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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챙겨야 할 '욕망'이라는 화두

slowdream 2007. 10. 26. 02:37
 

다시 챙겨야 할 '욕망'이라는 화두


조성택

(본지 주간 ㆍ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석사 : 인도철학), 미국 UC버클리대학원 졸업(박사 : 불교학), 전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현대불교학의 합리주의적 경향」「무아 : 불교의 정의관을 향하여」 등 논문 다수.



욕망은 ‘근대적 인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고대 종교에서 바라본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헤브라이즘적 수사이다.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의 욕망과 그 결과는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문제의식이 되었다. 한편, 보리수 아래서 수행자 고타마가 넘어야했던 마지막 관문 또한 욕망의 문제였다. 마라(Mara)의 유혹으로 상징되는 욕망을 제압(?)하고서야 고타마는 비로소 ‘깨달은 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십이연기도 결국 욕망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대한 통찰 이다. 그로부터의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또한 고통의 근원이 욕망에 있다는 자각과, 그 욕망의 소멸을 위한 수행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다.


욕망을 넘어선 지점에서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강조하느냐, 욕망에 넘어간 실낙원의 현실에서 인간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느냐의 차이만큼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와 역사는 크게 다르고, 그 욕망을 ‘악’(evil)의 문제로 실체화 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심리적 경향’의 문제로 보느냐의 차이는 간과할 수 없이 큰 것은 분명하지만 욕망을 인간의 근원적 문제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기반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깨달음=욕망의 소멸’이라고 하는 등식은 초기불교의 근본적 테제였다. 초기불교의 모든 교리가 수행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적 주제일 수 있는 무아론이나, 삼계설(三界說)과 같은 유사(類似) 우주론조차도 욕망의 발생과 소멸이라고 하는 근본테제의 실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열반에 이르는 것은 곧 욕망의 소멸을 의미했다. 아라한은 욕망의 소멸을 현실에서 구현한 초기불교의 종교적 이상(理想)이었다. 불교 상가는 욕망의 소멸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출가자들의 수행공동체였다. 상가라는 제도를 통해 수행자들은 탁발이라고 하는 최소한의 생존활동 이외에는 노동과 같은 일체의 생산 활동이나 경제 행위로부터 면제되는 ‘특권’을 누렸다. 나머지 모든 노력과 행위는 전적으로 욕망의 소멸을 향한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깨달음=욕망의 소멸’이라는 초기불교의 근본테제는 대승불교의 등장으로 다소 해석학적인 변화를 겪게 되지만 여전히 욕망은 핵심적인 문제로 남는다. 대승불교의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욕망의 소멸’을 통한 깨달음의 획득이라는 초기불교의 수행론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욕망을 실체화하는 것이며 이는 비불교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의 소멸이 아니라 욕망의 비실체성을 체득하는 반야의 획득이 곧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꿰뚫는 반야의 지혜를 강조한다고 해서 욕망을 깨달음의 근원적인 장애로 보는 불교 본래 입장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욕망을 소멸해야 할 것으로 보았든 아니면 욕망의 비실체성을 체득하는 것이든 욕망은 여전히 불교 수행론의 근본문제였다.


인도 북부 갠지스강 유역에서 기원한 붓다의 가르침은 불멸 후 남쪽으로는 스리랑카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남전 불교의 경우 비교적 비슷한 문화권으로의 이동이었고 전파 과정에서 특별히 이질적인 문화와의 조우가 없었기 때문에 초기 불교 본래의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전의 경우 당시 국제적 교류의 중심이었던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의 종교문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동아시아 한문문화권에서 불교는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불상(佛像)의 등장과 같은 불교 의례와 신앙 형태상의 변화는 물론이고, 경전의 번역, 주석, 새로운 해석학적 노력 등을 통해 인도에서 발생한 ‘석존의 불교’는 ‘동아시아 불교’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당 이후의 선불교가 결정판이라 할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새롭다’ 할 만큼 혁명적 변화 속에서도 불교 본래의 전통이 유지되었던 것은 출가 제도였다.


많은 불교의 교리가 ‘동아시아적’으로 새롭게 이해되고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출가 제도는 지켜졌다. 출가의 사회적 의미라든지 불교 사원의 사회경제학적 위치라든지, 혹은 출가의 종교적 동기, 출가자의 사회적 지위 등등 많은 내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출가제도 그 자체는 불교적 고유 정체성으로 동아시아 전통 속에 정착되었다. 물론 종파에 따라 출가제도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여전히 출가제도는 동아시아 불교의 주류적 흐름을 형성했다.


깨달음을 위해서 반드시 출가를 해야 한다는 교리적 정당성은 대승불교에서는 물론 남방 상좌부 전통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출가제도는 발생 당시부터 불교 고유의 종교적 자기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왔다. 오랜 불교사를 통해 전개되어온 다양한 불교 전통은 깨달음과 욕망, 그리고 그 양자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인식론적, 수행론적 교리를 발전시켜왔다.


여러 전통의 다양한 교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출가제도를 유지해온 것은 석존의 가르침 이래 그것이 불교의 근본 테제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욕망의 완전한 소멸’을 지향하든 혹은 ‘욕망의 비실체성’에 대한 반야적 지혜의 획득을 지향하든 욕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제도라는 전통적이며 암묵적인 집단의식이 있어왔기 때문에 재가와 출가의 구분이 최소화되는 대승 불교의 보살사상에서 조차도 출가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없었다.


일상 속에서의 깨달음, 나아가 재가자의 깨달음의 가능성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있는 선불교가 실제에 있어서는 어떤 다른 불교 전통에서보다 더 출가중심주의적 경향을 역사적으로 보여 왔다.


앞서 언급한대로 출가가 가장 유효한 수행의 방식이라고 하는 불교 전통 내에서의 일반적 합의는 욕망을 인간의 근본 문제로 보고 있는 석존의 가르침에 기반하고 있다. ‘욕망’의 관점에서 볼 때 출가는 일단 욕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욕망은 ‘성적(性的) 욕망’ 과 같이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출가는 일단 경제적, 정치적 동기와 같은 사회적 측면의 욕망을 전적으로 배제 혹은, 적어도 최소화 할 수 있는 여건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또 사회 현상적으로 출가자 집단 내에서, 금전이나 지위 상승 등과 같은 사회적 욕망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엄격하게 말해 출가 본래의 정신을 망각한 출가 윤리의 문제이지 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규범적 차원에서 볼 때 출가제도는 일체의 사회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제도이다.


한편 욕망의 문제와 관련할 때 출가와 재가가 나누어지는 일차적이며 가장 중요한 점은 ‘성적 욕망’에 관해서이다. 재가에게 정당한 범위 내에서의 일정한 자유가 주어지고 있는 반면 출가자에게 성적 욕망은 철저한 금기이다. 수행 일반론으로 볼 때 재가와 출가의 구분은 실천의 엄격성과 철저함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수행의 목표에 있어서도, 대승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그 시기의 빠르고 늦음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 적어도 이론적 차원에서는 그러하다.


하지만 성적 욕망과 관련하여 출가자의 ‘不淫’과 재가자의 ‘不邪淫’의 차이는 ‘邪’ 한 글자 이상의 차이가 있다. 재가자의 ‘불사음’은 굳이 불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의 세속 윤리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 통념적 규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바이지만 아예 성적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하는(혹은 억압하는) ‘불음’의 규범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성적 욕망에 관한 이해도와 관용의 정도는 문화적으로 시대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적 욕망이 식욕 등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인간의 기본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삶의 추동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출가자들의 ‘불음’은 단순히 윤리적 삶을 위한 자발적 ‘금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종교 심리학적 측면에서 그리고 종교 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출가자의 ‘불음’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불교뿐 아니라 출가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종교들에 있어서도 ‘불음’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한 욕망을 자발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이상적 인격에 도달하고자 하는 출가자 개인의 결단이기도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출가자의 도덕적 권위와 종교적 카리스마의 원천이며, 더 나아가 ‘聖’과 ‘俗’을 구분 짓는 종교적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에 대한 재가자들의 존경과 신뢰, 그리고 경제적 지원은 성적 욕망의 자발적 포기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보답이며 보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그리고 한국의 경우 근자에 이르러 특히, 출가자(혹은 가톨릭의 경우, 성직자)의 ‘불음’의 윤리적 의미와 종교적 상징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사회 여러 부문에서 제기되고 있다. 성직자의 애초에 불가능한(?) ‘불음’을 소재로 하여 종교적 위선과 추한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는 특히 문학과 영화 예술의 단골 소재가 되어 왔다.


물론 이러한 시도의 이면에는 진정한 인간의 추구라는 예술의 고전적 주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진정한, 제대로 된 인간이 되고자 스스로 선택한 ‘불음’이 이제 ‘위선’이 되고 ‘추한 인간의 다른 면’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타당한 것이지 아닌지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근대 이후의 인간관, 그리고 ‘세속화’로 일컬어지는 근대 이후의 문명의 변화와 그에 따른 종교 환경의 변화가 문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전통 사회와 비교할 때 근대의 인간관의 한 특징은 ‘욕망하는 인간’의 긍정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욕망은 더 이상 금기시되거나 죄악시 되지 않는다. 욕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자기 표출로 이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적 ‘불음’은 인간성에 대한 제도적 억압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가 인간의 이기적 본능을 긍정하고 그 바탕위에 정치적 경제적 질서가 제도화 되고 있는 것처럼 성적 욕망 또한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억압할 수 없는, 아니 억압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자연스런 생명 현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긍정의 근대적 인간관은 세속사회에만 그 영향력이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출가자들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러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출가자와 재가자의 물리적 거리가 거의 없어진 지금, 사회의 어떤 집단도 시대적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불음’의 출가 윤리가 더 이상 수행자 스스로의 ‘결단’이 아니라 ‘부자연스런 짐’일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근대 사회의 한 특징인 종교의 ‘세속화’ 현상 또한 이러한 문제를 더 가속화하고 있다. ‘세속화’는 종교의 세속 사회와의 밀접한 관련이나 참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세속화’ 현상은 종교적 가치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를 의미하며 성(聖)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적 상징에 대한 세속적 이해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초세속적 가치와 윤리의 상징이었던 출가자의 ‘불음’은 이제 세속적인 ‘의문사항’ 혹은 종교와 제도의 ‘억압’ 정도로 여기게끔 된 것이다.


근대 혹은 탈근대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종교 환경하에서 불교의 오랜 전통인 출가제도 그리고 그 출가제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불음’의 계율은 이제 기로에 서 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종교의 세속화 현상이나, 종교 환경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출가자로서의 윤리적 도덕적 근기나 자긍심이 낮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계율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국 불교계의 수행 풍토와 관련이 있다.


물론 그러한 수행 풍토가 전반적인 한국 불교의 수행 모습은 결코 아니지만, 분명히 계율을 수행의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는 그런 흐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계율에 관한 한국 불교의 ‘느슨한’ 입장은 거슬러 가면 계율을 방편 정도로 생각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최상의 계로 여기는 선종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원효나 경허의 파계에 관해서도 그것을 문제 삼거나 비난하기보다 깨달음의 어떤 경지를 실증하는 것으로 여기는 관점이 근대 이후 한국 불교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계율에 관한 이러한 한국 불교의 한 수행풍토가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 그리고 욕망 긍정의 시대적 흐름과 어울려 ‘불음’의 문제는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현안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불교의 미래와도 직결되어있다. 과연 출가제도는 미래 사회에도 유지될 것인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지되어야 하는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욕망 긍정의 근대적 시대정신이 일정하게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폐해 또한 적지 않다. 최근의 많은 문제들은 결국 근대적 인간들의 욕망 추구에서 빚어진 것이고, ‘본능’이란 미명하에 욕망 긍정이 지나쳐 욕망의 과잉이 문제가 되고 있다.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고자 하는 출가 본래의 정신이 석존의 시대보다 더 절실한 것이 지금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출가자들의 ‘불음’의 윤리는 당연히 지켜야 하고 더욱 더 철저한 실천을 통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는 출가자 본래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견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랜 불교사가 보여주고 있듯이 불교는 오랜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종교 환경에 적응하면서 부단히 적응 변화해왔다. 이제 새로운 시대 환경과 욕망 긍정의 근대적 인간관을 수용하여 출가제도나 ‘불음’과 같은 전통적인 제도나 계율이 더 이상 새로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자각으로 새로운 불교 현대화를 꾀해야 한다는 의견도 충분히 정당하며 옳을 수 있다.


이론적 차원에서 불교의 상가는 출가와 재가를 다 포함하는 사부대중이 구성원이라고는 하지만 출가제도나 그와 관련한 ‘불음’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직접 ‘이해 당사자’인 출가 공동체 내부의 문제이다. 바깥에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더 이상 불교계의 ‘뜨거운 감자’로 치부하여 미루어 두거나 논의 자체를 외면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감히 거론하는 것이다.


지키지 않아도 좋을 제도나 계율이라면 구성원 내부의 논의와 합의를 거쳐 폐기하든가 수정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지켜야 할 계율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불교와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출가 공동체 내부의 진지한 논의를 통한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2005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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