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부처골 감실 부처 읽기 - 진속불이론 <하>
불국토라 여겨진 신라 땅에 신라인 모습으로 나툰 부처
감실은 파들어가다 그만두기라도 한 듯 작고 투박하다.
그 속에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처의 모습은
만일 육계가 없었더라면 우리 주변의 할머니와 다를 바 없다.
경주 남산, 감실 부처골을 따라 오른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여 몇 미터만 더 오르면, 빈터를 끼고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보면 소박한 석굴이 있다. “야마모토 겐지(山本謙治)라는 일본인 학생(현재는 일본 한난국제대학 국제관광학과 교수)이 1980년대 초에 이에 매료가 되어 달밤에 침낭에 들어 불상과 함께 하룻밤을 지냈다는 그 불상이다.”(박홍국, 『신라의 마음 경주 남산』)
높이 3.2미터, 너비 4.5미터의 바위가 세모 꼴 홈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 불상이 있다. 투박하게 세모 모양의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작은 좌불을 앉힌 구도 자체가 독특하다. 신선암 마애불이 세련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면, 이는 질박미의 정점이다. 다소곳이 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는 점이 다른 불상과 다르다. 육계가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부처인데, 왜 저 부처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까. 명상에 잠긴 것을 표현한 것이 분명한데, 이 불상의 상호가 너무도 질박하고 다소곳이 앉아서 머리를 숙인 품 때문인지 마치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모습 같다는 착각이 든다.
닳은 탓도 있지만 원래 뭉툭했을 코, 두툼한 입술, 지그시 감은 눈을 둥그런 얼굴이 감싸고 있다. 소발(素髮)을 하였고 육계(肉)는 작아 없는 듯 있다. 자애로운 어머니나 할머니를 연상시키는 상호다. 어깨는 직각을 이루고 목에 삼도(三道)는 없지만 육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여래일 터인데 수인은 범인처럼 팔짱을 낀 모습이다. 박홍국의 지적대로, “코와 입술이 마모되었을 뿐이고 원래 모습은 이것이 아닐 것이기에 자애로운 어머니로 보이는 것은 착시현상일 수 있다.”(박홍국, 『신라의 마음 경주 남산』)
투박한 감실 질박미의 정점
전체 자세도 그렇지만, 팔짱을 낀 수인, 작은 감실에 숨은 듯 자리한 형상, 간단하게 처리한 가사의 주름 등을 보면 질박함을 한껏 드러낸 불상이다. 좌대는 수미산을 상징하는 방형의 수미단인데, 직각형의 돌에 간단히 옷 주름을 늘어트려 단순한 문양으로 처리했을 뿐이다. 지금의 형상에서 코를 조금 높이고 입술을 도톰하게 한들 신라의 평범한 아주머니의 모습을 넘어서지 않는다.
옆에서 보면 이 불상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몸과 다리는 돌판에 돋을새김으로 새겼고 불두(佛頭)만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이 불두는 직각을 이룬 몸에서 30도 정도 숙인 자세다. 키는 1미터 30센티 남짓이다. 원래 모습은 선정을 하는 부처의 상이었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이 불상에 정질을 더한 탓인지, 이제는 영락없이 작은 키의 우리 주변의 할머니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형상이다.
가사나 승기지의 옷주름에도 별 기교가 보이지 않는다. 발은 두루뭉술하게 처리하여 어떤 것이 오른 다리인지 왼 다리인지 알 수 없고 옷 주름도 상의에서 바로 아랫부분까지 하나로 이어졌다. 수미단도 수평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문양도 간단하며 좌우대칭도 아니다. 시선을 돌려 밖으로 보면, 감실도 정확하게 배 모양으로 판 것도 아니고 파다가 만 흔적도 보인다. 삼각형으로 파다가 안쪽에 들어 둥글게 곡선을 주어 파내고 그 안에 부처를 앉혔다. 광배도 없고 삼도도 없는 데 더하여 표정까지 그러니, 육계만 없었다면 부처가 아니라 신라인을 조각한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졌으리라.
얼굴을 대하면 우리는 기존의 미적 기준이나 평가를 유보하게 된다. 이마는 좁고 코는 뭉툭하고 입술도 뚜렷하지 않다. 뒷머리단인지 아닌지 귀는 명확하지 않고, 목도 짧다. 어깨는 작고 상대적으로 얼굴은 크다. 상호가 갸름하지도 않고 원에 가깝다. 눈썹의 곡선도 수려하지 않으며 눈두덩은 튀어나왔다. 이처럼 거의 모든 면이 아름다운 얼굴, 혹은 간다라 불상의 상호에서 볼 수 있는 수려함과는 반대를 지향하고 있다.
범인의 표정 속엔 자애-진리 가득
부처골 감실 부처의 상호.
그럼에도 얼굴 전체가 주는 인상은 석굴암이나 미륵반가사유상의 불상이 취하지 못하였던 경지를 이루고 있다. 명상에 잠긴 것은 분명한데 엄숙하지 않다. 미소를 머금은 것은 확실한데 심오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다. 그냥 후덕하게 생긴 동네 아주머니가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고 아주 살짝 스치듯 미소를 짓는 형상이다. 그러기에 이 불상 앞에 서면 누구나 자애로움과 평안함을 느낀다. 이 자애로움과 평안함을 이방인인 야마모토 겐지 교수도 느껴 산 속에서 홀로 잠을 청할 수 있었으리라. 그처럼 그 느낌 속에 빠져들면 평안하고 포근한 그 가운데 부처를 만난다. 이 순간 우리는 가장 속한 것이 바로 거룩함임을, 속제(俗諦)가 바로 진제(眞諦)임을 깨닫는다.
원효의 표현을 패러디하면, 금을 녹여 금반지로 만들듯 진제를 녹여 속제를 만들며, 다시 금반지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그렇듯 신라의 장인은 불법의 저 높은 진리를 신라 땅 남산의 한 골짜기로 끌어내려 주변의 평범한 바위에 질박한 솜씨로 감실 부처로 빚어내었고, 그 평안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부처를 대하는 사람들은 그 품안에서 저 높은 깊은 진리를 깨닫는다.
신라의 부처를 보면 처음엔 하늘에서 떨어지나 점점 땅에서 솟아난다. 신라인은 불교를 신라화하여 이 땅 신라가 바로 불국토라 생각하였다. 왕은 전륜성왕, 화랑은 미륵의 화신이었다. 경주 낭산이 수미산이요, 동해변에 나타나는 신기루는 건달파성이었다. 그러니 불상도 간다라나 굽타 양식에서 차츰 신라인의 모습을 하였다. 부처골 감실 부처는 신라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부처이다.
이 부처를 보고 있노라면 『대일여래경』의 “지금의 이 진여문보살(眞言門菩薩)이 만약 법칙을 어기지 않고 방편을 수행한다면, ……불지(佛地)를 뛰어넘어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아지려고 하면 또한 거기에도 이를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그 밀교 경전들을 읽으며 이를 삶의 준칙으로 삼았던 신라인들은 그렇게 부처가 되었다.
해탈을 이룬 이는 많은 재물을 절에 희사한 신라의 귀족 귀진이 아니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 742-765) 때 욱면은 종의 신분에 지나지 않는 데도 손바닥을 노끈으로 뚫는 고행을 하여 부처가 된다. 기록에는 『삼국유사』의 특성상 간단히 언급하고 말았지만 종의 신분으로 염불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아야 하였고, 또 얼마나 많은 수모와 멸시와 고행을 겪어야 하였을까? 광덕은 10여 년을 아내와 동거하면서도 관계를 갖기는커녕 누워 자지도 않은 채 수행에 힘써 마침내 성불하였고, 그의 친구 엄장도 뼈를 깎는 아픔으로 쟁관법대로 수행하여 친구의 뒤를 좇을 수 있었다.
신라인들은 저 아래의 미천한 백성까지도 삶에서 빚어지는 고통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고 저 높이 성스러운 세계를 지향하였다. 거룩한 세계로, 더 거룩한 세계로 한 발 한 발 그들은 쉽지 않은 발걸음을 디뎠다. 현실의 행복이나 쾌락보다 내세의 왕생을 더 추구하였다. 욱면처럼 육체적 고통이 클수록 정신은 맑아진다. 엄장처럼 쓰라린 고통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릴수록 깨달음은 밀물져온다. 어두울수록 달이 맑아지듯, 고통이 클수록 깨달음은 깊어진다.
이와 같은 생각이 가능한 것은 모든 이들이 부처님의 품격을 갖고 있기에 자신을 갈고 닦으면 누구나 부처님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대승의 진리를 신라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은 저 높고 눈부신 곳에서 불교를 끌어내려 속세의 삶 속에서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절에서만 불법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농민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자비로 베풀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합장을 하며 감사하였다. 일을 하면서도 관음보살님이 뿌리신 빛이 흙 알갱이 사이사이에 묻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집을 짓는 데서부터 나라의 큰일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뜻에 따라 하였다. 쟁기로 밭을 갈다 말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불렀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극락왕생을 빌었다.
불교 끌어내려 속세의 삶에 구현
이처럼 부처골 감실 불상 앞에 선 이들은 불교를 모르더라도 자연스레 진속불이(眞俗不二)를 깨닫는다. 우리 주변에 흔한 아주머니가 갖는 질박함과 포근함 속에 폭 안기다 보면 어느새 어머니 품이 되고, 그것이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임을 새삼 느낀다. 그리 그 품에 빠져 인연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바로 그 어머니가 부처임을 깨닫게 된다. 이 부처 앞에 서면 이것이 과장이 아님을 느낀다.
어머니인가 하여 품에 안기려 다가가면 부처이고, 부처라 여겨 거룩함에 경건해져 합장을 하다 보면 자애로운 모습으로 나를 감싼다. 이처럼 성스런 세계와 일상,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진리는 바로 대중들이 사는 일상에 있다. 대중도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 부처가 된다. 대중도 저 질박한 불상에서 진속불이를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 어머니의 모습은 부처의 성스런 모습에 비추어 그 속에 담긴 진리를 드러내고, 부처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이해되고 작용하는 진리가 된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에서 일상의 즐거움에 탐닉하다가 문득 천박하다는 생각이 들면 거룩한 세계를 지향한다. 금욕을 하며 부처가 되었지만 아직 고통 속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지 않으면 부처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환속하여 어머니가 되어 중생을 품는다. 바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양자 사이를 진동하였기에 신라인들은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불교미술을 이룩하였다.
원효와 의상으로 대표되는 차원 높은 불교의 형이상학에 도달하였으면서도 신라인들은 그 관념성을 깨닫고 현실로 내려왔다. 극락왕생을 지향하면서도 바로 이 땅이 불국토라 생각하였다.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단호하게 여인을 멀리한 달달박박보다 밤길에 다칠 것을 염려하여 여인을 받아들여 눈부신 나신를 보며 그 살에 손을 대 직접 목욕까지 시켜준 노힐부득이 먼저 부처가 된 설화에서 보듯, 신라인들은 금욕이 깨달음의 길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이름으로 인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 신라인이 조각한 이 감실 부처야말로 다른 불상들이 가지지 못한 현실과 삶의 구체성과 진정성의 미학을 담고 있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이도흠 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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