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 칼럼] 21세기 불교의 철학적 읽기
몸의 이중적 의미와 불도(佛道)
미련은 소유로 표현…몸이 소유 출발점
색즉시공은 空을 추구하는 해탈의 길
불교 수행법에 사념처관(四念處觀)이 있다. 이는 몸(身)과 몸의 감각(受)과 마음(心)과 세상의 모든 법(法)을 관하는 방법을 말한다. 몸은 더럽고 부정하고, 몸의 감각작용이 고통의 진원지이고, 마음도 무상하여 변덕스럽고, 일체 법이 자기 동일성이 없다는 것을 관하는 것이 사념처관이다.
이 수행법은 세상의 것에 대한 짙은 애착을 끊게 하여 해탈의 길을 가는 색시공(色是空)의 도(道)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은 모두 소유욕을 통하여 표현된다. 내 몸은 모든 소유의 출발점이다. 나는 내 몸을 단지 객관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관적 생각을 낳는 출발점으로 생각한다. 자아라는 생각도 내 몸의 감각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그러므로 마음과 몸과 그 감각작용은 자아라는 허상을 낳는 근거와 현상, 그리고 그 현상의 작용에 해당하는 셈이다.
자아의 생각을 끊어버리게 하는 길은 몸의 더러움과 감각의 고통스러움과 마음의 무상함을 사유하는 길을 밟음으로써이다. 그리고 주관마저 자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바깥의 객관도 역시 지기동일성을 보장해 주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생각으로 불교는 우리를 인도한다. 이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도리다. 이 도리는 소유론적 탐욕을 아예 놓아버리는 해탈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길이 불교에서의 상향의 길, 즉 지혜를 터득하는 길이다. 상향의 길은 소유를 낳는 몸의 실존적 느낌을 공의 존재로 치환하는 길이다. 석가모니불은 이 길을 우리에게 현시하고 가신 역사적 실존불(實存佛)이다.
그런데 불교는 모든 소유욕의 원형으로서 몸을 더럽게 여기는 법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 안 보이는 공의 무한한 존재방식을 가시화하는 다양하고 찬란한 공의 화신(化身=incarnation)으로 몸을 생각하게 한다. 삼신불(三身佛) 사상이 이것이다.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은 다 부처님을 나투신 몸에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법신불로서의 비로자나불의 무한하고 무진장한 힘을 스스로를 현시하고 보시하는 길과 같다. 이 길은 태양이 빛을 넘쳐 발산하듯이,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자신을 세상에 증여하고 베푸는 본질불(本質佛)을 상징한다. 본질불은 자비의 원력과 같은 하향의 길이다. 이 하향의 길이 바로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도리다.
이 도리에서 보면 이 우주에 미만되어 있는 물질은 다 비로자나불인 공의 다양한 표현이요 말이다. 삼라만상, 산하대지는 다 법신불의 다양한 집이고, 언어현상으로서의 화신불이다. 이 도리에서 보면, 불교는 모든 우주가 그대로 이미 구원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화신불은 자연세계거나 역사세계거나 물화(物化)된 또는 육화(肉化)된 가시적 몸과 다르지 않다. 보신불은 법신불과 화신불을 일즉다(一卽多)로 연결시켜 주는 신비스런 파동적 힘의 끈과 같다.
색즉시공은 모든 소유를 버리는 마음의 가난인 공을 추구하는 해탈의 길이라면, 공즉시색은 오히려 무한대의 힘의 원천으로서의 공의 존재방식이 이 세상에로 다시 다양하게 하강하는 육화(肉化)나 물화(物化)의 길이다. 보신불은 법신불과 화신불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공명의 파동이다. 실존불인 석가모니불이 점진적 수행의 결과를 상징한다면, 본질불인 비로자나불은 이미 구원되어 있는 우주법의 순간적 깨침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본질불은 돈오적이다.
석가모니는 실존불로서 해탈을 지향한 점수적 색시공(色是空)의 상징이고, 동시에 본질불로서 보시를 현시하는 돈오적 공시색(空是色)의 상징을 다 공유한 이중성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실존적으로 깨달음의 길로 올라간 성불의 역사적 인물이고, 동시에 불생불멸하여 무시이래 있어 온 자연의 여법한 존재방식과 다르지 않다. 불교의 도는 점수적이기에 기나긴 수행의 여정이 필요하고, 돈오적이기에 한 순간에 빛이 어둠을 제거하듯 찰나적 마음의 회심에 다름 아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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