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로 <벽암록> 읽기
- 무기로서의 언어, 생성의 사유
(미술사 전공.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저서로 <호모 아르텍스>가 있다.)
1. 토론
어떤 인디언은 이렇게 말한다. “백인은 공간을 소리로 채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자들이라고. 논리의 이름으로, 법의 이름으로, 혹은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말하게 한다고. 그가 보기엔, 침묵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문명인’의 언어능력이란 유아적인 무능력일 따름이다. 그런가 하면 들뢰즈는, 토론을 통해 진리나 최선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철석같은 믿음을 이렇게 비웃는다.
“현재 사람들을 맥빠지게 만드는 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아무 흥미 없는 제안들이다. 그런데 이른바 제안의 의미라는 것은 그것이 보여주는 이해관계다. 다른 정의는 있을 수 없다. 제안의 새로움이란 것도 다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얘기에 여러 시간 귀를 기울이지만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수가 많다... 그래서 토론이란 그처럼 어려운 것이다.
또 그래서 토론의 여지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코 누구에게 대고 ‘네가 말하는 것은 아무 흥미가 없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건 틀렸어’라고는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하는 것이 틀리는 법은 없다. 틀리는 것이 아니라, 바보 같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수천 번도 더 반복된 얘기이기 때문이다.”
방송사마다 각종 토론 프로그램들이 있다. 더러는 싸움닭 같은 논객이 등장해 볼거리들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대체로 토론 프로그램들은 ‘재미가 없다’. 이슈가 별 볼 일 없어서가 아니라 토론이 진행되는 방식 자체가 따분하고 식상하기 때문이다. 토론에 참가한 패널 들 중 그 누구도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깨지지 않는다. 흥분을 자제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주어진 시간 내에 준비해 온 말을 최대한 많이 하는 것. 그게 관건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그저 자기 말만 열심히 한다. 그리고 끝난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고, 변화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말길은 끊기고(言語道斷),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아예 길을 잃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들의 언어는 그저 열심히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언어고, 그런 점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실 독백이나 방백에 가깝다. 자신의 사유를 변화시키고, 타인의 사유를 배우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대화. 그런 식의 토론은 하면 할수록 허무해지는 수다를 닮았다.
토론이 재미없는 또 다른 이유는, 토론의 밑바탕엔 언제나 ‘상식(常識)’이나 ‘양식(良識)’에 대한 기본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가져오는 근거는 고작 자신의 말이 더 ‘상식적’이라는 것이다. ‘상식’이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보편화함으로써 상대방의 언어를 주변화해 버리고, ‘양식’이라는 말로 자신의 논리를 더 우월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상대방의 논리를 비하하는 방식. 그래서 들뢰즈의 말처럼 토론자들은 언제나 ‘넌 틀렸어’라고 말한다.
옳은 것 아니면 틀린 것. 많은 경우, 토론에 참가한다는 것은 기꺼이 그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에 도달하기는커녕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을 더 굳건히 다지게 될 뿐이다. 때문에 상대를 알고 싶거나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토론은 그리 좋은 방법이 못 된다.
2. 역설
상식과 양식은 언제나 일방향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항(혹은 두 방향)을 전제한다. 道인가-아닌가, 삶인가-죽음인가, 아이인가-어른인가, 여자인가-남자인가... 이러한 두 개의 선택항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 그것이 상식과 양식의 명령이다. 이러한 통념들(doxa)은, 한편으로는 인식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또 한편으로는 인식되는 대상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이고 미래의 나여야 하며, 내가 지금 보는 산은 어제도 그 산이었고, 내일도 바로 그 산일 것이라고 믿는 것. 그런 점에서 양식과 상식의 언어는 동일자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것을 믿지 않는 자, 혹은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는 ‘대화’할 수 없다.
역설(para-doxa)은 이러한 통념을 전복한다. 그것은 이항 중 하나의 방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늘 ‘동시에’ 여러 방향과 의미를 생성하는, 일종의 ‘무의미’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것.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과 저것의 경계 자체를 부수면서 모든 의미와 벡터를 긍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일한 한 점에 머무르지 못하고 언어를 진동하게 하는 분열자의 언어처럼, 또 ‘이게 뭐냐’라고 물을 때마다 언제나 다른 식으로, 다른 지평에서 대답하는 아이의 언어처럼, 그리고 선문답처럼.
<벽암록>에서 선승들은 언제나 “양쪽을 말하고 있다. 비록 양쪽을 모두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양쪽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저것이고, 그럼 저것인가, 라고 의심하는 순간 저것이 아니다. 선문답의 역설은 이것과 저것 모두를 긍정하는 것도, 혹은 모두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항기계 자체를 고장내버린다. 역설은 어떤 전제로부터의 벗어남이고, 어떤 의미도 될 수 있기 위해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역설은 도달되어야 할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진리 따위는 모른다. 토론이 그토록 간절히 얻고 싶어 하는 ‘합의’ 같은 것도 모른다. 상식적인 지반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끊임없이 부수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선문답에서는 대화자들 간의 암묵적 전제 같은 건 없다. 말로 안 되면 때려서라도, 모든 전제, 모든 인식을 철저하게 부수고 은산철벽(銀山鐵壁) 앞에 상대를 세운다. 그러므로 선문답의 대화는 사실, 대화가 아니라 전투다. 죽기 전엔 살 수 없는, 생사를 건 전투. 아무도 죽(이)지 않는 토론과 죽(이)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선문답.
선문답의 ‘모순적’ 언사들이 언어의 대립이 아니듯이, 역설은 단순한 모순형용이 아니다. ‘모순’은 언어의 대립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지만, 역설은 삶의 표면에서 우글거리는 생성들(生住異滅)을 투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럴진대, 찾아내거나 해석해야 할 비의(秘意) 같은 건 없다. 역설은 우리의 인식을 견고하게 하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테크닉이 아니라, 우리의 지견(知見)을 깨고 타인으로의 열림을 체득하기 위한 힘이다. “간절하게 그리고 몸소 얻고자 한다면 물음을 가지고 묻지 말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3. 질문
일반적으로 질문-대답은 이원론을 전제한다. 예컨대, ‘도가 있느냐’는 질문은 ‘있다/없다’라는 두 항을, ‘도(道)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道/非道’라는 두 항을 전제한다. 이처럼 질문이란 대개 이미 가능한 답변을 염두에 두고 던지는 것이다.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해’ 답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함정에 빠지게 된다.
플라톤은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를 열거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고 한다. 그것은 ‘본질’을 보여주지 못하는 단순한 지시작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디오게네스가 청어를 보여준 것은, 플라톤이 생각한 것처럼 철학의 ‘예’를 지시함으로써 철학을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청어’라는 지시작용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것,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질문 자체를 무화시켜버리려는(청어를 ‘먹음’으로써!)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벽암록>의 본칙들은 ‘묻고 답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기실 그것은 물음을 위한 것도 답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답들은 언제나 “물음을 막아버리기 위해” 주어지며, 그런 점에서 답은 궁극의 종착점이 아니다. <벽암록>의 선문답들은 질문 자체를 막아버림으로써 모든 의미작용을 일거에 쓸어버린다. 예컨대, ‘부처 = 뜰 앞의 잣나무’라는 지시작용(designation)과 ‘부처= 내 마음 속의 신념’이라는 표명작용(manifestation), 그리고 부처의 의미를 기호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은 모두 부처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나 똥막대기를 ‘지시’할 때, 그는 사실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서 부처를 찾으려는 자에게는 그 부처마저도 죽이라고 한다. 언어 기호의 구조 속에서 부처를 이해하기란 더욱 불가능하다. 말이 결국은 사유의 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의미작용을 통해 선문답을 이해하려고 들면 이내 길을 잃고 만다. 선문답에서는 말해지는 것과 의미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미하는 바가 없다. 말해진 순간 말해진 것을 버려야 한다. 일체의 상식과 양식을, 일체의 전제들을 버려야 한다.
선문답의 언어들은 격외구(格外句)다. 그것은 “틀 밖의 말”, “아무 맛이 아닌 말”로 학인의 입을 막아버리고, 개념과 인식들로 무장한 질문자들을 ‘단번에’ 무장해제시켜 버린다. 선승들은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부수기 위해 답한다. 따라서 “무릇 묻는 것은 복잡할 것이 없다. 그대들이 밖으로는 산하대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안으로도 견문각지가 있다고 여기거나, 위로는 우리가 도달해야만 하는 부처님의 경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래로는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일랑 모두 토해버려라! 그래야지만 하루 종일 행주좌와하는 가운데 한결같아지리라. 그러하면 비록 한 터럭 끝이라도 대천사계만큼이나 넓으며, 확탕, 노탄 지옥에 있어도 안락국토에 있는 듯하며, 온갖 보배 속에 있어도 초라한 띠풀집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4. 속도
들뢰즈가 말한 대로, “사람들은 질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으로 되돌아”오지만, 답을 찾기 위해 질문 자체에 매달리는 한, 한 발짝도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건은 항상 “사유하는 이의 등 뒤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질문에 매달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음알이를 내어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인식의 싹을 잘라내는 것이다. 무언가에 ‘비추어’ 해석하고 반성하는 순간, 기억으로부터 재-인식하는 순간, 주체와 대상의 거리를 통해 관조하는 순간, 우리는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그것은 사유가 아니라 기억이다. 오롯한 생성이 아니라 진부한 재인식이다. 들뢰즈가 말한 대로, 사유하기 위해 필요한 건 차라리 폭력이다. “우리가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이, 즉 그와 동시에 우리로부터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해가는 무한 운동의 폭력이 가해져야” 한다. 모든 물음을 막아버리는 선승들의 폭력, 그리고 폭력처럼 다가오는 깨달음.
선문답에서 문제되는 것은 속도다. “전광석화 속에서 흑백을 구별하고, 번뜩이는 번갯불에서 살(殺), 활(活)을 분별한다면, 시방의 논란을 꽉 틀어막아 천 길 벼랑처럼 우뚝”할 수 있으며, “전쟁터에서 승부를 내는 것과 같이 항상 보고 들음, 소리와 색깔을 일시에 틀어막아 꽉 움켜들어야” 주인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일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생각하거나 방편에 걸려 머뭇거리다가는 목숨을 잃는다. 번갯불이 번쩍, 하는 찰나에 모든 방향을 긍정/부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 ‘찰나’에는 주체나 대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비인칭적이고 前개체적인 노마드적 언어. 폭력처럼, 폭력의 속도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 선문답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선문답은 대개 유머를 동반한다. 모순의 원리를 따져 물으면서 점점 더 깊이 하강하는 아이러니와 달리, 유머는 표면 위에서 순간적으로 번쩍하는 사건의 폭발이다. 틈을 허용하는 것은 유머가 아니다. 상식과 양식을 작동시키는 것 또한 유머가 아니다. 유머는 속도를 생명으로 하며(생각하고 웃어야 한다면 웃음은 얼마나 피곤한 일이 될 것인가), 통념을 배반하고 전복한다. 앞에서부터 다가오는 게 아니라 예기치 못한 순간 갑자기 뒤통수를 내리치면서 인식의 지반을 흔들어놓는다. 때리고 고함치는 등의 액션 역시 ‘나중에’ 반성하고 비판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단번에’ 통념을 뒤집어엎는 폭발들이다. 생성과 전복으로서의 사유의 본성을 이보다 더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5. 훔침
“혜능은 길들여진 우리의 허튼 집착을 훔치는 노련한 도둑이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가슴에 숨겨 두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혜능의 ‘마음’이 훔쳐낸 장물이라는 것을 아는 또 다른 도둑이라야 그의 의중을 간파할 수 있다. 이것을 두고 ‘도둑만이 도둑을 알아본다’고 한다. 그 ‘마음’이 장물로 드러나 보이는 순간 도둑 혜능의 정체가 서서히 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흔히 탁월한 선사를 도둑에 비유한다고 한다. 스승은 말해주는 자가 아니라 말해주지 않는 자이며, 주는 자가 아니라 훔치는 자이다. 다시 말해, 선문답은 상대방의 인식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갖고 있는 모든 인식의 전제를 뺏기 위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훔침’은,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이중의 생성’이다.
클레르 파르네와의 대담에서 들뢰즈는 말한다. 밥 딜런처럼 강의하고 싶다고, “딜런처럼 갑자기 광대의 가면을 쓰고, 각 세부가 조율되어 있으면서도 즉흥적인 연주를 하는 기법으로 강의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들뢰즈가 이렇게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강의방법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는 밥 딜런의 연주에서 그 독특한 리듬과 억양을, 즉흥성을, 깊이를, 훔.친.다. 무언가가 해석되기도 전에, 재빨리, 단번에,(훔침의 기본!) 들뢰즈는 밥 딜런의 매력을 훔쳐내는 것이다. 들뢰즈의 밥 딜런-되기. 그런데 들뢰즈가 밥 딜런이 되는 이 찰나에, 들뢰즈와 마주친 밥 딜런은 들뢰즈가 된다. 밥 딜런의 들뢰즈-되기. 이것은 들뢰즈와 밥딜런의 상호모방이나 동화가 아니다. 들뢰즈가 밥 딜런의 연주와 마주치는 순간, 들뢰즈가 다른 것으로 되는 생성과 밥 딜런이 다른 것으로 되는 생성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것과 저것의 마주침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사이(‘과’), 즉 마주침이라는 사건 자체다. 우리가 무언가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은, 즉 훔치고 훔침을 당하는 것은 모두 구체적인 마주침의 순간에 일어난다.
선문답은 마주침의 순간(시절인연)을 오롯이 표현하고 있다. 좋은 도둑이 훔칠 대상에 대해 그러하듯, 탁월한 선승들은 단 한번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완전히 파악한다. 그래서 질문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그 질문을 막아버린다. 상대방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상대의 균형을 뺏는다.
이때, 자신이 무장해제 당했음을 알지 못하고 또 다른 무기를 찾아 머뭇거리는 질문자들은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덕운비구를 찾아 헤맸던 선재동자처럼. “묘봉고정(妙峰孤頂)이란 한 맛으로 된 평등한 법문이다. 낱낱이 모두가 진실하고, 낱낱이 모두가 완전하며, 득실, 시비가 없는 곳에서 뚜렷이 드러났건만 선재가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산스님과 유철마의 일화에서처럼, “기연마다 서로가 맞고, 구절마다 서로 투합”하는 마주침에서는 말과 말 사이에 어떤 머뭇거림도 없다. 거기서 파생하는 의미는 언어의 작용이 아니라 마주침의 작용이다. 그들은 서로의 사유를 표절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의 사유를 훔친다. 그리고 웃는다.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은 역시 늘 속도의 문제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알아차려야 하고” 알아차리자마자 떠난다. 여기에는 어떤 인식작용도 끼어들 틈이 없다. 사유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이 되는 생성의 문제이며, 배움은 모방이나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훔치고 달아나는 문제라는 것. 무시무시한 가르침이다.
6. 사유
지배적인 사유는 진리에 대한 의지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우리 모두가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에 동의한다는 암묵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진리라는 종착지에 이르고자 하는 철학. 하지만 철학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나 선한 의지가 아니라, 이런 전제들을 부정하고 뺏는 데서 출발한다. 비철학적이라는 비난을 들을지언정, 이런 이미지들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이는 곳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그래서 철학은 차라리, “침울하게 하는 데 이용된다. 아무도 침울하게 하지 않고, 아무도 언짢게 하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선문답의 목표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는 게 아니다. 진리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그런 진리를 실체화하고 언어로 표상화하려는 시도를 부정한다. 진리는 아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서, 화두를 붙드는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일대사 인연은 전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는 대혜 스님의 말은 아마도 그런 뜻이리라. 하지만 그 말할 수도, 전할 수도 없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전히 언어라는 방편이 필요하고, 배움이 절실하다. “궁극의 경지는 언구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구가 아니고서는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로써 말을 쳐내기.
언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지만, 언어를 통해 다른 사유로 이행해 갈 수는 있다. 번번이, “항구에 닿은 줄 알았는데, 바다 한가운데 다시 내던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방식으로. 선문답의 격외구들은 관념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언제나 신체에 물질적으로 작동하는 구체적 방편들이다. 말은 살아 있다. 그리고 펄떡거리며 살아 있는 말이라야만 상식과 양식을 넘어 다른 사유를 작동시킬 수 있다.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해야지 사구(死句)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활구에서 알아차리면 영겁토록 잊지 않겠지만, 사구에서 알면 자신마저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선문답의 언어들은 싸우지 않고도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며,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사람을 죽인다. 그러므로 “말은 반드시 무쇠를 단련하는 집게와 망치 같아야 하며, 낚시와 자물쇠처럼 끊기지 않고 한결같아야” 한다. “말하자마자 등줄기에 몽둥이질을 하고, 곧 주둥이를 틀어막아 밀쳐 내버려야만이 비로소 간절하게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문답의 언어는 진리를 설명하는 대신,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주파하고 안정된 존재의 지반에 지진을 일으킨다. 그리고 묻는다. 이대로 살(죽을) 것인가, 다르게 살(죽을) 것인가. 사유는 생사(生死)의 문제다. 그리고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언어는 살리는 무기가 될 수도, 죽이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선문답에서는 말 그대로, 말이 무기다.
출처 http://budrevi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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