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비움과 채움

slowdream 2008. 1. 1. 19:19
 

자기라는 덫


삶의 지향이란 문제는 개개인으로 놓고 보자면 천차만별일 수 있겠지만, 뭉뚱그리자면 행복 아닐까. 행복이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지만, 단순화하자면 자기만족이겠다. 물질적인 채움이든 정신적인 채움이든 또는 어떠한 형태의 비움이든,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일단은 자기만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 우리는 늘 ‘자기’라는 덫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주의 중심이 바로 나며, 생각과 행위의 주인 또한 나일 수밖에 없으니.


그렇기에 또한 지복(至福)의 수준, 곧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가 어렵다고 얘기해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 해탈이란 지적인 번뇌와 감성적인 번뇌 곧 법집(法執)과 인집(人執)을 떨친 경지로, 이는 곧 ‘무아(無我)’로 집약할 수 있겠다. 궁극적 무아의 지경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야 할 경계는 바로‘공(空)’이다. 空은 일심(一心)이자, 연기(緣起)이며,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텅 빈 충만’이고, 화엄에 따르면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다.


  한 송이 꽃이 열릴 때 세계가 진동하고(一花開 世界起)

  한 톨 먼지 속에 대지가 담겨 있네    (一塵擧 大地收)


이러한 이치는 지극히 난해한 듯싶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종이 한 장에서 구름과 비, 대지, 꽃내음, 노동의 손길 등 온 우주의 숨결을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다. 말하자면, 나는 나 아닌 모든 것의 총체인 것이다. 너와 내가 결코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석가모니께서 비유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투명한 구슬인 바, ‘나’는 나 아닌 모든 구슬에 비친 그 모든 상의 집합인 것이다. 나는 내 밖의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비친 단편적인 나의 취합에 지나지 않다. 또는 너는 너의 밖에 있는 존재들에게 비친 모습이 한데 맺힌 상일 따름이다. 끝내 맞춰질 수 없는 조각그림처럼 ‘나’또는 ‘너’는 어설프기 짝 없으며, 구름처럼 어떤 모습을 지녔다가도 이내 흩어져 다시금 다른 모습을 띠기 마련이다.


모든 존재는 한 손에서 갈라진 손가락이며, 한 가지에 핀 여러 꽃이자, 한 구덩이 속의 다른 진흙임에 분명하다. 이렇듯, 구름과 얼음, 눈, 비에서 물을 본다면 이것이 곧 ‘색불이공 색즉시공(色不二空 色卽是空)’의 지혜이다. 또한 바닷물이 강과 시내와 샘으로 펼쳐져감은 '공불이색 공즉시색(空不二色 空卽是色)’의 자비이다. 결국 지혜와 자비로운 삶이란, ‘나’를 비우고 그 자리에‘너’를 채우는 작업 아니겠는가.


채움과 비움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젊음들에게는 낯익은 시 둘을 꼽아, 비움과 채움, 그 연기(緣起)적인 삶의 미학을 다시금 느껴보자.


왜 나는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가

저 왕궁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도 가로놓여 있다.

이를 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 십사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 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서 있지 않고

암만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적으냐

정말 얼만큼 적으냐...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며 / 김수영


모더니스트로 분류된 김수영을 통해서 나는 자기 안에서 안주하는 쁘띠부르주아인 지식인의 한계를 여실히 확인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80년대의 암울한 시대에 그 울림은 적지 않았다. 물론 신동엽, 박노해도 있고, 김지하, 김남주, 송기원, 곽재구, 정희성 등 숱한 시인과 작가들이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김수영의 무게가 적잖았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 기형도


젊음을 채 꽃피우지 못하고 삶을 마무리한 기형도. ‘실천’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으면 외면당하기 십상이었던 80년대의 풍경 한 귀퉁이를 장식한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케 하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남해금산>이라는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준 이성복, '바퀴만 보면 굴리고 싶어지는' 황동규도 그러했으며.


김수영을 ‘채움’이라 한다면, 기형도는 ‘비움’의 시인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물론 평생에 걸친 다양한 작품을 놓고 본다면 무리일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이 두 작품만을 놓고 보자는 얘기이다. 지성과 실천이 새의 두 날개처럼 함께 가야 하듯, 비움과 채움 또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리라. 비움인 공(空)은 곧 자리(自利)의 지혜이며, 채움인 불공(不空)은 곧 이타(利他)의 자비이겠다.

 

‘빈집’에 은닉한 기형도는 마침내 빗장을 열고 김수영의 흔적을 좇았을 것이며,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며’김수영은  외롭기 그지 없는 기형도의 그늘에 눈길을 던졌으리라. 그래서인가. 40대 후반인 1968년에 김수영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지고, 1962년생인 기형도는 종로의 한 허름한 극장에서 극적으로 20대 후반의 짧은 생을 접었다.


戊子年 첫머리에, 蕭湛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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