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미적 체험의 부정의 부정, ‘유상유식론’ <상>
존재-대상 부정하면 허무주의에 빠진다
유상유식론은 흐드러진 꽃과 꽃을 바라보는 나를 긍정하므로써 예술의 여지를 열어 놓았다.
강진 백련사=최호승 기자
봄날이다. 들에, 산에 꽃들이 흐드러졌다. 잔설 사이로 복수초가 살짝 고개를 내밀더니, 산수유가 절로, 코숭이로 가는 길에 연초록 점묘화를 그리고, 어느새 진달래가 연분홍 빛 수를 놓았다. 갈색과 초록으로 수개월을 버티던 권태의 숲에 노랑, 분홍, 하양 점들이 꽃 잔치판을 벌이며 전혀 새로운 꿈을 꾸어보라 유혹한다. 이때가 되면 아무리 무뚝뚝한 이도 꽃잔치 판에 들면 절로 콧노래가 터져 나오고 저절로 엉덩이가 들먹거리고 어깨가 들썩여 봄날의 감흥에 젖는다. 그 장면을 보며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으리?
오온서 벗어나야 진여실체 보여
우리는 숱한 대상과 마주친다. 대상과 만나는 순간 주체의 마음에는 감성과 지각이 작동한다. 모든 만남이 미적 체험을 안겨다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방이나 사무실을 드나들 때마다 아름답다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거기 시멘트 틈 사이로 바람에 날아온 민들레 씨가 꽃을 피웠다면, 누구나 다가가서 바라보고 감동어린 찬사를 보낸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금붕어 없는 어항이요” 운운하는 연애편지를 받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감동하여 그 편지의 주인공을 만나고픈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시인의 시를 읽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예술은 ‘상투성에 대한 반역’이며, 이는 대상과 새로운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체가 대상과 새로이 만나 감각과 지각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미적체험(aesthetic experience)이라 한다. 예술은 대상에 대한 미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불교는 대상만이 아니라 미적 체험을 부정한다. 불교에서 진여 실체에 이르려면 의식작용의 본체(心王)가 객관의 대상(萬有)을 인식하는 정신작용(心所)이 오온(五蘊)에서 벗어나서 적멸(寂滅)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진여 실체의 깨달음은 오온을 해체하고 번뇌와 아집과 어리석음으로부터 풀려날 때 이루어진다. 더불어 ‘온(蘊:skandha)’이란 “쌓음, 간직함, 집합체”를 의미한다. 집합체란 하나, 하나 해체할 수 있으며, 해체되면 그 순간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러니 존재한다 할 수 없다. 목적론적으로 보아 진여 실체에 이르기 위해서도 오온을 벗어나야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보아도 오온은 실체가 아니라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오온-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에 얽매여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색온은 오근(五根)과 오경(五境)으로 이루어진 물질계를 의미한다. 눈을 통해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혀로 맛보고 살로 접촉할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색이다.
수온은 대상을 몸으로 받아들여 느끼는 것이다. 꽃이나 예쁜 여인을 눈으로 보고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느끼는 것, 바람 소리나 노래 소리를 귀로 듣고 느끼는 것, 꽃향기나 시궁창 냄새를 코로 맡고 느끼는 것, 음식이나 독을 혀로 맛보고 느끼는 것, 살로 접촉하여 부드러움과 거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수온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즐겁거나(樂受), 괴롭거나(苦受),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捨受) 세 단계로 본다. 전자가 서양의 미학에서 말하는 미적 쾌(快)라면 후자는 미적 불쾌일 것이다. 사수는 A or not-A가 아니라 퍼지의 A and not-A, 극단이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것과 저것의 중도(中道)를 추구하는 불가에만 있는 미학일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에서도 추함을 느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대상의 미는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하는 양 극단에 있다기보다 아름다운 동시에 추하다.
상온은 대상을 감각으로 느끼고 지각하여 옳고 그르며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는 개념의 정신작용을 뜻한다. 우리는 꽃을 보고 “(꽃잎이)크거나 작다, (색깔이) 붉거나 붉지 않다, (암술의 크기가) 적당하거나 적당하지 않다.” 등의 판단작용을 한다. 이것이 바로 상온이다.
행온은 인연에 따라 이루어지고 행해지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심리활동을 의미한다. 대상을 보는 순간, 우리는 몸과 입과 업(業)으로 맺은 인연에 따라 의향, 동기, 지향성 등등의 심리활동이나 의지활동을 일으킨다. 반면에, 식온은 대상을 분별하여 이해하는 인식 작용을 의미한다. 이는 인식활동의 결과로서 모든 정신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뜻한다.
세계는 의식 변하여 옮겨진 것
오온을 예술과 결부시키면 예술의 대상, 미적 감각, 미의식, 미적 가치 판단과 통한다. 불교는 진여실체를 벗어나려면 오온에서 벗어나라 이르고, 오온 자체가 허상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교가 예술의 사유와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불교는 인간이 대상과 만나 이루어지는 미적 판단과 인식,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마음의 본체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면 불교 철학을 통해 대상을 만나 미적 체험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답은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이다. 이 논리는 대상에 대한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중도(中道)의 입장을 취하여 대상, 대상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을 행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봄햇살에 연분홍 꽃잎을 화사하게 드러낸 채 바람에 한들거리는 저 아름다운 진달래꽃은 실체가 아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 분별하고 그리 생각한 것일 뿐이다. 진달래가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종, 속, 과, 목, 강, 문, 계로 나누고 그것에 각자 이름을 달고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5,000여 년 후의 사람들은 그것을 다르게 부를 수 있으며, 지금도 그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어느 사람은 이 꽃을 보며 “이 꽃 앞에서 나눈 첫사랑”을 떠올린다면, 다른 이는 이를 따다 “꽃전을 부치어 먹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생각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춘궁기 때 진달래꽃처럼 아름답게 반란의 꽃을 피웠다가 져버린 민초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진제(眞諦: 499-569) 계열의 무상유식론(無相有識論)에서 볼 때 일체는 오로지 식(識)이 작용한 것일 따름이다. 그들은 성상즉융(性相卽融), 곧 진여와 대상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허상이다. 대상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나 파악되는 것의 분별이 없으며, 현상계 자체가 진여가 비슷하게 드러난(似現) 것이지 진여가 아니다. 진달래를 보고 우리가 여러 생각을 하고 진달래의 의미를 무엇이라 하듯, 의식이 변하여 옮기는 것, 곧 식의 전변(轉變)은 허망한 분별이다. 진달래는 이 허망한 인식에 따라 분별된 대상이니 그것 또한 허상이다. 그러니, 무상유식론에 따르면 대상도, 대상과 마음이 작용하여 마음속에 만들어지는 형상도 모두 허위인 비실재일 뿐이다. 마음과 대상을 분별하지 않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통해 있는 그 자체대로 대상의 진여를 여실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현장(玄裝: 602-664) 계열의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은 대상과 이에 대한 정신작용, 대상과 마음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형상을 긍정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규기(窺基)는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호법(護法)의 입을 빌어 “의식을 떠난 실아법(實我法)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파악하는 견분(見分)과 파악되는 상분(相分)으로 전변하는 의식의 체(體)를 떠나서는 달리 실재하는 사물이 없기 때문이다.”라 말한다.
‘대상’ 인정해 ‘예술’의 길 열어
우리가 진달래를 바라볼 때, 진달래와 나는 별개의 존재다. 진달래가 있다면 이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가 있고 진달래에 대해 무엇이라 생각하는 주체가 있으며, 그렇게 생각하여 달라진 진달래가 있다. 여기서 진달래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내가 견분이라면, 나에 의해 인식되어 달라진 진달래는 상분이다. 이처럼 유상유식론자들은 성상영별(性相永別), 곧 진여와 대상이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
유상유식론에 따르면 식(識)은 스스로 둘로 나뉘어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見分)와 인식되는 대상(相分)으로 변화하는 정신작용으로 나뉜다. 현장은 이 변화를 ‘스스로 변하는 것(能變)’, 변화하는 과정(轉變), 변화된 결과(所變)로 나눈다. 정신작용이란 정신이 스스로 변화하려 하거나 실제로 변화하거나 변화되어 대상을 이루고 대상에 따라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것(心所)을 뜻한다. 여러 가지 식(識)이란 이 세 가지 변화하는 식(識)과 그에 따른 정신작용(心所)을 말한다. 세계는 인간의 의식이 지각하는 주체-견분-와 지각되는 대상-상분-으로 변하여 실제와 유사하게 현현한다. 이렇게 견분과 상분으로 나눌 때, 견분은 각각 연기 원리에 따라 서로 의존하고 있는 대상을 잘 파악하여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는 것이니 ‘분별하는 것(分別)’이라고 부른다. 의식이 변하여 된 견분과 상분 중 상분은 견분에 의해 파악되고 분별되는 대상이기에 ‘분별되는 것(所分別)’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세계가 모두 의식이 변하여 옮겨진 것이므로, 실재하는 개개의 존재와 이에 내재하는 원리인 진리는 모두 의식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 주체가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能取)과 인식 주체에 의해 이해되고 파악되는 것(所取)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대상을 인식하고 인식되는 것을 떠나서 실재하는 사물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는 인간의 의식이 대상의 형상을 띠고 변화하여 나타난 것일 따름이다. 불변(不變)의 입장에서 수연(隨緣)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 수연에 현혹되어 불변을 보지 못하면 스스로 미혹함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수연의 대상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인식하여 견분을 이루고 이 견분이 대상을 인식하여 달라진 대상인 상분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불변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이렇듯 유상유식론의 입장에 서면, 인식하는 주체인 우리가 수연의 대상을 보고 그 대상을 지각하고 의식하고 파악하여 불변의 진리에 이르는 것이 불교 교리적으로 타당성을 갖는다. 대상에 따라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심소(心所)이며, 이 정신작용이 미적인 정신작용일 경우 심소가 바로 미적 체험이 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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