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인간의 본성

slowdream 2007. 9. 3. 04:42
 

 

‘인간의 본성’이라는 이슈(issue)는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늘 상반된 다툼을 불러일으키며 관심을 일으켜왔다. 최근 <만들어진 신>에서 기독교 신앙의 모순과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서 생존에의 투쟁을 극복하기 위한 이기적 본성을 강조한다.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과학자는 요하임 바우어로 <감성의 심리학>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칙>에서 인간의 본성을 상호협력에 둔다. 이에 대한 근거로, 바우어는 신경전달물질의 생리적 기능, 즉 도파민 같은 물질은 사랑과 신뢰 같은 인간 상호간의 긍정적인 관계를 통해서만이 작용할 수 있게끔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타인의 행동을 닮고자 하는 거울신경세포의 작용을 통해서 공동체에의 긍정적 기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상지대 과학철학 교수 최종덕 경향신문 2007년 7월 31일 칼럼 참고) 

 

이 두 상반되는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성악설과 성선설이겠다. 이는 곧 이기배타(利己排他)적인 태도와 자리리타(自利利他)적인 태도로 양분된다. 물론 이기적인 태도에서 이타적인 태도가 비롯하기도 하고, 뒤집어서 이타적인 태도에서 이기적인 태도가 비롯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역시 분명한 계산이 있으며 지향점은 결국 원점이다. 말하자면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 투항을 하는 셈이다. 이들의 주장은 각기 ‘생물학적 결정론’에 서 있다는 점과, 나름대로 합리적이지만 전체가 아닌 단면만을 들여다보았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공(空)’하다. 空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텅 빈 충만’이다.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모두 품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다.”(6조 혜능선사) 이는 세상의 모든 만물 즉 두두물물이 자성(自性)에서 비롯한 것이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의 모든 행동 역시 자성에서 비롯한다. 이기적인 태도와 이타적인 태도는 한 가지에서 나온 꽃과도 같다. 이기는 이타의 흔적을 지니고 있고, 이타는 이기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지극히 이타적인 행동은 이기와 통하고,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 또한 이타에 통한다. 중도(中道)의 이치에 따르면, 이기와 이타는 둘이 아니면서 하나 또한 아니다. 사물과 행위의 겉모습에 홀려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주역(周易)의 원리인 易에 따르면, 현상계의 두 양태인 음(陰)과 양(陽)은 서로 뒤집히고 돌아가며 되풀이한다. 빛과 어둠이 서로 의지하며 갈마들 듯, 이기와 이타는‘서로 의지하고 있는 갈대묶음’과도 같다. 어느 하나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현상계의 모든 만물은 이런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를 서양철학식으로 매끄럽게 포장하자면 ‘구조주의적 결정론’이라고나 할까. 이는 곧, 시비분별에 얽매이지 말고 ‘관계’에 초점을 맞추자는 얘기이다. 중도는 바로 관계이다. 인간과 사물을 섬이라 한다면, 관계는 바다이다. 꿈틀거리는 바다를 통해서 섬과 섬은 결국 모두 이어진다. 우리가 초점을 섬에 맞추면 ‘차별’이라는 메마른 사막에 갇히지만, 바다에 맞추면 ‘차이’라는 풍요한 숲을 만나게 된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데리다에 따르면 A와 B는 서로의 차이에 의해서 정의될 따름이며, 그 궁극적인 의미는 계속 미끄러질 따름이다. 그냥 서로 다를 뿐이지,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나’를 뭐라 정의할 수 있는가. ‘너’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은 ‘또 다른 너인 나’일 뿐이다. 이름, 성별, 직업,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브랜드, 적금 액수, 생김새, 취향, 지식 따위로 ‘나’를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주어가 아닌 술어, 실체가 아닌 사건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들뢰즈의 철학이 주목받는 것도 이와 연장선상에 있다.

 

꿈틀거리는 바다인 관계, 즉 사건을 통해서 ‘나와 너’는 끝없이 재생산되며 늘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사랑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연인이 된 우리는 구름 위를 거닐게 되고, 이별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원수가 된 우리는 가시밭길을 거닐게 된다. 그리고 또다른 사랑을 통해서 전혀 다른 큰 기쁨을 맛보고, 또다른 이별을 통해서 전혀 다른 고통을 겪는다. 존재란 물위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출렁거리는 부표(浮漂), 아니 좀더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물위에서 순간 솟구쳤다 사라지는 거품과도 같다 하겠다.

 

사건을 통해서 존재는 찰라 새로운 의미를 띤 채 생성되었다가 소멸되기를 끝없이 되풀이한다. 구조주의철학에 충실했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두 남녀는 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말론 브란도는 마리아 슈나이더에게 이렇게 묻는다. “Ou are You?” who 가 아닌 ou 는 프랑스어로 where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u 위에 방점이 있어야 하지만 기술문제로 생략). ‘당신 누구요?’가 아닌 ‘당신 어디에 있소?’라니. 이는 실체가 아닌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구조주의적 세계 이해이며, 불교의 가르침인 중도와 맥락이 닿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십여 년 전 한국에 수입된 미국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남자 주인공인 에단 호크가 여자 주인공인 줄리 델피에게 나지막히 건넨 한마디. “신은 너 안에도 내 안에도 있지 않아. 너와 나 사이에 있다구.”


蕭湛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