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현대 불교학의 새 방향
시모다 마사히로 지음
/ 김재성 역 metta@sutra.re.kr
시모다 마사히로 / 동경대 박사. 현재 동경대 문학부 교수. 주요 저서로 《藏文和譯 大乘 涅槃經 I》 《涅槃經の硏究―大乘經典の硏究方法試論》이 있으며 그 외 논문 다수.
김재성 / 서울대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동경대 인도철학 불교학 석 박사 과정 수료. 현재 경전연구소 소장. 논문으로 〈일본의 초기불교 및 남방 상좌부 불교연구의 역사와 현황〉 〈청정도론의 찰나정 근행정〉 〈순관(純觀, suddha-vipassana-)에 대하여―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역서로 《지금 이 순간 누가 깨어 있는가―우빤디다 스님의 가르침》 《위빠사나 수행》 등이 있다.
근대의 여러 학자에 의해 인도불교 역사가 연구되어 온 방법은 결정적으로 특이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 보다 더 특이한 것은, 그것이 거의 특이하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이 특이함은, 한 종류의 원천 자료에 대해 언뜻 보아 기묘한, 논의의 여지 없는 기호(嗜好) 같은 것에서 분명하다.
인도불교 연구를 새로운 각도로부터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그레고리 쇼펜은 이 한 구절로 ‘인도불교 연구에서 고고학과 프로테스탄트적 전제’라고 제목붙인 논문을 시작해서, 서양에서 태어나 오늘까지 계승되어 온 불교 연구방법의 역사적 연구로서의 의의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 주장에는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가 제기한 문제는 본고의 주제와 직접 관계가 있으므로, 그것의 상세한 논의는 잠시 후에 살펴볼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일단 접어두고서라도, 이 논문이 근대 서양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져 온 불교연구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었던 것은 분명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 제기로부터 벌써 10년. 현재 (일본) 국내외에서의 불교 연구는 그의 비판에 대한 답이 거의 없었으며, 특히 일본에서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처음부터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 문제에 조금의 눈길을 주는 사람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쇼펜의 지적이 서양의 불교연구를 지적한 것이어서, 일본의 불교연구는 이 비판과는 무관하다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는 아닌가 한다.
그가 지적하는 불교연구 방법의 특이성은 현재의 일본에서의 불교 연구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뿐만 아니라, 그 특이성을 거의 의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학계는 구미보다 오히려 더 심각한 정도라 하겠다. 위와 같은 쇼펜의 지적은 ‘생활 속의 불교’라고 하는 관점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만 그 관계하는 방법은 이 관점을 불교연구가, 특히 일본의 불교연구가 언제부턴가 배제해 버렸다고 하는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그럼 ‘생활 속의 불교’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과제가 제기하는 문제는 본고 전체를 통해서 검토해 보겠지만, 그 대략의 특징을 쇼펜이 지적하는 ‘불교연구에서 방법의 특이성’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모두(冒頭)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쇼펜이 말하는 ‘한 종류의 원천 자료에 대한 기묘한 기호’란, 그 이면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도 불교 연구자가 오직 문헌자료를 사용해 온 반면, 비문이나 고고학적 유물의 증언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곡해해 온 것을 가리킨다.
〔연구자들 앞에는〕 고고학적 자료, 그리고 많은 비문 자료들이 있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를 충분히 합리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편집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대부분은 읽혀지는 것조차 예상할 수 없는 자료이다. 이 자료에는 출가자, 재가자 모두를 포함해서 그들이 실제로 실천하고 신앙한 것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으로〕 같은 방식으로 많은 문헌 자료가 있으나,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시대가 기록되지 않았고, 극히 최근에 전승된 사본 안에서만 남아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이 편집되어진 성전으로, 신성한 것이며, 이상(理想)을 교육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소수의, 즉, 평균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신행 기록이라 하겠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고고학 자료와 문헌 자료와의 차이나 그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쇼펜은 여기서 자료 문제에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불교학이 성전, 이상, 신성함 등의 말로 표현된 주제를 연구의 대상으로 하여, 그 관점에서만 그려진 이미지를 불교 전체의 이미지로 확장해 온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불교를 믿고 실천했던 대다수의 평범한 불교도의 모습을 역사에 거의 반영시키지 않았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 속에서 나타난 이른바 ‘인도학’이라는 것 가운데서 입지를 찾을 수 있었던 현재의 불교학은, 산스크리트어 자료를 중심으로 하는 텍스트 연구, 그것도 불교의 사상 해명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만을 추진해 왔다. 그리고 확실히 그 연구는 고대 인도불교 세계의 교의나 사상에 대해, 여러 텍스트를 문헌학적으로 분석하는 형태로 다양한 문제를 해명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성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과정에서, 교의, 사상이라고 하는 영역 이외의 많은 중요한 요소를 연구자들이 간과해 온 사실은 그다지 지적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불교가 역사 안에서 열매를 맺어온 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그리려면, 규범적, 이념적인 문헌의 기술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것은 생활 경험 속에서 그 이념이 실제로 어떠한 형태로 기능했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세계는 세속 세계와 함께 있어야 비로소 그 존재 의의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것이며, 어느 쪽이나 한편의 극단만을 열심히 그려보아도 불교라고 하는 세계 전체를 그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의식되지 않았지만, 근대불교학이 취한 방법의 특징, 혹은 한계성과 거기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불교의 모습의 편향이라고 하는 결론의 쌍방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부터 근대의 불교연구가 어떠한 경위로 현재의 방법을 습득했는지, 그 사이에 어떤 문제를 안게 되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그러한 여러 문제를 이해한 다음,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개선 할 수 있는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차례차례 논의해 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의 불교연구 방법에 특징적인 요소로 우선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문헌 편중의 태도, 그것도 사상, 교의 내용을 분석하는 텍스트의 연구에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점이다. 원래 종교의 중심에는 사상이 있고 교의가 있는 것은 의심할 수 없고, 그러한 연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필자 자신도 확실히 문헌 연구로써 불교학의 방법으로 삼고 있는 한 사람이며, 본고의 최종적인 관심도 그 초점은 문헌 연구에 있는 것을 미리 단언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문헌연구의 의의, 더 나아가 그 중에서도 교의나 사상 연구의 의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성립되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즉, 무엇보다도 교의의 의미는 그것이 구체적 현실에서 얼마나 일을 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긴 역사적 현실 속으로 한 걸음 발을 디디면, 교의가 현실을 바꿀 뿐 아니고, 현실에 의해 교의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늘 있던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 터이다. 이러한 요소를 빠뜨리지 않고 고찰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상이나 이념으로서의 불교와 생활 경험 속의 불교를 하나의 기도(企圖)에서 파악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근대의 불교연구에서는 이러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다. 연구자들은 거의 사상 연구만을 불교연구로서 인정하는 편으로, 그 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생활환경이나, 혹은 그 환경 속에서 숨쉬고 있는 불교는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종교학이나 문화인류학 등 다른 학문분야에 맡기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도 방법론적인 논의를 거듭한 다음 의식적으로 선택한 결론은 아니다. 고대의 텍스트에 씌어 있지 않은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하거나, 혹은 불교의 아류정도라고 처음부터 결정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왜 이러한 경향이 정착해 버렸는가. 실은 이 문제는 서양 근대가 어떠한 경위를 거쳐 인도학, 그리고 불교학을 만들어내 왔는가라고 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불교학의 발단에서 태어난 연구 경향이, 현재까지 살아남아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해답의 열쇠를 갖고 있는 서양에서의 근대 불교학 성립 사정을 잠시 살펴보자.
대항해시대부터 세계 각지에 진출하기 시작한 유럽은 선교사나 정부 고관이 중심이 되어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화한 지역의 언어, 문화, 그리고 종교 연구를 진행해 나갔다. 인도에 관한 연구는 이런 새로운 학문 가운데 대표적인 성과이다. 18세기 후반에 본격화된 인도 연구는 영국,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서 19세기에 접어들어 비약적인 진보를 이루어 간다.
그렇지만 불교연구에 한해서는, 이러한 인도학의 발전은 동시에 극복할 수 없는 연구 상의 큰 장애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지만, 인도에서는 아득한 옛날에 불교가 사라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일찍이 인도에 불교가 존재했다고 하는 인식을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인도학의 진전과 불교학의 진전과는 좀처럼 걸음을 같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불교를 밝히려면 아시아 각지로부터 불교에 관한 단편적 정보를 모아 그것들을 종합해 재구성한다고 하는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종합의 중심이 되어야 할 인도에 현실적으로 불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교를 탐구하는 것은 중심이 정해지지 않은 원을 계속 그리는 것 같은 것이다. 불교가 현존하지 않는 인도에 불교의 중심점을 정하기까지, 연구자들 사이에 오랫동안의 논의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를 중심으로 아시아에 들어간 서양이 먼저 불교를 파악한 방법은, 오늘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현지조사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눈앞에 존재하는 다른 민족,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살아 있는 종교를 관찰하는 것에 의해 정보를 얻어가는 것이다.그러나 몽고, 티벳, 중국, 한반도, 일본,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캄보디아 등등 언어, 문화, 역사를 완전히 달리하는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실제로 접하는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는 종교 활동을 하나의 같은 종교로서 인지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작업은 아니었다.
실제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현재에도 쉽지는 않다. ‘불교와는 다른 라마교’라고 하는 개념이나, 혹은 정확히 그 대국(對局)에 해당되는 ‘일본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라고 하는 주장 등 여러 가지 상이한 주장들이 정합성 있게 설명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이처럼 19세기 아시아를 관찰한 서양의 연구자들이 ‘불교라고 하는 하나의 인식’에 이르는 데까지는 실제 얼마나 곤란했었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 연구자들이 간신히 ‘불교’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실재인물인 샤캬무니에 대한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현재는 아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이러한 이해도, 인도에 불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현지조사를 통해 아시아 각지로부터 정보를 모으고, 마지막에는 현지조사 방법이 미치지 않는 세계인 인도에 불교의 중심을 정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심으로서의 인도에 역사적 붓다가 존재했다고 하는 이 이해는 단순하게 ‘사실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인식의 탄생’이라고 말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근대 불교학의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이 불교의 중심으로 세울 수 있는 샤캬무니를 신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와도 무관계한 철학자, 혹은 도덕가로 파악한 것이었다. 이렇게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신처럼 숭배되는 그 사람은 한 현인이었으며, 합리적인 사상을 말한 역사상의 실재 인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인식의 탄생으로 이후의 불교연구의 큰 기둥이 결정된다. 그것은 제일 먼저 불교는 사람이 말한 철학이라는 사실로부터 불교의 해명은 철학, 사상의 해명과 다름없는 것, 따라서 연구의 대상으로 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문헌 자료여야 할 것, 그 중에서도 읽어야 할 것은 현인의 철학에 어울리는 합리적 내용일 것, 또 당연한 일이지만 고대 인도에서 말해진 교의가 본래의 불교일 것 등이었다. 이러한 요소 모든 것이 현재 행해지고 있는 불교학의 특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근대 불교학에서 문헌 편중의 경향과 그 문헌을 취급하는 태도의 쌍방이 이’불교’라고 하는 인식 가운데에서 필연적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이 불교학의 탄생에는 당시의 유럽 사상계에 있어서의 철학 혹은 그리스도교 연구 양상과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 원래 서양사상사의 근저를 이루는 그리스도교는, 성서라고 하는 텍스트 속에서 ‘말의 탐구’에 각별한 지위를 부여해왔다.
이 연구는 역사적 접근이든, 해석적 접근이든, 혹은 문헌 복원이든, 고등 비평이든 간에 모두 텍스트 그 자체에 향해 있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텍스트 연구를 열어 가는 성서 연구의 성과가 얼마나 깊이 불교연구 태도의 양성에 관련되어 있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최고의 복음서 자료인 Q복원의 노력은 초기 불교 경전의 연구 경향과 그대로 겹쳐진다. 또 19세기 중엽, 인간으로서의 예수상을 구하는 노력으로 나타난, 르난의 《예수전》이나 카임의 《나자레 예수의 역사》 같은 세기말 리스 데이비즈의 저작 《인간 고타마》의 이념과 서로 겹치는 것 등 몇 가지 사례를 드는 것만으로도 양자의 관계는 명료하다.
이러한 요소를 생각하면, 본고의 모두에서 인용한 ‘근대의 학자들이 불교를 연구할 때의 방법의 특이성’, ‘문헌 편중의 태도’라고 하는 쇼펜의 지적은, 실은 서양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 연구가 안고 있는 특징에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모두에 인용한 그의 논문 타이틀인 ‘프로테스탄트적 전제’란 바로 이 문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쇼펜은 그리스도교 연구, 특히 신약학은 신약 성서라고 하는 특별한 텍스트 읽기를 존중하여 거기에 따라 그리스도 교도의 양상을 결정하는 데 열심이었던 반면, 고고학적 유물의 증언에는 솔직하게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영국 초기 고고학 연구의 제일인자인 찰즈 토마스가 5, 6세기 영국의 그리스도 교도 묘비 조사에서 보이는 ‘기묘한 변명’을 주시한다. 토마스는 문헌 자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그리스도 교도의 양상이, 고고학적, 미술적, 건축학적인 유물로부터 꽤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면서 아래와 같이 부언한다.
그리스도교도 독자들은 아래에 설명할 섬나라 〔영국의〕 그리스도교도의 양상을 이교도적이 혹은 전(前)그리스도 교도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이 사람으로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서 책형에 처해진 것을 통해, 모든 신자가 사제라고 하는, 속죄나 축복의 방법이 주어져 있는 신약 성서의 중심적인 메시지는 〔유물에 대해〕 접촉되지 않은 그대로이다. 그것이 복음서나 교부(敎父)들의 저서, 더 나아가 상징에 의해 전해진 메시지라 할지라도, 그것들과 떨어져 물질적인 것을 반영하고 있지도 않고, 또 반영할 수도 없다.
한편, 사람이 만들어낸 무덤이나 묘지, 산 인간이 죽은 인간을 기념하는 것, 뼈의 일부나 그것과 비슷한 작은 것을 성스러운 유물로 보관 유지하는 것, 숭배의 의식용으로 지은 건축물의 구조 등에 의해 나타난 외관상의 형태는 이 메시지에다가 인간들이 덧붙인 것이다. 그 자체로서는 ‘말씀’과 무관하고, 대부분의 경우 직접적인 성서에 의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다. 이것들은 미르시아 엘레아데 교수가 말하는 종교적인 인간으로 되게 하는 일과 다름없다.
이것은 ‘그리스도 교도의 무덤’을 조사해 놀랄 만한 고고학적인 발견을 이루면서, 그러한 결과를 그리스도교 세계에 소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이라고 하는 다른 카테고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결과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1년의 출판에 대해서조차 이러한 태도가 바탕에 있음을 고려해 볼 때, 문헌에 나타나는 세계만을 순수한 그리스도교 세계라고 생각하고, 문헌에서 멀어진 세계는 별세계로서 취급하는 연구 상의 태도는 오랫동안의 강고한 원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원칙을 지키면서, 게다가 연구 대상을 문헌 이외의 세계에 넓히려고 할 때, 연구는 ‘본래의’ 그리스도교 연구와는 다른―예를 들어 민속학과 같은―영역 안에 그 성과를 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쇼펜이 인용하고 있는 또 다른 고고학자 슈나이더는, 초기 그리스도교 유적 연구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민속학으로서 연구하는 본(Bonn)학파의 태도에 동조한다.
즉, 그는 문헌 외 자료에서 세계는 문헌 자료의 세계와는 영역이 다른 ‘종교사회학’의 문제이며, 그리스도교 연구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본다. 같은 태도를 다른 말로 명확하게 표현한 사람이 엘리아데이다. 그는 유럽에서의 ‘농민의 풍습과 신앙’을 논할 때, 농촌 지역도 천년 이상에 걸쳐서 그리스도교화 되어왔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태고의 습속이나 종교를, 그들 나름의 그리스도교에 넣어 온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그리스도교도는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종교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갇혀버리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는 원초적인, 역사 이전의 그리스도교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유럽의 농민들이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신앙 안에 유사 이래 계승되어 온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를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엘리아데는 여기서 그리스도 교도 농민들의 ‘풍습과 신앙’이 ‘역사적 그리스도교’와 구별되어야 하며, 실제의 그리스도 교도 농민이 믿었던 것은 ‘비역사적 그리스도교’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결국 쇼펜이 말하듯이, 토마스도 슈나이더도 엘리아데도 각각 취급하는 시대나 지역은 달라도, 실제의 그리스도 교도가 생활 속에서 행한 것은 역사적인 그리스도교 연구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이해와 일치하고 있다. 그 주장의 근저에는 ‘진실의’ ‘본질적인’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성서와 그 해석 안에서만 즉, 문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실생활에 나타나는 것은 그 만큼 불순한 것이어서, 그리스도교 이외의 요소가 서로 섞인 것이라는 이해가 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본고의 목적은 주지하다시피, 그리스도교 연구를 묻는 것은 아니라 불교연구를 되묻는 것이며,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와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문헌 자료의 취급 방법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쇼펜의 논의는 고고학적 자료의 존중을 결론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므로 그 점에서 본고와는 분명히 입장을 달리하지만, 거기서 지적된 위에서 말한 여러 사례는, 본고의 목적으로 충분히 이바지하는 바가 있다.
무엇보다 ‘진정 올바르고 본질적인 불교’를 생활 세계로부터 완전히 떼어낸 다음, 사상적, 교의적인 텍스트 안에서 구하려고 하는 태도는, 오늘의 불교연구의 저류에 깔려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연구를 추진하는 연구자들은, 불교를 과거의 텍스트 안에 가둔 다음, 그 시대의 생활 세계로부터 떼어 낸다고 하는 이중의 조작을 무의식 속에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불교는 변해 가는 역사적, 문화적인 상황 속에 말려 들어가면서 오늘까지 존속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이 이중의 조작은 그대로 이중의 과실로 연결되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불교가 인간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이상 인간 존재가 안고 있는 기본적 세속성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고 하는, 정말로 기본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세속적 양상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으로서 끊임없이 변천해 가는 것을 본성으로 하고 있으며, 불교는 실제로 이러한 상황성에 묻혀서 존속해 왔다. 또 더욱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하는 것은, 그 불교를 관찰하려고 하는 연구자 자신이, 사실은 같은 생활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올바른’ 불교를 탐구하려고 하는 연구자는 연구대상을 불변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한정함과 동시에, 세속성과도, 생활 세계와도, 상황성과도 관련 없는 불교를 추출하려고 한다. 이 기도는 해명 대상의 불교를 불변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올바른 불교를 상황 세계에 의존하는 일 없이 골라낼 수 있다는 특권적 입장에 서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세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신의 입장에서 관찰하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느 새부터 불교연구에서 당연시되어 버린 이 태도가, 얼마나 본래적인 것이 아니었는지, 그것은 서양의 근대가 ‘불교’를 발견할 수 있었던 이전의 역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먼저 말한 것처럼, 아시아 각지에 존재하는, 그리고 인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교’를 발견한 것은 선교사나 고급 관료 등이 현지조사에 의해 만나는 세계를 상대로서 소재를 얻어, 그 해석의 노력에 의해 완수될 수 있었다.
당초는 하나의 개념으로서 정해지지 않았던 아시아 여러 지역의 종교는 정말로 생활 세계에 말려 들어간 형태로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같은 지평의 시점에서 그리면서 간신히 도착했던 것이 ‘불교’라고 하는 인식이다. 그 ‘불교’의 소재는 문헌에서만 구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으며, 문헌만이 독립해 ‘본질적인, 진정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는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역사적 붓다의 존재와 그 철학자로서의 모습을 공유하면서, 그 후의 서양의 불교 해명에의 움직임은 거의 문헌으로 한정되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생활 세계에 파묻힌 불교는, 그 배경으로부터 추출되어 ‘순수한 불교’로 탐구의 새로운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여기서 문헌 이외의 불교 소재를 거의 모두 잘라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메이지기에 서양의 불교연구 방법을 도입한 것은, 이러한 태도가 유럽에서 정착한 다음이었다. 유럽의 불교학계로부터 보내진 불교연구의 ‘도전장’은, 거의 모든 것이 문헌에 근거해 있지만, 생활 세계에서 떼어내진 것이었다. 일본의 학계는 이 도전장을 받는 일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데 조건을 붙이는 일 없이, 다만 그 도전장에 얼마나 잘 해답할까에 전력을 다해 왔다.
그리고 확실히 그 성과는 현저하게 드러났고, 극히 단기간에 서양을 능가할 정도로까지 성장해서 오늘날 불교학의 기초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완전히 서양의 불교연구의 판에 올라서 문헌연구에 특권적인, 혹은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주는 연구 토양을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이 문헌연구는 모든 지역의 불교를 평등하게 다루는 것에 입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인도를 중심으로 조직화했기 때문에 모든 작업이 고대 인도의 복원을 향해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 기본적으로 불교학의 성과는 고대 인도불교와의 거리에 의해 헤아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이전에 존재한 일본의 불교연구와는 전혀 다른 연구환경이 일본에 출현한 것이다.
이 흐름을 계승하는 일본의 불교연구는, 현재 일본불교를 상대로 하는 일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현대불교는 종교학인가, 사회학인가, 민속학인가? 현재의 불교는, 현재에 말려 들어 있다고 하는 의미로 항상 생활 세계에 말려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이념적인 텍스트에만 불교를 결정화시킨 불교학의 입장으로부터 보았을 때에는, 다양하고, 애매하고, 순수하지 않은 모습을 한 것으로 비춰져 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의 불교는 단지 그것만으로 불교학의 상대로 삼을 가치는 없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멈춰서 다음의 소박한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재의 불교학 성립의 근거인 근대 서양이 발견한 ‘불교’는 ‘그 당시의 현재’에서 소재를 얻어, 거기서 주어진 복잡한 소재에 대한 해석의 노력에 의해 점차 도달한 인식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은 벌써 활동을 그쳐 의미가 완결된 세계로서의 불교를 상대한 것은 아니고, 미완성인 채, 실제로 계속 생성하고 있는 세계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역사적 존재인 붓다에 도달한 것이며, 이것은 이미 닫혀 버린 과거에는 찾을 수 없는, 열려 있는 현재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현재의 연구자들이 어느 새인가 잊어 버린 이 불교학의 기원은 언제나 새롭게 상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연구 방법으로서 현지조사를 취하든지, 문헌을 읽든지 하는 기술적인 차이에 관련된 문제는 아니다. 이 근대 불교학의 기원에 관한 사건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접근 수단은 별도로 하고, 불교학의 양상 그 자체에 극히 큰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더 파고 들어가 보자.
처음부터 단언해 두었지만, 본고의 관심은 문헌 연구에 있다. 근대 불교학이 현지조사로부터 일어난 것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 불교학을 지금 되묻기 위해서 고고학을 필두로 하는 문헌 외 자료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문헌을 버리고 현지에 나가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고는 불교학이 실제로 성립해 있는 조건이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한 후, 그것을 통해 문헌을 읽는 법, 그리고 읽기 결과를 취급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문헌학 그 자체를 물으려고 하는 것이다.
서양 근대가 ‘불교’를 발견하고, 그 내실이 ‘역사적 붓다가 말한 사상’으로서 확정된 후에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불교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실질적 물음은 제기되지 않았고, 그 연구는 정해진 정의에 따라서 내용을 찾아내는 것을 향해서 기울여져 왔다. 이러한 작업 태도를 가능하게 한 것은, ‘불전(佛典)’이라고 하는 텍스트로부터, 의미를 잘라내는 방법은 벌써 자명한 것으로 정해져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의미의 생성활동이 닫혀서, 과거가 되어 버린 세계를 상대로 하는 독법(讀法)과 다름없다.
그러나 본고의 주제에 맞추어서, 만약 생활 세계에 있어 얼마만큼 사상이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문제삼는다면, 사상 문헌을 취급하는 것은 극히 어렵고, 한편 정말로 불안정한 작업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바뀌어 가는 자타의 세속적 상황에서, 한편으로 정해지지 않는 해석의 테두리를 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확정되어야 할 텍스트의 의미와 계속 갈등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인정된 의미를 사용하면서, 교의를 정리해 가고 기술하는 것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작업이다. 교의 그 자체의 의미가 의존해야 할 세계에 다시 환원되어야 그것은 비로소 결정된다.
현재 불교학의 주류를 구성하는 전자의 독법에 대해서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성전이 완성되고 닫혀서, 거기에 이어 만들어진 방대한 문헌은 모두 시간 혹은 지역별의 순위로 성전의 지위에 순서로 배열된다. 그리고 그 문헌 전체 의미의 독해 작업은 정점을 이루는 성전으로 향하는 계층적인 구조를 가진다. 현재의 학계에 있어 고대 인도불교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불교의 가치가 판단된다고 앞서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며, 그 작업은 거꾸로 보면 현대판 교상판석(敎相判釋)과 다름없다.
그에 반해, 후자의 독법은 성전을 상황과 함께 변해 가는 생활 경험 세계 안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느 성전의 제작이 역사적으로 언제 닫혔는가라고 하는 문제가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적절한 콘텍스트에서 기능하고 있는지를 중시한다. 이 시도는 역사적으로 계승되어 온 의미의 계층적인 통일이 파괴되어,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는 순간에 관한 것이어서, 해석이 그대로 성전 창조에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자를 ‘닫힌 성전’의 세계라고 부른다면, 후자는 ‘열린 성전’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시점은, 단지 이론적인 양극으로 필자가 가정해서 세운 것은 아니고, 불교라고 하는 독특한 텍스트를 연구하기 위해서, 실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현재의 불전연구는 ‘역사적 붓다의 교설과 그 발전을 찾는다.’라고 하는, 언뜻 보면 명료한 유일한 목적 아래로 집약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앞에 존재하는 방대한 텍스트 가운데 어느 요소가 ‘역사적 붓다’에 돌려지고, 무엇이 ‘그 교설’이며, 거기로부터의 ‘발전’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일의적(一義的)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연구가 이것을 묻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 난폭한 명제에 불교연구 전체를 포함시키려는 시도 자체에 무리가 있어, 오히려 이 명제를 놓아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역사적 붓다 이전과 역사적 붓다 이후로 시점을 나누어, 구체적 사례에 의해 예증해 보자.
먼저 후자, 즉 역사적 붓다 이후의 불교의 문제를 다루어 보자.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해석이다. 대승의 기원이 어느 곳이며, 그 배경이 무엇이고, 도대체 그것은 어떤 불교였는가. 이 과제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불교학의 중심 테마였지만, 이 물음을 근대 불교학이 해결하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도 ‘역사적 붓다’라는 거리나 관계를 문제시해 왔다.
그 결과 도달한 대표적인 2개의 가설인 대중부기원설과 재가불탑기원설―양자 모두 이미 재검토가 진행되고 있지만―을 보면, 전자는 교설이나 교의의 연결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는 것이며, 후자는 교단의 연결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아 불교사 안에 위치 설정을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즉 ‘역사적 붓다’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그 의미를 측정하려 하고 있는 점에서는 양자가 완전히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특징은, 거기에 나타나는 붓다가 ‘역사적 붓다는 아니다’라고 하는 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대승의 기원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으려는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수로를 파서 ‘역사적 붓다’라고 하는 원류에 다다르려고 했지만, 그 노력은 아직도 결실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다양한 각도의 비판을 견딜 수 있는 가설이 제시되지 않은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대승경전을 읽는 일이 적어도 그 기원을 확정한다고 하는 큰 사건까지는 열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승 기원의 확정이라고 하는 작업과 대승경전의 해독이라고 하는 노력이 왜 유효하게 결합되지 않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아마 불교학에서 경전 연구가 ‘닫혀 버린 성전’을 상대로 하는 관점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성전은 팔리어나 아함으로 대표되는 ‘원시경전’으로, 어느 시기에 제작이 닫혀지고 그 후에 주석 시대가 시작했다고 이해하고 있다.
도식적 이해로서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 성전 제작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려 있는 점진적인 것이며, 사실, 경전과 주석, 즉 원전과 해석과의 구별이 본질적으로 애매하다. 따라서 고대 인도불교 세계에 있어 성전의 제작은 언제 어디서 닫혀지고, 언제 어디서 주석 시대에 접어들었는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작업임과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그다지 의미를 갖지 않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실은 경전과 주석의 구별의 애매함을 본질로 하여 성립된 텍스트의 대표가 다름 아닌 대승경전이다. 대승경전이 종류, 분량 모두가 확대해 가는 것은 결코 ‘역사적 붓다’의 권위를 빌려 날조한다고 하는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앞서 설해진 경전의 언설을 받아들여, 해석하면서 새롭게 읽는 일을 거치고 경전 자체로 성립시켜 가는 시도이다.
대승경전의 장명(章名)이 parivarta인 것은 텍스트 자체가 변용, 확대해 가는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며, 그곳에서는 앞 텍스트를 받아들인 자가 그대로 ‘동일’텍스트의 후속 부분의 발신자가 되고 이렇게 해서 발신자와 수신자가 함께 동일 텍스트 제작에 관여해 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경전이 목표로 하는 곳은 확실히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전통 불교의 언설과 의미의 계층적인 통일이 무너져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는 순간에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상이, 모든 대승경전이 전제로 하고 있는 ‘공(空)’사상이다. ‘공’은 전통 불교의 교의나 계율 등의 콘텍스트가 보충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져서 해석될 수 있는 용어이며, 그 점에서 분명히 전통적인 텍스트에 대한 탈구축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공’을 말하는 주체는 대승경전의 붓다이지만, 서양 근대가 독자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인식의 노력을 거듭해 도달한 ‘역사적 붓다’와는 차이가 있다. 대승경전의 붓다가 비록 샤카무니 붓다가 되어 있기는 해도, 그것은 근대 불교학이 찾아낸 ‘역사적 붓다’와는 ‘어긋남’이 있다.
‘붓다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테마는 여러 가지 각도로 해명해야 하는 불교의 중심 테마이므로 여기서 깊이 논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경전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경전의 말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에 의해, 처음으로 그 의미를 드러내는 주체’가 붓다이다. 이것은 지금 말한 ‘텍스트를 전승하면서 새롭게 읽는 법에 의해 텍스트 창작에 관련된다는 행위 그 자체의 인격화’라고도 말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지금까지의 불교학이 이루어 온 것처럼, 대승경전에 설해진 불교, 즉 대승불교를 유일한 ‘역사적 붓다’와의 거리에 의해 밖으로부터 분석적으로 모두 설명하려고 했던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대승경전의 제작 자체가 발신자와 수신자의 분리 불가능한 ‘상황 의존적’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를 가진 작품을 근대 서양의 주객을 분리하고, 객관화하는 방법을 빌려, 텍스트의 밖으로부터 감독자적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해도, 그 존재 양식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붓다를 불교연구의 전면적인 기초로 하는 것이 역사적 붓다 출현 이후의 불교 전개를 이해할 때 걸림돌이 되듯이, 붓다의 존재를 생활 세계로부터 떼어내서 그 텍스트로부터 콘텍스트성을 빼앗는 것은 역사적 붓다 이전, 혹은 붓다가 등장한 장면 그 자체를 이해할 때에도 큰 걸림돌이 되어 버리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원칙적으로 생각한다면, 경이나 율이나 붓다가 말한 텍스트는 붓다 이후의 요소와 구별될 뿐만 아니고, 붓다 이전에 존재한 요소와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연구자는 때때로 ‘불교의 모든 것’이 역사적 붓다의 개교(開敎)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서 그 이전의 교설과의 연결, 즉 콘텍스트를 생각하는 경향이 부족하다. 때문에 붓다의 교설 안에 남는 전(前)시대적 요소를 얼마나 이해할까에 대해서, 매우 어색한 해석이나 논의를 하기 쉽다.
일례로서 지금 말한 대승불교의 붓다라고 하는 문제와 본질적 관계를 가지는 예로서 ‘붓다’라는 호칭 자체를 생각해 보자. 샤카무니는 성도 후,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붓다 혹은 여래라고 부르게 했지만, 이러한 호칭은 샤카무니를 효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 호칭은, 샤카무니 이전에, 특히 슈라마나(沙門)의 세계에 알려져 있던 존칭이며, 즉 붓다란 샤카무니를 전통에 연결시키는 호칭인 것이다. 이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의해 샤카무니라고 하는 불교의 개조는 역사적 존재이면서 샤카무니 출현 이전부터의 존재로, 즉 인도 세계의 콘텍스트에 존재하는 것으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경과 율을 막론하여 샤카무니가 말하는 교설도, 이 전통에 연결되는 ‘붓다’라고 하는 명칭에 어울리는 내용을 안고 있어, ‘붓다 이전’과 이어져 있다. 최초기의 제자들에게 ‘계(戒)’로서 설한 소위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는, 과거의 붓다들이 걸은 길이며, 샤카무니가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제정한 것이 아님을 샤카무니 스스로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실, 실제로 규정되는 계율만 해도, 4바라이죄 등 그 중심적인 중죄는 불교 독자적인 것은 아니고, 사문의 세계 전체에 공유되고 있던 관습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불교 독자적인 것은, 승원화가 진행된 후에 나타나는 특수한 항목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불교의 계율도 중요한 만큼 전통과 겹치고, ‘역사적 붓다’라고 하는 고유성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한편 ‘무아’ ‘무상’ ‘근심’ 등의 불교교리의 중심이 되는 문제라고 해도, 붓다는 당시 시대에 말려 들어가, 특히 바라문 사상을 콘텍스트로 하여, 이미 존재한 언설과 확정된 의미를 변혁하려고―오늘날의 용어로, 탈구축, 혹은 탈중심화―했다는 중요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붓다의 언설을 보다 엄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콘텍스트를 알고 거기에 다시 자리잡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순수한 불교는 모두 ‘역사적 붓다’의 순수한 텍스트에서만 성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연구자들은, 붓다의 언설이 콘텍스트에 파묻혀 존재하는 것을 잊어, 콘텍스트를 불순한 것이라고 배제한 다음, 모든 구체적 현실을 빠뜨린 공허하고 보편적인 형식을 언어 속에서 찾아 가려고 한다. 이 태도는 일견, 보편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교의의 언어를 배타적 도그마로 만들어 버리는 시도로도 통한다.
이렇게 해서, 무아나 무상 등 붓다의 교설은 어느 쪽도 브라흐마니즘이라는 배경과는 무관하며, 모든 세계에 독립해서 적용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해, 실제로는 아주 다양한 콘텍스트에서 부적당함을 낳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하며 완고하게 나가려고 한다. 그 결과, 경직된 전통세계를 부수고, 새롭게 자유로운 지평을 열었을 붓다의 말을, 극히 비좁아서 답답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반성해 보자. 경험 세계라고 하는 콘텍스트로부터 떼내어져 무아나 무상의 교설을 들으면, 불교는 허무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서양근대가 빠진 망상이며, 또 때때로 현대의 학자가 빠지는 관념적 함정이기도 하다. 실제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벳불교도, 명상을 세계로 널리 알리고 있는 테라바다 불교도, 그리고 진지한 동아시아의 불교도들 가운데, 도대체 누가 허무를 말하고, 그 결말로서의 죽음을 찬미하겠는가. 불교 전통의 의미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불교도를 만날 때, 우리는 ‘그 관대함,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 관용, 비폭력’에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서양과는 달리 일본은 전통적인 불교 세계를 살아 온 점에서 생활 속에 스며 있는 불교를 ‘내부로부터’ 배울 기회가 주어져 있었다. 거기에서는 ‘외부에서’ 불교를 분석하는 입장뿐이었던 서양에서 태어난 불교학과는 분명하게 다른 불교학이 태어날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며, 실은 아직도 그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메이지 이전의 불교연구와 내적인 연결을 현재의 불교학이 찾아내, 새로운 콘텍스트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의식은 일본에서는 희박해져 가고 있는 위기감을 느낀다.
이것은 물론 불교학만의 책임은 아니다. 현실의 불교가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교의와 현실 문제의 관계를 얼마나 진지하게 반성하고 모색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만이 불교 세계가 닫혀 버리지 않고, 계속 생성해갈 수 있는 유일한 표식이다. 이 노력 안에서 불교와 불교학이, 서로 마주보는 타자로서 떨어질 수 없는 콘텍스트를 만드는 것은 쌍방의 발전에 있어 시급한 일일 뿐만 아니라,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실현시킬 가치가 있는 시도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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