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우울한 시대의 초상, 학력위조

slowdream 2007. 8. 22. 05:05
 

독일의 비판철학자 헤겔(Hegel)에 따르자면 삶은 ‘인정투쟁(認定鬪爭)’이다. 그의 논리를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자아 즉 ‘자기의식’이란 스스로를 재현할 수 없는 결핍된 욕망인 까닭에 타자의 욕망을 자기화함으로써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놓는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제각기 우주의 중심이므로, 타자의 인정을 향한 투쟁은 불가피하다. 유물변증법의 창시자 마르크스(Marx)가 역설했듯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물화(物化)된다. 다시 말해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화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하여 한 개인이 지닌 모든 것-생김새, 집안, 학벌, 경제적 지위, 독특한 재능, 종교, 지식, 친구, 배우자, 자식, 취미 등등-은 환금성을 띈 경제적 지표로 탈바꿈된다. 결국 한 집단의 개인들은 이러한 지표에 의해 인정투쟁의 성과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서열은 물론 유동적이지만, 한계는 뚜렷해진다. 계급 또는 계층이라는 범주로 고착화된 경계를 뛰어넘기란 실상 초인적인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적인 행운아가 없지는 않지만, 이는 인생대박이라는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경우의 수와 거의 다를 바 없다.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프로필(profile)은 욕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이는 인정투쟁에서 얼마만큼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인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는 ‘학벌’이 상당히 비중 있는 무기로 인정받고 있다. 집안도 별로이고 생김새도 별로이지만 학벌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그래도 비빌 언덕은 하나 챙긴 셈이다. 물론 그나마도 없다면 딱할 노릇이겠다. 그러니 변변찮은 무기 하나 없는 대개의 ‘민초(民草)’들은 ‘나도 한번 화려한 삶이고 싶다’는 헛된 꿈은 접고, ‘끼니 안 거르면 다복(多福)한 삶’이라는 우울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위안을 갖고서 하루를 꾸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살맛 안 나는 가여운 민초들에게 실소를 머금게 하는 일들이 최근 불거지고 있다. 학력 위조. 짝퉁 학력. 신정아, 이청하, 장미희, 김옥랑, 강석, 오미희, 지광스님......수년 전 베스트셀러 김아무개 작가의 경우는 세인의 관심에서 슬쩍 비껴갔지만, 이들은 운이 나빴다고나 할까. 어쨌든 이들 모두 자기 분야에서 상당한 위치에 이른 사람들이다. 사실 나는 대중문화 예술연예인은 별 관심이 안 간다. 서울대 아니 하버드대학을 나왔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연기력만 뛰어나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실상 연예인에게 학벌이 큰 무기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대중의 관심도 인물이나 스캔들 따위에 있지, 학벌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좀더 심각해질 필요가 있겠다. 신정아씨의 경우는 워낙 매스컴에서 두둘겼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이창하씨는 기사를 본 순간 몇 년 전 내 마음을 들뜨게 했던 그 해맑은 표정 때문에 기사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고 이내 큰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헌데,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지광스님이라니. 강남 한복판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사를 일으킨 스님 아닌가. 양재동 큰길가에 자리한 <능인선원>을 볼 때마다 스님의 법력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탄사를 내뱉었던가. 성직자는 병든 사회의 마지막 보루 아닌가. 거참...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덕, 윤리적으로 이들에게 비난할 필요는 없겠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처럼 그럼 나는 거짓말 한번 안하고 살았느냐는 소박한 자책의 차원은 결코 아니다. 거짓말의 차원이 다르니깐. 그러나 어찌됐든 스스로를 기만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형벌 아니겠는가. 마음 한켠에 남들에게 들킬까 부끄럽고 두려운 구석을 지니고 하루를 보냈을 테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을 빌려와 그들을, 아니 우리 자신을 위로해 보자. “악한 일을 하면서도 남이 알까 두려워하면 그 악 속에 오히려 선의 길이 있고, 착한 일을 하면서도 남이 알아주기를 성급히 바라면 그 선 속에 악의 뿌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의 ‘거짓말’이 인정투쟁에서 파괴력 큰 무기로써 활용되었다는 점에서는 관용을 베풀기가 어렵지 않을까. 원래의 ‘순수학벌’로도 과연 지금의 부와 성공을 누리고, 달디 단 열매를 맛볼 수 있었을까. 설령 그랬다손 쳐도, 엄연히 ‘기회비용(機會費用)’은 치렀어야 하지 않은가. 교묘하게 포장된 짝퉁 상품에 기만당한 경쟁자와 소비자들의 경제적 손실은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이는 학벌을 속이고 결혼했지만 나중에 들통이 나서 배우자에게 용서를 비는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 용서를 하든 안하든 가정경제에 축이 나지는 않는 것이니. 학벌을 위조했던 당시의 소박했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변함이 없고, 그 의도에 악의가 없었으며, 밝히고 싶었으나 적절한 기회가 없었을 따름이라고 그들은 변명한다. 물론 그러했으리라. 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의 희생양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변명이, 의지에서 비롯한 것이든 아니든 성실하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숱한 민초들의 가슴에 진정하게 울리자면, 이제껏 쌓아온 경제적 가치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해야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욕망은 끝없이 자기를 증식하는 바이러스와 같다. 결코 만족을 모른다. 타자와 자신이 공멸하기 전에는.  '칼은 스스로를 베지 못하고, 손은 스스로를 더듬지 못한다.’그런 까닭에, 칼은 타자의 칼을 베며, 손은 타자의 손을 더듬는 것이다. 이렇듯 삶은 욕망의 투사(投射)인즉, 우리의 세계는 욕망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사랑에 빠진 이에게는 세상은 온통 환희와 장밋빛으로 가득하고, 사업에 실패한 가장에게는 어둠과 끝없는 나락만이 그의 하루를 채운다. 욕망하자, 욕망을 비우기 위한 더 큰 욕망을.

 

중국 선종사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노방(老龐 : 방거사라 불림. 상당한 부호였으나 재물은 탐욕을 부른다며 전재산을 버리고 돗자리를 팔며 궁핍하게 일생을 마쳤음)의 게송으로 씁쓸한 마음을 달래보자.


但願空諸所有 愼勿實諸所無

好住世間 皆如影響


다만 온갖 있는 바를 비우기 원할지언정

온갖 없는 바를 채우려 하지 마라

즐거이 머문 세간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 같나니  


  蕭湛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