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불교의 돈점논쟁
서명원
<서강대 교수>
서강대 교수.프랑스 사제로서 한국의 불교를 연구하고 있다. 본명은 베르나르 서네칼. 파리 7대학에서 2004년 ‘성철스님의 생애와 전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처음 한국을 방문해 ‘한국적인 것’에 매료되어 1995년 이후 한국에 살고 있다.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외국인으로서 한국불교의 돈점(頓漸)논쟁을 연구하며 다룰수록 그 중요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보조지눌(1158~1210)의 돈오점수론(頓悟漸修論)에 대한 퇴옹성철(1912~1993)의 철저한 비판은 한국불교에서 일반적이었던 사고방식에 극단적으로 도전을 가한다. 즉 성철의 비타협적이며 무조건적인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은, 원효(617~686)나 지눌의 저서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교리적 차이를 넘어 조화를 선호하며 구현하려는 회통적(會通的) 통불교(通佛敎)의 이상과는 양립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필자는 화두의 의심 덩어리 같은 이 논쟁을 이해하고자 아낌없는 노력을 해오는 가운데, 거기에서부터 배워 얻은 바가 대단히 크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조만간 이 돈점논쟁과 반드시 대면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또한 이 돈점논쟁은 다른 나라에서와는 다른 것으로서 한국불교만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일컬을 수 있으며, 이 논쟁은 한국불교를 사상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 만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한국의 돈점논쟁을 잘 이해하려는 사람은 어느 정도 복잡한 공식에 맞닥뜨려야 할 것이다. 즉, 철저한 수행자들이었던 지눌과 성철의 고유한 사상적 근거가 되는 통찰의 핵심들을 각각 정확히 터득해야만 하고, 나아가 그 복잡한 공식을 풀이하는데 소위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맥락(context), 전통(text), 해석(interpretation)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지눌이나 성철 모두가 불교적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어떻게 자기가 태어난 역사적 맥락 안에서 각각 시대에 알맞게 그 전통을 해석했는지를 파악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참다운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공시적(synchronic) 시간관을 통해 전통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연역적 사고와, 통시적(diach- ronic) 시간관을 통해 자기의 시대적 상황 안에서 전통을 재해석하는 귀납적 사고가 둘 다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균형잡힌 자세가 요구된다.
여기에 반드시 첨가시켜야 할 요소는 돈점논쟁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현재 입장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지눌과 성철의 통찰 내용뿐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오늘날 자기의 입장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밝히는 바, 이 중요한 요소를 연구에 필히 포함시켜야만 한다. 그 이유는 돈점논쟁에 관한 이 작업이 단순히 흥미로운 이론적 탐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본적 의미와 직결되는 지극히 실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이 연구는 시종여일(始終如一) ‘나는 어떻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결정적인 자기탐색 및 수행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돈점논쟁이 생존과 관계된 근원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사에 완전히 열린 해석학적 순환의 논리에서 본다면, 이는 해석자가 속한 시대에 따라 다르게 새로운 해석이 나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획일적인 이론적 정답은 있을 수 없고, 나아가 해석자의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넘은 그 이상의 답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정답이라고 단언하기 힘든 이 돈점논쟁 앞에서 진리를 탐구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넘어가지는 말아야 된다. 왜냐하면 참다운 해석을 하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얻게 되는 진리야말로 가장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고정시키지 않고 언제나 더욱 역동적으로 탐구함으로써 그 뜻을 심화하려는 수행자의 모습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머무름이 없음(無住)’에 가장 충실한 자세로 남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종교 간 대화의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현대사회 안에서,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을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여러 종교들에 걸친 방대한 연구를 시도하기보다는, 단지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에서 주요내용을 이루는 돈오돈수 및 돈오점수 개념을 그리스도교에서 가능한 한 이에 해당되는 개념과 대비시켜 보고자 할 뿐이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로 진행시켜 보겠다.
① 퇴옹성철의 돈오돈수 사상이 지닌 특성을 여러 각도로 살펴봄. 즉, 성철에 대한 여러 비판들을 재고해보고, 그의 해석학적 순환 문제를 살펴본 다음, 성철에 관한 바른 이해를 위한 견해들을 밝힘.
② 그리스도교의 근거가 되는 《신약성서》 안에서 돈오돈수 및 돈오점수에 해당될 수 있는 유사한 기본 개념이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함. 그리고 만일 그 개념들이 있다면, 그 개념들이 《신약성서》 안에서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탐구함.
③ 그 결과를 통하여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을 조명함.
위의 방법론을 적용시키면서, 그리스도교를 불교의 개념으로 혹은 반대로 불교를 그리스도교의 개념으로 환원(reduce)시켜 놓으려는 의도는 필자에게 전혀 없다. 또 어떤 가치 판단에 근거하여 불교나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가리거나 그 두 종교를 뛰어넘는 신흥종교를 새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겠다. 다만 양쪽 종교에서 유사한 개념의 대비적 관찰을 통하여 상호 조명하는 가운데, 각 종교의 전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려 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차이점과 최소한의 공통점을 알아내고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그 점들을 살려 내야만 실제적으로 보람 있는 대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결코 동일시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두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대립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필자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아주 가까운 면이 있으면서도 아주 다르다고 본다. 흔히 연구자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전자 또는 후자를 강조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양쪽을 고수해야만 그 연구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 본 논고가 지향하는 바와 똑같은 목적으로 연구된 내용은 아직까지 그 선례가 없다. 그럼에도 반드시 이런 연구를 해야만 하리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어느 종교든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류 종교사에서 볼 때,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지니는 선교적 특성으로 인하여, 가는 곳마다 그 문화에 주고받은 영향이 컸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불자와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인구 전체의 대략 25% 씩을 각각 차지하는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이 한국은 불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가 가장 많이 이루어질 수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현실적으로는 그 대화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기에 본 논고는 한국의 간화선이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양사회에 장차 더 뿌리내리기를 희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관심 영역이 되리라고 본다.
2. 퇴옹 성철 의 돈오돈수 사상의 특성
1) 성철에 대한 비판 재고
필자는 <성철의 생애 및 전서>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성철에 대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신랄한 비판을 국내 도처에서 계속 들어야 했다. 학자들은 물론 때로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돈오돈수 사상이 도대체 실제 삶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혹독한 질문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 몇은 성철의 열반송을 인용하면서, 입적하기에 앞서 성철은 자신이 저질렀던 사상적 오류를 스스로 고백했다는 주장까지도 밀고 나갔다. 필자가 박사 과정을 마치고 2004년 가을 학기부터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학원생들에게 한국불교에 관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성철에 대한 더욱 크고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직접 보고 들어야 할 때가 많았다.
예외적으로 퇴옹성철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조계종 스님 한 분은 세미나 토론 시간에 다른 학생들의 계속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한 학기를 내내 보내다시피 했다. 막상 보니 성철의 돈오돈수 사상을 완전히 배격해야만 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정도의 분위기였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퇴옹성철의 돈오돈수 사상의 의의에 대한 객관적 토론을 진행시키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끔씩 한국의 돈점논쟁에 있어서 조심스럽게 처신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런 경우들이 비교적 많지는 않았다.
필자는 성철에 대한 그 모든 비판들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다 귀담아 들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분에 대하여 친밀감이 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성철 사상의 참다운 특성이 무엇인지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필자는 또한 종달(1905-1990) 노사를 통해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波)의 법맥(法脈)을 잇고 있는 한국선도회에서 약 10여 년 전부터 법경(法境) 거사의 지도하에 꾸준한 참선 수행을 해 왔다. 그러는 동안에, 성철의 돈오돈수가 한국선도회에서 주창하는 사상의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는 필자에게 한결 같이 큰 힘이 되어 왔음에 틀림이 없다.
성철이 많은 비판과 반박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사상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상을 전달하는 그의 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쉽게 말해서, 그 내용보다는 포장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바로 전자가 문제되기 때문에 후자도 그렇다.’는 식으로 다른 견해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고에서는 성철의 사상에서 문제시될만한 모든 점들을 일일이 다 언급하기보다는,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만을 골라 두드러지게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대저 사람들이 자기가 숭상하는 스승의 약점을 듣기 싫어하고, 또 어쩔 수없이 듣게 된다면 보통은 크게 실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승에 대한 참다운 존경이란 스승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궁극적인 위대함을 믿는 제자의 직관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본다.
2) 성철의 해석학적 순환
지눌에 비하여 성철은 해석학적 순환에 있어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적극적으로 찾기보다는, 늘 변형과 양립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전통만을 주로 강조할 따름이다. 이는 성철의 고도의 연역적인 사고구조와 압도적인 공시적 시간관을 잘 드러낸다. 그 때문에 그에게 통시적(diachronic)인 면과 귀납적인 면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비례적으로 볼 때 이 면들이 상당히 미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역사적 원근감(historical perspective)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하여, 자신의 돈오돈수 사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점차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한 사건들의 시간적 전개를 고려하거나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두드러진 예로서, 그는 《백일법문》에서 천태종 교학을 길고 면밀하게 소개하고자 하면서도, 그 묘한 돈점의 회통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돈적(頓的)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성철은 시대에 대한 시간적 착오를 여기저기에서 비일비재하게 저지르고 있다. 예컨대 아무런 문제없이 천태지의(538-597)의 원돈지관이나 육조혜능(638-713)의 가르침을 이보다 훨씬 후대인 송대의 원오극근(1063-1135)과 대혜종고(1089-1163)의 간화선 수행과 거의 동일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철은 자신의 사고방식과 시간관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기에, 진리에 대한 정의란 역사적 제약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최소한 인정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자면 그가 중도사상의 독창성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 사상을 평지돌출(平地突出)한 것에 비유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즉 그 사상이 태어난 역사적 배경을 그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또한 성철의 전서(全書)에서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화엄교학과 선의 조화를 이루어야 했던 지눌의 시대적 입장을 깊이 객관적으로 다룬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지눌뿐 아니라 다른 어느 고승이나 조사들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가 역사적 맥락을 경시하거나 또는 완전히 무시하면서 필요한 내용만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발췌하는 경향이 두루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성철이 축적하여 제공하고 있는 바, 돈오돈수에 대한 수많은 경증(經證)들은 설득력이 약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성철의 진리관이 매우 이상적이며 고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성철은 극도로 절대적인 자신의 진리관이 지니는 상대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결국 진리에 대한 성철의 이해가 연역적이며 동시에 공시적인 만큼 그는 타인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만의 독특하고 절대적인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성철의 세계 안에 들어가려면 완전히 그와 똑같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문제들 때문에 흔히 성철을 두고 ‘물거품 속의 인물, 과거의 인물, 이제는 묻어도 되는 인물’이라는 등의 신랄한 비판들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그의 약점들을 계속 되풀이해서 지적하기보다는, 그의 주요작품 안에서 핵심적 기표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며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의 사상의 의의를 찾는데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달리 말하여, 그의 여러 약점들의 구정물을 다 버리고 나서, 성철의 돈오돈수 사상의 궁극적 구성원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3. 성철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성철과 지눌의 공통점과 차이점 몇 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살았던 각 시대를 비교하여 보면, 거기에 두드러진 유사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외세의 침입, 군인들의 쿠데타, 불교의 생명을 위협하는 승가의 심한 타락, 치열한 경쟁과 피할 수 없는 분열이다. 그런데 그 이외의 나머지 모든 점들은 다 다르다. 두 사람의 초상화나 사진만을 보더라도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성격적 특성이 다르다는 것을 곧 짐작할 수 있다.
지눌의 얼굴 표정은 온정과 친절을 풍기는 반면에, 성철의 안광은 한결 같고 형언할 수 없는 강경한 뱃심을 나타낸다. 지눌의 호인 ‘목우자(牧牛子)’와 성철의 별명인 ‘가야산의 호랑이’를 비교하면 그 성격적 차이가 즉시 확인된다. 또한 두 선사의 저서들에서 풍기고 있는 분위기도 대단히 상반된다. 즉, 지눌의 저서에서는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상을 밝히려는 사변적 정신(speculative mind)이 보이는가 하면, 성철의 저서에서는 시종여일 지나치게 독단적이며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기에 대체적으로 성철은 지눌에 비해서 학자들에게 매력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의 여러 차이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들이 각각 밟아 나간 신비적 여정(mystical itinerary)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출가한지 삼년 만에 혹독하고 순수한 간화선을 통해서 29살에 단박에 깨쳤던 성철에 비해서, 지눌은 경전을 접하며 세 번에 걸쳐 점차적인 깨달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성철은 출가하기도 전에 사상이 지극히 돈오돈수적인 영가현각(665-713)의 《증도가》를 숙독하였고, 또한 선종의 필수불가결한 《대혜어록》을 자신의 실제적 간화선 수행의 지침서로 삼았다.
지눌이 거의 마흔이 되었을 때 같은 어록을 통해서 간화선을 발견한 것과는 달리, 성철은 이십대 초반에 알게 되어 이를 자신의 평생의 수행 및 설법의 핵심으로 삼았다. 아마도 이러한 근원적인 개인체험의 차이 때문에, 양자의 시간관도 이에 따라 서로 다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점수를 강조하는 지눌의 시간관은 무엇보다도 통시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시적인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면이 크게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돈수에 초점을 맞추는 성철에 따르면, 그러한 통시적인 면과는 추호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이런 여러 차이들만 보더라도, ‘지눌과 성철의 사상은 결국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와 필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철의 돈오돈수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철이 매우 아끼던 《육조단경》 돈황본의 주요 인용문을 통해 살펴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 첫째 인용문은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의 수행은 부처님 수행이다.’는 말이다. 성철에 따르면, 이 말은 ‘구경각(究竟覺)인 오(悟)를 단박에 이루는 수행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제적으로 부처가 되므로, 그 체험을 한 순간부터 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도 아주 다 사라져버려, 그는 더 이상 부처가 되기 위해 닦을 필요가 없게 된다.’는 의미다.
이것은 성철 자신이 체득한 것으로서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역대 부처와 조사가 체득했던 바와 같으며, 바로 이러한 근본적 체험이 없이는 불교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고 그는 말한다. 즉 불교는 바로 깨달음의 종교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궁극적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꾸준한 간화선 수행을 통해서 이와 같은 돈오돈수의 체험을 할 수 있다고 그는 한결 같이 주창한다. 성철이 깨닫고 나서도 계속 부처가 되기 위해 닦아야만 되는 경험들을 모두 완전히 배척한다.
둘째 인용문은 ‘오직 견성하는 법만을 전하며, 세상에 출현하여 사종(邪宗)을 파쇄(破碎)하노라(唯傳見性法 出世破邪宗)’는 말로서, 그 내용은 육조혜능의 대를 이어 살았던 성철의 굳건한 정신을 드러내 준다. 그는 여기에 나오는 견성법과 돈교법의 의미를 동일시한다. 전자는 《법보단경》, 후자는 《육조단경》 돈황본에 각기 해당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철이 그 인용문을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서, 그가 이 내용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도 잘 알 수 있다. 물론 성철에 있어서는 견성법이나 돈교법이 둘 다 돈오돈수와 같은 것이다.
셋째 인용문은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法을 배워도 이익이 없느니라.(不識本心學法無益)’는 말이다. 그래서 성철에게는 ‘진리에 대한 체험이 무조건적으로 먼저’라야 된다. 즉 ‘깨달음이 먼저지 팔만대장경이 먼저가 아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철의 선교(禪敎)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는 선종의 종지를 형언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불급언전(不及言詮) 등의 표현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철에 따르면, 교(敎)를 단절해야만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성철의 법어집을 이루는 11권의 책들은 모두 다 한결 같이 그 길로 향하여 이끌어줄 뿐이다. 예컨대 《백일법문》 700여 쪽의 주요 가르침은 불교의 다양한 사상적 주류들을 하나의 고유개념인 중도사상으로 결정시켜준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의 핵심인 그 중도사상을 지적으로만 터득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간화선 수행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다고 그는 주창한다. 어떻게 보면 《백일법문》의 고도의 회통적인 설법은 교를 단절하도록 집중적으로 정신을 준비시켜 준다. 구경각을 통해서 그 단절을 결정적으로 이룬 사람은 경전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위에 언급했듯이 성철의 교에 대한 인용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진리에 대한 자기체험을 위주로 불교전통을 재독(再讀)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역사적 배경에 걸림 없이 나름대로 불교전통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완전히 자유롭다. 어떻게 보면 경전들이 성철의 체험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철의 마음이 그 경전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성철에 있어서는 선을 통한 깨침인 계란이 먼저 있지, 교인 닭이 먼저 있는 것은 아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러한 이치를 파악하려면 상당한 가치관의 전도가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철이 사용하는 경증들을 받아들이려면 그분과 똑같은 경지에서 교를 보아야만 된다.
성철은 《육조단경》을 압도적으로 공시적으로 이해하며 숙독했으되, 그 통시적 형성 과정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육조단경》 돈황본을 혜능이 몸소 설법한 내용의 기록으로 생각하며 하택신회(670-762)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육조단경》 돈황본 현토 편역의 출간이 성철의 입적 6년 전인 1987년에 이루어진 사실로 미루어서, 이는 그의 돈오돈수 사상을 입증하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철이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인하여 오로지 돈오돈수 사상만을 밀고 나갔던 점을 고려할 때, 그는 자신을 어디까지나 육조혜능과 완전히 동일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구경각의 경지에서는 일불일체불(一佛一切佛)이라 하므로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지눌도 단경을 일찍 알게 되어 이를 통해 첫 번째 깨달음을 얻었고 또한 이를 평생토록 매우 아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오점수적인 입장을 선호했다.
성철은 그가 주장하는 사상이 평범한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극단적이며 이상적으로 여겨지는지를 과연 인식했을지 의문스럽다. 돈오점수 사상을 완전히 배척했던 ‘성철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자나 깨나 외줄타기만 하는 곡예사.’라고 대답하면 될 것 같다. 과연 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 여부를 물을 수밖에 없는 놀이는 완전히 깨어있는 사람이거나 신이 아니고서는 즐기기가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성철의 돈오돈수 사상이 지닌 특성을 정의하는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면 그가 왜 그토록 중력을 거스르는 그런 입장만을 고수했는지를 이해하려 하되, 혹시나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의 근거가 되는 《신약성서》 안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개념을 살피는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자.
2. 《신약성서》 안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탐구
《신약성서》는 소위 예수 그리스도(기원전 6년~기원후 30년26)) 사건을 다루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경전이다. 그 내용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의 생애를 알려 주는 공관복음(共觀福音)과 사도(使徒) 요한의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뒷부분은 예수가 죽고 난 다음에 그 제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 및 다른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신약성서》의 앞, 뒷부분 전체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 안에서는 불교의 전문용어인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표현이나 그와 유사한 낱말들을 찾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신약성서》를 다시 깊이 읽어가면서 잘 살펴본다면, 그 불교용어들이 의미하는 진리에 대한 체험의 구조와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돈오돈수의 탐구
공관복음에서 ‘단박에 깨쳐서 단박에 수행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확실한 경우는 그야말로 단 하나 밖에 없는데, 그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된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활(公生活)을 시작하기에 앞서 돈오돈수와 아주 흡사한 체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체험을 하고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진리의 궤도를 조금도 이탈하지 않고 이타행만 하면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여, 그는 그때 체득했던 경지에서 한 치도 더 이상 후퇴하지 못 하는 양, 오로지 외길 인생만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는 구조로 보아 불교적 배경과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 《육조단경》의 오후수행불행(悟後修行佛行)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신약성서》에서는 어떻게 ‘예수의 궁극적 깨침’을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실 그것은 지극히 소박한 내용으로서, 서른 살이 된 예수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洗禮)를 받고 나서 기도하고 있을 때 돌연히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가 그때 어떻게 기도했는지, 또 무엇 때문에 그 순간에 그런 체험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 전혀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석가모니불과는 다른 어떤 수행의 과정을 겪고 나서 득도하게 되었는지 조차도 알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의 궁극적 체험이야말로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가장 갑작스러운 체험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깨침의 정확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서도 연기의 법칙을 깨친 석가모니불에 비해서 예수의 깨침은 겉으로 크게 얻을 것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을 어구에 걸리지 않고 해석하자면, 그는 그 순간부터 궁극적 진리와 최대한으로 가까워졌다거나 또는 그 궁극적 진리와 하나(一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불교용어로 말하자면 그가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완전히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 것은 77代로 이어지는 예수의 족보이야기다. 그 내용의 핵심은 사람들이 예수를 ‘요셉이라는 사람의 아들’로 여겼지만, 그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맨 마지막에서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역사적 사실성을 따지기보다는, 그 족보 이야기가 말하는 상징적 의미를 터득해야 된다. 위에서 방금 말한 바대로 그가 진리와 최대한으로 하나가 된 사람이라면, 겉모습으로는 그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의 법안(法眼)이 활짝 열렸으므로 그의 본래 모습 자체가 결정적으로 환히 드러났다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성불하고 나서 그와 함께 수행했던 다섯 고행자들이나 자기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들에게 예전대로 궁전에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권고했던 아버지께 석가모니가 말했던 바는 ‘저의 혈통이 바뀌었습니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고타마 벗’이라고 불렀던 동료 고행자들에게 그가 ‘이제 나는 너희들의 벗이 아니라 여래다.’고 대답한 것과도 유사하다.
예수의 족보에 이어서 나오는 장면은 소위 사막 체험이다. 그는 혼자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고행하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악마에게 유혹을 받는다. 악마가 온갖 종류의 유혹들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마음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의 이야기는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예수, 그 얻은 경지에서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확철대오한 예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예수가 사막에서 나와 세속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공생활을 시작하는 모습이 나온다.
예수의 공적활동 기간은 길어야 삼 년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그 활동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가 구마자(驅魔者) 또는 치료자로서 활동하며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고, 그에게 찾아오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아무도 배격하지 않으며 영적, 육적(肉的)으로 모두 해방시켜 주는 상당한 보살심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둘째는 예수가 공적활동을 시작하면서 제자들을 뽑아서 자신의 존재방식에 참여하도록 그들을 키우며 가꾸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셋째는 그가 자주 산이나 외딴 곳에 가서, 혼자 또는 제자들과 함께 명상을 하는 모습이다. 물론 장수했던 석가모니불에 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매우 짧았지만, 그는 그 짧은 생에서도 오로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정신대로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 당시의 사회가 지나치게 경직된 유대교 전통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였기에 대중에게 막대한 인기가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어느 새 심한 대립관계를 맺게 되었다. 예수는 그 사람들이 아주 빨리 자기를 처치해버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직 홀로서기를 해가면서 결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의연히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갔다.
예수는 결국 자신이 원하기만 했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을 십자가형을 스스로 당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약성서》란 무슨 희소식을 전하기에 복음이라는 이름을 받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석가모니불이 중생들에게 생사해탈의 길을 가르쳐 주었듯이, 예수도 죽음을 뛰어넘는 하나의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목숨을 내어 놓은 그리스도가 전체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물론 ‘영이 하나와 똑같다(0=1)’고 말하는 식의 이성초월적인 논리다.
예수 사건에 있어서 우리가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하여 별 볼일 없는 작은 나자렛 마을과 평범한 가족 출신의 사람이, 알아줄만한 학벌이 전혀 없는 사람이, 책이나 철학서라고는 하나도 남기지 않은 사람이, 득도했다거나 누구한테서 인가를 받았다는 식의 소리를 한 적도 없는 사람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생활을 삼 년도 못해서 그 당시 가장 수치스러운 사형방법으로 죽었던 바로 그 사람이, 그가 죽은 지 20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는지 하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예수가 자신의 공생활(公生活)에 앞서 돈오돈수적 맥락의 체험을 했는지 안 했는지의 여부는 물론 사람들의 믿음 하나에 모두 달려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불의 성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것이 정말인가?’ 하는 질문에 ‘예.’라는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바탕 전체는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전히 ‘석가모니불과 예수 그리스도는 어찌하여 그토록 깊이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은 그대로 남게 될 것이다.
2) 돈오점수의 탐구
《신약성서》에서 제자가 되는 길은 늘 스승의 부르심에 단박에 응답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자기 자신도 스승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닫는 경험이기에, 이 경험이 보조지눌의 돈오와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 경험의 구조상 어느 정도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는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뽑았던 목적은 자신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사람들을 일깨우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인 제자라면, 그도 자기의 스승처럼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는 가운데 새로 생겨나는 제자들을 일깨우는 사람, 즉 장차 자기 차례가 되어서 대를 이어 주어야 할 제자들을 일깨우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이는 자각각타(自覺覺他)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숙한 제자가 될 때까지는 한동안을 오래 추구해야 되므로, 그 첫 번째 깨달음대로 되기를 바란다면 점차적 수행을 해야만 된다.
달리 말하자면, 이(noumenal world)에 있어서는 본래 모습이 이미 스승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phenomenal world)에 있어서는 그 모습이 아직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표출되기 위해서는 제자에게 시간적 과정을 통하여 닦아나가는 것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단밖에 깨치고 닦은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돈오’와, ‘부르심에 응답하고서부터 꾸준한 닦음을 해야 되는 제자의 돈오’가 그 글자는 똑같다 하더라도 내용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돈오점수적인 경우들은 《신약성서》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많다.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돈오는 사람에 따라서 그 강도가 다르고 점차적 수행의 진전속도도 다르다. 그런데 일단 돈오를 했다면, 수행도중에 잠시 옆으로 빠질 수는 있어도 결국 그 부르심의 궤도를 완전히 이탈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예로, 죽음을 앞두고 수난의 길로 들어가는 스승을 배반하고서도 다시 그 스승에게 돌아오는 사도 베드로의 경우나, 스승을 팔아넘기고서 극심한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었던 사도 유다의 경우를 통해서도 잘 볼 수 있다. 즉, 엉뚱한 길을 갔다가도 스승이 구현하는 이상으로 계속 되돌아오는 제자는, 아직도 자신이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되풀이 고백함으로써, 늘 그 스승에게 더 열렬히 귀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도 제자는 자신을 진리로 이끌기 위하여 절대적 매개역할을 하는 스승과 조만간 헤어져야 한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근본구조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곧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의 교의에서는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유한한 분(예수 그리스도)이 무한한 분(하느님)을 담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기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그대들에게 이롭다.’고 말한다. 사실 스승의 어쩔 수 없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하는 이러한 단절 없이는,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끝까지 내면화하기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스승이 살아 있는 한, 제자들은 스승이나 스승의 말씀에 걸려 넘어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지월(指月)의 손가락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단절의 근거가 되지만, 이 단절 없이는 그 근거를 이루는 가르침이란 전혀 의미가 없다. 즉 부정이 있어야 긍정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제자들은 스승이 구현하는 이상을 붙들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상에 저절로 붙들려져야만 된다. 그것은 바로 ‘본래 마음(本心)’을 ‘아는 것(識)’이다. 그러한 근본적 체험 없이는 스승의 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學法無益). 위에 언급한 성철의 열반송의 의미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즉 ‘가야산의 호랑이’는 입적하기에 앞서 자신을 극도로 낮춤으로써, 그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온갖 집착을 끊게 하려고 했을 뿐이다. 《신약성서》에서나 선종에서나 돈오점수를 하다가도 조만간 스승이나 그 스승의 가르침과 단절을 이루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렇다면 스승과의 단절을 겪고 난 후 제자들의 점차적 수행의 도착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위에서 본 바대로 스승과 똑같이 되는데 있다. 그리스도는 명확히 말하기를 ‘누구든지 잘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한결같은 전통에 따르면, 그러한 체험이 드물기는 하지만 역시 가능하다고 한다.
3)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관계
《신약성서》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두 가지 사상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양쪽 패러다임(paradigm)이 다 양립하며 또 공존한다. 전자는 예수께, 후자는 그 제자와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 해당된다. 그런데 돈오돈수가 돈오점수보다 더 핵심적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도 예수는 자신만큼 깨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가를 전해 준다. 그는 사람들에게 돈오돈수를 결코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돈오점수적인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인내를 보여주며 그들의 실수를 한결 같이 용서해 준다. 그러면서도 자기 제자들의 발전속도가 너무 느려서 크게 화를 내는 적도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결국은 제자들도 자신만큼 깨어서 살아야만 된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한다.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신약성서》 안에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보완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스승 예수가 돈오돈수 하지 않았다면, 돈오점수 하는 사람들이 어느 방향을 향해 수행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수행의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가신 스승이 계속 제시해주는 방향이 없이는 점수가 늪의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참다운 돈오점수는 돈오돈수 안에 담겨 있다고 보아야 된다. 환언하자면, 《신약성서》안에서 돈오돈수 없는 돈오점수란 의미가 없다.
《신약성서》에서 구경각은 이(noumenal)와 사(phenomenal)의 통합, 시공과 영원의 통합, 즉 공시적 시간관과 통시적 시간관의 완전한 통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돈오돈수한 예수는 그 통합의 궤도를 시시각각 추호도 이탈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그러한 통합은 역사의 전개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 귀납적이고 연역적인 사고의 통합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순간, 즉 과거의 전체가 결정되듯이 미래의 전부가 열리는 순간만이 중요하다. 반면에, 《신약성서》에서는 점차적으로 닦는 사람이 궁극적인 목적지를 향해 있기는 하지만, 그 현실의 통합을 이루지 못해서 아직은 옆길로 빠져나가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기에 스승이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돈오돈수의 이상이 없이는 그 제자가 따라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육조단경》의 ‘유전돈교법 출세파사종(唯傳頓敎法 出世破邪宗)’이라는 말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 말 자체는 비록 《신약성서》에 없지만, 그 의미는 예수의 깨우침의 체험과 정통으로 맞아 들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돈오돈수의 실제적 이상을 망각할 정도로 지나치게 돈오점수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 말은 반드시 해독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에 대한 조명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돈점논쟁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눌 이후 800년간 그의 사상적 영향 하에 있던 한국불교가 왜 하필이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논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궁금히 여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연의 일인지, 아니라면 역사적 상황의 결과 때문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성철이 한국불교 안에서 잠시 나타났던 단순히 유성 같은 인물인지, 아니면 오래도록 그 자취를 남길만한 인물인지를 알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철의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제공할 수가 있다. 그의 독단적인 태도는 주로 그가 독재정권 하에서 활동했기 때문이거나, 지배적인 심리구조를 지녔기 때문이거나, 해방 이후 완전히 갈라진 한국불교를 근원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그 사상적 통일을 이루려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해인사의 헤게모니의 경향들을 드러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들을 들 수는 있겠다. 그 모든 이유들에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한 가치들이 각각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의 일생이 오직 돈오돈수에 대한 직관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는 또한 그의 철저한 간화선 수행의 열매이기도 하다.
그 열매에 대하여는, 앞서 제2부에서 ‘돈오돈수 없이는 그리스도론이 무너진다.’고 충분히 드러냈기에 돈오돈수에 대한 그의 직관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성철은 불교 창립의 근본 패러다임을 극단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인물로서, 모든 불자들이 불교의 근원에로 들어가기를 언제나 주장한다. 그의 일생 및 전서는 오로지 거기에만 초점이 맞추어 있는 것도 명백한 사실로서, 그는 간화선을 통한 돈오돈수적인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에 있어서는 돈오돈수적 패러다임이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단지 그 창립자한테만 국한되어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 돈오점수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자인 지눌도 이와 똑같은 결론을 내어서 일반적인 중생들을 위한 돈오점수의 과정을 제공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만년에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발견한 이후로는 그 사상적 유산도 남겨주셨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던 것은 이러한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지눌에 대하여 성철이 비판을 가했던 순간부터였다고 본다. 그 때문에 성철이 과연 지눌을 얼마나 이해했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달리 보면, 지나치게 돈오점수적 패러다임을 강조했던 지눌의 태도가 오히려 성철의 그러한 태도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아니면 지눌의 전서에는 그런 불균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지눌의 사상을 지나치게 돈오점수 중심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성철의 반응은 지눌의 사상이 내포하고 있던 위험성에 상응하는 것이 된다.
어쨌든지, 타협을 완전히 배격하는 성철의 극단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를 위에서 다양하게 언급했던 이유들 때문으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한국불교 안에 있는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는 그의 피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여길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성철의 사상이 극단적이었던 만큼 그의 사상이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는 더 극단적으로 자기주장을 밀고 나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철은 모든 이론이 다 선을 망치게 한다고 믿으면서, 간화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주로 하여 늘 설법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맺음말
본 연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나타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관계를 통하여 돈오돈수의 우수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볼 때, 지눌 이후 지난 800년에 걸친 한국불교의 역사도 성철을 통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즉, 성철의 사상은 돈오돈수적인 배타주의를 통해서 지눌의 지나친 돈오점수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성철의 사상은 돈오돈수적 패러다임의 핵심성 및 그 우수성을 상기시키는 했지만, 성철이 대응했던 그 방법 자체는 지나치게 불균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성철은 불균형을 통해서 불균형에 응답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지눌과의 관계로써만이 성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결국 지눌 없는 성철이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성철의 이러한 방식이 오늘날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지니는 극단성에 쉽게 빠지지 않으면서, 그의 가르침의 가장 좋은 면인 돈오돈수의 핵심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즉, 돈오점수를 완전히 배격하지 않으며 통시적 시간관과 귀납적 사고방식을 수용하는 가운데 그가 상기시키는 돈오돈수의 핵심성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종교간 대화가 활발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적 과제이자 동시에 한국불교를 더욱 아름답게 꽃피우는 길이라고 본다.
출처 http://budrevi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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