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불교 예술의 철학적 타당성 - 인언견언(因言遣言)의 논리 ②

slowdream 2008. 3. 4. 16:48
 

[이도흠 교수의 불교 미학에세이]


3. 불교 예술의 철학적 타당성 - 인언견언(因言遣言)의 논리 ②


형상은 실체 담은 그릇…강 건너는 뗏목과 같아


 

     <사진설명> 형상화된 불상은 분명 불법을 왜곡하고 은폐하지만 그 속에 담긴 창조성은 불법의 한 자락을 드러내는 방편이 된다.



불법(佛法)이란 인간의 말이나 의식으로 다다를 수 없는 진여실체(眞如實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는 “가히 도라고 이르는 도는 늘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며 도(道)의 ‘헤아릴 수 없고 다다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도가(道家)의 사유를 만나면서 이 점이 더욱 심화하였다. 마침내, 선(禪)에 이르러서는 불입문자(不立文字)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한다.


이처럼 궁극의 진리란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러면 불가사의한 진여실체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답은 모든 말을 버리고 선정(禪定)에 몰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진리에 이르고 이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보편적인 방법 또한 언어이다.


내가 궁극의 진리란 말을 떠난 것이라는 뜻으로 강의실에 들어가 세 시간 동안 천장만 바라보다 나온다면 과연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딜레마에 대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이런 뜻인 까닭으로 여래는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이 아닌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가?’라고 늘 말씀하셨다.”라 말한다.


말로 말을 떠나는 역설


석가모니가 펼치고자 하는 법은 언어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설법이란 방편을 통하지 않으면 이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설법을 방편으로 이용하되 이를 듣는 이들은 설법 너머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 비유로 말하면, 법이란 강 건너 저 편에 있는데 뗏목(설법)을 이용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으므로 이를 이용하되, 강 너머에 도착하면 뗏목에서 내려야 언덕(법)에 이른다. 그렇게 깨달은 법도 집착이므로 또 다시 이를 버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뗏목(설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 없다.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켜야 한다. 대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을 보고 달이 없다느니, 달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언어기호(손가락)로 진리(달)를 지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언어기호의 역할은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끝날 뿐이지 그것이 세계를 대체할 수 없다. 언어기호는 세계를 왜곡시키기에, 언어기호는 세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지시를 받은 사람은 언설을 떠나 세계를 세계대로 관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여 세계 자체를 그 실상(實相)대로 언어기호로 표현하거나 전달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존재를 실상으로 착각하는 중생들에게 그에 대한 깨달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언어기호는 한 방편으로 필요한 것이다. 진정하고 완전한 사랑이 100이라면,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사랑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 사랑의 80 내지 90%밖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마음으로만 사랑을 담고 있을 수 있는가. 가끔은 그것이 왜곡이고 모자람인 줄 알면서도 “사랑한다” 말해야 상대방은 사랑의 충만함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의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손가락을 통하여 달에 이르는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원효가 오랜 동안 고민한 모양이다. 왕의 사위란 지위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누더기 옷을 입고 박을 두드리며 당시에 가장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곁으로 간 원효는 그들을 해탈에 이르는 길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말을 버려야 진여실체에 이르지만 과연 무명(無明)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저 우매한 중생들을 어찌 구제한단 말인가. 말이 설사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을 왜곡한다 하더라도 당장 불난 집에서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기서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원효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깊이 찬탄하는 말이다. 이 말 다음의 말들은 따로 이해하는 말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언어와 문구를 받아들이고 나중에 그 뜻과 이치를 헤아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부처님의 말씀, 궁극적 진리는 너무도 깊어 우리의 의식이나 언어기호를 통하여 헤아릴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언어기호가 가진 지시적 의미를 먼저 받아들인 다음 이에서 머물지 않고 그 지시적 의미를 넘어서는 뜻을 헤아린다면 불가사의의 한 자락이라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선령언구(先領言句) 후령의리(後領義理)의 방법에 대하여 이어서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문어(文語)가 아니라 의어(義語)라는 것’은 말이 마땅히 진실한 뜻에 맞아 단지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어가 아닌 문어(文語)’란 것은 말이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이기에 진실한 뜻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뜻의 이치와 원리에 맞게 말하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은 곧 뜻의 말이며, 뜻이 없는 범부의 말과는 다른 것이다.”


‘문어(文語)’란, 일상 언어의 속성에 집착해 낱말이나 문맥에 얽매이는 세속의 말, 상투적 의미로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의어(義語)’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문맥을 넘어서서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드러내는 말을 이른다. 즉 문어는 세계를 왜곡하지만, 우리는 의어를 통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고, 또 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달의 실체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달을 ‘지구의 위성’이라고 하는 데서 떠나 ‘관음보살’이나 ‘화엄의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이라 할 때 인간은 좀 더 달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때문에 언어도단과 불립문자로 언어기호의 공성(空性)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다. 언어기호가 세계의 실상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중생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정확히 말하여 중생이 존재를 세계 자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도록 하는 방편은 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가 아무리 높이 뛴다 하더라도 우주에 이를 수 없지만 장대를 이용하면 더 높이 날아 우주에 좀 더 가까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 장대를 이용한 뒤에는 장대를 놓아야만 땅의 굴레를 넘어 잠시나마 비상할 수 있다.


왜곡하는 말과 드러내는 말


인언견언론을 예술론으로 전환하면, 이는 하이데거 미학과 통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기원(The Origin of the Work of Art)』이란 책에서 “예술의 본질은 작품 안에서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정립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정립이란 존재자의 존재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밝힘 가운데로 나서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미적 기교나 기술 등과 관련시키던 입장에 반발하면서 이를 진리와 연관시킨다. 그가 예술 작품에서 주목하는 것은 개별적인 존재자를 어떻게 재현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사물들의 본질을 어떻게 드러냈느냐는 점이다. “예술작품은 자신의 독자적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 보인다.” 우리가 고호의 그림이나 횔덜린의 시에서 삶의 진리를 읽어내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듯, 예술작품은 숨어 있던 사물의 본질을 탈은폐(Entbergen)시켜 그 안에 담긴 진리를 밝힘 가운데로 나오도록 스스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술작품엔 세계(world, die Welt)와 대지(earth, die Erde)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같은 책에서 “세계의 건립(setting up, aufstellen)과 대지의 설립(setting forth, herstellen)은 작품의 작품 존재(the work-being)에서 두 가지 본질적 성격이다. …… 세계는 대지 위에 근거하면서도 대지를 극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헤겔에게 세계란 있는 그 자체이기에 해석의 대상이었다면, 하이데거에게 세계란 “세계 그 자체를 세계화하는 존재와 진실 사이의 필연적 연관”이기에 존재가 새로이 세계를 해석하고 이를 역사적으로 표명함에 따라 열려진 대상이다. “세계는 존재자의 총체성, 존재자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영역, 현존재가 그 안에서 실제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바로 그것, 세계성(worldness)의 개념을 의미한다.”(『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 세계를 세계화하는 것과 세계를 끌어들여 은폐하려는 것은 예술 작품의 본질적 특성이다. 양자는 서로 다르지만 분리될 수 없어서, 세계는 대지를 바탕으로 하되 이를 극복하여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고, 대지는 세계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여 그곳에 머물며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숨기게 한다. 세계는 존재를 개시하려 하여 어떤 폐쇄나 닫힘도 용납하지 않지만, 대지는 은폐하고 머물려 한다.


그러니, 세계가 의어라면 대지는 문어다. 들에 홀로 핀 들국화를 외롭다고 노래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여인으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금붕어 없는 어항이요, 팥 없는 찐빵이요” 식으로 쓰여 있는데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감동하여 그 여인을 만나러 달려가겠는가? 정반대일 것이다. 이 편지가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상투성에 반역을 일으켜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는 양식이다. 지상 최고의 장인이 지상 최고의 불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여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불상을 부정하거나 파괴할 일이 아니다. 문어류의 상투적인 불상은 불법을 왜곡하여 세계를 은폐하고 대지를 드러내지만, 의어류의 창조적이고 불법의 진리를 제대로 담은 불상은 세계, 혹은 불법을 드러내는 ‘방편’이 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한자락으로 가는 길


우리는 의어의 불상을 통해 그 조형이 주는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그 속에 담긴 진여실체를 깨달을 수 있다. 불교 미술에서 형상에 치우쳐 감상하고 이해하는 것은 불교철학에 반하는 것이다. 형상은 진여실체로 가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형상을 무시하고 부정해서는 안 된다. 형상 자체가 진여실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하여 세계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에서 논한 대로 아무리 새로운 의미를 밝힌다 하더라도 언어기호로 말하는 순간 이는 세계를 왜곡시키게 되어 있다. 의어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실체를 밝힌 것이라 하더라도 곧 문어로 전락한다. 이처럼 우리가 궁극적 진리를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는 더 더욱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의어를 통해 그것의 한자락을 엿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진리의 본체의 지극한 한 부분이기에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된다. 석굴암의 본존불이나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 1299-1375)의 선시를 방편으로 삼아 불법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지만, 그 깨달음조차 해체할 때 진여 실체에 이른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