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의 다른 종파 비판
이병욱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 강사.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논저에는 〈천태지의 철학사상 연구〉 《천태사상연구》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인도철학사》외 다수가 있다.
"불교학과 불교철학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시오." 언젠가 면접시험에서 받았던 질문이다. 그 때 필자는 "불교학은 범위가 넓고 불교철학은 불교학의 하위단위입니다"고 대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불교학'은 불교철학을 비롯해서 불교역사, 불교문학을 아우르고, 나아가 응용불교학도 포괄하는 큰 개념이다. 그에 비해 '불교철학'은 작은 개념이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듯이 우습게 볼 게 아니라고 본다.
불교철학은 불교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학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서도 '불교철학'에서 '불교'에 강조점을 두는가, '철학'에 비중을 두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본다. '불교'에 강조점을 둔 불교철학은 불교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설명에 주안점을 두는 학문이 될 것이다. 그에 비해 '철학'에 비중을 두는 불교철학은 불교현상과 불교교리에 대해 비판적 안목을 강조하는 학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두 가지 흐름은 서로 방해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체계적 설명도 필요하겠지만,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서 창조적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판이 필요하다. 과거의 설명은 과거의 사회환경에 부합하는 것이었지 현대사회에 맞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과거의 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 때, 현대사회에 알맞은 이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 때 현대사회에 호소력 있는 설명 체계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비판이 아프기는 하지만, 그러한 비판을 수용할 수 있을 때, 불교의 이론은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철학을 함'이 요청될 때도 있다. 그것은 권위와 권위가 서로 부닥칠 때이다. 예를 들어 천태대사 지의(智 , 538597)가 중국의 유식학파인 지론종과 섭론종을 비판할 경우를 보자. 유식학 쪽에 좀 더 비중을 두는 사람이라면 천태의 비판에 기꺼워하지 않을 것이다. 천태종과 유식학파, 이 두 흐름은 이미 이론적 권위가 인정받은 것이다.
서로 부닥치지 않으면 아무 일 없겠지만, 서로 충돌한다면 이제 종교적 권위에 의지한 호소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천태대사의 종교적 권위도 엄청난 것이겠지만, 유식학파의 권위도 그에 못지않은 것이다. 이때는 제 아무리 신심 있는 불교학자라고 해도 자기 스스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때 불교철학의 지평이 열린다. 이 글에서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천태대사가 당시의 주요 대승종파인 지론종, 섭론종, 삼론종 등에 대해서 비판한 것에 대해서 검토하고, 그 비판의 정당성에 대해 따져보고자 한다.
'철밥그릇'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있다. 이는 이미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변화를 구하지 않고 현상에만 안주한다는 비판의 말이다. 발전은 경쟁에서 오는 법이다. 경쟁이 없으면 과거의 찬란한 업적도 소리 소문 없이 점차 녹슬게 된다.
천태종이 활동하던 수나라 시대에도 경쟁하는 종파가 있었고, 천태종은 이 종파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어느 종파만이 독존적 위치에 있다면 변화를 추구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그 순간부터 내부에서는 녹이 슬기 시작한다. 천태종과 경쟁하던 종파는 중국의 중관학파인 '삼론종'과 중국의 유식학파인 '지론종'과 '섭론종'이다.
삼론종은 용수의 저술《중론》과 《십이문론》, 용수의 제자 제바의 저술 《백론》을 근본 논서로 하여 성립된 종파이다. 삼론종의 연원은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또는 350409)에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삼론종을 크게 일으킨 인물은 길장(吉藏, 549623)이다. 삼론종의 가장 특징적인 이론은 '4중이제설(四重二諦說)'이다. '이제'는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로 구분되는 것인데, '속제'는 현상계의 진리나 언어로 표현된 진리를 의미하고, '진제'는 공(空)을 깨닫는 것이고, 이는 언어의 표현을 벗어난 궁극적 경지를 뜻하는 것이다. 4중이제설은 이러한 속제와 진제를 4번 전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속제의 경지를 진제에서 부정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이 부정한 경지도 다시 부정하고, 3단계에서는 이 부정을 부정한 경지도 다시 부정하고, 4단계에서는 앞의 부정을 다시 부정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4중이제설'에서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누가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하자. 그 다음 단계에서는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다시 부정한다. 3단계에서는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한 것을 다시 부정한 것도 또 다시 부정한다. 4단계에서는 앞의 3단계 주장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철저한 부정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삼론종의 주장이다.
지론종(地論宗)은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을 근본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다. 이 종파는 남도파(南道派)와 북도파(北道派)로 구분된다. '남도'와 '북도'라는 명칭은 상주(相州)에서 낙양으로 들어가는 데 두 가지 길이 있기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북도파'는 도총(道寵)에 의해서 일어났고, '남도파'는 혜광(慧光)에 의해서 생겨났다. 혜광의 문하에서 유명한 사람은 법상(法上), 도빙(道憑, 488559)이다. 법상의 제자로서 정영사 혜원(慧遠, 523592)이 있고, 도빙의 제자계열은 화엄종의 2조 지엄으로 맥이 이어진다.
북도파에서는 아려야식(阿黎耶識)이 8식이고, 상응심(相應心)이고, 진여는 불상응심(不相應心)인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남도파에서는 아려야식이 7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천태종의 6조 담연은 남도파에서는 진여에 의미를 두고 있고, 북도파에서는 아려야식에 의미를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섭론종은 진제(眞諦, 499569)가 번역한《섭대승론》을 근본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다. 이 종파에서는 9식설을 주장하는데, 9식(九識)인 아마라식(阿摩羅識)이 청정한 식(識)이라고 한다. 지론종 북도파가 섭론종에 포섭되었다.
크게 구분해서 보자면, 인도의 대승불교에는 2개 학파가 있다. 하나가 중관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유식학파이다.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에서 모두 공(空)을 말하고는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점도 있는 듯이 보인다. 중관학파에서는 모든 것이 공(空)임을 강조하는 데 비해서, 유식학파에서는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阿梨耶識)의 존재를 거론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중관학파에서는 공(空)을 강조하고, 유식학파에서는 유(有)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차이점이 생긴다. 이런 차이점을 어떤 식으로 정리할 것인지가 후대에 대승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의 과제였다.
이런 과제에 대해 천태는 《마하지관》에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친(世親)은 유식학파를 열었고, 용수(龍樹)는 중관학파를 열었다.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에서는 모두 공(空)을 말하고 있으므로, 그 귀착지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표면적인 내용만 다른 듯이 보일 뿐이다. 만약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의 시대정신에 맞추어서, 불교사상이 옷을 바꿔 입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부분만을 붙들고, 한 종파의 우두머리들이 편집되게 이해하고, 그 밑에서 배운 사람은 그 가르침에 구차하게 집착해서 전쟁하듯이 싸운다. 이는 성인(聖人)의 도(道)와 크게 동떨어진 것이다.'
그리고《마하지관》의 다른 곳에서도 중관과 유식의 화해를 말한다. 천태는 보살의 주장을 4문(四門), 곧 유(有)·공(空)·역유역공(亦有亦空)·비유비공(非有非空)으로 정리하고, 그 가운데서 중관과 유식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우선, 유문(有門)에 해당하는 것이 세친의 유식학파이다. 여기서 아리야식(阿梨耶識)은 세제에 포함되고, 진여(眞如)는 아리야식과 따로 존재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진여의 존재를 말하고 있으므로 유문(有門)에 속한다. 그리고 아리야식 이론이 유식학파의 주요 논점이고, 나머지는 주요 논점을 보완하는 기능만을 할 뿐이다. 그리고 공문(空門)에 속하는 것이 용수의 중관학파이다. 용수의《중론》에서는 모든 것이 필경에는 다 공(空)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공문'에 속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주장이 다르지만, 진리를 자각한다면 모두 다르지 않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보살들이 일문(一門)만을 치우쳐 편다. 세친은 말하길 "아리야식(阿梨耶識)은 세제(世諦)요, 진여(眞如)는 아리야식과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한다. 이 주장이 논(論)의 주요점이다. 그리고 선정과 도 닦음을 돕는 수행은, 모두 옆에서 논(論)의 주요점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중론》에서는 필경공(畢竟空)을 주장하니, 공(空)이 주요점이고, 나머지는 조도(助道)일 뿐이다. 나머지 문에서도, 보살들이 논(論)을 지어 자기 주장을 폈을 것이다.〔이와 같이〕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어찌 4문(四門)을 벗어나겠는가? 그리고 각각의 문(門)마다 다름이 있지만, 진리를 깨치고 보면 다르지 않다. 만약 이러한 뜻을 이해한다면, 어찌 서로 싸워서 고통스럽게 모순을 일으키겠는가?
천태는 중관과 유식의 조화를 말하면서도 중국의 중관학파 '삼론종'과 중국의 유식학파 '지론종'과 '섭론종'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의 주요 근거는 용수의 《중론》에 나온 4구(四句)이고, 비판을 한 뒤에 4실단(四悉檀)에 근거해서 다시 수용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의 잘못을 비판한다고 하자. 남이라면 아주 철저하게 잘못을 꼬집을 수 있겠지만, 가까운 사이라면 상대방의 약점을 지적하고서도 결국에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감싸 안아 주는 경향이 강하다.
이처럼, 천태도 '4구'로 비판을 하고, '4실단'으로 다시 포용한다. 여기서 '4구'는《중론》에서 사용되는 것인데, 이는 어떠한 존재도 형이상학적 실체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하기 위해서 제시된 것이다. '4실단'은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방편을 베풀어서 진리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비판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인도의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인정해주면서도, 중국의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에 대해선 곱지 못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비판의 시선은 어디까지 정당한 것인가? 그 구체적 내용을 검토해 본다.
먼저, 천태는《유마경현소》에서 '중도제일의관'을 말하면서 '지론종'과 '섭론종'과 '삼론종 '등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열반의 경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보자면 지론종, 섭론종, 삼론종의 주장은 어느 한 쪽에만 집착한 고정된 것이다. 이때에는 이들의 주장을 4구로 깨뜨린다. 그러나 4실단이 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를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해서 전달한다. 이 경우에는 앞에서 비판한 지론종·섭론종·삼론종의 주장도 모두 다 중생을 이롭게 하고, 불법(佛法)을 빛낼 수 있는 훌륭한 가르침이 된다.'
이렇게 논의를 전개하면, 결국 4구로 깨뜨리고 4실단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나아가 천태는 중도제일의관의 내용을 공삼매(空三昧)로 풀이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지론종'과 '섭론종'에 대해 비판을 시도한다. 천태는 지론종의 주장을 진여법성(眞如法性)이 모든 존재를 생기게 한다고 정리하고, 섭론종의 주장을 아려야식이 모든 존재를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간추린다. 그러고 나서 모든 존재가 공(空)이므로, 이 두 종파의 견해가 한 쪽에 치우쳤다고 지적한다.
원래 공(空)은 어떤 형이상학적 주장도 부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불생(不生)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불생'은 어떠한 형이상학적 실체에 의해서도 이 세상은 성립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형이상학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론종과 섭론종은 공(空)을 주장한다고 하면서도, 진여법성에 의해서 또는 아려야식에 의해서, 모든 존재가 생긴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천태의 입장에서 보면, 공(空)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중관학파의 대표적 논서《중론》의 공(空)의 관점에서 보면 어떠한 형이상학적 주장도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데 비해서, 유식학파에서는 공(空)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세계관을 세우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이러한 대목에 대해『중론』의 공(空)의 관점에서 비판한 것이 천태의 주장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유마경현소》에서 나온 것이지만,《마하지관》에서도 '지론종'과 '섭론종'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는 천태는 지론종의 견해를 마음이 일체법을 갖추었다고 정리하고, 섭론종의 견해를 연(緣: 마음 이외의 대상)이 일체법을 갖추었다고 간추린다. 그런 다음, 천태는 법성이 마음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는 것에 착안해서, 마음이 일체법을 갖추었다는 지론종과 연(緣)이 일체법을 갖추었다는 섭론종을 비판한다. 이것이 비판의 큰 줄거리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싸움구경은 재미있는 법이다. 천태의 비판에 대해 '지론종' 쪽에서 반론하기를 "법성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일체법을 생기게 할 수 있다"라고 한다. 이는 법성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 위에 서서 마음이 일체법을 생기게 함을 감독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천태는 지론종의 반대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비판한다. 가장 얄미운 반론이다. 상대방의 주장대로 해도 그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꼬집고 있다. 천태는 다시 반론하기를 "그렇다면 법성은 연(緣)도 아니므로, 연(緣)이 일체법을 생기게 해야 한다"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지론종의 반론대로, 법성이 마음이 아니어서, 마음 위에 위치해서 마음이 일체법을 생기게 함을 감독한다면, 그렇다면 또한 법성은 연(緣)도 아니니, 법성은 연(緣) 위에 서서, 연(緣)이 일체법을 생기게 함을 감독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천태의 이 주장에 대해 지론종에서 수긍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이상의 내용은 《마하지관》에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 다음, 천태는 섭론종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비판을 시도한다. 섭론종의 주장대로 제9식인 '아마라식'에서 일체법이 생기지 않고, 제8식인 '아려야식'에서 일체법이 생겼다고 한다면, 아려야식과 아마라식의 관계는 어떠한가? 아려야식에서 일체법이 생겼다고 한다면, 아려야식과 아마라식은 서로 떨어져서 완전히 별개의 존재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아마라식과 아려야식은 서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섭론종에서 말하는 망식(妄識)인 아려야식에서 일체법이 생겼다는 주장은 틀렸다.
비유를 들면, 국회의원이 비리를 저질렀는데, 그 잘못을 그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전부 덮어쓰는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엄청난 돈을 뇌물로 받았는데, 그 보좌관이 단독으로 받았다고 그 누가 보겠는가? 그 돈을 건네준 사람은 그 국회의원을 보고 준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보좌관은 '아려야식'을 비유한 것이고, 국회의원은 '아마라식'을 묘사한 것이다.
다시 《유마경현소》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천태는 '지론종'과 '삼론종'을 비판한다. 지론종에서는 인간과 생명체에게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곧 본유불성(本有佛性)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현실의 인간을 보면 과연 저 사람이 부처가 될 만한 인물인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어두운 방에 있는 물건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고 부정할 수 없듯이, 저 사람의 행실이 현실적으로 좋지 못한 것이고, 부처의 싹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부처가 될 가능성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 지론종의 주장이다. 그에 비해, 삼론종에서는 공(空)을 주장해서 본유불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 주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우유가 응고하면 타락이 되는데, 현재의 우유에는 타락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유에는 타락의 성분이 없다고 비판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주장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태는 지론종의 주장은 유(有)에 치우쳤고, 삼론종의 주장은 무(無)에 치우쳤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천태는 지론종의 '남도파'와 '북도파'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우선, 진여실상(眞如實相)은 4구에 의해서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 4구는 연수(緣修), 진수(眞修), 연수와 진수를 합한 것, 연수와 진수에 상관없는 것이다. 연수(緣修)는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켜서 수행함이요, 진수(眞修)는 새삼스레 의지를 일으킬 것도 없이 이미 자연히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다. 천태는 진수가 되었든 연수가 되었든 간에 집착하게 되면,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진수'와 '연수'의 의미를 비유를 통해 다시 알아보자. 남북통일의 대세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이대로 그 기세를 밀고 나가면 된다고 주장한다면 '진수'에 비유할 수 있고, 남북통일에 앞으로 많은 장애가 남아 있으므로 그 때 그 때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라면 이는 '연수'에 빗댈 수 있다. 이 입장에서 천태는 지론종의 남도파(南道派)와 북도파(北道派)를 비판한다. 천태에 따르면, 지론종의 '남도파'와 '북도파'의 차이점은 '연수'와 '진수'에 있다. 남도파에서는 '진수'를 통해서 부처가 된다고 하고, 북도파에서는 '연수'를 통해서 부처가 된다고 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도파에서는 진여를 강조하고 아려야식(阿黎耶識)은 생사의 근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이는 새삼스럽게 의지를 일으킬 필요 없이 자연히 이치에 부합하는 수행을 하는 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진여를 강조하면 그 진여를 활용하면 될 것이기 때문에 수행에서도 이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될 것이다. 이는 유학에서 성선설을 주장하면 특별히 예(禮)를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그에 비해, 북도파에서는 진여를 불상응심(不相應心)으로 보고 있으므로, 수행은 상응심(相應心)인 아려야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켜서 수행하는 쪽으로 연결된다. 북도파에서는 아려야식을 강조하고 있고 이 아려야식에는 진실된 부분[眞]과 망령된 부분[妄]이 섞여 있으므로 망령된 부분을 제거해 나갈 필요가 있다. 마치 유학에서 성악설을 주장하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 예(禮)에 비중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 천태의 본래 의도는 무엇인가? '여래는 많은 말을 하였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은 셈이 된다. 이와는 달리 중생들은 성인(聖人)들이 4실단(四悉檀) 방편으로 제시한 것에 집착해서,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진수니 연수니 하는 논쟁도 4실단 방편으로 제시된 것을 잘못 알아 집착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천태의 의도는 진수니 연수니 하는 논쟁은 4실단 방편을 잘못 알아 집착하는 것이니, 이 무익한 논쟁에서 벗어나라는 것에 있다.' 구체적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지론종의 남도파와 북도파는 진수로 성불(成佛)한다, 연수로 성불한다라고 집착함이 같지 않다. 그러니 어찌 자생견(自生見)과 타생견(他生見)의 허물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여래가 항상 법(法)을 말하지 않았음을 안다면, 어찌 진수로 성불한다, 연수로 성불한다라고 말하면서 논쟁하겠는가? 모든 경(經)과 논(論)에서 진수로 성불한다, 연수로 성불한다는 말이 있음은 단지 성인(聖人)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용수(龍樹)와 천친(天親)이 제 각각 말한 것이 있겠는가?
용수와 천친 같은 법신보살(法身菩薩)은, 4실단으로 인연 있는 중생에 다가가서 그들을 구제한다. 그런데 모두 다 말법시대에 법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 뜻은 놓치고, 글자에만 집착해서 한 쪽만을 주장했을 따름이다. 이런 내용을 안다면, 다른 종파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질문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요즘 정당 간에 서로를 비판하는 것을 보면 쓴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자신이 속한 정당에서 주장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거의 같은 내용인데도 다른 정당의 주장이라면 그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차이점을 내세워서 깎아 내리고자 한다. 이런 점은 불교의 종파 간 비판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이 속한 종파의 주장은 애써 이해하려는 모습을 취하지만, 자신과 경쟁하는 종파의 주장은 이해하기보다는 차이점만을 부각해서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천태가 지론종, 섭론종, 삼론종을 비판한 것이 과연 정당한 주장인가? 물론 천태는 4구로 비판을 하고 다시 4실단을 통해서 받아들였으므로 비판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천태가 비판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천태의 지론종, 섭론종, 삼론종의 비판은 자신의 관점에 갇힌 것이지, 결코 공정한 안목에서 행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론종 남도파 계열의 정영사 헤원과 삼론종을 크게 일으킨 길장도 천태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인 공(空)·가(假)·중(中)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큰 줄기에서 공통점이 존재하는데도 차이점만을 부각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세간의 속설과 유사하다.
길장은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을 말하고 있는데, 그 대목에서 공·가·중의 관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제합명중도는 세제중도(世諦中道)와 진제중도(眞諦中道)를 합쳐서 중도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세제중도'는 임시의 있음[假有]을 중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인데, '임시의 있음'은 결정코 있음[定有]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임시의 있음'은 존재하는 것이므로 완전히 없음[定無]도 아니다. 이것이 세제중도의 의미이다. '진제중도'는 임시의 없음[假無]을 중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인데, '임시의 없음'은 결정코 없음[定無]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임시의 없음'이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것이 진제중도의 의미이다. 이러한 이제합명중도를 밝히는 데 3가지 길이 있고, 그 3가지는 각각 공·가·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삼론종의 '이제합명중도'와 천태종의 '일심삼관'은 만나게 된다.
정영사 혜원은《유마경의기》에서 진여법(眞如法)이 공(空)·유(有)·비유비무(非有非無)의 세 측면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진여법은 모습과 성품을 벗어났기 때문에 공(空)이고, 진여법은 모든 불법(佛法)을 갖추었기 때문에 불공(不空) 곧 유(有)이고, 진여법은 유(有)와 무(無)가 한 몸이기 때문에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이는 천태의 일심삼관인 공·가·중(中)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보자면, 천태의 비판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이지, 결코 공정한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삼론종의 길장이나 지론종의 남도파 정영사 혜원도 천태종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을 때, 불교이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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