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대표적인 학문을 꼽자면 과학과 철학이겠다. 방법론적으로 과학은 귀납적이며, 철학은 연역적이라 할 수 있겠다. 존재론의 측면에서 보자면 과학은 형이하, 철학은 형이상이며. 물론 우리가 발로는 땅을 딛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듯, 과학과 철학은 서로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겠다. 과학 없는 철학은 오류의 덫에 발목이 잡히고, 철학 없는 과학은 맹목성의 바다에서 표류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일단 불교의 범주부터 정리를 해보자. 불교를 종교라는 울타리에 억지로 구겨넣을 수 있을까. 물론 교주가 있고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무리가 있다는 의미에 비추어보자면 대개의 종교들이 그러하듯 불교 또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세속적인 종교들이 그 교주를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존재, 전지전능한 존재, 그의 말씀에 ‘무오류성’이라는 금장을 두르고, 현실과 그 너머의 세계를 분리시키고, 절대적인 복종과 믿음이라는 공통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면, 불교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또한 과학과 철학, 예술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더 나아가 종종 충돌하는 예의 종교들과는 달리, 불교는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든 아니든 불교는 그 ‘모든 것’이다. 불교는 삶의 모든 곳에 그 숨결을 불어놓고 있으며, 무늬이자 바탕이다. 일례로 물리학자나 철학자들 가운데 불교로 귀의하는 분들이 적지 않음이 이를 반증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인 ‘중도(中道)’는 고전역학이나 양자역학, 생물학, 정신분석학 등의 분야뿐만 아니라, 유물변증법에서 해석학, 현상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등으로 펼쳐져온 현대철학의 흐름도 결국은 불교의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빛이 파동이며 입자임을 밝힌 현대물리학의 성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사상과 맥락이 닿는 뇌과학, 카오스(chaos)와 코스모스(cosmos)가 공존하는 카오스모스(chaosmos), 연속과 불연속을 다루는 형태변이(形態變異, morphogenesis), 또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다루는 프락탈(fractal) 등이 그렇지 아니한가.
흔히 불교의 가르침을 ‘언어의 길을 끊고[言語道斷]’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며[不立文字]’‘말을 떠나고 생각을 떠나며[離言絶慮]’라 하여, 합리적인 이성과 판단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이성과 판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거인 ‘합리성’자체에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합리성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으로 이해하는 합리성의 전도된 측면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불교 유식학에 따르면 3성 가운데‘변계소집성(邊界所執性)’이 바로 그것이겠다. 중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 그곳이 곧 진정한 합리적 이성과 판단 아니겠는가. 또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에서 방편인 언어와 문자를 버리라는 가르침 또한 방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 올바른 뜻은 그릇되고 비틀린 언어와 문자에의 집착과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질책이다.
언어 없이는 그 어떤 사유도 가능하지 않다.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색신(色身)을 떠나느니라.”선불교의 6조 혜능대사의 말씀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도구이자 수단은 바로 ‘직관적 사유이자 언어’인 것이다. 화두(話頭)와 침묵[良久], 방할[棒喝], 오도송(悟道頌) 등 진리를 건네고자 애쓴 옛조사와 선지식들의 노력에서 그 흔적을 역력히 엿볼 수 있다. 중도에 따르면 ‘번뇌가 곧 깨달음’이며 ‘방편이 곧 진리’ 아니겠는가. 제 8식인 아뢰야식을 진여와 무명이 공존하는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 곧 진여와 무명이 둘이면서 하나인, 그리하여 진여문과 생멸문이 일심(一心)의 양면임을 밝힌 원효스님의 가르침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종교를 과학과 철학과는 전혀 다른 낯선 세계로 받아들이게끔 한 주범은 바로 종교 자체이다. 종교가 인간의 기원과 가장 밀접한 까닭이기도 하겠다. 인간의 지능이 저급한 수준이었던 고대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종교가 과학이자 철학이며 그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 지성이 발달하면서 과학과 철학이 좀더 정교해지고 합리적인 모습을 띌수록 종교는 거북하고 서투른 모습으로 전락하며 모순에 빠지기까지 한다. 여전히 ‘신비’라는 그물로 자신을 보호하려 몸부림을 치지만. 물론 종교적 신비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이므로,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의 몫이다. 그러나 ‘진리’와 ‘믿음’을 동일시하기에는 그 폐해가 적지 않다. 마음의 실체, 사후세계, 우주의 기원과 종말 등 과학과 철학이 손을 맞잡고서 마침내 이러한 궁극적인 물음을 해결한다면 종교의 자리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불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종교가 아닌 ‘그 모든 것’이니까.
우주의 차원인 극대(極大)와 입자의 차원인 극미(極微)가 아닌, 개미나 코끼리, 나비와 소나무의 차원이 아닌 바로 우리 인간의 중간계(中間系), 사후의 삶이 아닌 눈앞에 펼쳐진 삶인 현상계의 차원으로만 국한시킨다 해도 중도는 여전히 타당하다. 알든 모르든, 우리는 중도로써 하루를 열고 닫으며, 중도 속에서 거닐고, 중도를 숨쉬고, 중도를 먹고 마시며, 중도를 껴안고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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