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불교예술, 진여에 이르는 방편인가 사도인가

slowdream 2008. 2. 20. 18:23
 

[이도흠 교수의 불교 미학에세이]1. 연재를 시작하며


불교예술, 진여에 이르는 방편인가 사도인가



만약 우주 여행을 하다 외계인을 만났을 때, 너희 지구 문명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사람들, 그들이 가진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답이 나오겠지만, 나는 단연코 자비를 포함한 ‘사랑’과 ‘예술’이라고 답할 것이다.


켈트족의 전설에 따르면, 가시나무 새는 그지없이 길고 날카로운 가시에 자신의 목을 찌르고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생을 마친다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처절한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가시나무 새는 왜 자신의 생명을 바쳐 노래를 불렀을까?”라는 의문에 휩싸인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간단히 말하면, 노래가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는 가시나무 새와 같은 예술가들을 숱하게 만난다. 꿈꾸거나 상상한 것을 형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지극히 거룩한 신성에 다가가기 위하여, 자신이 보고 체험한 것을 다시 재현(再現)하기 위하여, 무의식의 저 편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을 승화하고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인간은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간혹 더 많은 사냥물이나 돈을 얻기 위하여 예술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예술은 ‘예술다움’에서 멀어졌다. 예술은 이를 떠나 ‘진리, 거룩함, 아름다움, 상상과 무의식의 근원’에 이르고자 할 때 더욱 예술다움을 띠었다. 하여 거의 본능적으로 생존에 급급하던 구석기 시기에도 사냥감과 관계없이 미인상을 새겼고,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도 전장에서 핀 인간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그런 예술작품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떤 물질이나 양식으로도 채울 수 없는 황홀감이나 마음의 만족상태에 빠진다. 형식의 아름다움에만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읽고 평생의 좌우명을 삼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까지의 삶을 철저히 반성하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한다.


삶의 비극, 죽음에 대한 불안과 사후세계에서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경이,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과 이를 초월한 완전의 추구, 무의식적 상징과 욕망 등이 어우러져 절대자와 종교가 만들어진다. 초기의 종교는 간단하였다. 절대자에 대한 숭배를 통한 제재초복(除災招福)과 사후세계의 보장이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초월적 존재인 신을 경배하는 의례를 행하면서, 현세에서는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불러주고 내세에서는 천국에서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철학이 더해지고 역사의 지층이 쌓이면서 종교는 더욱 복잡하고 체계적이며 심오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차축시대(the Axial Age)와 그 직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공자와 노자, 석가모니와 예수, 마호메트 등의 성인과 현인이 태어나 전 시대의 미신과 주술, 타부를 해체하고 진리와 지혜의 말씀을 전하면서 종교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성인들은 궁극의 진리를 말씀하셨고 그것은 경전(經典)으로 엮여졌으며, 이것은 인간이 2,000여년을 두고두고 읽고 해석해도 다다를 수 없는 텍스트가 되었다.


중세란 한 마디로 말하여 각기 일정한 장(場) 안에서 지배적인 경전 텍스트의 해석에서 비롯된 가르침과 신앙이 세계관이 되고 이데올로기로 작용을 하고 모든 집단과 개인의 사고와 실천과 표현의 준칙으로 강제되던 사회다. 이 장 안에서 예술은 거룩한 세계로 다가가기 위한 방편, 혹은 절대자를 향한 동경으로 한정된다.


기독교가 예술을 압도하던 시대에, 성상파괴주의자들이 말하였다. 지상 최고의 장인이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형상을 지극히 거룩하고 아름답게 빚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고 훼손하는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성상옹호론자들은 이에 반박한다. 무지한 자들은 말씀만으로 신성을 접할 수 없다. 설사 그 형상이 신성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매개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를 수 있으니 성상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의 성서’이다 라고.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세 가지 종류의 침대가 있다네. 첫째, 완전한 현실성 속에 존재하는 침대. 그건 아마 신이 창조하셨겠지. (…) 둘째는 목수들이 만든 침대라네. (…) 그리고 셋째는 화가가 제작하는 침대. (…) 따라서 화가, 목수, 신이 바로 이 세 종류의 침대의 제작자인 셈이지.”라고 말하였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하여 이데아는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나 현실이라는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는 변화무쌍하고 덧없으며 그래서 참이 아니라 거짓이기에 이 가짜를 배격하고 참된 세계, 이데아로 상승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여기에 눕자마자 잠이 오고 잠깐만 잠을 자도 모든 피로가 사라지고 좋은 꿈만 꾸는 이상적인 침대가 있다. 이 이데아의 침대를 모방하여 목수가 침대를 만든다. 이데아의 침대에 이르려 하지만 그 어떤 훌륭한 목수도 그런 침대를 만들지 못한다. 화가는 그 침대를 다시 모방하여 그림으로 그린다. 지상 최고의 화가라도 이데아의 침대는 물론 목수의 침대와 ‘같은’ 침대를 그리지 못한다. 그림은 이중모방이므로 허위이다. 그렇듯 예술은 허위이고 시인은 거짓을 말하는 자이니, 공화국에서 시인을 영원히 추방하고 철인(哲人)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반론을 편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은 운문을 쓰느냐 아니면 산문을 쓰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다시 말해 이러이러한 성질의 인간은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정부의 보고서나 역사학자의 문건과 소설 <봄날>, 영화 <박하사탕>이나 <화려한 휴가> 가운데 어느 것에서 더 광주의 진실을 접하는가?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예술은 대상, 세계의 피상적인 모습만 복사하고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 뒤에 숨어있는 내적 세계까지 모방하므로 현상계만이 아니라 실재계를 모방한다. 예술은 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의 삶의 보편성을 드러내며, 따라서 진리를 드러낸다. 침대와 흡사한 사진은 물론이거니와 침대 자체보다도 잘 그린 침대 그림이 침대의 ‘침대다움’을 더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대상, 대상에 대한 미적 체험(aesthetic experience)과 표현, 예술가와 독자라는 네 요소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불교는 어느 하나 남김없이 네 가지를 모두 부정한다. 대상은 자성(自性)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의해 빚어진 것으로 공(空)이다. 말이든 아니든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고 지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도 마음도 아니기에, 진여실체(眞如實體)는 말을 떠난 무엇이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얽혀 있어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조건에 얽매이며 존재는 여러 요소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기에,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는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는 것이기에 모든 대상은 허상이며 나[我]는 없다.


언어와 형상은 물론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불교 철학에서 보면 예술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석굴과 사원, 불상과 탑, 탱화와 불교 공예품, 범패와 선시에 이르기까지 동양예술 가운데 압도적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고 질적으로도 풍성한 것이 불교예술이다. 사는 곳에서 조금만 움직여 가까운 절에 가면 수많은 불교 예술품과 마주친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모순과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미학을 표방하는 책과 논문을 읽었지만 해갈이 되지 않았다.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지엽적인 언급은 없지 않았으나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본격적인 글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한 종류의 책들은 미학으로 전변하지 않은 채 불교철학의 일정 부분을 그냥 뚝 떼어 정리하였다. 또 한 종류의 책들은 서양의 미학이론에 불교 용어를 덧씌워 놓은 것으로 머물고 있었다. 한 종류의 책들은 불교예술작품에 대한 인상비평이었다.


스탈린은 교조적인 기계론의 맑시즘을 고수하면서 이에서 어긋나는 것들을 모든 ‘이단’으로 단죄하여 처형하거나 강제노동수용소(Gulag)로 보냈다. 그때 그 반대자들이 마르크스의 원전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오히려 마르크스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임을 논리적으로 입증하여 스탈린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석가모니께서 <금강경(金剛經)>,[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서 “형상으로 나를 보면/음성으로 날 구하면/요게 바로 사도(邪道) 행함이니/여래 볼 수 없다라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게송을 부르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일 불교 교리에 충실한 한 스님이 이런 논리를 근거로 절에 들어와 사도라며 국보급 불상과 불화들을 모아 태우려 할 때, 그 스님을 불교교리로서 설득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가 무엇인가. 찬란한 불교예술품에 대한 미학적 해설, 동양 미학의 하위범주로서 불교 철학의 미적 체계에 대한 정립도 좋지만,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불교에서 예술로 형상화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타당성을 갖는가에 대하여 먼저 따져보련다. 불교 경전(sutra)과 논(sastra) 등을 텍스트로 하여 이것을 촘촘히 분석한 다음, 미적 원리, 혹은 형상과 언어를 긍정하는 진술을 찾아내어 그것을 미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미학이론의 핵심이자 출발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아울러, (서양)의 미학이나 예술의 관점이 아니라, 이렇게 예술적 형상화를 허용하는 불교 논리에 따라 불교 예술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간략하게 제시하고, 이어서 이 이론에 따라 불상, 불화 등 작품을 놓고 이에 대해 불교 교리에 따라 감상하고 비평하는 법을 제시해보련다. 근기가 모자라 의욕만 앞설 때 독자들의 질정을 바란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