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불교예술의 철학적 타당성-①인언견언(因言遣言)의 논리

slowdream 2008. 2. 26. 03:47
 

[이도흠 교수의 불교미학에세이]


2. 불교예술의 철학적 타당성-①인언견언(因言遣言)의 논리


언어 밖 진여실체니 진리 담은 작품이란 당초 불가능하다?


나는 오늘 봄날의 산자락을 답청한다. 코숭이를 돌아가는 길가에 핀 산수유가 아름답다. 아직 겨울 색이 짙은 산야를 연노란 점들로 수놓아 봄의 빛과 기운으로 가슴을 채우게 하는 그 질박하면서도 당찬 모습에 흠씬 빠져 있다. 그 꽃의 이름조차 모르던 시절에도 그 꽃은 아름다웠다. 그 꽃이 몸에 좋은지 좋지 않은지, 그 열매를 먹으면 몸이 좋아지고 열이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던 시절에도 산수유는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그처럼 미란 목적과 이해관계를 떠난 미 그 자체다. 산수유의 미를 그 자체대로 체험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산수유가 무엇을 말하려는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 꽃잎과 암술과 수술의 조화, 꽃잎의 연노랑빛과 푸른 하늘과 봄빛의 대조에 주목한다. 다시 말하여,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언어는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지만 그 자체는 아니다. 목어는 물고기처럼 생겼지만 나무일 뿐이  

     고   그것마저 썩어버리면 나무라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속엔 분명 부처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헤겔의 미학과 칸트의 미학


어느 날 나는 그 산수유를 보면서 예전과 다른 감동에 휩싸였다. 그 길의 중턱쯤 무덤가에 있는 시인을 좋아하던 소녀가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자 지상에서 마지막 일로 이 길을 따라 산수유를 심었다는 것이다. 반대의 예도 존재하리라. 그 산수유 길을 따라가면 고문과 학살과 부조리를 닥치는 대로 자행한 군사 독재자의 집이 있다고 할 때도 산수유의 아름다움에 취해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산수유를 보면서 봄날의 즐거움에 들뜨고 미음완보하며 첫사랑 소녀를 떠올릴 때 그 꽃은 더 아름답다. 이처럼 산수유의 미추(美醜)는 산수유와 관련된 의미들과 무관하지 않다. 아름다움은 대상 자체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산수유의 미를 총체적으로 체험하고자 할 때 우리는 들국화 그 자체와 함께 들국화가 무엇을 말하려는가에 귀를 기울인다.


산수유를 보면서 황홀감이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감동한 적이 있다. 산수유 노란 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라는 진리를 그 속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 산수유는 ‘숲속의 경전’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가이다.


서양의 미학은 크게 둘로 갈린다. 한편엔 헤겔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칸트가 있다. 헤겔의 미학(Hegelian Aesthetics)에서 보았을 때 예술은 진리를 드러내는 방편이다. 우리는 목사의 설교보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더 감동을 하고 더 인간다운 삶을 살려 노력하게 된다. 예술은 작품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려 그 사람이 그 메시지를 해석하며 진리를 접하고 나아가 참다운 삶을 살게 하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내용이며, 독자는 ‘무엇을 말하는가’에 주목하며 작품을 읽는다.


이 입장에서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진리를 효과적으로 담는 실천이다. 작가는 어떻게 하면 올바른 진리를 작품 안에 담을까, 그 진리를 수용한 사람들이 타락한 세상에서 좀 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게 만들까에 대하여 고민한다. 작품의 독서와 감상행위란 작품에서 그 진리를 발견하는 행위다. 비평이란 작품에 머물지 않고 작품이 생산되고 수용되는 맥락[context], 곧 작게는 작가의 의도나 세계관에서 크게는 이데올로기, 사회문화, 사회경제적 토대 등과 관련지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실천행위다.


칸트의 미학(Kantian Aesthetics)에서 보았을 때, 예술은 목적과 이해관계를 떠난 그 자체(Art for art itself)이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독자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감상하고 미적 황홀감에 빠진다. 이 입장에서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예술적 영감을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작가는 진리나 세상이 아니라 그 영감을 어떤 형식에 담아 얼마나 아름답게 빚어낼까에 대해 고민한다. 작품의 감상이란 작품을 만나 미적인 아름다움에, 그것이 주는 만족감이나 황홀감에 빠지는 행위다. 비평이란 오직 작품 그 자체[text]만 놓고 그것이 어떻게 하여 아름다운가를 해명하고 평가하는 행위이다.


불교예술이 가능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헤겔의 미학이다. 헤겔의 미학을 저버리면 예술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포장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칸트의 미학을 무시할수록 그 예술은 아름다움에서 멀어진다.


당신은 미인이나 뛰어난 경치를 대했을 때 거기서 무슨 의미를 읽어내려 하는가. 대다수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에 취할 뿐이라고 답하리라. 모더니스트가 보았을 때, 내용과 메시지를 중심으로 예술을 창조하는 방식은, 더 나아가 현실에 관여하여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는 예술을 사상과 진리의 전달도구, 혹은 이데올로기의 선전물로 삼는 행위다. 예술의 목적은 지식과 정보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드러내 이를 지각과 감각으로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예술의 기법은 대상을 낯설게, 형식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감동은 형식의 아름다움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여 자비를 베푼 보살들이나 폐허로 변한 역사 유적지를 보고 감동을 한다. 리얼리스트가 보았을 때, 내용과 메시지를 버리고 형식의 아름다움에 몰두하는 예술은 인간 구원이라는 예술의 목적을 망각한 포장물에 불과하다. 리얼리스트가 추구하는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미적 만남을 통해 개인의 삶을 성찰하며 각자의 성정(性情)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 자신의 주변의 현실을 돌아보며 더 나은 세상과 삶을 꿈꾸게 하고자 함이다.


최고의 예술, 형식-내용 조화


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형식은 단순히 의미와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포장물이 아니라 이것을 가장 집중적으로 응축하는 방식이다. 형식이란 내용이나 의미를 가장 극적으로 추상화한 것이자 다양한 요소나 질료 등을 통일적으로 관련시켜 구조에 연결을 짓는 것으로, 내용의 여러 요소를 조직하고 구성하며 표현하여 짜내는 구조적 통일체이다. 예술에서 ‘중요한 형식’은 항상 내용적이다. 형식을 내용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은 형식을 파괴하는 것이며, 내용을 형식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은 형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일러 진정한 미인이라 할까. 유가의 미학은 얼굴이 너무도 못 생겨 과거에 계속 낙방하자 자살한 종규가 선한 마음을 가졌으므로 아름답다 한다. 헤겔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헤겔이나 유가의 미학은 얼굴이 추하더라도 마음이 착한 여자를 미인이라 한다. 반면에 칸트는 얼굴이 이뻐야 미인이라 한다. 하지만, 대다수 남자들이 얼굴이 이쁘고 몸매가 아름다우면서도 마음이 착한 여자를 이상형으로 꼽을 것이다. 이것으로 만족하는가. 착하고 예쁘지만 어딘지 모르게 천박한 인상을 주는 여인은 또 어떤가.


진정한 미인이란 겉모습은 못 생겼지만 마음이 선한 여자(내용이 형식을 앞선 예술)도, 마음은 나쁘지만 뭇 남성을 호릴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형식이 내용을 앞선 예술)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름다우면서도 마음이 선한 여자(형식과 내용의 통일을 이룬 예술)도 아니다. 마음이 선하고 겉모습이 예쁘면서도 지적이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 그 여인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아닐까. 예술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예술이란 내용과 내면형식, 그리고 외면형식 모두 아름다우면서, 내용이 내면형식으로 표출되고 다시 외면형식을 형성하며 외면형식이 내용을 더욱 뒷받침하고 강화하며 내용과 내외면 형식이 모두 서로 깊은 연관과 통일을 이룬 것이다. 공자의 말대로 문식(文飾)과 실질(實質)이 함께 빛나는 것이야말로 좋은 예술이다.


예술작품은 표현을 전제로 한다. 말과 글만이 아니라 도상이나 구조도 진리의 표현수단이라는 점에서, 그림이나 패션도 감성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언어로 읽어서 해석하고 감상하기에 넓은 범위의 언어이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 말로 할 수 있다면, 말을 이용하여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도(邪道)다. 그럼 불상 등 작품을 통해 무엇인가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불교예술이 어떻게 가능한가.


표현한다면 그것은 허위다


불교가 언어도단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선언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사랑한다 말을 하지 못한다. 지극한 사랑이 100이라면,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사랑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80-9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여실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머리로 헤아릴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진여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언덕 저 너머에 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가히 도라고 하는 도는 늘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말처럼, 부처님의 마음이나 진여실체는 언어를 초월한 곳, 일체의 언설을 끊은 곳에 있기에 불가언설(不可言說)이다.


다음으로 언어 자체가 자성(自性)이 없이 연기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소쉬르나 데리다와 통하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빌리면, “언어에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나무’는 스스로는 아무런 의미도, 본질도 갖지 못한다. 이는 ‘풀’과의 ‘차이, 관계, 구조’ 속에서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 ‘나무’의 의미는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고 규정되지 않는다. 이는 다른 것과 관계에 의하여 ‘푸르른 이상, 하늘과 땅의 중개자, 자연, 부드러움’ 등으로 의미망을 넓히고 나무를 정의한 글 속의 ‘목질, 줄기, 가지다, 다년생, 식물’의 기의(signifi??) 또한 맥락에 따라 기표(signifiant)의 사슬 속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를 연기(延期)한다. 이렇듯 언어는 공간화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지연되어 무의미를 생성하기에, 세계는 이(diff??)ence)가 드러난 것, 이 체계 속에 쓰여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인데 대상 자체가 자기 동일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란 것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세계를 분별한 것에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인가.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를 천 개, 만 개로 나누어 극도로 진한 주황, 극도로 흐린 주황으로 나눈다 하더라도 그는 색 자체에 이르지 못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책상은 책상인가. 시간만 개입시키면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수년의 세월이 지나 접합부분만 떨어져도 그것은 목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마저 썩어버리면 나무라 할 것도 없다. 이처럼 대상은 찰나적이고 자성이 없이 연기에 의해 드러난다. 이는 인간이 마음에 따라, 자신의 인식체계나 범주 체계로 파악한 허상이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