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간화선에 대한 비판적 고찰

slowdream 2007. 10. 30. 07:31
 

간화선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이 글은 한국불교계 전반이 아니라 일부분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 일부분이 매우 영향력이 큰 집단이라는 사실에 입각했습니다. 표현 가운데 ‘한국불교’는 ‘한국불교 가운데 일부분’이라는 의미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깨달음과 수행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간화선을 기치로 내건 한국 조계종에서는 깨달음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로 간화선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밖의 다른 수행법들은 삿된 외도로 치부하거나 수준이 낮은 수행의 차원으로 폄하해 버린다. 과연 그럴까? 간화선 또한 역사적 맥락에서 시절인연으로 주어진 수행법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왜 석가모니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은 간화선을 방편으로 건네지 않았을까? 간화선만이 최상승선이라면 처음부터 그 길을 제시하지, 왜 오랜 세월을 기다리게 했단 말인가? 모든 의문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리고 그 답 또한 단순하다. 간화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유일한 길임을 주장하는 입장은 ‘내가 하면 로맨스요 네가 하면 스캔들’이라는 세간의 작태와 다를 바가 없다.


한국 선불교의 입장을 간략하게 나누자면, 지눌과 성철이겠다. 말하자면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냐의 차이다. 불교계 내부의 문제를 밖에서 바라보면 실소를 머금지 못한다. 돈오다 점수다, 해오다 증오다 등의 다툼은 세간의 이익집단들의 헤게모니 다툼과 다르지 않다. 이런 다툼과 분별이 벌어지게 된 까닭은 ‘선’에 대한 그릇된 이해이다. 이는 곧 선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로 펼쳐진다. 선의 궁극적 목표가 깨달음인가? 아니다, 착각하지 말라. 선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번뇌(무명과 갈애)가 사라진‘해탈’이다. 깨달음은 해탈에 이르는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깨달음을 궁극적 목표로 두는 태도는, 깨달음 지상주의, 깨달음 신비주의, 깨달음 만능주의이다. 그리하여 깨달으면 수행할 무엇이 없다는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다.


6조 혜능의 ‘오후수행불행(悟後修行佛行)’은 성철 스님의 해설처럼 ‘깨달으면 더 이상 수행할 여지가 없으며, 곧 돈오돈수’가 아니다. 부처님행은 열반으로 향하는 수행을 말한다. 깨닫고 나서는 더 이상 아무런 수행이 필요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오후수행을 독려하는 강조이다. 그런 까닭에 6조께서도‘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이다(迷即佛眾生 悟即眾生佛)’라 했다. 부처는 깨달은 자인데 왜 다시 미혹하는가? 이는 곧 깨달음이 궁극의 지향은 아니라는 뜻이며, 깨달았다 한들 열반을 향한 수행이 없으면 다시금 중생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인 것이다. 근본불교의 성문 4과(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서 사다함을 일래라 하는데, 이것이 곧 깨달음에 들어선 수다원이지만 수행이 약하여 다시금 번뇌의 자리에 돌아온 중생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나함은 수행이 더하여 다시는 번뇌에 빠지지 않고, 궁극적 수행의 자리에 들어선 아라한은 무학으로 열반의 위치이다.


깨달음을 한국불교의 대표상품으로 내걸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어긋나 버린다. 8정도는 해탈에 이르게 하는 수행법인데, 정견(正見)이 가장 앞에 자리한다. ‘올바른 견해’가 없으면 정사유와 정어, 정업, 정명, 그리고 더 나아가 정정진, 정념, 정정 등의 수행의 차원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올바른 견해’란 3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과 연기법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며, 이것이‘깨달음’이다. 8정도는 계, 정, 혜의 3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혜로써 마음을 닦고, 정으로써 몸을 닦고, 계는 그 둘을 아우르는 수행의 방편이다. 올바른 지혜로써 궁극적 진리인 연기법을 깨닫고, 선정의 수행으로써 무시 이래로 쌓인 습기를 지우는데, 계는 지혜와 선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감싸 보호하는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그릇이 깨지지 않아야[계], 담긴 물이 고요해지고[정], 그래야 사물이 비추이는[혜] 것이다. 또한 중도의 이치에 따라, 셋은 곧 하나이다. 이는 진여 근본당처에서의 이치이고, 생멸변화하는 세간에서는 어쩔수없이 차제를 두어 구별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혜[정견, 정사유] -> 계[정어, 정업, 정명] -> 정[정정진, 정념, 정정]인 것이다.


깨달음을 수행의 궁극적 차원에 두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서 달을 깨달음[禪]으로, 손가락을 일체의 알음알이[敎]로 그릇 이해하는 폐단을 낳는다. 여기서 달은 해탈을, 손가락은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옳다. 손가락이 없다면 달을 확인할 수 없듯이 수행은 깨달음에 의지해야 하나, 깨닫고 나면 거기에 머물러서 안 된다. 깨달음의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깨달음[인식론적 전환]의 체화과정을 거쳐야 해탈[존재론적 전환]로 이어지는 것이다.‘불립문자, 직지인심’은 문자와 가르침을 애초에 무시하고 버리라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이는 그러한 가르침에 머무르지 말라는 뜻인 바,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는다(得魚忘筌)’‘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得意忘言)’는 도가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으며, 이는 곧 근본불교의 ‘견도 -> 수도 -> 무학도’의 이치와 같다.


‘방편’을 ‘강을 건너고 나면 버리고 가야 할 뗏목’이라 비유했지만,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다시금 그 강을 되건너와야 할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결코 뗏목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는 ‘머무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황벽 선사의 가르침대로 ‘모든 법에 머무르지 말고, 머무르지 않음에도 머무르지 말고,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머무르지 않아야’하는 것이다. ‘알음알이’를 부정하는 이유는 우리의 언어와 문자, 사고의 분별적 속성에 발목이 잡히지 말라는 당부이다. 원효 스님의 말씀대로 ‘언어에 의지해서 언어를 떠난다(依言離言).’또한 <금강삼매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속제를 버려 진제를 나타낸 평등한 상이 공상인 바 이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진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처럼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를 삼으며(空相亦空), 또 장엄구를 녹여 다시 진금을 만드는 것처럼 이러한 차별상인 공공에도 머무르지 않으며(空空亦空), 이 두 가지 공에도 머무르지 않는다(所空亦空).


언어는 곧 사유이다. 언어 없이 사유란 불가능하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사유와 사유가 지향하는 궁극적 진리에로 다가간다. 그리고 언어로 드러낼 수 없는 궁극적 진리를 깨닫고 나서, 언어를 통해서 그 진리를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어떠한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알음알이를 부정하는 선가에 설법과 선문답, 오도송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이심전심, 언어도단, 심행처멸’을 기치로 내건 선사들이 깨닫고 나면 헛기침이나 할 일이지, ‘빈주먹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듯 무슨 당치도 않은 오도송이란 말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행한 8만 4천 법문은 선사들의 말마따나 ‘다 말라비틀어진 뼈다구’‘고름 닦는 휴지’란 말인가?


단순히‘알음알이’의 병폐가 심각함을 강조한 것이라면 그 순수성을 의심치 않으나, 최근의 행태를 보면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싶다. 출세간의 위치를 세간에 비해 우월하게 두고자 하는 꿍꿍이 말이다. 이는 곧 조바심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종교가 처한 위치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하늘에 자리한 절대의 차원과 땅에 자리한 상대의 차원의 거리를 부정하는 인문,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비판적 대중 때문이다. 세간의 지식을 전면 부정하는 완고한 태도에는 출세간의 흔들리는 위상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소승, 대승을 가르고 비하하는 태도도 그렇다. 이는 밖에서 바라보면 정말 유치하고 한심한 작태이다. 모두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렇기에 모두 일면 당위성과 적합성을 갖고 있지만, 그만한 무게로 한계를 지닌다. 역사는 고여 있지 않고 늘 흐르니깐. 불법의 가르침 또한 머물지 않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늘 상속과 단절의 이중적인 태도가 자리한다. 상속과 단절은 중도의 이치에 다름 아니다. 완전한 단절도, 완전한 상속도 있을 수 없다. 상속은 단절을, 단절은 상속을 자기 안에 흔적으로 두고 있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태도가 곧 상속[내용]과 단절[형식]의 이중적 형식이다. 내가 한국에 태어났으니 간화선의 영향을 받을 뿐이고, 티벳에 태어났으니 금강승의 영향을 받을 따름이다. 일본사람더러 왜 한국말을 못하느냐고 구박하면 말이 되는가? 한국에 뜨는 달만 진정한 달인가?



중도, 연기법


깨달음에 집착하는 한국불교의 폐단은 무척 심각하다. 깨달음이 지상최대의 목표인 바, 깨달으면 어떤 수행도 필요치 않고, 깨달음의 분상에서는 어떤 경계에도 걸리지 않으므로 술을 마시고 계집질을 해도 무방하다. 그러면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이길래?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이 차가운지 따스한지는 먹어봐야 안다’며 체험을 중요시하는 태도는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렇다면 선지식이 굳이 필요할 이유도 없다. 깨닫지 못한 차원에서 누가 선지식인지 가름할 방법도 없다. 결국 경전을 근거로 해서 깨달음의 내용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은 모두 ‘중도’의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이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확인한 그 유명한 ‘중도선언’이 불교의 테제이다. 중도는 곧 연기법이며, 이는 공, 마음, 진여, 진아, 자성, 한물건, 정법안장, 본래면목, 본지풍광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중도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중도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설명하는 차원이 더욱 난삽하다는 얘기다. 자칫하면 힌두이즘에서 얘기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전락하기 쉽다.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는 3법인이다. 이는 곧 무아, 무상이며, 이것이 곧 중도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실체론적인 태도로 중도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리’라는 무엇이 내 안이든 밖이든 존재한다는 태도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어긋나 버린다. 연기법의 설명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기에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하기에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이 멸한다.’여기서 우리는 이것과 저것의 상호의존성으로 연기, 곧 중도를 이해한다. 물론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것, 저것’에 눈길을 주어서는 안 된다. 눈길을 주어야 할 곳은 바로 ‘있기에, 없기에, 생하기에, 멸하기에’이다. 간략히 ‘생멸’이다. 그렇다, 중도는 바로 생하고 멸하는 ‘작용’인 것이다. 존재가 아닌 생멸의 작용이 바로 연기의 가르침이다. 작용은 말하자면 ‘사건의 발생과 사라짐’이다. 발생과 사라짐을 밤과 낮,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이는 곧 ‘펼쳐짐’이다. 이러한 펼쳐짐의 장에 본체와 현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남녀가 있다. 우리는 이 둘의 존재에 눈길을 주고 그 둘이 엮어내는 온갖 관계를 부수적으로 설정한다.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말하자면 술어는 주어, 동사는 명사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서 보면 만남으로 두 남녀가 드러나고, 사랑하는 작용으로 인해 두 남녀가 사랑하는 두 남녀의 현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듯, 사소한 시비로 다투고 이별하면서 죽고 못사는 사랑하는 관계로서의 두 남녀는 말끔하게 증발해 버린다. 말하자면, 인간이란 그가 ‘하는 바 그것’이며, 도둑질을 할 때만이 그는 도둑놈인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매어 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가 쐐기에 의해 매어 있듯이.”

           

<숫타니파타>

 

이렇듯 용(用)의 펼쳐짐에 체(體)와 상(相)이 더불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작용은 일어나자마자 곧 사라지며 또다른 작용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머무르지 않는다.’이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인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이 펼쳐진다(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그러기에 그 무엇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고, 무아이며 무상이다.


중도란 작용 곧 관계맺음이요, 머무르지 않음이며, 상호의존성의 사건이 무한히 펼쳐짐이며, 이들 찰라의 존재들이 서로의 흔적을 끝없이 각인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앞에 확인하는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님이 분명하다. 우리의 감각과 인식이 착각하고 왜곡시키는 까닭에, 일정한 형태로 지속된다고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다. 이를 ‘전도망상’이라 하지 않는가. 한국 선가에서 떠받들고 있는 임제 선사의 ‘지금 눈앞에서 작용으로 드러난다(卽今目前現用)’는 말씀이 바로 중도와 연기, 공의 이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작용으로 인하여 시공간과 존재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모든 존재에 대한 담론, 철학은 주체와 객체, 곧 실체에 대한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이르러 후기구조주의 또는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명되는 철학적 사조가 ‘관계맺음’‘사건’이라는 주어가 아닌 술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곧 불교에의 관심이 증폭된 것과 맞물린다. 아울러, 현대과학 특히 양자물리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큼은 주목해야 한다.



마음


선가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법문, ‘마음을 알아 본성을 보고 스스로 불도를 이룬다[識心見性自成佛道].’‘이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헌데 마음이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음은 중도이며 공이며, 연기인 작용이다. 작용이 곧 욕망이며 기(氣)이다. 욕망은 현상계에서 연기로 인하여 선악, 시비, 호오 등의 두 갈래로 나뉜다. 이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생양의(太極生兩義)’이다. 양의는 음(陰)과 양(陽)이다. 그리고 욕망의 투사에 의하여 상이 맺힌다. 이것이 '양의생사상(兩義生四象)으로, 사상은 음양의 기가 표면으로 드러난 현상인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분노의 욕망이 강하면 싸움꾼, 탐애의 욕망이 강하면 카사노바, 받으려는 욕망이 강하면 뿔...등등의 상(相)이 펼쳐지는 것이다. 관계란 늘 꿈틀거리며 머무르지 않는 까닭에, 사랑하는 사람이 곧 원수로 돌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체와 용과 상이 둘이 아님[不二]을 안다.


마음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이제 불법의 진수에 들어가도록 하자. 화엄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법문은 ‘모든 것을 오로지 마음이 짓는다’로 이해한다. 이 법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 <대승기신론>에 의지해서 그 심층적인 의미를 파악해보자. <기신론>에 따르면, 8식은 진여와 무명이 혼재한 ‘진망화합식’이다. 이 근본적인 마음자리에 진여가 있기에,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 사이에 놓인 다리가 바로 진여이다.


생사 윤회의 근본은 ‘무명(無明)’인 바, 무명은 곧 ‘일체유심조’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무명이 진여를 덮으면, 곧 ‘무명의 불가사의한 훈습(薰習)으로 진여가 덮이면’그리하여 주관과 객관이 나뉘고 잠재의식인 자아의 7식이 분별의식으로 현상계를 인식한다. 말하자면, ‘나’의 관념으로 세상을 덧칠하는 것으로, 시비와 분별로 얼룩진 세계가 곧 내 눈앞에 펼쳐진다. 이것이 중생심, 중생의 분별하는 의식이 작용하는 현상계이다. 남자인 내게 한 여자가 나타난다, 8식에 갈무리되어 있던 습기가 튀어나와[種子生現行], ‘오, 섹쉬한데?’라는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정욕의 갈증이 몸을 달아오르게 하여, 수작을 부린다[現行熏種子].


진여가 무명을 덮으면, 곧 ‘진여의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무명이 덮이면,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다. 시비와 분별이 사라진다. 이것이 불심이 작용하는 현상계이다. 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 여자는 내가 남자이듯 다만 ‘여자’일 뿐이다, 나아가 공한 존재이다, 숙세의 인연이 있다면 또다른 인연이 맺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스쳐가는 평범한 관계일 따름이다, 그렇듯 나의 눈길에는 나의 습기가 묻어 있지 않다. 이것이 곧 ‘보되 보지 않고, 듣되 듣지 않는’깨달음의 차원이다.


 ‘일체유심조’에 담긴 두 가지 의미는 바로 중생의 차원과 부처의 차원이다. <기신론>의 마음은 곧 중도인 바, 진여문은 언어를 떠난 승의제의 차원이며, 생멸문은 언어에 의지한 세속제의 차원으로 둘 모두 진리의 세계이다. 비유하자면, 진여문은 생멸문[현상계]의 안감이라 할 수 있다. 이 생멸문에서 마음은 중생심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불심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작용의 이중성이다. 생멸문에서 분별하는 마음(분별하는 작용)이 곧 세상 만물에 헛된 이름과 색상을 입히지만, 중도의 이치로 관하면 그저 상호의존하는 관계가 펼쳐질 따름이다. 실체론적으로 이해하면 생멸하는 존재들이 제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관계론적으로 이해하면 그들은 연기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호의존적 존재일 따름이다.


여기서 잠깐 의미와 무의미에 대해서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로(理路)는 이치의 길, 사(事)는 반드시 이(理)를 지니고 있으니, 소나무는 곧고 가시나무는 굽고 까마귀는 검고 갈매기는 희고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등의 천지(天地)의 이치(理致)이며, 의로(義路)는 理속에 지니고 있는 차별적인 뜻이니, 땅은 굳어 만물을 싣고 물은 습하여 만물을 적시고 불은 뜨거워 만물을 익히고 바람은 움직여 만물을 성장케 하는 따위이니라.” <사기(私記)>


이렇듯 의미란 모든 사물에게 내재한 2차적 속성이다. 사물들을 고정불변한 실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자기중심적이고 고립적이며 차별화된 속성들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다. <금강경>에서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가 드러나리라.’는 게송의 상(相)이 바로, 이러한 외적[物] 내적[心]으로 불변하는 상이다. 그렇다면 무의미는 ‘의미의 부재’가 아닌 의미의 전복으로, 일면적이며 일방향으로의 전개인 의미가 아닌 다중적이며 모든 방향으로의 전개인 의미를 함축한다. 의상 스님이 화엄의 이치를 설파한 <법성게>의 ‘하나 속에 모두 있고 여럿 속에 하나 있어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네(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가 바로 이것이다. 결국 무의미는 중도이며, 연기, 공을 가리킨다.


선의 ‘불립문자, 교외별전’은 의미에서 무의미로 나아가나, 거기에 결코 머물지 않고 다시금 의미의 세계로 돌아온다. 처음의 의미는 분별로 얼룩진 전도망상의 존재의 세계이며, 뒤의 의미는 분별하되 모든 존재가 각을 세우고 대립하는 모순의 정체적인 장이 아닌 상호의존의 관계로 녹아 있는 ‘관계 맺음’‘만남’의 활발발한,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펼쳐지는 살아 꿈틀거리는 장이다. 유식학의 논리로 말하자면, ‘변계소집성’의 현실은 모든 존재가 실체를 갖고서 서로를 용납지 못하는 침전된 장이며, ‘의타기성’의 현실은 존재가 무화되고 관계만이 찰라찰라 펼쳐지는 생동의 장이다. 이를 <기신론>에 빗대면, 생멸문의 변계소집성의 현실에서 진여문의 원성실성인 출세간의 진리[승의제]로 들어섰다가, 다시금 생멸문의 의타기성인 세간의 진리[세속제]의 차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금강삼매경>의 ‘삼공(三空)’이 이러한 의미이며, 이것이 바로 지혜와 자비,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리타(自利利他)인 중도의 가르침이다.



화두


한국에서는 선, 하면 대체로‘간화선’을 연상한다. 그만큼 그 영향력이 크지만, 간화선은 곧 깨달음이며, 일체의 알음알이[교학]을 버린 최상의 교육법[선학]이며, 깨달음이 수행의 목적인 것으로 삼는 폐단을 낳기도 한다. 간화선의 유래와 성격에 대해서는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물들이 많이 나와 있으므로, 굳이 이 자리에서 부연할 이유가 없다. 다만 나는, ‘깨달음’에 집착하고 몰두해 있는 한국 간화선의 병폐에 대해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깨달음의 ‘내용’이 아니라 ‘성격’에 대해서 유독 편향되어 있는 태도 또한 만족스럽지 않다.


선사들은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결코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멱살을 잡거나, ‘할’을 외치거나, 불자를 들거나, 오근[안이비설신]을 활용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한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하나는 곧 ‘스스로 의심하고 견성하라’는 직접체험에의 다그침일 것이며, 다른 하나는 ‘똑바로 보라’는 노파심의 일환이며, 또한 질문 자체의 그릇됨에 대한 갈파이기도 할 터이다. 어쨌든 세간의 논리와 이성의 차원을 떠나 있기에, 배움의 길에 나선 사람들이 선지식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곤혹스러움에 처하기도 한다. 선지식임을 은근히 자처하지만, 실상 그중에는 깨닫지 못하거나 삿된 깨달음에 의지하는 ‘착각도인’이 없지 않을 것이다.


선은 방편에 따라 관법, 의심법, 염법으로 나뉘고, 내용에 따라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으로 나뉜다. 관법은 사마타와 비파사나, 의심법은 화두, 염법은 염불이겠다. 화두를 들고 의심하는 간화선은 중국 조사선의 명맥을 고스란히 잇고 있다. 중국에서는 조사선의 시작을 6조 혜능으로 삼고, 그 제자인 남악회양 -마조도일 - 백장회해 - 황벽희운 - 임제의현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조사선의 취지와 내용, 형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구두선, 문자선, 의리선’으로 퇴색되고 변질되었다고 판단한 대혜선사가 간화선의 체계를 정립한 것이다. 이것이 불교 내부의 상황이라면, 불교 외부의 상황은 성리학의 도전이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의 유교, 노자와 장자의 도교, 불교의 이치를 고루 수용한 학문이기에 종교의 차원으로도 격상될 만큼 잠재력이 컸다. 이는 곧 간화선 또한 ‘머무르지 않음’의 중도의 발현이며 역사적 맥락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는 얘기이다.


  알음알이를 배제하고 돈오견성을 강조하는 한국 간화선의 수행방법은 전통에 충실한 나머지, 폐쇄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 상승의 의미는 구현하지만, 단절의 의미는 구현하지 못하는 불균형한 모습이다. 아니 어찌 보면, 과연 전통의 참모습을 고스란히 잇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지 않다.‘지금, 여기’는 1천여 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문적, 과학적 탐구는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신비’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종교의 역할이 위축되고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공시(共時)적 차원과 통시(通時)적 차원의 병행이 아쉽다.


대혜선사가 남긴 화두 수행법의 지침은 간략하게 유심, 무심, 언어, 적묵의 네 가지 태도를 버리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는 곧 사량과 비사량의 차원을 모두 버리라는 얘기이다. 이를 ‘의심’이라 하는데, 의심이 똘똘 뭉쳐 ‘의단독로(疑團獨露)’하면 곧 화두가 깨쳐진다. 화두가 순일하게 익으면 짧게는 7일 안팎으로 견성한다. 화두는 선지식이 제자에게 건네는 그 모든 것이다. 특별히 ‘무’‘삼서근’‘마른 똥막대기’‘이뭣고’등만이 화두인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1천 7백 공안이 있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버리는‘의심’이 생명인 간화선이 사마타 수행법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나 또한 이러한 견해에 동조한다.


“공부가 익은즉 화두를 쳐서 깨뜨릴 것이다. 이른바, 공부란 세간의 잡다한 일을 헤아리는 마음을 ‘마른 똥막대기’ 위에 되돌려 두어서 정식(情識)으로 하여금 행하지 못하게 함이 마치 흙. 나무. 인형과 같음이라.”


이는 대혜선사의 말씀이다. 화두의 기능을 이렇게 이해하자면, 의심법이 관법, 염법과 다를 까닭이 없다. 이 모두가 일미(一味) 아니겠는가. 다만 수행자는 근기가 제각기이므로 자기의 기질에 따라 걸맞는 수행법을 취하면 될 따름이고, 인연이 닿은 선지식은 제자의 근기와 현실적으로 처한 물리적, 사회적 상황을 감안해 수행방편을 건네주면 되는 것이다.


모든 화두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 그 첫째는 진여문인 불법의 대의를 가리키며, 사량하는 언어의 차원을 넘어서 공과 연기의 이치가 즉자적으로 주어진다. 둘째는 생멸문인 사량하는 언어의 차원에 머물며, 공과 연기의 이치가 작용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물론, 비사량의 세계와 사량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선험과 경험, 현상과 본질을 나누는 것은 의식, 인식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인 것이다. 경험과 현상을 통해서 선험과 본질의 세계를 확인하지만, 그 자리가 다름 아닌 <지금, 여기, 바로 이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공의 이치가 곧 현상계의 작용임을 결국 가리킨다. 이 또한 중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깨달은 자들의 노래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선사들의 오도송 또한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선문답 또한 화두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비논리의 차원이라 하여도, 비논리는 논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결코 논리적 구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원효 스님 말씀에 빗대자면, ‘의언진여(依言眞如)’인 셈이다. 그렇다면 선문답이 가리키는 곳, ‘직지인심(直指人心)’은 어디인가? 이 또한, 중도이자 연기, 공에 다름 아니다. 이는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법계이며, 진제와 속제, 중도제일의제가 어우러진 논리와 분별, 곧 알음알이의 차원이다. 선사들이 남긴 오도송과 임종송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논리와 분별, 알음알이는 전도망상된 중생의 차원에서가 아닌, 똑바로 봄[正見]의 차원이다.


간화선에서는 ‘깨달음’을 ‘돈오’의 자리에 놓는다. 이는 자가당착적인 오류에 빠진다. 6조 혜능의 <6조단경>에 분명 ‘법에 남북이 있을 수 없으며 사람에게 남북이 있을 따름’ ‘지혜로운 자는 단박에 깨치고, 미혹한 자는 점차 계합한다’고 나와 있다. 이 말은 곧, 다양한 수행법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간화선을 최상승선이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전통에 대한 예의라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단박에 깨침’만이 깨달음의 유일한 형식이라면, 미혹한 중생들은 어쩌란 말인가. 근기가 열등한 중생들은 결코 견성할 수 없다는 그런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선가에서는 깨달음이 몇 번에 걸쳐 주어지는 경우도 있고, 화두 하나를 깨치면 1천 7백여 일체 화두 또한 타파된다 하지만, 또다른 화두에 걸려 다시금 수행에 몰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화두, 선문답, 오도송 등은 과연 알음알이로써는 깨칠 수 없는 소실점 너머의 차원인 것일까. 화두를 든 채 용맹정진해야만 기연이 맞아 깨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단연코 거부한다. 중도의 이치는 알음알이로도 충분하다. 그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장광설을 아끼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나 <아함경> 등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몇 번씩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문답과 설법을 한다. 중생들에게 화두나 하나씩 안겨주면 될 일을 왜 그리 비생산적인 노력을 기울였겠는가. 선사들은 나름대로 아끼는 화두가 있다. 어떤 분은 ‘이뭣고?’ 어떤 분은 ‘무’를 으뜸으로 치며,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 '일면불월면불(日面佛月面佛)’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여인출정화(女人出定話)’ 등을 으뜸으로 치는 분도 있다. 이들 화두뿐만 아니라 모든 화두는 알음알이의 차원에서 충분히 깨칠 수 있다. 왜 아니겠는가.


한국 선방의 트레이드 마크인 ‘안거’와 ‘용맹정진’ 또한 옛선사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 참선에 집착하는 제자 마조를 일깨우기 위해 남악이 보여준 ‘기왓장 갈기’의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6조 혜능 역시 <유마경>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시끄러운 곳을 피하여 조용한 곳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대혜선사의 말씀을 들어보자.


...옛적에 바수반두가 항상 한끼만 먹고 눕지도 않으며, 여섯때로 예불하며, 청정하여 욕심이 없어서 대중들의 귀의할 바가 되더니, 이십조인 사야다가 장차 그를 제도하고자 하여 그의 문도에게 물어 이르되 “이 두루 두타를 행하여 능히 깨끗한 행[梵行]을 닦음이 가히 불도를 얻을 수 있겠는가?”하니, 그의 문도가 이르길 “내 스승의 정진이 이와 같거늘 무엇 때문에 할 수 없겠습니까?”하였다. 사야다가 이르길 “네 스승은 도와 더불어 멀다. 설사 고행하기를 티끌처럼 많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모두 다 허망의 근본이니라.”고 하니, 그의 문도가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모두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고 소리를 높여서 사야다에게 이르되 “존자는 무슨 덕행을 쌓았기에 우리 스승을 비난하는가?”하니, 사야다가 이르되 “나는 도를 구하지 않되 그렇다고 전도되지도 않으며, 나는 예불하지 않되 그렇다고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나는 늘 앉아 있지 않되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으며, 나는 한 끼만 먹지 않되 그렇다고 잡식하지도 않으며, 나는 만족함을 알지 못하되 그렇다고 탐욕하지도 않음이라.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없음이 이름하여 도라고 한다”고 하니, 바수반두가 듣고서는 무루지를 깨달았으니, 이른 바 “먼저 정(定)으로써 움직이게 하고 뒤에 지혜로써 뽑아낸다”고 하였다...


성철스님이 ‘돈오돈수’를 강력하게 주장한 이면에 당시의 불교계가 처한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봉암사 결사’를 감행했겠는가. 물론 성철스님으로 인하여 빚어진 ‘돈점논쟁’의 소모적인 다툼은 부정적인 부산물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깨달음 절대주의’ 또한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지대하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에서 ‘해탈’로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고 여긴다. 선(禪)의 지향이 깨달음이 아니라 해탈임은 앞에서 강조했지만, ‘선’만이 궁극적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차원이라는 그릇된 생각에서 또한 벗어나야 한다. 선이 ‘이언진여(離言眞如)’이라면, 교(敎)는‘의언진여’이다. 곧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동전의 양면, 새의 양날개와도 같아서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알음알이인 해오를 ‘깨달음’의 자리, 궁극적 체험인 증오를 ‘해탈’의 자리에 놓고자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곧 해탈인 그런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능엄경>의 말씀을 빌리자면, ‘이치는 몰록 깨달을 수 있으나, 일상의 습기는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으니 차례를 따라야 한다(理則頓悟 乘悟並消 事非頓除 因次第盡)’인 바, 이는 여러 선사들이 또한 자주 인용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면 깨달은 후의 수행인 ‘보림(保任)’은 헛말이 될 것이다.


천황도오에게 용담이 물었다.

“어떤 것이 보림입니까?”

천황도오 선사가 답하길,

성품에 맡기어 소요하고, 연을 따라 놓아 비울지니라.

다만 범부의 분별심을 다할지언정 달리 성현의 견해가 없느니라

(任性逍遙 隨緣放曠 但盡凡心 別無聖解).”


이 보림에 대해서 <능엄경>은 다음과 같이 상세히 말하고 있다.


...네가 지금 부처님의 삼마제를 닦아 증득하고자 할진대

이 본인(本因)의 원래 가지고 있는 바의 어지러운 생각에

세 가지 점차(漸次)를 세워야 바야흐로 제멸함을 얻나니,

마치 깨끗한 그릇 가운데의 독을 제거하려거든

깨끗한 물과 재와 향으로써 그릇을 씻은 다음에,

감로수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느니라.


무엇을 이름하여 세 가지 점차라고 하는가?

첫째는 닦아서 익힘이니, 그 돕는 인[助因]을 제거함이요,

둘째는 참으로 닦는 일이니, 그 번뇌의 바른 성품[正性]을 끊음이요,

셋째는 더욱더 정진함이니, 나타난 업[現業]을 어김이라.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모든 중생들이 ‘먹는 것’에 의지해서 머문다”라고 하시니,

아난아 모든 중생들이 단 것을 먹는 까닭에

생(生)이 있고, 독을 먹는 까닭에 죽느니라.

이 중생들이 삼마제를 구하려 할진대,

마땅히 세간의 다섯 가지 냄새나는 음식을 끊어야 하나니,

이 오종의 신(辛)을 익혀 먹으면 음심을 발하고

날로 먹으면 성냄을 더함이라.


아난아, 이와 같은 중생이 삼마제에 들고자 할진대

모름지기 먼저 청정한 계율을 엄히 지켜야 하나니,

영원히 음심을 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불로써 음식을 깨끗이 하여 생기를 먹지 말지니라.

아난아, 이 수행인이 만약 음식과 살생심을 끊지 않으면,

삼계를 벗어날 도리가 없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청정한 계율을 지킨 사람은

마음에 탐욕과 음심이 없어서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 아니함을 인(因)하여,

되돌아서 근원으로 스스로 돌아가고,

육진을 이미 반연치 않으므로, 육근이 짝할 바가 없느니라...


결론인즉, ‘보림’ ‘세 가지 점차’ - 이것이 곧 계(戒) 아니겠는가 - 를 바탕으로 한, 해오에서 증오에 이르는 길이 하나가 아님을 나는 말하고 싶다. 의심법만이 아닌, 염법과 관법의 길 또한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이는 지눌 스님의 세 문 ‘원돈신해문, 성적등지문, 간화경절문’ 사상과 맥락이 닿는다. 인식론적 전환이 곧바로 존재론적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연기를 깨닫고, 그 소중한 진리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엄청난 노력이 없다면, 해탈은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은 해탈이라는 먼 여정의 첫걸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蕭湛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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