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인문과학

대상에 대한 부정의 부정 『조론(肇論)』<하>

slowdream 2008. 3. 31. 18:39
 

6. 대상에 대한 부정의 부정 『조론(肇論)』<하>


-칠불암 불상읽기


일곱부처 앞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로 회통한다

 

            경주 남산의 칠불암은 자연을 끌어들여 작품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있다.

          일곱부처가 빚어내는 만다라는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쁜 삶에 여백이 생길 때마다 눈에 어른거리는 경주 남산! 설악처럼 아름답지도, 지리처럼 웅장하지도, 한라처럼 높지도 않다. 금오봉의 높이는 468미터, 고위봉의 높이는 494미터요, 동서로 4킬로미터에 남북으로 10킬로쯤 되는 작은 산이다. 하지만 2천여년 전 그곳은 극락정토였고 도솔천이었으며 연화장이었다. 수많은 신들이 내려와 바위에, 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나타나 지혜의 말씀을 전하고는 다시 그곳으로 사라졌고, 불교가 들어온 이후엔 부처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삼국유사』의 감통 편 ‘진신 석가가 공양을 받다’ 조를 보면, 신라 효소왕(孝昭王: 692-702) 8년(699년)에 망덕사 낙성연을 여는데 한 걸인이 떼를 써서 참여하려 하자 효소왕은 맨끝자리에 앉는 조건으로 참석시켰다. 왕은 잔치가 파한 후 어디 가서 왕이 여는 잔치에 참석하였다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조롱 투로 말하였다. 그러자 걸인 또한 “폐하께서도 역시 남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하고는 공중으로 솟아 경주 남산 비파골 비파암 뒤로 지팡이와 발우만 남긴 채 사라졌다.


왕은 걸인이 바로 석가모니임을 깨닫고 뒤늦게 반성하며 그곳에 석가사를 세웠다. 97년에 실종 위기까지 겪으면서 길이 사라진 비파골을 가시덤불을 헤치며 헤매다 끝내 찾지 못하였고 98년엔 마침내 비파암을 발견하였다. 거기 비파모양의 바위가 있었고 그 아래 덤불 사이로 석가사로 추정되는 석축이 보였으며 옥개석 파편이 뒹굴고 있었다. 2007년에 다시 찾았더니 석축과 비파암은 그대로인데 수해로 인하여 옥개석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듯 남산엔 신이 자리한다. 부처가 계신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찾은 것으로 절터만 147개소, 불상 118체, 불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에 달하니,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부처가 조성되었다는 말이 그리 과장이 아니다. 그곳에 가면, 가선 마애불앞에 서서 합장을 하고 산을 안으면 누구나 신라인이 된다.


한 겨울날 밤 10시 반 서울역에서 경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경주역에 도착하니 새벽 3시 30분이 조금 넘었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점심거리와 음료수를 챙긴 다음 택시를 탔다. 봉화골 입구에 도착하니 4시가 막 지났는데 여름과 달리 골짝은 칠흑같이 어둡다. 몇 차례 와서 지리를 몰랐다면 꽤 겁을 먹고 올랐으리라. 손전등도 챙겨오지 못한지라 기어가듯이 산을 타며 간신히 칠불암에 오르니 일곱 부처가 장엄한 모습으로 과객을 맞는다. 곱은 손으로 합장을 하고 참배를 하다 보니 스님이 인기척을 한다. 성범 스님의 자비로운 배려로 따스한 온돌방에서 언 몸을 녹이고 아침 공양까지 받고는 새벽 햇빛에 더욱 맑은 자태를 드러내는 칠불암을 본다.


신라 부처의 상주처였던 남산


필자가 지금 칠불암 부처 앞에 있는 그 순간은 인연에 따라 구세(九世)가 한 순간에 겹쳐진 때이다. 과거의 과거는 예로부터 이 칠불암에 부처가 상주하던 일이며, 과거의 현재는 신라 시대 어느 날 석공이 지극한 불심을 가지고 돌을 쪼자 바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부처의 형상을 가진 일이며, 과거의 미래는 이로 중생들이 돌을 통해 부처를 만나 해탈을 이루는 어느 날이다. 좁히면, 과거의 과거는 경북 군위에 삼존불을 조성하던 일이며, 과거의 현재는 그 군위의 삼존불을 모방하여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세 부처님을 이곳 칠불암의 바위절벽에 모시던 일이며, 과거의 미래는 다시 이 인연을 계기로 토함산 석굴사에 석가모니께서 가장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자리하시던 일이다.


현재의 과거는 내가 칠불암 앞에서 이 모든 일들과 신라인의 불심을 헤아리는 일이요, 현재의 현재는 칠불암 부처 앞에서 합장을 하며 무아경에 이르는 이 순간이요, 현재의 미래는 오늘 부처를 만남에 따라 달라질 내일이다. 미래의 과거는 멀리로는 부처께서 남산에 나투신 때로부터 오늘 이 순간을 비롯하여 미래의 어제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며, 미래의 현재는 이 불상 앞에서 다시 누구인가 서서 무아경에 이르는 바로 그 찰나며, 미래의 미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아우러져 다시 달라질 미래의 내일이다. 과거의 과거에서부터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를 부처님의 진리가 인연에 따라 회통(會通)하고 있으니 이것이 십세(十世)이다.


이처럼 한 순간의 시간은 다른 시간들과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잠깐 신라인의 불심을 떠올리고 그를 반추하듯 찰나의 순간에도 무한한 시간이 겹쳐져 있다. 그리고 내일 이 장소에 다시 부처를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차이를 갖는다. 들뢰즈의 지적대로 “모든 반복에 차이를 새겨 넣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은 기수적(cardinal)이기를 멈추고 서수적(ordinal)이 되며, 이것이 시간의 순수한 질서이다.”(Difference and Repetition) 차이를 갖지만 부처를 통해 깨닫는 진리로 인하여 하나로 통한다. 구세들은 서로 어울리면서도 뒤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의상대사의 지적대로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며, 구세, 십세가 서로 서로 부합하되 아무런 뒤섞임 없이 떨어져 따로 이루진 것이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으므로 사물은 공하지만 가유(假有)라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씨와 열매처럼 스스로는 자성이 없이 공하지만, 씨가 자신을 죽여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자신을 썩혀 씨를 만들듯 공(空)이 생멸변화의 조건이 된다. 불상과 불탑은 수많은 인연이 겹쳐서 지금 내 앞에 실재하는 가유(假有)의 존재이다. 이를 실체로 착각하는 순간 그 예술품들은 불법의 진리를 알리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의 감상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를 보며 주와 객, 형식과 내용, 진리와 허위, 미(美)와 추(醜)를 구별하는 것은 불법의 예술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양자를 연기론에 따라 구성하고 불일불이(不一不二)론처럼 하나가 공하다고 하여 다른 하나를 드러내는 식으로 조성한다면, 감상하는 우리 또한 부진공(不眞空)론에 따라 가유인 불상과 불탑을 통해 실유(實有)를 만나려 하고, 불일불이론에 따라 이것을 공하다고 하여 저것을 감상하고 이해하며 저것을 공하다고 하여 이것을 감상하고 이해한다면 불상과 불탑에서 부처를 만날 수 있으리라.


각자의 역할 따라 중생 구제


물불천(物不遷)론과 화엄 연기론을 결합하면 대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장엄하면 둔탁하고 빼어나면 가볍기 마련인데, 칠불암의 본존불은 장엄하면서도 아름답다. 아미타불이라는 설도 있지만,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앞의 사방불의 서쪽부처가 아미타불이니 석가모니로 봄이 타당하다. 앙련과 복련, 두 겹으로 핀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있는 자태가 당당하다. 앙련과 복련이 사실적이고 입체감이 돋보이고 앙련과 가부좌 사이에 옷 주름이 있어 부처님께서 활짝 핀 연꽃 위에 두리둥실 나는 듯 가볍게 앉아 계신 듯하다. 큰 육계를 올리고 눈을 치켜뜬 채 넓은 어깨와 두터운 가슴을 하고 팔을 힘차게 뻗어내려 항마촉지인을 그리고 있다.


너무도 엄숙한 기상에 어떤 마귀라도 곧 항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 듯하다. 코가 떨어져 나가 합성수지로 만들어 붙인 것이 조금 높고 직선이 강하여 상호의 조화를 깨고 있지만, 치켜뜬 눈에 눈시울 아래 깊은 주름을 주어 자애롭게 하고, 큼지막한 얼굴은 위엄이 넘치는데 상대적으로 작고 도드라진 입술과 눈썹으로부터 코를 향해 활처럼 흘러내린 선이 자애로운 곡선미를 형성한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커 위엄이 넘치는데 반의 반원을 이루며 겹으로 층층이 흘러내린 가사의 주름이 부드러우면서 여백이 있는 곡선미를 부여한다.


오른쪽에 서 있는 협시보살은 아무래도 관음보살로 보인다. 복련대 위에 올라 왼 팔은 엄지와 중지를 편 채 들고 있고 오른 손은 아래로 늘어뜨린 채 정병을 들고 있다. 팔과 몸의 균형이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삼면두식(三面頭飾)의 관장식이 화려하고 천의의 흘러내린 선이 자연스럽고 곡선미가 아름답다. 왼손의 형상은 우리에게 진여를 깨우치라 이른다. 오른 손의 형상은 목이 마른 자에게 물을 주듯, 진리에 굶주린 자와 사바세계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리라는 서원을 되새기게 한다.


가유인 칠불 통해 실유 추구


왼쪽의 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보인다. 이도 복련대좌 위에 서서 오른손에는 보상연화(寶相蓮華)를 들고 있고, 왼 팔은 아래로 늘어뜨린 채 천의의 자락을 살포시 들고 있다. 팔이 몸과 다리에 비하여 굵고 손이 커서 좀 둔탁해보이기는 하지만, 군의의 겹주름의 곡선과 나비 날개 모양의 매듭과 승기지의 흘러내린 선이 그를 만회한다. 이 형상은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이 저 높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고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온 중생을 구제한 뒤에 비로소 열반을 얻으리라.”라는 게송을 떠오르게 한다.


삼존불 앞의 바위는 그대로 사방불이 되었다. 동쪽 면의 부처는 설법인을 하고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으니 약사여래요, 서쪽면의 부처는 설법인을 하고 서쪽을 향하고 있으니 아미타불이겠다. 남쪽 면의 부처는 경전대로라면 환희국의 보생여래인데 확정하기 어려우며, 북쪽 면의 부처는 관음보살에 가깝다.


우리 예술의 진미는 자연을 끌어들여 자연조차 작품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데 있다. 절벽엔 삼존불을 새겨 병풍을 두르고 그 앞에 솟은 바위엔 사방불을 조각하였다. 신라의 부처는 처음엔 천상계인 하늘에서 떨어졌으나 나중엔 이 땅 신라에서 솟아난다. 이곳 신라가 바로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우협시보살과 좌협시보살은 가운데 본존불을 서로 쳐다보고 사방불을 새긴 바위 전체는 삼존불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다.


이렇게 하여 이들 부처는 일곱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인가 하면 일곱이다. 이렇게 일곱 부처가 각각 자신의 구실에 맞게 중생을 구제하다가 하나를 이루어 이곳 남산을, 더 나아가 신라를 불국토로 만든다. 이처럼, 일곱 부처가 만다라를 이루게 한 것이 칠불암이 갖는 가장 중요한 미학이다.


칠불암을 통해서 보았듯, 조론과 화엄연기론으로 보면, 가유이지만 연기에 따른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길이 열린다. 이로 가유로서 대상을 긍정하고 이를 예술로 형상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