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책여행 /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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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입자물리학자들보다 더 헌신적으로 ‘궁극의 답’을 찾는 사람들도 없을 터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복잡한 현상이 실제로는 단일한 무엇의 현시(顯示)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아인슈타인은 최초로 궁극의 답을 추구한 현대인이었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상대성이론을 양자역학과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이론을 발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가 통일장이론을 통해 알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우주의 탄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은 얼마나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는가?
물리학이 곧 자연에 대한 완전한 통일이론을 획득할 것이라고 예견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는 스티븐 호킹이었다. 1998년 발간된 뒤 세계적으로 1000만 부가 팔려 나간 베스트셀러 ‘시간의 역사’(김동광 옮김·까치)에서 호킹은 “컴퓨터가 독자적으로 궁극의 이론을 획득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저술가 존 호건에 따르면 1980년대 초 세계의 저명한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을 그들이 그토록 수립하고자 애써 왔던 통일이론으로 믿었다고 한다. 호킹도 그렇게 여겼다.
너무도 난해해서, 또는 너무도 심오해서 수학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이 이론은 10차원 초공간 속에서 요동하고 있는 ‘에너지 고리’가 모든 힘과 입자를 생성시키며 여기서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호건은 수많은 물리학자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초끈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했다며 “초끈은 우리 세계의 그 무엇과도 상응하지 않는 일종의 수학적 원료”라고 말한다.
초끈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미하다. 가령 끈을 양성자만 한 크기로 확대한다면, 양성자는 태양계만한 크기로 확대된다. 이론상으로는 초끈이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영역을 탐사하려면 둘레가 1000광년이나 되는 입자가속기를 건설해야 한다.
초끈이론은 경험적 영역을 완전히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틀릴 수가 없다’는 이 초끈이론은 어떠한 직접적인 증거도 내놓을 수 없다. 그것은 ‘순수한 사고’의 도약을 나타낸다.
1960년대 쿼크 개념이 도입될 때만 해도 과학에 충만했던 자기 신뢰는 이제 놀랄 만큼 사그라지고 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이후 현대과학은 이미 우리가 획득한 진리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지식에 내재해 있는 결점들을 지적하는 데 몰두함으로써 오히려 과학의 신화화를 부추기는 듯하다.
대표적인 낙관주의자인 호킹도 2005년에 다시 쓴 ‘시간의 역사’에서 미묘한 견해를 보인다.
“오직 하나의 통일이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방정식의 집합일 뿐이다. 이 방정식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주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우주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는 통상적인 과학의 방법으로는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가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를 밝혀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궁극의 물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찾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선승들의 영원한 화두에 닿는다.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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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의 ‘초고성능 현미경’을 통해 원자 이하의 세계(예컨대 전자)를 들여다본다고 치자. 이때 우리는 현미경에 감마선을 쏘아야 한다. 전자보다 파장이 긴 일반광선으로는 전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마선은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게 문제다. 감마선이 전자를 때리면 그것은 그 전자의 존재는 밝혀내지만 불행히도 전자를 제 궤도에서 쳐내어 그 방향과 속도(운동량)를 변화시키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감마선 대신 에너지가 약한 빛을 쓴다면 그 빛은 파장이 너무 길어 전자가 어디 있는지 보여 주지 못한다. 우리는 움직이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길이 없다! 아원자(亞原子·원자 이하)의 세계에서는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현실을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게 불확정성원리의 제1차적 의의다.
동양사상에 정통한 미국의 과학이론가인 게리 주카브는 1979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춤추는 물리’(범양사)에서 하이젠베르크의 경이로운 발견을 이렇게 풀이한다.
“움직이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결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운동입자를 결코 ‘실제 모습대로’ 볼 수 없으며, 오직 우리가 선택하는 데 따라 그 대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철학적 함의는 현란하다. 인간은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 현실을 창조한다! 인간이 스스로 측정할 속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속성 자체를 지어 낸다고 해야 할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자들은 묻고 또 물었다. 우리가 운동량 측정 실험을 하기 이전에 운동량을 가진 입자가 존재했던가? 우리가 위치 측정 실험을 하기 이전에 위치가 있는 입자가 있었던가? 우리가 입자에 대해 생각하고 측정하기 이전에 도대체 입자가 존재했을까? 지금 우리가 실험하고 있는 입자들을 우리가 지어 낸 것은 아닐까?
과학자들만이 이런 의문을 좇았던 것은 아니다. 2000년도 훨씬 전에 수많은 힌두교도와 불교도도 같은 문제를 궁구했다. 혜능선사의 저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보자.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끼자 두 승려가 입씨름을 벌였다. 한 승려는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 맞섰다. 혜능이 나아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움직이는 것은 너희 마음이니라….”
데모크리토스와 탈레스, 피타고라스의 학문적 후예들이 도달한 현대물리학의 자연관이 인더스와 갠지스, 그리고 양쯔와 황허 강 유역에서 태어난 주관주의 사유의 우주상과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
양자역학에 따르면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카브는 우리와 분리돼 ‘저 바깥(out there)’에 존재하는 외부세계란 관념에 불과하다고 자른다. 심리학자 융의 주장대로 이 세계는 우리의 내면이 연출한 것일까?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파울리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psyche)이 외향성을 띠고 바깥, 즉 물리적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원자 이하의 차원에서 객관과 주관의 구분은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우주의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 우주가 그 스스로를 드러내는 문이 되었다. 양자역학은 20세기의 선문답을 던진다. 새로운 물리학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했느냐?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회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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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이든 제대로 본다면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란 없다고 가르친다. 일찍이 붓다는 우주를 무수하게 다양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짜인 거대한 그물에 비유했다. 그 보석들은 무수한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석 하나 하나는 그 거대한 그물 안에 있는 다른 모든 보석들을 반사하고 있으니, 하나의 보석은 다른 모든 보석들과 하나인 것이다.
불자들은 이렇듯 독립된 특성의 부재를 ‘공(空)’이라 일컫는다. 티베트 불교의 위대한 스승 소걀 린포체는 ‘티베트의 지혜’(민음사·1999년)에서 나무의 예를 들어 그 오래된 지혜를 이리 전한다.
“한 그루의 나무를 보라. 그것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나무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무는 우주로까지 뻗어나가는 지극히 미묘한 관계의 그물 속으로 용해되는 것을 알게 된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나무를 흔드는 바람, 양분을 공급해 주고 나무를 지탱해 주는 토양, 사계절과 날씨, 달빛과 별빛 그리고 햇빛…. 이 모든 것이 나무의 일부를 이룬다. 나무는 어느 한순간도 다른 어떤 것들로부터 분리된 적이 없으며, 순간마다 그것의 품성은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나무의 개별적인 정체성은 ‘비어 있고’, 관계로 ‘가득 찬’ 움직임만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것은 신비주의 사상의 핵심이다. 이 우주에 분리란 없으며, 있다면 오직 우리의 환상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주의 모든 것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존재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개념은 과학의 패러다임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것은 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의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물리학의 상식에 어긋난다. ‘국소 발생 원리(The principle of local causes)’는 물리학의 정설이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 ‘쌍(雙)으로 움직이는’ 입자체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과율(因果律)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입자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상호작용을 한다. ‘빛 신호’로 연결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즉각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A지역에 있는 입자는 언제 어디서나 B지역에 있는 입자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두 개의 떨어진 것들이 이토록 빨리 소통할 수 있을까? 일개의 업적으로는 물리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벨의 정리’(1964년)는 양자이론의 통계적 예측이 정확하다면 국소 발생 원리가 틀릴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물체들의 독립적인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봄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의 ‘개개의 부분’은 서로 밀접하게,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부분들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고전적 관념을 부정하는, 세계는 부서지지 않는 전체라는 새로운 관념을 갖게 되었다.”
부서지지 않는 전체!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 아닌가. 우주 만물의 ‘상즉상입성(相卽相入性)!’
14세기 티베트 승려 롱첸파는 이렇게 설파했다. “그 어떤 것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밖의 어디에서 발생하고 있는 어떤 것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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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고 하자. 상자 안에는 당장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가스 분출 장치가 있고, 가스는 순전히 우연에 의해 분출된다. 상자 바깥에서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한 순간 가스가 분출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전물리학에 의하면 그 고양이는 죽거나 죽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고전물리학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 오직 하나의 세계가 있으며 그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빌려 생각하면 그 고양이의 운명은 우리가 상자 안을 들여다 볼 때까지 결정되지 않는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비로소’ 고양이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다. 우리가 관찰하기 이전에 그 고양이는 천국과 지옥의 ‘망각지대(limbo)’에 있으며, 상자 안을 들여다 볼 때야 죽거나 죽지 않거나 두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고 나머지는 사라진다. 그때까지 고양이는 실재한다고조차 말할 수도 없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는 원자 이하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을 일상 언어로 번역할 때 공상과학 소설보다 더 기괴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재는 본질적으로 불확정적이며, 통상적인 의미에서 알고 있는 실재라는 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하지만 미국의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은 양자역학의 계승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견해는 수용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과학에서 제기된 모든 개념은 어떤 현상의 배후엔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실재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왔던 것이다.
봄 역시 일견 카오스적으로 보이는 물리적 현상계, 즉 드러난 외양의 질서의 이면엔 항상 더 깊은, 함축된, 내재적 질서(implicate order)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모든 수준에서 외양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무엇과 그 외양을 설명하는 본질로 간주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봄의 이 개념은 우연히 TV를 통해 본 어느 실험에 의해 고무되었다. 그 실험은 한 방울의 잉크가 글리세린이 담긴 원통 속에서 퍼져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글리세린 표면에 떨어진 잉크 방울은 원통이 회전하면 글리세린 속으로 퍼져 안 보이게 된다. 하지만 원통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잉크 방울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잉크 방울은 완전히 사라진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내재적 질서’는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잉크 방울은 한순간 홀연히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외적 질서) 이는 내재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
봄은 양자역학과 신비주의 사상을 한데 포용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과학자다. 그의 말은 자주 티베트 고승의 가르침을 연상시킨다.
“우주는 결코 분해되지 않는 전체성, 그 내재적 질서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내재적 질서는 ‘존재하는 그것’의 본질적인 차원이다. 존재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실재의 여여(如如)함(suchness)이다!”
인도의 신비주의자 크리슈나무르티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봄. 그는 과학을 연구하는 것은 현재의 지식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재와의 접촉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것.
“과학은, 지성이 결코 파악할 수 없으나 시적(詩的) 직관이 이해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한다….”(막스 플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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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을 이해하는 학자가 전 세계에 12명뿐이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지요. 물론 그 말은 과장됐어요. 하지만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양자전기역학을 완성한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그는 양자역학에 내재돼 있는 역설에서 또 다른 역설을 끄집어낸다.
“상식적으로 볼 때 양자역학은 정말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자연을 서술합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은 실험 결과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자연이라는 것 자체가 본시 터무니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미국 뉴욕시립대 석좌교수로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미치오 가쿠는 2005년 출간된 ‘평행우주’(김영사)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오랜 논란을 소개하며, 양자역학은 지금도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거는 “나는 평생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학 이론에 매달리면서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과학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이론이다. 양자역학의 ‘표준모형’은 수십 년간 축적되어 온 실험데이터를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양자역학을 물리학의 왕좌에 올려놓았다. 미치오는 “양자역학은 이유는 잘 모르지만 기가 막히게 맛을 내는 조리법 안내서와 같다”고 설명한다.
아마도 양자역학의 가장 기괴한 대목은 물체가 관측이 행해진 후에야 ‘비로소’ 확고한 실체가 된다는, 관측이 행해지기 전에는 물체가 모든 가능한 상태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이다. 우라늄 원자의 방사능 붕괴와 같이 어떤 양자적 사건이 상자 안 고양이의 생사를 좌우한다고 했을 때, 고양이가 살거나 죽는 것은 우리가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인가? 우리가 상자 안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는 함께 존재하고 있었단 말인가?
뉴턴과 마찬가지로 결정론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세계의 불확정성을 이렇게 꼬집었다. “저기 떠 있는 달을 보세요. 쥐 한 마리가 달을 보았다고 해서 없던 달이 갑자기 나타났겠습니까?”
하지만 양자론의 계승자들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며 슈뢰딩거 고양이의 역설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고자 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유진 위그너는 “궁극적인 진리는 우리의 의식에 담겨 있다”며 “외부의 물리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인식론뿐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동양적 사유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원리로서 브라만과 아트만(자아)의 조화와 일치를 상징하는 힌두 시바신의 춤이 ‘양자적 춤’으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춤사위는 ‘양자적 물음’ 속에 끝없이 계속된다.
그렇다면 내가 무언가를 관측했을 때, ‘나’의 상태를 결정하는 요인은 또 무엇인가? 나의 상태가 ‘지금의 나’로 결정되려면 다른 누군가가 나를 관측해야 한다(물리학자들은 ‘무언가를 관측하고 있는 나’를 관측하는 또 다른 인물을 ‘위그너의 친구’라고 부른다). 위그너의 친구는 ‘위그너의 친구의 친구’에 의해 관측될 수도 있고, 이 사람은 또 ‘위그너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눈에 관측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측의 연결고리를 결정하는 우주적 의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친구의 친구의 친구… 는 끝없이 계속되는 것일까? 우주와 우리는 의식의 세계 속에 하나로 존재하는 것일까?
출처 동아일보
'***풍경소리 > 불교와 자연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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