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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세계관과 성욕의 절제

slowdream 2007. 12. 4. 15:14
 

유교적 세계관과 성욕의 절제


노영찬 조지 메이슨 대학 종교학과 교수


이상인 옮김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철학과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sactuary@korea.ac.kr




금욕과 세계관


일반적으로 종교전통은 금욕을 정신적, 그리고 종교적 수행과 결부시킨다고 알려져 있지만, 모든 종교전통이 금욕을 삶의 궁극적 목적 달성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취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동아시아의 종교, 특히 유교 전통에서는 금욕에 관한 덕목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비록 도교 전통의 몇몇 분파에서 양생을 위한 수행 방식으로 금욕수행을 제시하였다고는 하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은 남아시아의 그것과는 달리 금욕 수행과 인간의 이상적 경지를 밀접하게 연관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금욕 수행이란 특정한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서만 발견되는 인간에 관한 독특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유교나 동아시아 전통 일반에서 금욕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세계관과 가치체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금욕 수행은 특정 문화권에서 상정한 인간 존재의 ‘완성’의 개념, 혹은 ‘본래적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기독교의 수도 생활 속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인간 이해와 종교적 인류학에 기반한 인간의 이상적, 혹은 본래적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힌두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불교를 포함한 남아시아의 종교 전통에서는 인간의 핵심적 요소로 ‘업(業, Karma)’을 상정한다. 예를 들어 힌두교에서는 성행위를 포함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금욕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금욕은 성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다. 힌두교에서 금욕이란 업설(業說)에 관련된 사회 인류학적 주제이다.’ 힌두교의 관점에서 진정한 금욕에 도달한 자는 오직 현세의 삶에 지워진 모든 업을 다 태워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삼야신(遊行者, Samnyasin) 뿐이다.


힌두 전통은 금욕을 현실적인 육체적인 속박뿐만 아니라 나아가 생사의 끊임없는 반복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인간의 경향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되어진다. 모든 인도 전통에서 받아들인 업설은 금욕을 이해하기 위한 존재론적인 초석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성욕은 ‘현재적 욕망(Synchronic complement)’과 ‘미래지향적 욕망(Diachronic supplement)’이라는 체계 안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가진다.


현재적 욕망이란 프로이드 학파에서 말하는 리비도(Libido)로, 현재의 만족감과 연결된 성욕이다. 미래지향적 욕망이란 미래의 만족을 위한 욕망, 아이를 위한 욕망, 더 나아가 사후에도 삶을 연장하려는 욕망이다. 카마(Kama), 즉 성적 욕망은 현재적 욕망(육체적 사랑)인 동시에 미래지향적 욕망(자식을 가지고자 하는 사랑)의 근본이 된다. 그리고 현재를 추구하는 욕망과 미래를 추구하는 욕망 모두 업이 되어 쌓이게 된다. 이러한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 상정된 금욕은 자기 억제의 고행을 넘어 인도의 세계관이 가지는 존재론과 구원론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금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 ‘구원’ 그리고 ‘깨달음’과 함께 ‘금욕’을 덕목으로 삼는 세계관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금욕은 사도 바오로의 사상인 ‘신과 배우자라는 두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갈라서 헌신하기보다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것이 낫다’(고린도전서 7. 7-8; 32-35)는 실제적 요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도 바오로에게 ‘원죄’와 ‘세속적 욕망’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속적 욕망의 개념은 금욕적인 수도 생활과 ‘원죄’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기독교에서 이해되는 ‘원죄’는 특정한 도덕적, 윤리적인 행위가 아닌 악행을 하려는 인간의 방향성 혹은 지향성이라는 존재론적인 지위를 지닌다. 유대인에게 금욕을 덕목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유대교는 ‘원죄’ 개념이 기독교만큼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임은 분명하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동일한 창세기를 가지고 있으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을 설명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던 것이다.

물론 세계종교, 혹은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금욕을 평가하는 것은 분명 본 논문이 목적하는 바를 넘어선 것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금욕 수행을 가치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요청도록 만들었던 금욕과 존재론, 그리고 종교적인 세계관의 관계를 밝히는 데 있다.


유교의 세계관과 금욕


남아시아와 인도 전통이 존재론 또는 구원론이라는 측면에서 금욕을 핵심 요소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동아시아, 특히 유교는 금욕을 말하지 않는다. 유교에서 금욕은 절대 긍정적일 수 없었다. 그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방식을 갖추고 있었고, 그 안에서 힌두교의 ‘업’이나 기독교 전통의 ‘원죄’와 같은 개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나아가 유교는 그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금욕은 동아시아 종교전통 일반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도가사상의 종교적 분파인 ‘도교’는 양생, 나아가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성적 욕망을 제어하는 형태의 수련을 행하나, 금욕은 본래 도가사상의 핵심적 요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도사들에게 있어 성행위란 그들의 자연, 인간, 우주 이해의 근간인 음양(陰陽)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가에서 금욕이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관에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도가 안에서의 모순은 ‘도교’가 기(氣)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성적인 에너지의 제어, 혹은 억제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행위에 대한 도교의 접근법은 힌두교나 불교, 기독교와 같은 여타의 종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여기서 우리는 성적 욕망에 관련한 도교의 수행법이 본래의 전통적인 도가사상에서 벗어난 것이며, 종종 그 사이에는 이와 같은 모순이 있어 왔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금욕을 이해하기 위한 일관성 있는 체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동아시아 종교체계 어디에도 금욕 수행이 근거할 수 있는 우주론이나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순리를 중시하는 동아시아인에게 있어서 금욕이란 자연을 거스르는 수행법이었다.


유교와 신유교의 세계관이 비록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세를 긍정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신유교의 우주관은 세계를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혼돈이 아닌 조화의 길을 따른다. 인간 또한 이 이치[理]에서 만들어졌고 또 이 이치를 따르며, 그 행위 또한 이러한 이치와 연관되어 있다.


유교의 관점에서 성(性)이란 단독적으로 존재하거나 그에 짝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재생산과 출산이라는 견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교전통에서 출산이란 아이를 가짐으로써 육체를 뛰어넘어 자신의 삶을 연장하고 싶어하는 ‘미래지향적 욕망(Diachronic supplement)’을 낳는 인간의 본성이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인간은 아이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확장시킬 수 있다.


우리는 아이, 특히나 아들을 통하여 계속 삶을 이어나간다. 출산은 부모의 생명을 확장시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아들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의무이며, 효(孝)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관점에서 금욕은 어떠한 기능도 지니지 못한다.


더욱이 욕망이 끊어진 상태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금욕은 찬미되거나 존경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의무에 태만하고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을 대상이었다. 유교의 이상적 인간이란 가족으로 대표되는 관계성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개인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교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세계관은 인간 또한 우주의 원리인 음양(陰陽)의 조화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음양의 원리는 우주의 원리일 뿐 아니라 인간의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우주적 원리인 음양은 남성[陽]과 여성[陰]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남성과 여성의 결합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또한 이러한 견지에서 가족은 인(仁)을 완성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기반이다. 그러므로 금욕은 부자연스럽고, 인공적이며, 이기적이고, 가족이라는 인간의 기반에 반하는 것이며, 효(孝)의 뿌리를 흔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교가 성행위를 지지하는 이유는 쾌락을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출산과 탄생이라는 원리를 유지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유교는 성행위 자체를 구속하는 어떠한 존재론적 기반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금욕은 자기 수양을 위해서 반드시 닦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실제적으로 그들의 이상적 인간상 역시 불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금욕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유교 사상에서 금욕이란 인간의 자기 성찰이나 자기 수양에 하등의 연관도 없다. 물론 유교도 가족과 사회에 관계되는 교화라는 측면에서는 성적 욕망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이러한 점에서 유교는 진정으로 현세 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유교에서 금욕은 이토록이나 낯선 개념이었지만, 유교에도 성적 욕망의 억제로 해석될 수 있는 덕목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수절(守節)을 들 수 있으며, 수절은 개인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또한 수절이란 금욕과는 달리 수행을 위해 고안되어진 특별한 체계가 아닌 유교적 사회체계의 정상적인 구성원이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 기대되는 행동 양식이다.


불교의 금욕과는 달리 유교의 수절은 근본적으로 사람, 가족, 사회 간의 맥락 속에서 이해된다. 순결을 유지하는 것, 혹은 성적 행위를 억제하는 것은 분명 개인적인 행위이지만, 동시에 가족, 집단, 그리고 사회와도 관계된 것이다. 이 개인적 행위는 가족과 사회의 모습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수절의 개념은 ‘예(禮)’의 모습이다. 예(禮)는 유교의 가르침, 그리고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회구조의 근간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유교적 개념인 ‘예(禮)’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외재적인 행위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태와도 연관되어진다. 그렇기에 유교는 외부 지향적이면서 동시에 내면 지향적이다. 올바른 행위가 진정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외부의 행위가 내면의 올바른 상태와 병립해야만 한다. 내면적인 완성이 없는 행위는 겉치레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교의 ‘인(仁)’은 종종 ‘예(禮)’와 합치되는 내재적 가치로 간주되어진다. ‘예(禮)’는 단순히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얄팍한 버릇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성실한 마음으로 예(禮)를 닦는 것은 내면적인 경지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점에서 ‘효(孝)’는 그저 도덕적 규범이나 고정된 형식이 아닌 참 인간이 되어가는 방법이며, 같은 이유로 효(孝)는 인간사회의 근본인 예(禮)에 포섭된다. 유교에서 효(孝)는 부모를 봉양한다는 의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예(禮) 속에서 생활하는 그/그녀를 모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예(禮)’는 분명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예(禮)의 한 형태로서 나타나는 ‘수절’은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의 본래적 형태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수절은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인간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교의 사회적, 혈연적 틀 안에서 수절이 유지하는 가족집단은 충(忠), 성(誠)과 동일선상에 놓여진다. 그렇다면, 수절은 분명히 유교사회의 인증마크이다. 세속을 떠나 수도생활을 하는 비구나 비구니들에게 맞추어진 금욕과는 달리 유교의 수절 개념은 현세적 세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기대되어진 덕목이었던 것이다.


수절, 혹은 성적 욕망의 억제는 충(忠)과 효(孝)를 배양하는 예절의 한 부분이었다. 물론 역사적으로 예절 수양은 종종 그 자체로 고정되고, 극단적으로 나타나거나,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인(仁)을 깨닫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절 수양 본래의 목적은 인(仁)을 획득하고 배양하는 방법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예(禮)를 닦는 것은 ‘자기 수양’의 일부분이었다. 유교의 ‘자기 수양’은 대학(大學)에 잘 나타나 있다.


옛날에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마음을 바로 잡고, 그 마음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뜻(意)을 성실히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 앎을 지극히 하였으니, 앎을 지극히 함은 사물을 궁구하는 데에 있다.(大學)


대학(大學)에서 찾을 수 있는 자기 수양의 핵심은 내면의 수양에서 외면의 발전으로 나아간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자기 수양’의 팔조목(八條目)은 내부와 외부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내적인 과정은 다시 네 가지로 분류되는데, 이는 이른 바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그리고 ‘격물(格物)’이며, 그리고 외적인 부분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그리고 ‘평천하(平天下)’로 나뉘게 된다. 대학(大學)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자아를 대상으로 삼으며, 그 속에서 ‘자기 수양(修身)’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연결한다. 유교는 ‘자아’를 인간만이 아닌 천하의 변화에 대한 열쇠로 여긴다.


자기 수양에서 ‘예(禮)’는 인간의 삶을 계발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도구이다. 특히 《논어(論語)》에서 인(仁)과 예(禮)는 유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데, 인(仁)을 인간 내면의 도덕적 성품으로 여긴다면, 예(禮)는 그러한 내면의 성품을 구체화시켜서 나타내는 외적인 덕목이다.


그러나 예(禮)는 단순히 내면의 성품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仁)이 변화한 하나의 능동적인 주체자로서 기능한다. 즉 예(禮)는 인(仁)을 배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예(禮)는 단순한 형식도, 외부적인 표현도 아니다. 이것은 창조력의 주체이며, 인(仁)을 깨닫는 방식이고, 인간의 가능성과 운명을 깨닫기 위해 행해지는 사회·우주와의 관계 맺기인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예(禮)는 도덕적 행위나 윤리적 형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신, 심지어는 우주적 질서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예(禮)는 인간을 조화의 원리와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예(禮)’는 주어진 맥락이나 상황 속에서 행해지는 적합한 행위로 이해하여야 한다. 유교는 수많은 형태의 예절 규범을 만들어 냈는데, ‘수절’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가장 적합한 행위이기 때문에 예(禮)로 인정된다. 예(禮)로서의 ‘수절’은, 유교사회의 개인적, 혈연적, 사회적 삶의 충(忠)과 성(誠)을 유지하는 기능을 가진다. 이것이 유교적 삶의 방식이며, 가치체계이고, 세계관이다.


유교에서 예(禮)란 순차적으로 세계와 우주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수절’은 인륜과 우주적 순리를 함께 유지하는 강력한 상징적 의사표시이다. 또한 개인적인 위기의 순간에 적절한 예(禮)의 행위인 수절을 지킴으로써 유교사회의 구성원은 사회와 친족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다. 나아가 의례 형식의 예(禮)는 인간과 하늘을 맺어준다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승화한다.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이기에, 예(禮)에 의해서 인간의 뜻이 하늘에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와 힌두교의 금욕이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입장에 있다면, 유교의 수절은 개인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측면 또한 고려하고 있다. 예(禮)의 형식으로서의 수절은, 또한 하늘(天)과 연계되어 있다. 수절에서 비롯되는 충(忠)과 효(孝)는 하늘을 움직이는 상징적인 힘을 지니게 된다.


‘몸’과 ‘나’에 대한 유교적 관념


유교에서 ‘몸’은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신체[體]’로서 존재하나, 또한 이 물질적 몸은 ‘나[身]’라고 표현되어지는 상징적 표식이다. 유교에서 ‘몸’과 ‘나’는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물질적 육신은 ‘나’를 담고 있는 그릇일 뿐만 아니라, 이른 바 ‘자신(自身)’이라는 타인과 구분되어지는 나의 기능 또한 가지고 있다.


힌두교와는 달리 유교의 ‘나’ 개념은 구체적인 형상이 존재한다. 유교의 관점에서 개인으로서의 ‘나’는 정신적인, 영적인, 사회적인, 공동체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물질적 형태이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간으로서도 우주적 원리로서도 ‘육신’과 ‘정신’은 구분되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나’에 대한 유교적 관점은 ‘신(身)’의 개념에서 발견되어지며, 나아가 자기 수양 또한 ‘체(體)’가 아닌 ‘신(身)’의 수양이다. 유교에 의해서 창발된 중국적 개념인 ‘신(身)’은 ‘나’에 대한 동아시아의 독특한 이해를 나타낸다.


‘나’는 개인과 사회, 육체와 정신, 고정과 상징, 그리고 인간과 우주를 반영한다. 유교의 자기 수양 개념은 참 자신이 되기 위한 모든 과정에 포섭된다. 참 인간의 완성은 우주 인간학적 과정, 즉 천지를 아우르는 근원적 원리를 수반하여야 한다. 자기 수양은 이미 잠재적으로 사회 지향적이며 우주 지향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교의 ‘개인(personal, individual)’과 서양의 ‘개인(private, privacy)'의 이해는 전혀 다르다. 유교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은 개인적인 나와 사회적인 나 사이를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구분되어질 수는 있지만 나누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나’의 행위가 ‘사회적 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나아가 ‘개인적 삶’의 수양은 ‘사회적 삶’의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자기 수양의 과정은 개인적 자아, 사회적 자아, 그리고 우주적 자아를 모두 포함하며, 유교의 자아는 개인에서 우주로 확장된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적 자아는 ‘자기 수양’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다. 우주적인 자아에 도달해가는 과정은 개인적 자아에서 시작한다. 유교의 개인적 삶이란 사회적 삶의 기초이다. 사회적 삶 속에서 진실로 ‘성(誠)’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선 개인적인 삶이 요구되어진다. 그러므로 자기 수양이 높은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그/그녀의 사적인 삶을 경계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혼자 있을 때에 더욱 경계한다.’(《中庸》 1)


여기에서 ‘혼자 있음’의 개념은 유교만의 독특한 발상이다. 현대의 서양적 관점으로는 이 ‘혼자 있음’은 ‘집단’을 벗어난 ‘개인의’ 혹은 ‘사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교적 관점에서 이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역설적으로, 《中庸》의 ‘혼자 있음’은 타인, 우주, 그리고 하늘과 맞닿는 ‘지공(至公)의 자리’이다. 문자적으로 소외를 뜻하는 ‘혼자 있음’은 타인과 우주와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


유교의 관점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우주인간학(Anthropo- cosmic)’적이다. 홀로 있을 때야말로 우리가 가족, 사회, 나아가 우주와 가장 깊이 연관됨을 느끼는 순간이다. 진정으로 ‘개인’이 되는 자는 또한 공동체적이고 우주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교의 ‘자기 수양’은 내면에 우주적인 원리를 내포한 개인의 실질적인 수양이다. 그렇기에 수절 또한 개인적인 예(禮)이지만 그 안에 사회적, 우주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禮)와 자기수양


예(禮)는 유교가 제시하는 명료하고도 구체적인 덕목의 집합이다. 인간의 적합한 행위인 예(禮)는 외부적으로 관계적 맥락에서 규정해야 할 뿐 아니라, 타인 그리고 우주와의 관계 맺음이라는 내면의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예(禮)는 공동체와 연관된 자기 이해이기에 ‘외부 지향적’이면서 동시에 ‘내면 지향적’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禮)는 인(仁)이라는 내면의 성품을 표현하는 의식이나 의례와 같은 외부적 대상과 관계되며, 또한 인간 존재의 내면적 상태에 대한 반조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계발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예(禮)의 한 모습으로써, 유교의 수절은 가족, 사회, 하늘과 관계된다. 수절을 지키는 것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상징이다. ‘예의 회복[復禮]’은 ‘사욕의 극복[克己]’을 전제로 한다. 힌두교나 불교가 이 세계[輪廻]를 벗어난 깨달음 혹은 구원을 얻기 위해 금욕을 말하지만, 유교는 이를 배척한다. 그러나 유교가 세속적인 삶이나 쾌락을 그대로 긍정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비록 유교가 현세적이고 세속적이라지만 분명 그 안에 우주적이고 신성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교의 금욕주의, 즉 수절은 진정으로 현세적인 것이다. ‘사욕(私慾)의 극복’은 ‘예(禮)의 회복’을 위한 자기 제어이다. 유교 전통은 절제와 같은 몇몇 자기 제어의 형식을 미덕으로 여긴다. 수절은 이러한 견지에서 사욕을 제어하기 위한 예(禮)이기에, 유교의 금욕주의라고 불릴 수 있다.


결 론


그러므로 유교 전통은 인간의 성욕과 금욕을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1. 유교 전통은 인간의 성행위를 우주적 원리인 음양의 인간적 현현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인 행위 자체는 인간의 구원이나 자기회복에 방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욕은 가족의 근간이 되며, 자신의 존재를 생물학적으로 연장시키는 출산의 역할을 한다.


2. 그럼에도 유교 또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제어하는 덕목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예(禮)’을 회복하고 지키기 위한 것으로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3. 유교 전통은 ‘나’를 구체적인 형태로서 이해한다. 이 점에서 유교의 ‘몸’ 개념은 성스럽고도 우주적이다. 유교의 ‘자기 수양’은 인간의 자아를 ‘신(身)’과 함께 조심스럽게 다룬다.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현세 속에서 자기 수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세계관을 따르자면, 인간 존재의 목적은 이 세계 안에서 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로부터의 ‘해탈’이나 이 세계를 벗어난 초월적인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고,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를 모색해 간다. 유교 학자들에게 인간의 이상적 모습은 《대학(大學)》에서 찾을 수 있는 팔조목(八條目)을 통하여 다다를 수 있다.


유교와 신유교는 이러한 과정 없이 ‘성인(聖人)’이나 ‘군자(君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자면 유교의 관심은 이 세계를 넘어선 깨달음이나 구원을 모색하거나 일반적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에 있지 않았다. 그들이 추구하고자한 것은 현세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삶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