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성과 속의 일치 - 진속불이론 <상>

slowdream 2008. 4. 28. 15:09
 

9. 성과 속의 일치 - 진속불이론 <상>


종교-일상의 괴리 진여해탈 추구하는 예술 창조의 원동력

 

 

불교예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인도 아잔타 석굴.

지극한 신심의 결정체인 이 석굴의 제17굴 입구에는

석굴이 조성된 굽타 왕조 시대 왕족들의 호사스럽던 생활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가장 성스러운 공간으로 조성된 석굴의 입구에 그려진 이 관능적인 세속의 모습은

성과 속의 거리가 결코 먼것 만은 아님을 말해주는 듯 하다.



세계의 한 편에는 성(聖)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속(俗)이 있다. 성스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종교라면, 속한 세계에 머물고자 하는 것은 일상이다. 세계 앞에 선 인간 또한 성과 속의 양면성을 지녔다. 성인에게도 천박하고 비루한 면이 있는가 하면, 속물에게도 고상하고 숭고한 구석은 있다. 우리는 욕망을 억제하며 지극히 거룩한 세계를 향하여 한 발 한 발 더 나아가는가 하면, 이상과 이데아를 버리고 감성과 욕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의 삶에서 성과 속의 일치는 가능한가? 아니, 그것은 정당한 것인가?


성을 향하는 삶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던 중세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은 어떤 모습을 하였을까. 성모마리아나 기도하는 여인이었다. 가장 신에 가까이 다가간 여인, 얼굴에 가득 신에 대한 지극한 경건함을 담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경배하는 여인이 바로 미인이었다. 중세 시대에 예술은 자기 목적성을 가지지 못하고 신에게 복속되었다. 예술은 신이나 종교적 이상을 구현하는 수단이었다. 하느님이 곧 진리였고 이데아였으며, 그를 향한 길만이 옳은 길이었다. 예술이란 것은 그를 드러내거나 빛내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종교적으로)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중세시대 예술은 종교의 수단


현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은? 당연히 얼굴과 몸매가 아름답고 성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여인이다. 지적 매력과 고혹한 분위기까지 갖추었으면 금상첨화다. 여인의 아름다움이란 신이나 도덕적 선과 하등 관련이 없다. 화가의 눈에, 특정 집단의 남성들의 시선에, 혹은 그 시대의 미적 패러다임이나 코드로 볼 때 아름답다면 그 여인(의 그림)은 아름다운 것이다. 현대는 예술이 신의 복속에서 벗어나 세속화하여 자율성과 자기 목적성을 가지고 예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대다. 현대 미학의 출발을 칸트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그가 미(美)란 목적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으로 정의하였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은 성의 자리에 속을, 신의 자리에 인간을, 제의의 자리에 일상을, 신앙의 자리에 상상을 대체하였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는 21세기에도 종교예술은 창작되고 수용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1세기 오늘날 종교예술에서, 종교의 성스러움을 전면에 내세우면 예술은 미적 자율성을 상실하고 궁극적 진리, 혹은 신에 이르는 도구로 전락한다. 그렇다고 종교 예술에서 성스러운 세계를 걷어내면 그 예술은 아우라를 상실하고 일상의 대상 내지 상품으로 떨어진다. 이 모순을 해결할 논리가 불교에 있는가.


밀교는 법화경의 일생성불(一生成佛) 사상을 계승하여 즉신성불(卽身成佛) 사상을 편다. 중생이 밀교를 방편으로 삼아 수행하면 부처의 대자대비한 힘의 가호를 받아 부처와 하나가 되는 무진 장엄의 경지에 들어가며, 부모로부터 받은 현신(現身)을 가지고 곧 바로 대일여래라도 될 수 있다.


밀교 경전인 『대비노사나성불신변가지경』에 의하면, 모든 여래는 방편바라밀에 통달하여 모든 실체의 본성이 공임을 알면서도 방편을 통하여, 무위로써 유위를 드러낸다. 여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상에 직접 나타나시어 불법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고 환희심을 발하게 함은 물론 삶의 즐거움, 오욕의 향락, 장수의 행복을 누리게 한다. 이런 이승의 행복과 환락을 누린 중생들은 스스로 세존께 공양으로 보답한다. 여기서 중생과 부처가 되는 것, 깨달음에 이르는 것과 일상의 즐거움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대승철학의 진속불이(眞俗不二論)론에서 보면,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성스러움과 속함이 둘이 아니라 하나다. 석가모니는 『금강경』에서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나 중생상(衆生相)이나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주체인 나나 대상인 타인이 있다는 생각, 중생이든 다른 존재든 이보다 위에 서서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대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서, 그들보다 높이 깨달아서, 그들보다 시간이 많아서, 그들보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타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보살행은 내가 그보다 높이 서서 나의 불성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하늘처럼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에 중생은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무명에 휩싸여 욕계(欲界), 색계(色界), 유계(有界)의 3계란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려 하는데 이 경계자체가 허망한 것이다. 이 모두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간다.


현대 종교예술, 성-속 사이 줄타기


비 온 뒤 지리산 능선 위로 보이는 하늘이 투명하게 맑고 푸르다. 부처의 마음, 진여의 세계도 그와 같다. 다만 창에 먼지가 끼었다면 푸른 하늘이 흐리게 보이리라. 이때 유리창만 닦으면 청정한 하늘이 보이듯, 무명(無明)만 없애면 본래 맑고 깨끗한 내 안의 불성이 스스로 드러난다. 원효의 표현대로 금을 녹여 장엄구로 만들듯 진제(眞諦)를 녹여 속제(俗諦)를 만들며, 다시 장엄구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금덩이를 녹여 금반지를 만들고 금반지를 녹여 다시 금덩이를 만들지만 둘은 모두 금으로 하나이다. 그러니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圓成實性], 부처와 중생,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가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정진하여 무명의 때만 벗겨내면, 누구나 완성된 인격[眞], 부처에 이를 수 있다.


부처가 되었다고 나라는 존재가 완성에 이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불성을 드러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세간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들을 열반의 언덕으로 나아가도록 할 때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구원은 그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주체는 타자를 통하여 자신을 완성한다. 타자를 구원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 숨어 있는 불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타자 속의 부처로 인하여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신문 사회면에 종종 등장하는 감동적인 미담이 있다. 어떤 이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에게 장기를 기증하였더니, 그 환자의 아들과 친척들이 다른 이에게 장기를 기증하는 소위 ‘사랑의 장기 기증 릴레이’ 기사다. 소재와 주제는 달라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우리 도처에 있다. 내가 타자에게 담겨 있는 부처, 곧 타인과 공존하려 하고 나보다 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려 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타인도 그를 드러내고 이어서 다시 나도 감화를 받아 내 안의 부처를 더욱 드러낸다. 바로 이것이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진속불이의 경지이리라.


‘천박’ 느끼는 순간 ‘성스러움’ 지향


고려 말 선승 충지(止: 1226-1292)는 선시 ‘이행검의 시에 답하며(答李公行儉)’에서 “그 발 밑 서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불국토의 은유)”이라고 노래하였다. 밥 먹고 물마시고 잠자고 배설하는 바로 평상에 도가 있다는 것은 선가(禪家)에선 너무도 상식적인 말이다.


성스런 세계와 일상,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예술을 통해 드러내려는 진리는 바로 대중들이 사는 일상에 있다. 대중도 대상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이를 예술로 승화하여 진리를 드러내면 부처이다. 대중도 예술작품을 보며 거기서 진여를 깨닫는 순간 부처가 된다.


일상은 성스러움에 비추어 그 속에 담긴 진리를 드러내고 성스러운 것은 일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삶에서 이해되고 작용하는 진리가 된다. 예술은 종교의 성스러움을 통해 아우라를 담고 일상을 초월하는 궁극적 진리를 드러내며, 종교는 예술을 통하여 궁극적 진리를 일상의 삶에서 펄떡이는 구체적인 진리로 빛나게 한다. (불교)예술이 일상을 초월하기에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진리의 빛을 모색하며, 일상의 진리로 반짝이기에 대중과 하나가 된다.


종교와 예술, 성스러움과 일상의 괴리는 예술의 역동성과 창조성이고, 양자의 공감은 예술의 진정성과 구체성이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욕정에 불타던 사람이 그를 승화하여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듯, 일상에 매몰된 우리는 천박하다고 느끼는 순간 성스런 세계를 지향한다. 현실에서 이상으로, 그림자에서 이데아로, 감성에서 이성으로, 욕망에서 금욕이나 해탈로 나아가고자 한다. 때로는 성자로 불리던 사람이 술도 먹고 주사도 부리고 여인도 탐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보이듯, 우리는 이상과 이데아와 이성과 금욕의 세계에서 내려와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한다. 예술은 양자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그 사이를 오고 가는 시계추다. 이것이 부단히 오고갈수록 예술은 더욱 미학적 깊이와 넓이를 갖는다. 그러기에 성과 속, 종교와 일상 사이의 괴리는 예술을 창조적이고 역동적이게 하는 바탕이다.


조선조 최고의 철학자였던 퇴계의 시에서 맛보지 못하던 감동을 우리는 왜 고통스런 삶의 애환을 노래하는 농부의 민요에서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왜 그 민요를 들으며 농부가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꿈꿀까. 양자의 공감, 곧 이상이 이상의 관념성을 깨닫고 현실과 대화하여 극복하려 하고, 이데아가 이데아의 도그마를 인지하고 그림자 속의 진리를 찾으려 하고, 이성이 이성의 도구화를 염려하여 감성을 통해 이성의 감옥을 넘어서려 하고, 금욕이 금욕의 억압성을 인식하여 욕망의 자유를 회복하려 할 때, 그런 예술은 (현실의) 구체성과 (타락한 시대에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진정성을 갖는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도흠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