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상에 대한 부정의 부정 『조론(肇論)』 상
‘가유’ 인정해 형상화 길 열어
예술은 대상을 바탕으로 한다. 대상이 없으면 이에 대한 사유나 표현이 없다. 예술에서 모든 생각과 상상의 원천은 대상이다. 꽃이 없다면 꽃의 아름다움을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으며, 별이 없다면 별을 보고 현실의 고통을 희망과 이상으로 승화시킨 시도, 그를 바탕으로 천사들이 별나라를 오고가는 상상도 존재하지 못한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봉은사 미륵대불의
발 아래에서도 찰나의 순간마다 회통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대상을 부정한다. 대상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이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공(空)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 의존하며 서로 조건이 된다. 『잡아함경(雜阿含經)』의 말씀대로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공=허무’에 대한 승조의 반박
삼라만상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내 눈으로 보면 내 앞에 분명히 목각인형이 있으나, 그것은 진실로 존재한다 말할 수 없다. 시간만 개입시켜도 그것은 목각인형이 아니다. 나무가 썩어 인형의 형상만 잃어도 그를 목각인형이라 하지 않는다. 이렇듯 대상은 찰나에 스쳐가는 것으로 동일성을 갖지 못하기에 공이다.
대상은 마음에 따라 빚어진 것이기에 공이다. 우리 눈 앞에 있는 하늘과 저 바다와 빛나는 태양과 별은 모두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 범주를 나누고 이에 따라 명명한 것이다.
이런 불교의 대상에 대한 관점은 궁극적인 진리인 도(道)마저 도라고 이르는 도는 도가 아니라는 노장사상을 만나 더욱 강화한다. 진(晉) 나라 때 도항(道恒) 등은 노장(老莊)을 바탕으로 공(空) 사상을 허무적인 것이나 극단적인 존재 부정의 사유로 끌고 갔다.
이에 반론을 제기한 자가 바로 후진(後秦) 시대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제자 승조(僧肇: 378~414?)다. 그는 중도(中道)사상을 바탕으로 이런 경향에 대해 반박하였다. 이것을 결집한 것이 바로 『조론(肇論)』이다. 조론은 현상론으로서 물불천론(物不遷論), 본질론으로서 부진공론(不眞空論), 양자에 대한 인식론으로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이를 통한 수행과정과 그 결과론으로서 반야무명론(涅槃無名論) 등 네 편의 논문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중도를 바탕으로 본무론(本無論) 등 대상에 대한 극단적인 공관을 비판하고 부정한 물불천론과 부진공론에서 대상을 긍정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나고 자라고 죽는다. 대지를 보아도 추운가 하면 봄이 오고 여름이 와 덥고 다시 추워진다. 그러니 사물이 늘 그런 것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변한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평상적인 정서다. 그러나 승조는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서 말하기를 ‘법에 오고 감이 없으며 움직이며 변함도 없다.’라며 반론을 편다. 그는 반대로 『조론(肇論)』에서 삼라만상이 옮기지 않는다는 견해를 편다.
“일반 사람들이 ‘사물은 움직이며 고요하지 않다(動而非靜)’라고 한 것은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물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靜而非動)”한 것은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물을 과거에서 구해 보았으나 과거에 일찍이 없지를 않았고, 과거의 사물을 현재에서 따져 밝혔더니 현재에선 아직까지 있지 않았다.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현재의 사물이 일찍이 과거엔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이를 뒤집어서 현재에서 찾아보았더니 현재도 과거로 가지 않았다. 이는 과거의 사물은 스스로 과거에 있었고, 현재로부터 과거로 이르러 간 것은 아니며, 현재의 사물은 스스로 현재에 있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르러 오지 않았음을 말한다.”
일반 사람들은 “사물은 움직이며 고요하지 않다(動而非靜)”라고 말한다. 그렇듯 옛날엔 젊은 얼굴이었는데 이제 늙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처럼 “사물은 움직이며 고요하지 않다”한 것은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흘러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젊은 사람의 얼굴이 현재의 늙음으로 옮겨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이 비슷하다 느끼지만 그 당시 있었던 세포는 수 조 개중 하나도 없다. 젊은 얼굴이 현재의 늙은 얼굴에 없으므로 과거의 것이 현재로 흘러 온 것이 아니다. 늙은 얼굴이 일찍이 과거의 젊은 얼굴에도 없었으니 현재의 사물이 과거로 흘러간 것도 아니다. 그러니 현재가 과거로 간 것도 아니요 과거의 사물은 스스로 과거에 있었고 현재로부터 과거로 간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사물 또한 과거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승조는 “사물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靜而非動)”라고 말한다. 현재는 현재이며, 현재의 사물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대상 부정해도 없지는 않다”
이처럼 물불천론으로 보면 현재의 사물은 긍정된다. 하지만 시간과 사물에 대한 관계가 완전히 해명된 것은 아니다. 물불천론을 의상(義湘)의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으로 보완할 수 있다. 의상은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어라. 구세(九世), 십세(十世)가 서로 서로 부합하지만 뒤섞이는 일 없이 따로 따로 이루었어라”라고 말한다.
소위 구세라는 것은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를 말한다. 필자가 지금 이 순간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 있다고 치자. 그 순간은 인연(因緣)에 따라 구세(九世)가 한 순간에 겹쳐진 때이다. 과거의 과거는 예로부터 낙산사 터에 관음보살이 상주하던 일이며, 과거의 현재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서 낙산사를 세운 일이며, 과거의 미래는 이로 모든 중생들이 관음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통해 구제를 받을 어느 날이다.
현재의 과거는 의상의 행적과 사상을 좇는 일이요, 현재의 현재는 홍련암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의상의 화엄을 되새기는 바로 이 순간이요, 현재의 미래는 이 순간 의상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재해석함에 따라 달라질 내일이다. 미래의 과거는 멀리로는 낙산사에 관음보살이 나투신 때로부터 오늘 이 순간을 비롯하여 미래의 어제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며, 미래의 현재는 이 낙산사에서 다시 의상의 사상과 실천을 떠올리는 바로 그 순간이며 미래의 미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아우러져 다시 달라질 미래의 내일이다. 과거의 과거에서부터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를 의상대사의 말씀과 실천의 행적에 담겨있는 진리가 인연에 따라 회통(會通)하고 있으니 이것이 십세(十世)이다.
‘존재’는 상호 조건 관계서 성립
찰나의 순간은 다른 순간들과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글을 쓰며 잠깐 의상을 떠올리고 그의 사상과 행적을 반추하듯 찰나의 순간에도 무한한 시간이 겹쳐져 있다. 그리고 내일 이 장소에 다시 와서 의상을 떠올린다 해도 그것은 차이를 갖는다. 차이를 갖지만 의상의 사상과 행적에서 찾을 수 있는 진리로 인하여 하나로 통한다. 구세들은 서로 어울리면서도 뒤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며, 구세, 십세가 서로 서로 부합하되 아무런 뒤섞임 없이 떨어져 따로 이뤄진 것이다.
부진공론(不眞空論)은 본무론(本無論)에 맞서서 현재의 사물의 존재성에 대해서 논한다. “만물이 정말로 있다 해도 실제로 있지 않은 까닭이 있으며, 실제로 없지도 않은 이유가 있다. 실제로 있지 않은 까닭이 있기 때문에 비록 있다 해도 있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없지 않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비록 없다 해도 없는 것이 아니다. 비록 없다 해도 정말로 없는 것이 아니므로 없음은 단절되어 텅 빈 것은 아니며, 비록 있다 해도 정말로 있지 않으므로 있음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승조의 말대로 세상 만물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 사물은 자성이 있어 스스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으니 스스로는 없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인과관계에 의해 나고 사라지는 존재이므로 진실로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비록 없다 해도 진실로 없는 것이 아니다.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단절되어 텅 빈 공이 아니라 묘유(妙有)로 있다.
승조는 이에 대해 다시 구체적으로 논한다. “중론에서 말하기를 “사물은 인연을 따르기에 있는 것이 아니며, 연기에 의해 있으므로 없는 것도 아니다. 이치를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러하다.” “왜냐하면 있다고 말하려 하지만 있어도 진실로 생(生)하는 것이 아니다. 없다고 말하려 하지만 사상(事象)이 이미 나타났다. 사상이 이미 나타났다면 사상은 없지 않으나 이는 진실로 나타난 것이 아니므로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부진공의 의미가 여기서 드러난다.”
모든 것이 자성이 없이 연기에 의하여 공이다. 그렇다고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연기에 의하는 것이지만, 가유(假有)의 형식으로나마 현상계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인연을 따라 발생한 현상계의 사물은 가유이므로 실유(實有)는 아니다. 있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가유라도 현재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모든 존재가 연기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 인과, 상호조건의 관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 스스로 자성이 없는 것이니 존재는 공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연기의 관계 속에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존재는 연기의 관계 속에서 가유이지만 사상(事象)을 형성하며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산 속의 호수를 보면, 계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담긴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호수는 그 비춰진 영상에서 바라보면 변하지 않는다. 더 큰 기준에서 보면, 호수마저 변하지만, 그를 담는 원리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현상계의 사물은 진실로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완전히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이처럼 물불천론과 부진공론으로 보면, 가유이지만 연기에 따른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길이 열린다. 이로 가유로서 대상을 긍정하고 이를 예술로 형상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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