에서 비롯된다. 18개월 이전의 아기는 상상계(imaginary stage)에 머문다. 그는 이미지에 속박된다. 젖을 빨면서 어머니와 자기가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외계, 주체와 객체간에 뚜렷한 구별이 불가능하다. 18개월이 지나면서 아기는 거울의 단계(mirror stage)로 진입한다. 아기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어머니와 다른 몸을 가진 주체라고 비로소 생각한다. 거울 속에 비친 대상이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이는 조각난 몸의 고뇌에서 하나의 전체성으로 자신을 통일시킨다.
어머니의 한 조각으로 알고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일관되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총체로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이다. 아기는 거울 속의 자기를 보면서 내면세계와 주위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여 자기 동일화를 이룬다. 이 아기는 곧 '아버지의 이름 (the-name-of-the-father)'을 받아들이면서 사회화하는 상징의 단계(symbolic stage)로 진입한다.
언어와 상징을 수용하여 이제 말을 시작한다. 인간은 욕망을 억압하고 언어기호와 도덕, 윤리를 수용하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는 화자 개인을 초월하는 사회문화적 상징체계이므로 무의식은 자아로부터 독립된 질서와 체계를 갖는 큰 타자의 담론이다. 그러기에 무의식은 큰 타자(아버지의 이름, 법, 기표)의 담론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서 나타난 주체의 다른 모습이다. 라캉은 이를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trans. A. Sheridan(Harmondsworth : Penguin, 1977), pp. 128∼129.
}}라고 한마디로 압축하여 주체중심주의의 사유에 있었던 현대 철학자들에게 외친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이에 기반을 두고 발전시켜 온 서구의 현대 철학은 전복된다. 나는 타자가 내재화한 것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 나타난 나의 다른 모습이다.
데리다는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발전시켜 동일성에 바탕을 둔 서구 철학을 비판한다.
"자의성(恣意性, arbitrariness)은 기호의 체계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하여 구성될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 Jacques Derrida, Speech and Phenomena and Other Essays on Husserl's Theory of Sign, tr. David B. Allison(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3), p. 139.}}
의미작용은 낱말이나 사물의 충만한 본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 구조 속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동일성은 하나의 다른 것이 또 다른 것으로, 대립의 한 용어가 다른 용어로 옮겨가는, 전복되고 모호한 통로에 불과한 차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동일하다고 믿은 것은 차연 속의 타자이며, 타자 속의 차연에 불과하다. "같은 것은 다른 것의 다른 것이고, 다른 것은 자기와 같은 것이다.……타자는 절대적으로 자아일 때만, 즉 어떤 면에서 나와 동일자일 때만 다른 것이다.{{ J. Derrida, Writing and Difference, tr. Alan Bas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 127. }}
'현존의 순간'이란 실제로는 不在와의 차이적 관계(differential relation)에 의해 산출된다. 진리의 기반은 훗설의 체계 내에서 비진리의 영역으로 배제시키려 했던 것에 의해 구조화한다. ……현존은 오직 동일성 내부의 다른 것, 즉 異他性(alterity)에 의존함으로써만 스스로 존재한다.{{ Michael Ryan, Marxism and Deconstruction - A Critical Articulation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2), p. 26.}}
이렇듯 탈현대의 철학은 동일성을 차이로 전복시킨다. 차이가 동일성에 선행하며 형이상학이 근원으로 내세우는 동일성은 차이작용의 결과로서 생산될 뿐이다. "동일성이란 본질적인 차이와 특수한 역사적 '분할(segmentation)'을 초월하는 일반적 범주-그 자체로 차이의 동일화(an identification of difference)-로 관념화할 수 있는 것인데, 사회적 관계는 결코 이런 동일성-개인-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을 구성한다.…단순히 한 "사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하나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異他性이 동일성에 선행하며 이를 생산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Michael Ryan, op. cit., pp. 47∼48.}}
원효는 8세기경에 연기(緣起)와 공(空)의 철학을 바탕으로 차이의 철학을 논한다.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 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같음은 다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같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다름은 같음을 나눈 것이 아니기에 이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르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는 둘도 없고 別도 없는 것이다.."{{ 元曉, 『金剛三昧經論』, 卷中, 『韓國佛敎全書』, 제1책, 626-상: "同者辨同於異 異者明異於同 明異於同者 非分同爲異也 辨同於異者 非銷異爲同也 良由同非銷異故 不可說是同 異非分同故 不可說是異 但以不可說異故 可得說是同 不可說同故 可得說是異耳 說與不說 无二无別矣"}}
외국인들은 뜨거운 국을 먹으면서 시원하다고 말하는 한국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이에 대해 뭐라 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는 변동어이(辨同於異)의 화쟁(和諍)의 사유가 우리 민족의 사유구조이자 문화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뜨거움은 홀로 존재하는 것도 홀로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찬 것이 있기에 그와 차이를 통하여 뜨거움을 분별한 것이다.
차다는 것 또한 홀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것이 있기에 차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둘 사이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뜨거운 것은 찬 것을 없애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찬 것은 뜨거운 것을 증발시켜 버리고 얻어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뜨거운 것이 있어서 찬 것이 드러나고 찬 것이 있어서 뜨거운 것을 느끼기에 가장 시원한 맛은 "뜨거운 시원함"이다.
원효의 말대로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주(主)와 객(客), 현상과 본질은 세계의 다른 두 측면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며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주체에는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고 타자 또한 주체를 형성한다.
원효의 화쟁 철학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란 것은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와 차이를 통하여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의 사유로 동일성의 사유가 범한 야만을 극복하는 길, 이타성(異他性)을 이타성(利他性)으로 전환하여 갈등과 폭력을 평화적 공존으로 대체하는 길은 무엇일까? 원효의 진속불이(眞俗不二)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진속불이는 당위의 명제만은 아니다. 범부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 깨달은 자가 다시 중생을 구원하여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은 당위이자 존재론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인(因)을 가지고 있다. 원효는 대승과 화쟁의 논법을 통하여 진속일여의 논리적 타당성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空相이 또한 공하다"라 한 것은 '공상'이 바로 俗諦를 버리고 眞諦의 평등한 상을 나타낸 것이요, "또한 공하다"란 곧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은 "空空"의 의미이니,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 "또한 공하다"라 한 것은 이 속제를 다시 융합하여 진제로 삼은 것이니, 이것은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덩이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 또 처음의 門에서 "속제를 버려서 나타낸 진제"와 제2의 공 가운데 '속제를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인 이 2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며, 진제의 오직 한 가지로 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는 오직 하나이다.{{ 元曉, 『金剛三昧經論』, 卷中, 《韓佛全 , 제1책, 639-하-640-상: "空相亦空者 空相卽是遣俗顯眞 平等之相 亦空卽是融眞爲俗 空空之義 如銷眞金作莊嚴具 …… 亦空還是融俗爲眞也 如銷嚴具 還爲金 ……又初門內 遣俗所顯之眞 第二空中 融俗所顯之眞 此二門眞 唯一無二 眞唯一種 圓成實性 所以遣融所顯唯一"}}
석가모니는 『금강경(金剛經)』,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나 중생상(衆生相)이나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구원의 주체인 나나 대상인 타인이 있다는 생각, 중생이든 다른 존재이든 이보다 위에 서서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대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서, 그들보다 높이 깨달아서, 그들보다 시간이 많아서, 그들보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보살행은 내가 그보다 높이 서서 나의 불성(佛性)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다움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승(大乘)의 요체이다. 그러니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심(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일체의 중생이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 馬鳴, 『大乘起信論』, 卷2, 『韓佛全』, 제1책, 744-하: "依一切衆生以有妄心 念念分別 皆不相應 故說爲空 若離妄心 實無可空故"}}
중생의 마음은 본래 하늘처럼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에 중생은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무명에 휩싸여 욕계(欲界), 색계(色界), 유계(有界)의 3계란 경계를 지어 세계의 실체를 바라보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이 모두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간다.{{ 元曉, 『金剛』, 卷中, 『韓佛全』, 제1책, 641-상: "衆生之心 實無別境 何以故 心本淨故 理無穢故 以染塵故 名爲三界 三界之心 名爲別境 是境虛妄 從心化生 心若無妄 卽無別境"}}
유리창만 닦으면 하늘이 다시 청정함을 드러내듯, 무명만 없애면 본래 청정한 중생 속의 불성이 스스로 드러나니 그 먼지만 닦아내면 된다. 원효의 표현대로 금을 녹여 장엄구로 만들듯 진제(眞諦)를 녹여 속제(俗諦)를 만들며, 다시 장엄구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금덩이를 녹여 금반지를 만들고 금반지를 녹여 다시 금덩이를 만들지만 둘은 모두 금으로 하나이다. 그러니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圓成實性], 부처와 중생,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가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 완성된 인격[眞]에 이를 수 있고 또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간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 元曉, 『金剛』, 卷中, 『韓佛全』, 제1책, 649-중: "具足般若海 不住涅槃城 如彼妙蓮華 高原非所出 諸佛无量劫 不捨諸煩惱 度世演後得 如泥華所出…"를 원용함.}}
이처럼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들을 열반의 언덕으로 나아가도록 할 때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구원은 그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주체는 타자를 통하여 자신을 완성한다. 타자를 구원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 숨어있는 부처를 드러내는 것이다.
원효의 변동어이(辨同於異)는 차이의 철학과 통한다. 차이의 철학이 이타성(異他性)을 동일성에 선행하는 것으로 밝혀 놓는 데 그치고 있다면, 원효의 철학은 진속불이(眞俗不二)를 통하여 이타성(異他性)이 이타성(利他性)으로 전화할 수 있는 근거를 당위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동일성, 우열의 철학은 갈등과 대립을 낳으며 우열을 설정하는 순간 타자에 대한 폭력을 부른다. 한국 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지역주의와 패거리주의, 닫힌 민족주의도 동일성의 철학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차이의 철학은 양자를 우열로 보지 않는다. 피부가 검은 것은 다름과 차이일 뿐 열등함이 아니다. 타자에게서 자기를 발견하며 타자와 차이를 통하여 자기를 찾는다.
독일의 문학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는 "가장 진정한 사랑이란 내 방식을 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신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했다. 이처럼 변동어이(辨同於異)의 사유는 나는 타자로 인하여 나이고 타자가 곧 나임을 자각하여 타자를 나처럼 끔찍이 보듬어주고 사랑하는 것, 나와 타자 사이에 평화스러운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폭력에 대한 불교적 대안에 대해선 졸고, 「원효의 화쟁사상과 탈현대철학의 비교연구」, 『元曉學硏究』, 제6집, 元曉學硏究院, (2002년 2월). 졸고,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으로서 화쟁사상4 : 인간주체의 죽음과 폭력의 일상화와 구조화: 나와 타자는 어떤 관계인가: 차이의 철학 對 辨同於異, 『법회와 설법』,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2001년 8월호)에서 논했던 것을 발전시켰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와서 현실의 세 가지 의미 - '지금 여기에서 사실로 나타나는 일과 사물', '실재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 '원본에 해당하는 무엇'-는 모두 전복되고 있다. 탈구조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지금에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져 있으며 현재 또한 과거와 미래의 재현에 불과함을, 실재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존재라 생각한 것은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원본이라 여긴 것이 실은 모본임을 밝힌다.
이들의 말대로 현실이란 근원적으로 허상이고 집착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은 '나와 내가 무한한 연관 속에 있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연기의 사유로 보면 나는 타인인 동시에 나이며, 주체는 대상인 동시에 주체이다. 현실은 허상이지만 연기를 드러내는 것은 실상(實相)이다.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연기를 드러내면 그 텍스트는 현실에 담긴 진리를 비춰준다.
필자는 현실을 불가지(不可知)의 것으로 만든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이들을 비판하며 현실을 갈등과 투쟁의 장으로 명확히 하려 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모두 맞서서 현실을 "지금 여기에서 존재들이 현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을 위해 세계와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연기(緣起)를 깨달아 화해하면서 사건을 만드는 場"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싸우던 두 사람이 배다른 형제였음을 알고 서로 화해를 하듯, 너와 나를 가르고 보면 우리는 갈등할 수밖에 없고 상대방에 대해 폭력을 행하나 너와 내가 서로 연기된 하나임을 알 때 갈등은 사라진다.
이렇게 연기의 패러다임을 따라 너와 나를 분별하는 사유를 혁파하고 나라는 집착을 떠나 우주의 삼라만상이 서로 깊이 연관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자각 속에서 상대방에게서 부처의 모습을 발견할 때, 네덜란드가 노동자와 자본가, 시민이 하나가 되는 기구를 만들어 IMF를 극복하였음은 물론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존과 평화를 이끌어낸 것처럼 개인의 깨달음의 차원을 넘어서서 연기의 패러다임을 사회제도와 기구로 구현할 때, 한국 사회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은 사라지고 모든 갈등은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이 되리라.■
'***풍경소리 > 불교와 인문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문명사회와 인도에서의 윤회 (0) | 2007.10.22 |
---|---|
자본주의와 빈곤, 그리고 무소유 (0) | 2007.10.22 |
승조(僧肇)의 존재에 대한 사유방식과 자유 (0) | 2007.10.19 |
매트릭스에 나타나는 불교적 상징 (0) | 2007.10.18 |
21세기 인문학으로서 불교철학의 가능성과 전망 (0) | 2007.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