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선암 마애불 읽기 - ‘유상유식론’ <하>
이 부처를 ‘허상’이라 외면하면 무엇을 얻으리
경주를 굽어보고 있는 신선암 마애불. 남산에서 가장 먼저 햇빛과 달빛을 맞이하는
이 부처님의 모습을 ‘대상’이고 ‘허상’이라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는 이 장엄한 상호에서조차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유상유식론을 예술에 대입해 보자. 우리 앞에 있는 대상은 우리의 의식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똑같은 달이라 하더라도 어떤 이는 그에서 ‘관음보살’이나 ‘해인삼매’를 읽어내고 이를 향가와 같은 예술작품으로 표현하지만, 바로 거기서 차창룡 같은 시인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읽고 이를 ‘목탁 16-거미’와 같은 시로 형상화한다.
경주 남산 칠불암 뒤로 깎아지른 벼랑이 있고 이 절벽을 오르면 신선암 마애불이 있다. 이 부처는 진여에 이르려는 마음이 변화하여 불상이란 대상으로 현현한 것이다. 이 불상을 대하는 순간 우리의 오감은 작동한다. 내 앞의 불상 자체는 색(色)이다. 눈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귀로 상호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바로 아래로부터 피어올라 막 광배를 지나는 꽃향기를 맡고, 혀로 돌조각의 한 구석을 맛보고 손을 들어 볼을 만져보며 불상을 아름답다 느끼는 그것이 수온(受蘊)이다.
494미터인 고위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와 고위봉 능선과 봉화대능선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20여 미터만 내려오면 바위 절벽 위에 신선암 마애불이 있다. 봉화골에서 오르면 칠불암 뒤의 깎아지른 절벽 위다. 이곳에 오르면 바람재를 지나 멀리 토함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경주 남쪽 평동의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자리에 마애불이 있다.
인식에 따른 ‘분별’도 맞는 말
이 불상은 바위 절벽을 파서 감실을 만들고 거기에 유희좌를 한 채 들어앉은 관세음보살상이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절벽 위에 한 20여 센티미터나 될까? 계단의 참보다 작은 공간을 남기고는 큰 바위가 이층의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바위 절벽에 움푹 홈을 파선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보살을 모셨다. 감실 위로는 가로 1.54미터, 세로 10.5센티, 깊이 6센티미터의 홈을 팠는데 차양을 질렀던 자리로 보인다. 감실의 상단부 끝에서 약 20센티 되는 곳에서부터 바위 아래까지 깊이 15센티 정도 두께로 높이 1.3미터, 넓이 약 3.8미터에 달하는 네모 모양의 판을 만들고 이파리, 혹은 배의 앞부분 모양으로 높이 1.53미터, 너비 1.27미터에 달하는 감실을 조성하고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조각하였다.
멀리서 보면, 수평으로 가로지른 홈 아래 이파리 모양으로 깊게 홈이 파이고 그 안에 불상이 자리했고, 불상은 정교하게 다듬었는데 감실 주변의 바위는 거친 터치로 정을 쪼아 불상의 섬세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바탕의 질박함과 불상의 정교한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깎아낸 윗부분이 툭 튀어나오고 아래쪽이 더 좁아 불안감을 주는데, 불상은 지면과 90도로 깎아 안정감을 준다. 이 구성 덕분에 불상은 구름에서 내려오는 듯한 역동성이 살아나고 감실은 실제보다 더 깊어 보인다.
더 다가가면, 보살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이 절벽 위로 내려 온 형상을 하고 있다. 발 아래 구름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고 그 구름 위로 보살이 유희좌(遊戱座)라 부를 정도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자리하고 신광과 두광이 세 겹으로 감싸고 있다. 언뜻 보면 머리가 몸에 비하여 크고 목이 짧아 조금 답답해 보이는데, 바위 절벽에 얼굴을 묻고 바로 옆에서 보면 그 의문이 풀린다. 옆에서 보면 상호가 감실 안에서 유독 도드라지고 몸과 다리는 주변으로 처리하였다. 보관과 이마, 코가 수평을 이루고 눈에서 흘러 볼을 지나 턱으로 흐르는 곡선이 부드러우면서도 이상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고, 이 곡선에 수직으로 선을 긋는 눈매가 그윽하다.
이마에서 코로 수평을 이루다 떨어진 곳에 입술이 도톰하게 솟아났는데, 언뜻 보면 엄숙하지만 곧 입을 열고 말하거나 미소를 지을 듯하다. 이런 모습이 불상을 성스러우면서도 인자하고 후덕하게 보이게 한다. 이 불상을 제작할 때 초점을 두어 강조하고자 한 것은 바로 얼굴이다. 남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서라벌을 바라보며 신라의 모든 중생의 고통을 품어주고 덜어 주겠다는 모습을 하고 거기 마애불이 자리한 것이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보관이 보인다. 불상은 머리엔 보관을 쓰고 둘레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하였다. 보관엔 화불이 들어앉아 있는데, 어떤 부처인지 알 수 없다. 이를 관세음보살로 보면 아미타불이 맞겠다. 앞에서 본 보살의 상호는 둥글고 큰 얼굴에 직선으로 코가 뻗어 내리고 입술이 두툼하여 정겹다. 이마 아래로 날렵한 초승달 모양의 곡선이 눈매를 그리고 있다. 지그시 감은 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길게 늘어진 귀엔 귀걸이가 달려 있다. 볼이 두툼하고 턱이 둥글어 원만한 조화를 이루고 볼수록 자비심이 피어난다. 정답고도 후덕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다.
생각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
한 손엔 꽃, 보상화(寶相華) 가지를 들고, 한 손으로는 설법인을 하고 있다. 코는 콧방울이 제법 두텁고 입술은 도톰하다. 설법인을 한 손가락은 알맞게 살이 올랐으면서도 맵시가 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승기지의 곡선은 팔이 구성한 직선과 조화를 이룬다. 통견으로 좌대에까지 흘러내린 천의의 곡선미는 압권이다. 좌우가 다르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무렇게나 자유롭고 활달하게 늘어진 것 같으면서도 발을 늘어트린 오른쪽은 조금 짧고 가부좌를 한 왼쪽은 길게 늘어트렸다. 돌이 아니라 실제 천을 대하는 듯 양감이 적절히 드러났고 질감이 부드럽다.
발은 유희좌라 칭할 정도로 편한 모양대로 연좌대에 놓여있다. 오른발은 아기의 발처럼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돌이 아니라 사람의 살처럼 부드러운데 그 발을 따라 연좌대가 둘러싼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연좌대 아래로는 구름 문양이 한껏 멋을 부리면서 불상 전체를 감싸고 있어 이 모든 것을 두리둥실 떠오르게 한다. 세 겹으로 둘러싼 광배는 멋대로 흘러내린 천의 자락을 정리하고 편안하게 자유로이 앉은 불상에 균형과 안정감을 준다. 이렇게 불상을 대상으로 보고 감각으로 느끼고 지각하며 미적 체험을 하는 것이 상온(想蘊)이다.
여기 와서 신선암 마애불을 보면서 어떤 인연으로 경주 남산에 와서 이 불상을 대하고 있는가 생각하며 신라인을 떠올리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 행온(行蘊)이고,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하여 신선암 마애불을 대한 것을 계기로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식온(識蘊)이리라.
무상유식론(無相有識論)에서 볼 때, 신선암 마애불을 보면서 의식이 변하여 옮기는 것, 곧 식의 전변(轉變)은 허망한 분별이다. 위의 진술은 이 허망한 인식에 따라 분별된 대상이니 그것 또한 허상이다. 반면에 유상(有相)유식론으로 신선암 마애불을 바라볼 때, 그것과 나는 별개의 존재다. 불상이 있다면 이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가 있고 이에 대해 무엇이라 생각하는 주체가 있으며, 그렇게 생각하여 달라진 신선암 마애불이 있다. 여기서 불상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내가 견분(見分)이라면, 나에 의해 인식되어 달라진 신선암 마애불은 상분(相分)이다.
신선암 마애불을 보면서 규기(窺基)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안혜(安惠)가 풀어 말하였다. 무엇을 옮기어 변하는 것이라 하는가. 세 가지 변화하는 식(識) 자체가 모두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似現)을 이르는 것이다. (…) 호법이 말하였다. 앞의 변화하는 것 가운데 변화된 것으로서 견분은 ‘분별(分別)하는 것’이라 부른다. 이는 의타성이다. 상분과 관계하고 의지함에 따라 대상을 분별하여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파악되는 것인 상분을 ‘분별되는 것’이라 부른다. 이는 견분에 의하여 분별되어 파악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 호법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에 헤아리는 것 바깥, 상분과 견분으로 변화하는 의식의 전변을 떠나서 실아법(實我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 말하였다.
나와 대상 떠나면 아무것도 없다
세 가지 변화하는 식(識)이란 정신이 스스로 변화하려 하거나 실제로 변화하거나 변화되어 신선암 마애불을 이루고, 또 이 불상을 감각으로 느끼고 생각하면서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것(心所)을 뜻한다. 여러 가지 식(識)이란 이 세 가지 변화하는 식(識)과 그에 따른 정신작용을 말한다. 세계는 신선암 마애불을 보고 지각하는 주체-견분-와 이로 달라진 신선암 마애불-상분-로 변하여 실제와 유사하게 드러난다. 세계가 모두 의식이 변하여 옮겨진 것이므로, 실재하는 개개의 존재와 이에 내재하는 원리인 진리는 모두 의식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 주체인 내가 신선암 마애불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能取)과 인식 주체인 나에 의해 이해되고 파악되는 것(所取)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대상을 인식하고 인식되는 것을 떠나서 실재하는 사물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는 인간의 의식이 대상의 형상을 띠고 변화하여 나타난 것일 따름이다. 이렇듯 유상유식론의 입장에 서면, 인식하는 주체인 우리가 수연(隨緣)의 대상을 보고 그 대상을 지각하고 의식하고 파악하여 불변의 진리에 이르는 것이 불교 교리적으로 타당성을 갖는다.
이 불상은 남산에 있는 100여개의 부처 가운데 가장 먼저 보름달빛과 햇빛을 받는다. 보름달이 뜨면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만나 설법을 들었다는 수월관음(水月觀音)이 된다. 이 순간 53선지식이 말씀하신 화엄의 그 높고 깊은 진리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침 햇빛이 비추면 이 부처는 서서히 돌 속에서 살아나 미소를 짓고 지긋이 경주와 속세를 바라본다. 우리는 이를 보며 관세음보살이 여래가 됨을 미루고 다시 보살의 모습을 하고 중생을 구제하러 나선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러니 감상하는 자는 그 불상에서 진여(眞如)를 만난다. 내 앞의 신선암 마애불은 인연을 따라 생멸하고 유한하게 나타나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 형상에 현혹되면 불변(不變)의 진여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진여에 치우쳐 수연과 의식의 전변(轉變)에 의해 빚어진 불상이니 공하다고 하면 우리는 그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풍경소리 > 불교와 인문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처골 감실 부처 읽기 - 진속불이론 <하> (0) | 2008.04.28 |
---|---|
성과 속의 일치 - 진속불이론 <상> (0) | 2008.04.28 |
미적 체험의 부정의 부정, ‘유상유식론’ <상> (0) | 2008.04.08 |
대상에 대한 부정의 부정 『조론(肇論)』<하> (0) | 2008.03.31 |
대상에 대한 부정의 부정 『조론(肇論)』 상 (0) | 2008.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